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 씨, 여긴 아직 철거 안 했다고 하네요. 다만 이틀 안에 곧 철거 들어간다더라고요. 정말 때맞게 오셨어요.”진오는 시아보다 먼저 도착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에 시아는 그 말을 듣고 한숨 돌리며 안쪽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땅 파고 구덩이 팔 줄 알아요?”진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땅 파는 연장 이름도 모른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사람을 묻어본 적은 있어요.”시아가 진오를 힐끗 보자, 남자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진짜예요. 지호랑 같이 한 적도 있거든요.”이들 모두 사람이 할 짓이 아닌 짓을 해본 적이 있었고. 이는 승전도 예외가 아니었다.이 판국에서 깨끗한 손을 찾기란 드물었다.폐허가 된 훈련장은 먼지에 덮여 있었고 사방에 잡초가 무성했는데, 한때의 북적임은 사라지고 황량함만 남았다.시아는 이곳에서 3년을 훈련했다. 곳곳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처참한 잔해뿐이었고 마음에도 먼지가 내려앉는 듯했다.이때 문득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세월은 무정하고 시간은 헛되이 흐른다.’“이 화단 맞아요?”진오가 먼저 화단을 발견하자 시아는 시선을 들었다. 화단은 더없이 초라했는데 잡초가 화단을 가득 메웠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탓에 마른풀과 새싹이 뒤엉켜 있었다.시아는 가장 먼저 미아가 심어둔 월계화를 찾았는데 금세 눈에 들어왔다. 너무 잘 자라 키가 시아의 키를 훌쩍 넘었고, 새가지도 돋아 있었다.“여기 맞아요.”시아는 확신했다.“어느 그루죠?”진오가 묻자 시아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그건 미처 묻지 못했네.’“일단 연장부터 찾죠.”그러고는 시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진오는 시아가 삽을 쥐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먼저 뛰어갔다. 십여 분쯤 지나서야 삽과 괭이를 들고 돌아왔다.“사람 묻을 때 이걸 썼는데 흙 파는 데도 되겠죠?”이에 시아는 말이 없었다.쿵! 쿵!한 번 또 한 번.진오는 허리를 굽히고 엉덩이를 쭉 내민 채 한 번씩 흙을 파냈다. 이는 진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거 맞지?”시아가 반지를 건네며 묻자 미아는 그것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눈빛 속에 번져든 격한 빛이 곧 대답이었다.시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웃었다.“그토록 소중하다면 끼워보자.”그러나 말이 끝나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7년 동안 누워 있던 미아의 몸은 많이 야위어 있었다. 근육은 쇠약해지고 손가락마저 가늘어졌는데 어떻게 예전 반지를 다시 낄 수 있겠는가?“미아야, 미안...”시아가 설명하려는 순간, 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반지를 손바닥에 꼭 쥔 채, 개의치 않다는 듯 눈짓을 보냈다.시아도 웃으며 대꾸했다.“찾았으니 됐어. 조금 더 회복해서 살이 오르면 다시 끼울 수 있을 거야. 아, 그리고 이거.”시아는 노란 캐릭터 곰이 달린 머리끈도 꺼내 그녀 손에 올려두었다.“이것도 반지랑 같이 있었어. 네 거 맞지?”미아의 눈빛에 순간 흐릿한 그림자가 스쳤다. 그러나 시아는 눈치채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이 곰 인형 귀엽지? 나도 이런 거 좋아했어.”물건을 찾아줬으니, 이번엔 시아가 물어야 할 차례였다.“미아야, 이제 나한테 7년 전 그 일에 대해 제대로 얘기해줄 수 있어?”미아의 어깨가 크게 떨리자 시아는 재빨리 여자의 어깨를 붙잡았다.“알아, 네게는 너무 아픈 기억이지. 하지만 지금 지호 씨를 구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그 말에 미아의 눈물이 다시 터졌다.‘예전의 미아는 이렇게 잘 울지 않았는데.’“휴, 대, 폰.”끊어진 듯한 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시아는 귀를 세우고 입술까지 따라 움직이며 단어를 분별했다.“혹시 휴대폰에 증거가 있다는 말이야?”미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아의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아의 물건 중에는 휴대폰이 없었다.“그럼, 네 휴대폰은 어디 있어?”미아의 촉촉한 눈동자가 시아를 향했으나 대답은 없었고, 그 불안과 망설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미아야, 날 믿어.”시아가 간절히 말했다.“옛, 훈, 련, 화, 화단...”시아는 온몸을 귀로 만든 듯 집
‘비밀번호?’‘내가 어떻게 지호 씨의 비밀번호를 알겠어?’그러나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은행 직원에게 입력 기회가 몇 번 주어지는지 확인한 뒤, 시아는 첫 번째 시도를 시작했다.지호의 생일은 입력하지 않았다.그만한 인물이라면 생일쯤은 모두가 아는 공개 정보였기에, 그런 걸 비밀번호로 쓰는 건 안 쓰는 것과 다름없었다.시아가 입력한 건 미아의 생일이었다.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그 여자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설정한다.누가 처음 말했는지 모르지만 연인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지호가 미아를 그렇게 사랑했다면 가장 먼저 떠올릴 건 미아의 생일 터였다.[죄송합니다.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시아는 놀랐다. ‘미아의 생일이 아니라니. 그렇다면 혹시 반대로, 자신의 생일을 입력했을까?’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번엔 지호의 생일을 입력했다. 그러나 결과는 또다시 오답이었다.이때 옆에 서 있던 직원이 말했다.“사모님, 총 세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이제 한 번 남았습니다.”“틀리면 어떻게 되죠?”시아가 물었다.“계좌가 자동으로 잠기고, 하 대표님 본인이 와서 얼굴 인식을 해야만 해제됩니다.”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애쓰지도 않았을 것이다.이에 시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호 씨가 설정할 만한 다른 비밀번호는 무엇일까?’ 그러다 문득, 예전에 지호가 휴대폰 비밀번호로 설정해 두었던 게 떠올랐다.‘우리 둘의 결혼 날짜. 혹시 이 금고도 같은 비밀번호일까?’그러나 곧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이 금고는 오래전부터 있었고, 비밀번호도 일찍 설정해 두었을 것이었다. 그때는 결혼 날짜 같은 건 알 수조차 없었지만 달리 떠오르는 숫자는 없었다.“사모님, 시도하시겠습니까?”직원이 조심스레 묻자 시아는 잠시 금고를 바라보다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시도할게요.”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 설령 잠겨버린다 해도, 반지를 찾지 못하는 건 똑같다.‘그렇다면 차라리 도전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시아는 원래도 모험을 두려워하
“미아야, 걱정하지 마. 그 반지는 꼭 찾아줄게. 어쩌면 지호 씨가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시아는 그렇게 달래며 말할 수밖에 없었으나 미아는 오히려 더 초조해졌다. 핏기 없는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고, 눈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했다.시아는 단번에 이상함을 느꼈다.“미아야, 그 반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야?”미아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자 시아는 숨이 가빠졌다.“미아야, 말해줘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그러나 미아는 말하지 않았고 대신 눈물만 흘러내렸다.긴 세월을 누워 지낸 탓에 미아는 마치 유리 인형처럼 연약해 보였다. 그 모습으로 눈물까지 흘리자, 시아는 차마 버틸 수 없었다.더구나 막 깨어난 사람에게 감정적인 자극은 위험했다. 곧 시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내가 찾아올게. 반드시.”‘근데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이때 시아가 먼저 찾은 사람은 서현아였다.[미아가 사고를 당한 후, 걔 물건들은 그대로 있었나요?][전혀 손대지 않았어. 전부 경찰이 수거해 갔지. 그때 사진도 다 찍었어. 경찰서에 가면 기록이 있을 거야.]당연히 확인해야 했기에 시아는 진오에게 곧장 알렸다.잠시 후, 진오가 답장을 보내왔다.[자료에 반지가 있었던 건 맞아요. 하지만 사건이 종결될 때 모두 정리돼서 가져갔어요.][누가 가져갔는데요?]잠시의 정적 뒤 진오가 답했다.[지호요.]노수한 역시 덧붙였다.“그런 개인 물품들은 모두 대표님께서 맡아갔어요. 그러니 반지도 대표님에게 있을 거예요.”이에 시아는 곧 이해했다. 수많은 물건 중에서 지호가 유독 반지만 남겨두었다는 건, 그 반지가 단순한 악세사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그건 아마도 두 사람의 약속, 정표 같은 물건일 것이다.‘지호는 그 반지를 어디에 두었을까? 사무실? 집? 아니면 하씨 저택? 혹은 지금 둘이 함께 사는 원프리미엄?’시아는 순간 깨달았다. 지호는 교활한 토끼처럼, 집과 은신처가 여러 군데였다. 그랬기에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하지만 찾기로 결
미아는 시아를 바라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이에 시아는 미아가 여전히 불안해하는 줄 알고 다가섰다.“미아야...”“아, 아...”미아가 소리를 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지만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말이 막히자 미아는 얼굴이 붉어지며 초조해졌고 시아는 여자의 손을 꼭 잡았다.“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내 눈을 똑바로 봐. 네가 말하려는 걸 내게 알려줘.”예전에 둘은 너무도 가까워서 서로의 마음을 다 안다고 믿었다. 시아는 종종 장난스럽게 우리 마음은 통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자만스럽고 어리석은 말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그토록 가까웠는데도 미아가 당한 고통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아직은 눈빛으로는 서로를 읽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미아의 시선은 시아의 얼굴을 거쳐 옷으로 그리고 결국 그녀의 손가락에 멈췄다.또한 거기에 끼워진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 반지는 지호가 결혼식 날 시아의 손가락에 직접 끼워준 것이었다.‘미아가 묻고 싶은 건, 그 사실에 대한 설명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의미일까?’시아는 미아와 대화할 때 결혼 이야기도 모두 들려줬다. 처음엔 명목뿐인 부부라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고. 또한 미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미아야.”시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지금은 설명할 때가 아니었다.“일단 먼저 지호 씨를 구해야 해.”그러자 미아의 손가락이 움직여 시아의 반지를 건드렸다.‘혹시 반지를 빼라는 뜻인가? 반지 하나일 뿐인데 그것조차 보기 싫은 걸까?’시아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내가 이 반지를 끼고 있는 게 싫구나? 그럼 빼줄게.”시아가 반지를 빼려는 순간, 미아는 오히려 여자의 손을 눌러 멈추게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반지를 꼭 붙들고 있었다.순간 시아는 혼란스러웠지만 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를 향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시아는 미아의 눈을 몇 초간 응시하다가 문득 깨달았다.“너도
곧 시아는 손을 뻗어 문을 다시 닫자 노수한이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시아는 노수한의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물었다.“미아가 갑자기 혼자서 깬 건가요?”아까 전화 통화 때는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네.”노수한은 단 한 글자만 내뱉자 시아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누가 가장 먼저 미아가 깬 걸 발견했죠?”“간호사였어요. 하지만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정기 검진을 마치고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간호사가 미아 씨가 눈을 떴다고 알려줬거든요.”이에 노수한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무슨 문제라도 있나요?”“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요?”시아가 다시 묻자 노수한은 여자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당시 간호사가 하지호 씨의 구속 소식을 꺼냈어요.”거기까지 말한 노수한은 곧 깨달은 듯 말을 멈췄다.“그 사건이 자극되어 깨어난 거네요.”그러자 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요. 진짜 핵심 인물은 지호 씨였던 거예요.”노수한은 세 사람의 얽힌 사정을 잘 몰랐지만, 시아가 지금은 지호의 아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기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시아는 곧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간호사가 미아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는데, 그녀는 평소처럼 시아에게 인사를 건넸다.“사모님, 오셨네요. 미아 씨가 눈을 떴어요.”간호사도 기뻤지만 이내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아래를 보니 미아가 자기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미아 씨?”간호사는 당황했다.“무슨 일인가요?”미아의 눈은 시아를 똑바로 향했고 떨리는 입술이 움직였다.그것은 분명 격한 감정이었고, 시아 역시 똑같은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7년 만에 마침내 그 눈을 마주한 순간이었다.“미아야.”시아가 부드럽게 부르자 간호사는 눈치 있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윽고 시아는 미아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 그날, 지호가 시아 앞에 미아를 데려왔던 순간처럼 똑같았다.곧장 미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구슬이 떨어진 듯, 한 방울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