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혁은 그제야 아내가 장갑을 뜨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꼼꼼하게 뜬 장갑은 어떤 실을 사용한 것인지 손을 찌르기는커녕 부드럽기만 했다. 시원한 장갑의 촉감에 기분마저 좋아지는 것 같았다. 주혁이 마무리가 덜 된 장갑으로 손을 넣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게 주혁의 손에 딱 맞는 사이즈였다.“어때?”주혁이 손을 이리 저리 움직였다. 장갑은 마침 상처로 얼룩진 주혁의 손을 가려주었다. “딱 맞아.”주혁이 말을 이었다. “예쁘게 떴네. 고마워.”여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장갑을 받으며 대답했다.“얼른 완성해서 줄게.”고개를 끄덕인 주혁의 손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그러자 여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까 어떤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당신이 숙제를 봐주고 있어서 내가 대신 받았어.”주혁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휴대폰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자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미안해...”주혁은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여자는 몸을 일으켜 커튼을 비스듬히 열었다.워낙 작은 월세 방은 방음이 좋지 않았기에 주혁은 매번 밖으로 내려가 전화를 받았다.가로등에 주혁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충분히 조급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의 마음은 불안해져만 갔다. 어쩐지 조향 회사로 이직을 한 후로 주혁은 항상 예민해져 날을 세웠다. 특히 S 라는 여자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눈에 띄게 긴장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한편, 강한서의 품에 안긴 한현진은 그가 들려주는 고전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잠에 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다급한 벨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한현진이 번쩍 눈을 떴다.“이 시간에 누구야?”휴대폰을 가져온 강한서가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홍혜림 씨.”순간 잠이 깬 한현진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강한서에게 전화를 받아보라고 손짓했
“23번 유현진 씨, 가족분께 연락하셨나요?“이제 간호사가 몇 번째로 유현진을 재촉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흘긋 확인해보았으나 강한서에게 건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한주시 북부 환형 육교에서 연속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하며 버스 한 대가 옆으로 기울다 강에 빠져버렸다. 그로 인해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이 하나둘씩 병원에 도착했지만 오직 그녀의 남편은 늦도록 연락되지 않았다.처참했던 사고 현장이 여전히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사고 당시 느꼈던 공포보다 이 순간 밀려오는 서운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유현진 씨?”간호사의 부름에 유현진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셔츠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몰골이 처참했으나 여전히 품위 있게 대답했다.“죄송합니다. 연락되지 않는 것을 보니 지금 좀 바쁜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사인해도 될까요?”“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어요. 만약 가족분께서 사인할 수 없다면 병원에 남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거예요. 뇌진탕은 빠른 진단을 내릴 수 없으니까요. 병원에선 당신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유현진은 입술을 꾹 닫고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제가 다시 전화를 걸어 볼게요.”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의료 기기를 담은 플라스틱 카트를 들고 지나가던 두 간호사를 만나자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여 길을 비켜줬다. 그때, 간호사 중 한 명이 말했다.“16번 환자, 누군지 알아요?““아뇨. 누구죠?““송민영 몰라요? 엄청나게 유명해요! 얼마 전에 찍은 핫한 드라마 ’비밀의 연인‘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분이에요.““저런! 그분, 많이 다치셨어요?““조금 늦게 오셨어요. 그리고 팔에 스친 상처가 있긴 한데 그때 이미 약간 아문 상태였어요. 하지만 연예인들 얼굴이 간판이잖아요. 당연히 우리 같은 일반인과 비길 수 없죠. 내가 만약 송민영과 같은 얼굴과 몸매
뜨거운 열기가 귓가에 뿜어지고 달아오른 체온까지 더해 유현진의 귓불을 뜨겁게 달구었다. 다만 그녀는 복부에 난 멍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며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다행히 불이 꺼져있어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의 목젖에 키스했다. 강한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짙은 눈빛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를 한입 물었다. 곧이어 유현진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나 오늘 배란기야, 할 때가 됐어.”강한서는 몸이 굳어지더니 눈가에 스친 욕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분노에 찬 말투로 물었다.“네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야?”유현진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뜨거웠던 귓불도 서서히 열기가 식었다.“너희 엄마가 계속 날 다그치잖아.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차라리 너 정자 기증할래? 그럼 내가 시험관시술 할게.”강한서가 비난 조로 되물었다.“엄마가 재촉한 게 아니라 네가 사모님 자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아이라도 낳으려는 거 아니야?”유현진은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옅은 미소만 지었다.“맞아, 네가 날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해서라도 우리 둘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지.”강한서는 단추를 채우고 짜증 섞인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이런 데 신경 쓰지 마. 난 아이 안 가질 거야.”유현진의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녀는 문밖을 나서려는 강한서를 불러세웠다.“강한서, 넌 대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 아니면 내 아이를 갖기 싫은 거야?”강한서는 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뭐가 다른데?”유현진은 주먹을 꽉 쥐고 대답했다.“같은 뜻이라면 결혼도 아무 의미 없겠지. 이혼해 그냥.”“네 마음대로 해.”강한서는 이 한마디를 내뱉은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유현진은 베개를 문에 힘껏 내던졌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다음 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강한서는 식탁 앞에 앉아 메일을 확인했다.아침을 준비한 지 반나절이 됐지만 그는 도통 수저를
차미주는 꿈속에서 헤매다가 노크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문을 연 순간 유현진이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떡하니 서 있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청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숙박 좀 할 수 있을까?”차미주는 그녀에게 아이스 콜라 한 병 건넸다. 유현진이 콜라를 건네받자 그녀는 불쑥 제 머리를 툭 쳤다.“내 정신 좀 봐. 너 탄산음료 안 마시지? 우유 갖다 줄게.”“아니야, 괜찮아.”유현진은 캔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못 마시는 게 어디 있어?”전에는 임신 준비 때문에 술과 담배, 음료 및 자극적인 것들을 싹 다 멀리했지만 이혼을 앞둔 지금은 이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인 것을.‘임신 준비? 그딴 건 무능한 강한서더러 하라고 해!’“너 정말 강한서 씨랑 이혼할 생각이야?”차미주는 소파의 반대편에 앉으며 확실치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응.”유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 또 송민영이랑 만나.”차미주는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그 여잔 대체 왜 이렇게 뻔뻔한 거야? 애초에 결혼할 때도 찾아와 소란을 피우더니 3년이 지난 후 또다시 나타나? 세상에 남자가 없대? 아니 왜 유부남을 물고 늘어지는 거냐고? 강한서 그 자식도 한심해. 놀다 버린 장난감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유현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지금 대체 누굴 욕하는 거지?’차미주는 마른기침을 하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 지금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야. 그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넌 그냥 빠지려고? 왜 그런 비겁한 인간들을 봐줘? 끝까지 맞서 싸우란 말이야! 그 여자가 온갖 청순한 척을 다 떨잖아. 사람들 앞에서 그 가면을 확 벗겨버려! 청순은 개뿔, 유부남이나 만나는 뻔뻔스러운 년인 주제에!”“그래서? 내 결혼생활이 파탄 났다는 걸 온 세상에 알려? 남편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가여운 여자로 남아?”유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이 결혼은 이미 실패야. 떠날 때까지 비참하게 굴고 싶
“네? 대표님은 아직 주무십니다.”“그럼 침실로 가서 깨워요!”유현진은 살짝 화가 치밀었다. 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심지어 이제 막 잠에서 깬 잠긴 목소리라 한순간 유현진도 저 자신을 의심할 뻔했다.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며칠 뒤에 네 옷장의 옷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리스트를 작성해서 보내줄게. 앞으론 이런 따분한 일들로 전화 걸지 말았으면 좋겠어!”“따분한 일?”강한서가 차갑게 웃었다.“유현진, 이런 따분한 일들은 네가 가장 좋아하던 일이었잖아. 내가 무슨 속옷을 입는 것까지 일일이 책임졌잖아. 이게 고작 네가 추구하던 삶이 아니었어?”유현진은 숨이 턱 막혔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심장이 쑤시듯이 아팠다.강한서에게 자신이 그저 이런 이미지였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 느낌이 새삼 달랐다.대체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야 이런 수모를 겪었을 때 아무런 느낌이 없을까?전화기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유현진이 잠긴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봐도 한심했어. 그러니까 이젠 더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얼른 사인해. 우리 둘 사이 빨리 끝내자.”화제가 또다시 이혼으로 돌아왔고 이제 막 화가 가라앉았던 강한서는 금세 분노가 차올랐다.“제발 적당히 해!”유현진은 피식 웃으며 비난 조로 되물었다.“내가 뭘 어쨌는데?”“너 후회하지 마!”강한서는 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툭 끊었다.유현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상하게 챙겨주고 묵묵히 헌신했던 지난날들이 강한서에겐 그저 한낱 놀림거리에 불과하다니.매번 그를 위해 여러 장소에서 입을 옷들을 정성껏 챙겨줄 때 정작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엔 짜증이 잔뜩 담겨있었을지도 모른다.종일 하루 세끼와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는 여자가 얼마나 창피했을까? 그녀가 생각해도 이런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어리석어 보였다.“대
곧이어 그녀는 안티카페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왜 넋 놓고 있어?”이때 훤칠한 남자가 프런트 데스크를 두어 번 두드리며 팔꿈치를 괴고 있었다. 그는 턱을 살짝 들고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너더러 넋 놓고 있으라고 월급 주는 줄 알아?”그는 바로 옆 건물의 사장이자 섬블 컴퍼니의 사장인 한성우였다.여직원은 한성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전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사장님도 종일 뵙기 힘들잖아요.”“입만 살았어!”그가 계속 여직원과 말장난을 걸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마른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성우는 동작을 멈추고 순간 장난기 어린 표정을 거두며 진지하게 말했다.“박 감독 어디 있어? 지금 바로 내려오라고 해.”“감독님은 녹음 테스트를 하고 계세요.”“녹음 테스트?”한성우는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선셋 스타가 왔어?”여직원이 머리를 끄덕였다.한성우는 살짝 기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개 돌려 굳은 표정의 강한서를 본 순간 재빨리 마음을 억누르고 정색하며 말했다.“박 감독한테 전화해서 내가 몇 가지 물을 게 있다고 전해.”곧이어 전화가 연결되자 한성우는 스피커폰을 눌렀다.“박 감독, 녹음 테스트는 잘 돼가? 나한테도 목소리가 괜찮은 배우가 있긴 한데.”“괜찮아, 테스트 다 했고 이미 계약도 마쳤어.”박정문은 비록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지만 한성우의 말뜻을 바로 알아챘다. 한성우는 한숨을 돌리고는 일부러 사장 포스를 내며 말했다.“이젠 나랑 상의도 없이 계약까지 하는 거야? 대체 누가 사장이야?”박정문은 전화를 툭 끊었고 한성우는 계속 구시렁댔다.“얘는 내가 점점 안중에 없는 것 같다니까!”이어서 그는 고개 돌려 강한서에게 말했다.“너도 들었지? 이미 계약했대. 다음에 버전 업데이트하고 알맞은 캐릭터가 있으면 그때 다시 써줄게.”‘정상에서’는 최근 섬블 컴퍼니에서 그가 가장 만족하는 작품이라 송민영이 이 완벽함을 망치는 걸 절대 지켜볼 수 없다.강한서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흘겨봤다
유현진과 마주치고 얘기할 기분이 사라진 강한서는 얼마 있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로비로 돌아오자마자 내려오는 박정문을 본 한성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선셋 스타는? 왜 같이 안 내려왔어?”“한참 전에 갔는데? 아래층에 있으면서 못 봤어?”‘현진 씨?’그가 프런트 데스크 여직원을 쳐다보자 여직원이 나지막이 말했다.“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신 그분요, 얼굴도 예쁘시고 사장님한테 고개 끄덕이며 인사하던 그분 있잖아요.”‘현진 씨? 현진 씨가 선셋 스타라고?’그는 순간 이 세상이 너무 판타지 소설 같았다. 강한서의 트로피 와이프가, 게다가 인스타그램에 자주 자랑질만 늘어놓던 졸부가 더빙 계의 최고 성우라니!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강한서가 돈으로 자기 와이프의 일자리를 빼앗아서 송민영에게 넘겨준 셈이 돼버렸다.‘이 스토리... 살아있네!’그의 모습을 본 박정문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눈이 게슴츠레한 게 또 무슨 꿍꿍이야?”한성우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두 글자를 내뱉었다.“비밀.”...‘빌어먹을 개자식 강한서! 그딴 선물 누가 좋아한대? 그 돈으로 가서 네 병이야 고쳐! 난 그딴 거 필요 없어!’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유현진은 분노가 치밀었다. 휴대폰을 만지던 그때 앱 화면에 뜬 생식 병원 광고 문구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예약 버튼을 눌렀다.개인 정보를 입력하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받기 싫은 듯 느릿느릿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아빠.”“너 어디야?”유상수가 전화한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던 유현진은 거짓말했다.“수업 중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별일은 아니고. 수업 끝나면 한서랑 같이 집에 좀 와. 아빠 친구가 트러플 선물해줬는데 안사돈이 트러플 좋아한다고 했지? 와서 가져가.”26년 동안 살아오면서 유상수는 정작 그녀가 뭘 좋아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건 정확히 알고 있었다. 참으로 씁쓸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알았어
“아빠, 아빠도 회사 운영하시니까 잘 알 거 아니에요. 어느 회사 인턴이 수억짜리 자동차를 몰고 출근하던가요? 한서 지난번에 수천억짜리 프로젝트를 계약할 때도 1억 좀 넘는 벤츠를 타고 고객을 만나러 갔어요. 그런데 얘가 뭐라고 벌써 그리 비싼 차를 타야 하는데요?”그녀의 말에 유상수가 살짝 분노를 터뜨렸다.“회사마다 사정이 다르잖아. 맨날 집에서 호강하며 놀고먹는 네가 뭘 안다고 그래?”“놀고먹는다고요?”유현진은 어이없는 나머지 피식 웃었다.“그때 저한테 일을 포기하라고 설득하실 때는 이렇게 얘기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리고 강씨 가문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어디 저뿐인가요?”“쾅!”유상수는 식탁을 탁 치며 노기등등하게 말했다.“차 좀 빌려달라는데 옛날 일을 왜 들먹여!”그러자 유현아가 재빨리 유상수를 말렸다.“아빠, 진정하세요. 아빠 혈압이 높아서 화내시면 절대 안 돼요. 이 얘기 꺼내는 게 아닌데 다 제 탓이에요. 언니가 빌려주기 싫다면 방법 없죠, 뭐. 화내지 말아요, 아빠.”그녀가 옆에서 말릴수록 유상수는 친딸이 점점 더 성에 차지 않았다.“현아 좀 봐봐. 너보다 어린데 훨씬 철이 들었어!”식사 자리가 결국 서로 기분만 상한 채 끝나버리고 말았다. 유현진이 가기 전 유현아는 트러플 두 박스를 그녀의 차에 넣고는 유리창에 대고 말했다.“언니, 형부 오늘 일 때문에 바빠서 못 온 거 아니지?”그러자 유현진이 그녀를 째려보았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유현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차 주인은 한 사람만 있는 거 아니야. 남자도 마찬가지고.”그러고는 그녀 대신 유리창 버튼을 누른 뒤 안으로 들어갔다.아파트.차미주는 그녀가 가져온 두 선물 박스를 만지며 말했다.“이거 대여섯 근 정도는 되겠는데? 너희 아빠 강씨 가문에 잘 보이려고 아주 아낌없이 돈을 쓰시는구나. 아빠한테 매번 가져간 선물 시어머니가 쳐다도 안 본다고 말 안 했어?”“말한다고 해서 그만둘 것 같아?”TV 채널을 여러 개 돌려도 송민영의 드라마만
주혁은 그제야 아내가 장갑을 뜨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꼼꼼하게 뜬 장갑은 어떤 실을 사용한 것인지 손을 찌르기는커녕 부드럽기만 했다. 시원한 장갑의 촉감에 기분마저 좋아지는 것 같았다. 주혁이 마무리가 덜 된 장갑으로 손을 넣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게 주혁의 손에 딱 맞는 사이즈였다.“어때?”주혁이 손을 이리 저리 움직였다. 장갑은 마침 상처로 얼룩진 주혁의 손을 가려주었다. “딱 맞아.”주혁이 말을 이었다. “예쁘게 떴네. 고마워.”여자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장갑을 받으며 대답했다.“얼른 완성해서 줄게.”고개를 끄덕인 주혁의 손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그러자 여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까 어떤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었어. 당신이 숙제를 봐주고 있어서 내가 대신 받았어.”주혁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휴대폰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얼굴이 하얗게 질린 여자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미안해...”주혁은 굳은 얼굴로 휴대폰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여자는 몸을 일으켜 커튼을 비스듬히 열었다.워낙 작은 월세 방은 방음이 좋지 않았기에 주혁은 매번 밖으로 내려가 전화를 받았다.가로등에 주혁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충분히 조급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의 마음은 불안해져만 갔다. 어쩐지 조향 회사로 이직을 한 후로 주혁은 항상 예민해져 날을 세웠다. 특히 S 라는 여자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눈에 띄게 긴장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한편, 강한서의 품에 안긴 한현진은 그가 들려주는 고전 이야기를 들으며 서서히 잠에 들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다급한 벨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한현진이 번쩍 눈을 떴다.“이 시간에 누구야?”휴대폰을 가져온 강한서가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홍혜림 씨.”순간 잠이 깬 한현진은 얼른 몸을 일으키며 강한서에게 전화를 받아보라고 손짓했
송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미친 것처럼 저한테 달려들더라니까요. 계속 구시렁거리면서 알아듣지도 못할 얘기들을 했어요.”“텅 비어 있는 한쪽 눈을 보고 너무 놀라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계속 안나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송가람은 곧이어 푸념을 늘어놓았다. “백화점 경비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런 미친 X도 함부로 들어오게 하다니.”한참을 구시렁거리던 송가람은 그제야 서해금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놀라고 의심 가득한 서해금의 얼굴엔 자그마한 불안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멈칫하던 송가람이 나지막이 서해금을 불렀다. “엄마, 왜 그래요?”번뜩 정신을 차린 서해금이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넌 괜찮아? 안 다쳤어?”“안 다쳤어요. 그 사람은 절 건드리지도 못했어요. 그냥 조금 놀란 것 뿐이에요.”서해금은 송가람에게 조그마한 일이 생겨도 걱정하기 바빴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괜찮다는 송가람의 대답에 별다른 말없이 대답했다. “내일은 일이 많을 텐데, 일찍 쉬렴.”송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일찍 주무세요.”“그래.”멍한 표정으로 대답한 서해금은 송가람이 방으로 올라가자 굳은 얼굴로 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서해금은 다짜고짜 그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오늘 백화점에서 웬 미친 여자가 가람에게 들이댔다며. 계속 안하라고 불렀다던데, 박안수! 대체 이렇게 큰일을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언성을 높이는 서해금과 달리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조용하기만 했다. 잠시 후,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 혹시 잘못 거신 거 아니세요? 저희 남편 이름은 주혁인데요.”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서해금이 곧바로 이성을 되찾았다. “주... 주 기사님? 그러시는 분은 누구세요?”“전 주혁 씨 아내예요. 주혁 씨가 지금 아들 숙제를 봐주고 있어서요. 주혁 씨 바꿔드릴까요?”전화를 받은 여자는 S라고 저장
갈비탕 세 글자에 서해금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학창시절 서해금은 집안 환경이 좋지 않은 탓에 등록금을 제외하면 조금의 생활비도 더 보태줄 수 없었다.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단지, 백화점, 서빙을 막론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뭐든지 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아르바이트를 할 곳이 적었고 전공 수업은 재료비가 많이 들었던 탓에 늘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았다. 당시 한아람은 반에서 몇 명 없는 고담시 출신의 학생이었다. 8인실의 기숙사에는 서해금과 한아람만 기숙사에서 밥을 먹었고 나머지 룸메이트는 전부 학교 식당으로 향했다. 서해금이 동기들과 함께 학교 식당에 가지 않는 건 가난함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김치와 밥, 그리고 김으로 대충 끼니만 때우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기숙사에서는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쓸 필요도 없어 창피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한아람이 식당에 가지 않는 건 단순히 식당이 시끄러워 집중력이 흐트러졌기 때문이었다. 한아람에게는 직접 집에서 밥을 배달해 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녀도 서해금과 함께 기숙사에서 밥을 먹었다. 기숙사에는 공용 책상이 하나밖에 없어 두 사람은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그때의 서해금은 부자를 그저 조금 더 멀끔한 옷을 입고 도시락에 고기반찬이 있는 정도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날 눈앞에 놓인 한아람의 도시락은 그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했다. 도시락을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인지 한아람은 서해금에게 같이 먹자며 슥 도시락을 내밀었다. 오랫동안 배불리 밥을 먹은 적이 없었기에 서해금은 괜찮다는 내숭조차 떨지 못했다. 밥을 먹는 동안 서해금의 젓가락은 계속 1년에 몇 번 먹을 기회가 없는 고기반찬으로 향했다. 그러면 한아람은 그녀에게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다는 이유로 야채를 올려주었다. 그날, 서해금은 처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느끼게 되었다. 배조차 제대로 채울 수 없어 굶는 날이 많았던 서해금에게 한아람은 영양을 따져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순간
탁, 소리와 함께 서류가 테이블 위로 흩어졌다. 주현은 순간 입을 꾹 닫았고 성월이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얼른 송 팀장님에게 회사로 돌아오시라고 해!”“아뇨!”서해금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사라고 해요. 돌아올 필요 없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라고 전해요.”주현이 황급히 전화를 끊자 휴대폰을 내린 성월이 조심스레 서해금에게 물을 건넸다. “대표님께서 지난번에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송 팀장님도 정말 열심히 노력하셨어요. 강민서 씨와는 줄곧 사이가 꽤 좋았었잖아요. 그러니 약혼식 선물을 준비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에요.”서해금이 피식 냉소 지었다. “성 비서는 정말 가람이가 강민서와의 우정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해요?”입술을 달싹인 성월은 끝내 한마디 말밖에 꺼내지 못했다. “송 팀장님은 아직 어리시잖아요.”“멍청한 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죠.”성월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은 화가 나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기 마련이었다. 서해금에게 송가람은 여전히 그녀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딸이었다. 서해금이 이 모든 것을 꾸민 이유는 전부, 유일한 딸인 송가람을 위해서였다. 화가 조금 가라앉자 서해금이 입을 열었다. “선물 좀 준비해줘요. 강민서 예비신랑이 대단한 가문의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의는 갖춰야죠.”고개를 끄덕인 성월이 막 사무실을 나서렸는데 서해금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니에요. 됐어요. 선물은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 봐요.”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서해금은 휴대폰을 들어서 송병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병천은 지난주부터 고담시에 가 있었다. 그곳에서 지내고 있는 늙은이가 수술을 해 병문안을 간 모양이었다. 만약 예전이었다면 서해금 역시 송병천을 따라 가 걱정하는 척 연기라도 했을 것이었다. 물론 최근까지도 서해금은 한태진과 공연선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두 분이 한아람의 친구인 그녀가 송병천과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지만 송가람이 송민준과 사이가
예민한 서해금은 단 한 마디로 짜증 섞인 홍혜림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멈칫한 그녀는 진윤의 안부부터 물었다. “사모님, 진윤 씨 퇴원했다면서요. 몸은 좀 어때요? 퇴원했어도 물리치료가 중요해요. 아직 어리니까 더 조심하는 게 좋아요. 물리치료 센터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필요하시면 소개해 드릴게요.”홍혜림이 심호흡으로 가슴 한 편 자리 잡은 분노를 꾹 눌렀다. “물리치료사를 고용해서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서 대표님.”잠시 침묵하던 홍혜림이 말을 이었다. “아, 윤이 일은 해결됐어요. 서 대표님이 오 교수님과 다리를 놔주신 덕분이에요. 서 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거예요. 제가 너무 큰 신세를 졌어요.”그 말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세라뇨. 사모님께서 깔린느와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요. 전엔 작은 오해로 사모님 기분을 상하게 해드린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었는데 이번 일로 도움을 드리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서해금의 의도를 눈치 챈 홍혜림이 한껏 여유로운 태도로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전했다.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아 서해금이 애간장을 태울 때쯤, 홍혜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가람 씨도 이번 조향 대회에 참석하셨다면서요?”서해금이 움찔했다. 홍혜림이 자신보다 더 직설적으로 그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서해금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네. 이번 대회를 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요즘 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어요. 결승 시간이 다가오니까 좋은 성적을 따내지 못할까 봐 부쩍 조바심을 내고 있더라고요.”홍혜림이 말했다. “젊은이가 욕심이 있는 건 좋은 거죠. 가람 씨가 서 대표님을 닮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결승전엔 저도 참석할 예정이에요. 가람 씨가 기대 이상의 실력을 보여줄 거라 믿어요.”아는 사람끼리 굳이 대놓고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서해금은 충분히 홍혜림의 말의 의미를 눈치 챘다. “말씀 고마워요, 사모님. 그럼 그날 현장에서 뵐게요.”전화를 끊은 서해금이 고개
[부정행위 같은 건 내부 조사로 진행해봤자 무슨 결과가 있겠어요? 학교 입장에선 당연히 부정하겠죠. 창피하잖아요.][부정행위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여기로 모이세요!]...댓글이 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그때, 그 대학원생은 좋아요가 제일 많이 눌린 댓글에 다시 댓글을 달았다. [진윤 학생의 루머가 퍼진 그날, 전 바로 해명 글을 올렸었어요.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피드는 계속 비공개로 전환이 되었어요. 서버 문제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규정 위반이라는 이유로 피드를 업로드 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며칠 사이 계정을 바꿔가며 계속 피드를 작성했지만 결과는 똑같았어요. 계속 업로드가 되지 않더라고요. 실체가 없는 압박 때문에 전 진윤 학생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없었어요. 그더라 오늘 점심이 되어서야 계정이 정상적으로 활성화되었고요.][전 대학원 2학년생이에요. 솔직히 얘기하면 적지 않은 학생에게 과외를 해줬어요. 하지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대부분이었어요. 진윤 학생은 제가 가르쳤던 학생 중 유일한 대학생이었어요.][과외비도 많이 챙겨줬고 사교성도 좋아서 다른 과외는 전부 거절하고 진윤 학생 한 명만 했었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공대의 많은 수업은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진윤 학생은 기초도 좋은 편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노력을 많이 했어요. 새벽 2, 3시까지 공부하는 것도 기본이었어요. 그러니 그 정도 난이도의 시험은 통과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죠.][인터넷에선 다들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진윤 학생이 부정행위를 했다고 하던데 솔직히 얘기하면 만약 진윤 학생이 부정행위로 그 정도 성적을 받은 거라면 정말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제가 하고 싶은 말을 여기까지예요. 앞으로 악플에 더는 대응하지 않을 거예요.]그는 설명과 함께 캡처 여러 장을 함께 공개했다. 그 중에는 업로드에 실패했던 여러 개의 피드와 늦은 새벽 진윤과 문제집을 토론하던 대화기록 그리고 진윤이 그에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