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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인 줄 알았던 복수
사랑인 줄 알았던 복수
작가: 푸른불씨

제1화

작가: 푸른불씨
“밖에서 하면 더 짜릿하다던데... 내가 갈아입혀 줄까?”

캠핑 텐트 안.

송기혁의 셔츠가 벌어져 있었다. 선명한 가슴 근육 위로 붉은 자국들이 겹쳐 보였다.

조금 전 기혁의 달콤한 부추김에 한나가 남긴 흔적이었다.

최한나가 눈을 내리깔고 작게 말했다.

“오늘은 안 하면 안 돼?”

기혁의 표정이 잠깐 멈췄다.

“생리 시작했어?”

“아니.”

기혁은 매번 오래 한나를 붙들었고, 몸의 움직임도 과감하고 컸다.

오늘은 친구들까지 함께 캠핑을 왔다.

한나는 부끄러워 목소리를 낮췄다.

“밖이라 소리 다 들리잖아.”

말하지 못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임신한 것이다.

“살살 할게. 너도 신음만 조금 참아. 텐트끼리 이 정도 떨어져 있으면 안 들려.”

기혁이 한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이마를 맞대고 달래듯 속삭였다.

“오빠 말 들어. 자기야?”

침대 위의 기혁은 다정하게 아껴 주다가도 능숙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한나는 얼마 버티지 못했다.

텐트에는 따스한 조명이 가득했다.

기혁은 분위기를 내겠다며 별빛 프로젝터까지 챙겨 왔다.

텐트 천장 위로 별들이 흐르고 있었다.

한나를 끔찍이 아끼는 듯한 입맞춤이 이어지자, 텐트가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나가 입었던 핑크색 토끼 의상은 조각조각 찢어졌다.

일을 끝내자 기혁은 금세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돌아왔다.

한나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돌아다니지 말고 있어. 내가 조금 있다가 널 캠핑카로 안고 가서 씻겨 줄게.”

기혁의 입은 달콤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기혁은 늘 이렇게 다정했다. 사랑을 나눈 뒤 몸을 씻는 일조차 기꺼이 직접 해 주었다.

기혁이 나간 뒤, 한나의 핸드폰에 모르는 사람에게서 친구 요청이 왔다.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한나 씨, 꼭 알려 드릴 일이 있어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한나는 요청을 수락했다.

곧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기혁의 혼인관계증명서와 결혼사진이었다.

신부의 얼굴과 인적 사항은 덧칠해 가려져 있었다. 혼인신고일은 한 달 반 전이었다.

최씨 집안은 가풍이 엄격했다. 송씨 집안과는 깊은 악연이 있어 몇 대에 걸쳐 물과 기름처럼 지냈다.

한나의 친언니 최혜나는 특히 기혁을 질색했다.

사업에서도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지난 2년간 신재생에너지 시장을 선점하려 맞붙으면서 둘은 그야말로 앙숙이 됐다.

그런 사이였기에, 2년째 사귄 남자친구가 기혁이라는 사실을 집에는 알리지 못했다.

한 달 반 전 가족들은 마지막 통보를 했다.

남자친구를 데려오지 않으면 집에서 정한 상대와 결혼을 추진하겠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기혁은 약혼식 준비에 들어갔다.

언니 혜나와도 지난 일을 풀고, 직접 한나의 부모님에 인사를 드리겠다고 했다.

그랬던 바로 그날 다른 여자와 혼인신고를 했다는 사실을 한나는 믿을 수 없었다. 옷을 챙겨 입고 기혁에게 직접 물으러 나가려고 했다.

주위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캠핑카 옆에서 몇 개의 붉은 담뱃불이 밝아졌다 흐려졌다 했다. 한나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시간까지 쟀잖아. 꼬박 한 시간 반이더라. 텐트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 기혁이 형, 벌써 2년이나 최한나를 데리고 노는데 아직도 저렇게 좋나? 진짜 사랑에 빠진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전에 완전히 넘어오게 하려고 정관수술까지 했잖아. 최한나가 애 낳아 주겠다고 매달리니까 복원수술 받은 거고.”

“한 달 넘었으니 형 정도면 벌써 임신시켰을 수도 있지. 저렇게 오래 몰아붙이면 형 바람대로 유산시키고 수술비까지 아끼겠네.”

한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머릿속에서 윙윙 소리가 났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것 같았다.

몸 안의 피가 모조리 얼어붙었다.

가족들이 둘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혁에게 아이를 갖자고 졸랐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면, 자신을 아끼는 가족들도 결국 결혼을 허락해 줄 거라고 믿었다.

정신을 놓고 그 앞으로 뛰쳐나갈 뻔했다.

그쪽에서 또 한 번 낄낄거리는 웃음이 들려왔다.

“형은 자기를 장난감으로만 보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약혼할 거라고 믿는지 모르겠다. 형수도 따로 있잖아.”

“한 달 반 뒤 약혼식에서 형이 버리면 나도 한번 데리고 놀고 싶어. 엉덩이도 예쁘고, 보기만 해도 군침이 싹 돌던데...”

“난 형이 찍은 코스튬 영상이 제일 기대돼. 제대로 한 수 먹였지. 최혜나한테 복수하려면 이만한 방법이 어디 있어? 형한테 차갑게 굴면서 고백을 거절했잖아.”

“그 잘난 최혜나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동생 망가진 꼴을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벌써 그 얼굴을 보고 싶다니까!”

“...”

한나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손가락을 움켜쥐자 손톱이 손바닥의 여린 살을 파고들었다.

기혁은 친구들 사이에 한나를 소개하려 했다. 최씨 집안의 귀에 들어갈까 두려워 나가지 않은 건 한나였다. 둘은 그렇게 몰래 연애를 해 왔다.

아무도 이 둘의 관계를 모를 거로 생각했다.

혼인관계증명서를 처음 봤을 때조차 믿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전부 사실이었다.

기혁의 친구들은 이미 다른 여자를 ‘형수’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불륜 상대가 되어 있었다.

친구들이 말한 코스튬 영상까지...

지난 2년간 끈질기게 조르는 기혁 때문에 못 이겨 수백 벌의 서로 다른 의상을 입었다.

둘만의 은밀한 재미인 줄 알았다.

실상은... 이토록 더러웠다.

낄낄거리는 소리는 계속됐지만, 한나는 더 듣지 못했다.

목 안에 무언가 걸린 듯 숨이 막혔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토록 사랑한 남자에게 자신은 장난감이었다.

‘언니에게 구애까지 했다니...’

‘언니가 왜 그렇게 송기혁을 싫어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네.’

‘언니는 진작 송기혁의 본모습을 간파했을 거야.’

‘나만 속아 넘어갔어! 내가 너무 어리석이야!’

‘우리 집안과 사사건건 맞서는 남자가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일 거라고 믿었는데...’

‘...’

한나는 넋이 빠진 채 텐트로 돌아와 안의 불을 모조리 껐다.

숙박업소에서 몰래카메라를 달아 돈을 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 확인 방법도 살펴봤다.

핸드폰 플래시로 렌즈에 반사되는 빛을 찾는 방법이었다.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켜고 텐트 안을 훑었다.

금속 장식도 유리 제품도 없는 공간이라 카메라는 금방 눈에 띄었다.

한나는 세포 하나하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기혁은 정말 주도면밀하게 몰래 찍었다. 카메라는 별빛 프로젝터에 달려 있었다.

함께할 때마다 기혁이 별빛을 켜 준 이유를, 한나는 낭만이라고 믿었다.

실은 그걸 위해서...

아랫입술이 찢어질 만큼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서 매번 그런 옷을 입으라고 달랬던 거야?’

지난 2년간 기혁은 주변의 여자들을 모두 정리했다. 한나는 자신 때문에 마음을 잡은 줄 알았다...

기혁은 정말 그런 비열하고 저열한 수법을 한나에게 썼다.

그녀는 혼인관계증명서와 한 달 반 뒤 약혼식을 떠올리자,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피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텐트 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한나는 눈꺼풀을 떨며 넘칠 듯한 눈물을 눌러 삼켰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기혁의 친구들이 말한 영상을 처리해야 했다.

공개되면 자신뿐 아니라 최씨 집안 전체가 무너질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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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인 줄 알았던 복수   제30화

    기혁이었다.한나는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요즘은 어째서인지 어디를 가든 기혁과 마주치는 것 같았다.기혁은 한나의 어깨를 붙잡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어디 아파?”“요즘 심장이 좀 불편해서 순환기내과에서 검사받았어. 다행히 별문제는 없대. 그런데 오빠는 여기 왜 왔어?”“나는...”“오빠!”기혁이 대답하려던 순간, 누군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말이 끊겼다.한나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쁜 혜나’가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검사 결과지를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곧장 기혁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더니 환하게 웃었다.“오빠, 초음파 봐 주신 선생님이 아기 건강하대. 심장도 벌써 뛰고 있대.”그 말을 듣는 순간, 한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다행히 기혁이 재빨리 한나의 팔을 붙잡아 몸을 지탱해 주었다.‘예쁜 혜나’는 그런 한나를 보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오빠, 아는 사람 만났어?”“응.”짤막한 대답에 한나의 입가에 씁쓸한 비웃음이 스쳤다.법적으로 아내가 된 여자 앞에서 자신은 그저 아는 사람에 불과했다.게다가 ‘예쁜 혜나’의 아이도 이제 막 심장박동이 확인됐다면, 두 사람의 임신 시기도 비슷하다는 뜻이었다.순간 한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이제는 기혁과 관련된 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이런 광경을 마주하니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그때 ‘예쁜 혜나’가 한나를 향해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나우혜예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최한나예요.”한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렇게 정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언젠가 이 관계가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기혁은 우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아직 채혈 하나 더 남았지? 같이 가자.”“응.”우혜는 다시 한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한나 씨, 다음에 또 봬요.”그녀의 미소는 눈부실 만큼 밝았다.

  • 사랑인 줄 알았던 복수   제29화

    지금 한나가 바라는 것은 벌여 놓은 일들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자기에게 상처만 남긴 이곳을 떠나는 것뿐이었다.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 결국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가족뿐이라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달았다.“그때는 어려서 바깥세상이 궁금했어. 그런데 이제는 집이 제일 좋다는 걸 알겠어.”“괜찮아. 이제 졸업도 얼마 안 남았잖아.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동안 보고 싶으면 휴가 내고 집에 와. 엄마 아빠도 너 많이 보고 싶어 하셔.”한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모든 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돌아가야 했다.마침내 한나는 손을 흔들며 언니를 배웅했다.혜나는 그동안 집안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해 온 사람이었다.앞으로는 한나도 언니와 가족들을 위해 더 많이 신경 쓰고 싶었다.공항에서 나온 한나는 곧바로 공항고속도로에 올라 병원으로 향했다.그런데 임신중절 수술을 받으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운전대에서 한 손을 떼어 아랫배 위에 올렸다.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팠다.고속도로를 빠져나온 한나는 안전하게 차를 세울 만한 곳을 찾았다.차를 세운 뒤에는 운전대에 이마를 묻었다.한나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가죽 커버를 깊숙이 파고들 정도였다.한나는 한때 기혁의 아이를 간절히 갖고 싶었다.자기 집안에서는 혼전 임신을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되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악연도 자연스럽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기혁의 생각은 달랐다.결국 뱃속의 두 아이에게 남은 것은... 비극뿐일 것이다.한나는 평소 다인이 남자들을 두고 이 사람도 쓰레기, 저 사람도 쓰레기라며 욕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하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의 남자를 자신이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한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리

  • 사랑인 줄 알았던 복수   제28화

    유삼순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사람 몇 명 불러서 이 소파 좀 옮겨 주세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한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소파를 옮기면 그 아래 숨겨 둔 검사 결과지가 드러날 터였다.그러면 기혁이 한나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네, 대표님. 바로 사람을 부르겠습니다.”유삼순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한나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기혁에게 물었다.“커프스 찾으려고 소파까지 옮기게?”“응.”“그냥 단추 하나잖아.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도 되는데...”한나는 어떻게든 소파를 옮기는 일을 막고 싶었다.하지만 기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네가 생일 선물로 준 건데. 소파 밑으로 들어간 것뿐이니까 옮기면 금방 찾을 수 있어.”한나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어떡하지?’그사이 직원 몇 명이 금세 안으로 들어왔다.기혁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커프스가 소파 밑으로 굴러 들어갔어요. 이것 좀 옮겨 주세요.”“네, 대표님.”직원들은 곧바로 소파를 옮기기 시작했다.쿵- 쿵- 쿵-한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이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어차피 기혁은 아이를 원하지 않잖아.’‘임신한 걸 들키더라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지우면 돼.’한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잠시 후, 직원들이 소파를 옆으로 밀어냈다.그리고 그 아래에서 한나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검사 결과지가 모습을 드러냈다.순간 한나는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평소 청결에 유난히 예민한 기혁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발견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곧바로 직원에게 말했다.“저 쓰레기도 좀 치워 주세요.”다행히 검사 결과지는 글씨가 적힌 면이 바닥을 향한 채 뒤집혀 있었다.기혁은 종이의 내용을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기혁의 깔끔한 성격을 잘 아는 직원은 그가

  • 사랑인 줄 알았던 복수   제27화

    혜나는 원래 결단이 빠른 만큼 걸음걸이도 거침없었다.라운지 홀 한쪽에 앉아 있던 한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오는 언니를 발견했다.그런데 기혁이 곧바로 혜나의 뒤를 따라 나왔다.기혁은 혜나가 차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혜나를 차체 쪽으로 밀어붙였다.“오늘 굳이 나를 찾아와 경고까지 한 게 정말 내가 네 동생을 건드릴까 봐서야? 아니면 아직도 나를 사랑해서야?”기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혜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혜나는 기혁을 거칠게 밀어내며 냉소를 흘렸다.“예전에도 너한테 관심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혼자 착각하지 마.”멀리서 지켜보던 한나에게는 두 사람의 움직임만 보일 뿐, 대화 내용까지 들리지는 않았다.하지만 기혁이 언니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반면 혜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밀어냈다.그 모습을 보자 한나는 더 확신하게 됐다.언니야말로 기혁이 끝내 손에 넣지 못한 여자가 맞았다.기혁이 아무리 다정한 말과 행동으로 유혹해도 혜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에 비하면 자신은...한나는 언니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다.한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아탔다.차에 올라탄 한나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깊은 밤, 화려한 네온사인이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한나가 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혜나도 돌아왔다.‘역시 언니는 다르구나.’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을 보면 기혁도 더는 언니를 붙잡지 못한 모양이었다....한편, 혜나가 떠난 뒤 기혁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그는 소파에 앉자마자 와인잔을 집어 들고 술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그 모습을 본 성모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얼굴에 와인까지 뒤집어쓰고도 또 쫓아갔다가 결국 차인 거야? 그런데 너, 최한나 만나는 거 정말 최혜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기혁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술만 마셨다.

  • 사랑인 줄 알았던 복수   제26화

    택시에서 내린 한나는 주차장에 세워진 기혁의 마이바흐를 단번에 알아봤다.차 자체가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지만, 번호판만큼은 달랐다.저 차번이라면 틀림없이 기혁의 차일 것이다.‘언니가 송기혁을 만나러 온 거야?’한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라운지 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화려하게 번쩍이는 조명과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이 거슬렸지만, 한나는 애써 참았다....그 시각, 혜나는 예약된 룸으로 들어갔다.룸 안에는 성모와 기혁, 단 두 사람만 있었다.한나의 말이 사실이었다.두 사람은 분명 가까운 사이였다.혜나는 망설임 없이 기혁의 옆자리에 앉았다.기혁은 다리를 꼰 채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의 주변을 맴도는 자욱한 담배 연기는 가뜩이나 잘생긴 얼굴에 묘한 신비로움을 더했다.혜나가 앉자 기혁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몸을 일으켜 와인 한 잔을 건넸다.혜나는 와인잔을 받아 들고 기혁과 성모를 차례로 바라봤다.하지만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동생에게서 들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오늘 낮 식사 자리가 끝나자마자 기혁과 성모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 봐도 둘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었다.게다가 혜나가 오늘 따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성모는 실제로 해외에서 신재생에너지용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었다.그가 이번에 귀국한 목적도 국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그렇다면 성모가 국내에서 처음 손잡을 협력자로 기혁을 선택할 가능성이 컸다.성모는 지환과도 친분이 있었다.만약 두 사람이 YW그룹의 프로젝트 기획 내용을 알게 된다면, 오랫동안 이어진 두 집안의 경쟁 관계를 생각할 때 기혁이 먼저 사업을 추진할 것이 뻔했다.하지만 혜나는 성모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그에게 나쁜 인상을 남기는 것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그녀는 곧장 기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내가 어제 분명히 경고했지? 그런데 오늘 네 행동은 대체 뭐야?”

  • 사랑인 줄 알았던 복수   제25화

    “뭔데?”혜나는 한나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오늘 너도 봤지? 송기혁은 행동도 경솔하고 여자관계도 복잡해. 그러니까 절대 가까이하지 마. 알았지?”한나는 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당부였다.한나는 오래전에 기혁이 쳐 놓은 다정한 덫에 빠져 버렸다.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수습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혜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번 프로젝트는 HM테크와 함께 진행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내일 아침 비행기도 예약해 뒀어. 난 먼저 들어가서 쉴게.”혜나는 말을 마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한나도 자기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한동안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지난 며칠 동안 한나는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그런데 고작 검사 결과지 한 장조차 제대로 가져오지 못했다.오늘도 기회를 놓쳐 버렸다.이제는 다시 그곳에 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난 혜나는 동생 방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한나가 불을 끄는 걸 깜빡한 줄 알고 방으로 향했는데, 뜻밖에도 동생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졸린다더니 왜 아직 안 자?”“마무리할 작업이 좀 있어서.”한나는 적당히 핑계를 댔다.“애니메이션 만드는 게 아무리 좋아도 너무 무리하지 마. 얼른 자.”혜나가 돌아서려던 순간, 한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언니.”“응? 왜?”“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뭔데? 물어봐.”한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언니는 왜 연애 안 해?”순간 혜나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했다.“너도 알잖아. 난 시간 낭비하는 거 싫어해. 어차피 결혼도 사랑이랑 상관없이 할 생각인데, 굳이 연애에 시간을 쓸 필요가 있겠어?”혜나는 한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좀 멜랑꼴리해진 거야?”“그런가 봐. 그래도 언니가 연애를 한 번도 안 해 보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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