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르셀리아가 눈을 뜬 것은 새벽빛이 침실 바닥을 아주 희미하게 밝히기 시작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왜 침대가 아니라 바닥에 앉아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등 뒤로는 침대 프레임이 닿아 있었고, 옆에는 소파가 있었다. 밤새 기대고 있었던 탓인지 목이 조금 뻐근했다. 드래곤의 몸으로 이 정도 불편함은 금세 사라지겠지만, 기분까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손.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의 손은 아직도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었다. 정확히는. 아스테리온이 놓지 않고 있었다. 손가락이 맞물린 채였다. 그것도 단순히 손바닥만 맞댄 수준이 아니라, 언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게 손가락 사이사이가 완전히 얽혀 있었다. 아르셀리아는 한동안 그것을 내려다봤다. “….” 어젯밤 자신이 먼저 잡은 것은 맞다. 명령이 발동하면 바로 알아차리기 위해서. 거기까지는 기억났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잡으라고 한 적은 없었다. 아르셀리아가 손을 빼려고 조금 움직였다. 순간.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아르셀리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안 자는 거 알아.” 반응이 없었다. “아스테리온.” 여전히 조용했다. 아르셀리아는 그를 쳐다봤다. 소파 아래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평온했다. 평소보다 조금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내려와 있었고,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로는 금빛 눈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르셀리아는 속지 않았다. “검은 잠 안 잔다며.”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역시. 아르셀리아가 손을 확 잡아당겼다. 아스테리온이 이번에는 눈을 떴다. “좋은 아침입니다.” “놔.” “싫습니다.” “내가 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싫다고 말해.” “연습 중입니다.” “그 연습 그만해.” “어제는 잘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런 데 쓰라고 한 거 아니야.” 아스테리온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상당히 유용합니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정확하게 말씀드릴까요?” “응.” “아르셀리아께서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셨을 때부터.” 아르셀리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내가?” “예.” “거짓말.” “제가 왜 그런 거짓말을.” “너는 할 것 같아.” “상당히 섭섭하군요.” 아르셀리아는 그의 어깨를 봤다. 셔츠 위로 아주 미세하게 붉은 머리카락 한 가닥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아스테리온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덧붙였다. “생각보다 얌전하게 주무시더군요.” “조용.” “그리고 잠결에 제 손을 더 세게 잡으셨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했어.” “혹시 꿈에서 저를 찾으셨습니까?” 아르셀리아의 눈빛이 순간 바뀌었다. 꿈. 그제야 떠올랐다. 어젯밤. 아스테리온의 기억인지, 자신의 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곳에서 들었던 목소리. 『형.』 『나 무서워.』 그리고. 『괜찮아, 아스테르.』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아스테리온의 얼굴에 머물렀다. 아스테르. 자신은 한 번도 그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아스테리온.” “예.” “너.” 아르셀리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 “아스테르라는 이름 알아?” 아스테리온의 미소가 사라졌다. 아주 빠르게.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되묻거나, 새로운 애칭이냐며 능글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왜.” 그가 먼저 물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아르셀리아가 그의 반응을 살폈다. “꿈에서.” “어떤 꿈.” “어제 본 기억이랑 비슷했어.”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어린 네가 있었고.” 아르셀리아는 천천히 말했다. “누군가를 형이라고 불렀어.” 아스테리온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제야 맞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아르셀리아는 손을 빼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널 아스테르라고 불렀어.” 정적. 아스테리온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창밖에서 아주 희미하게 새벽 바람이 스쳤다. 화염궁은 늘 따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방 안의 온도가 조금 내려간 것처럼 느껴졌다.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기억나?” “…이름만.” “네 이름?” 아스테리온은 대답하기 전에 꽤 오래 망설였다. “아마도.” “아마도?” “아스테리온이라는 이름은 제가 성검으로 불리기 시작한 뒤부터 사용했습니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부터 네 이름이 아니었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아스테르는?”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아주 깊은 곳에.” “누가 부른 건지는?” “모릅니다.” “형이라는 사람도?” “…예.” 아르셀리아는 그를 한동안 바라봤다.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하지 않다. 아스테리온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반복되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단순히 기억이 오래돼 흐릿해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잘라 냈다. 그가 누구였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을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까지. “기분 나쁘네.” 아르셀리아가 중얼거렸다.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봤다. “무엇이요.” “네 기억 건드린 것들.” “….” “다 남의 거 가지고 마음대로 했잖아.” 아스테리온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르셀리아는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내 보물인데.” 이번에도. 그 말에 아스테리온은 조용해졌다. 전처럼 웃지 않았다. 대신 맞잡힌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줬다. 아르셀리아가 그걸 느끼고 쳐다보자 그제야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응.” “정말 돌아갈 곳이 생긴 것 같아서 곤란합니다.” 아르셀리아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요.” “그럼 안 곤란하잖아.” 아스테리온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는 주인을 상당히 잘 고른 것 같습니다.” 아르셀리아가 바로 대답했다. “내가 주운 거야.” “그 부분은 절대 양보하지 않으시는군요.” “사실이니까.” “예. 아르셀리아께서 주우셨습니다.” 아스테리온이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아르셀리아가 미간을 찌푸리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손등 가까이 내려왔다. 닿기 직전. 멈췄다. “키스해도 됩니까?” 아르셀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왜 물어.” “허락 없이 하면 혼날 것 같아서.” “맞아.” “그러니 물었습니다.” “왜 하고 싶은데.” 아스테리온은 너무도 태연하게 말했다. “좋아해서요.” 아르셀리아는 잠깐 그를 바라봤다. “손이?” “주인이.” “…….” “이제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지 않습니까?” “왜.” “어제부터 참았거든요.” 아르셀리아가 손을 빼냈다. “안 돼.” “아쉽군요.” “안 아쉬워 보여.” “상당히 아쉽습니다.” “일어나.” “예.” “황금령 가야 돼.” 아르셀리아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아스테리온도 따라 일어나는 순간. 그의 목덜미에 빛이 스쳤다. 아르셀리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젯밤에도 봤던 것. 금빛. 비늘. 검은 셔츠 깃 위로 아주 작은 비늘 한 장이 드러나 있었다. “가만있어.” 아스테리온이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아르셀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뻗었다. 아스테리온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시선은 그녀의 손끝을 따라갔다. 아르셀리아의 손가락이 셔츠 깃을 아주 살짝 밀어냈다. “아르셀리아.”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왜.” “아침부터 상당히 적극적이십니다.” “조용.” 손끝이 비늘에 닿았다. 순간. 아스테리온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아르셀리아의 손도 멈췄다. “…아파?” “아니요.” “그럼 왜.” “갑자기 만지셔서.” 아르셀리아는 비늘을 자세히 봤다. 매끄러운 금빛. 그런데 단순한 장식 같은 것이 아니었다. 드래곤의 비늘이었다. 아르셀리아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거 어제 없었잖아.” “예.” “언제 생긴 거야.” “모르겠습니다.” “밤에.”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아주 조금 돌리려 했다. 아르셀리아가 목덜미를 잡았다. “가만있으라니까.” “…….” 금빛 눈이 천천히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이 자세가 상당히 위험하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뭐가.” “제 목을 잡고 계시잖습니까.” “보고 있잖아.” “드래곤이 목을 만지는 의미는.” 아르셀리아가 즉시 손을 뗐다. 아스테리온의 웃음이 터졌다. “알고 계시는군요.” “너 일부러 말했지.” “조금.” “진짜 귀찮아.” 아르셀리아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금빛 비늘이 계속 걸렸다. 검 안에 골드 드래곤의 심장이 들어 있다. 진명 문양은 두 용핵이 연결될 때 나타난다. 그리고 이제. 아스테리온의 몸에서 드래곤 비늘까지 나타났다. “카르디안한테 보여 줘야겠네.” 그 말에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싫습니다.” 아르셀리아가 그를 봤다. “왜.” “카르디안이 싫다고 어제 연습하지 않았습니까.” “그거 계속 갈 거야?” “예.” “비늘 확인해야 돼.” “아르셀리아께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난 이게 뭔지 몰라.” “그러면 같이 공부하죠.” “카르디안이 더 빨라.” “다른 사람을 찾으십시오.” 아르셀리아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문득 물었다. “너 질투해?” 아스테리온이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예.” 이번에는 아르셀리아가 말문을 잃었다. “…뭐?” “질투합니다.” “왜?” “아르셀리아와 오래 알았으니까요.” “그게 왜.” “저보다.” “너도 앞으로 오래 알면 되잖아.” 아스테리온이 멈췄다. 아르셀리아는 정말 별 의미 없이 말했다. “드래곤 수명 긴 거 알지?” “예.” “너도 오래 살잖아.” “그렇죠.” “그러면 몇백 년 뒤에는 너도 오래 안 사이잖아.”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정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르셀리아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몇백 년 뒤에도.” 그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제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르셀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없을 건데?” 너무 당연한 대답. 아스테리온의 금빛 눈이 흔들렸다. “제가 부러져도?” “고치면 되고.” “고칠 수 없다면.” “보관하면 돼.” “아무 능력도 없어도?” “어제도 말했잖아.” 아르셀리아는 귀찮다는 듯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예뻐서 가져온 거라고.” 아스테리온은 다시 침묵했다. 그 얼굴을 본 아르셀리아가 물었다. “너 왜 자꾸 이런 거 물어.” “확인하고 싶어서요.” “뭘.” “어디까지 쓸모없어져야 버려지는지.” 아르셀리아의 표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짧은 문장이었다. 그런데 아스테리온이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무기로만 사용됐던 천 년. 성검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던 존재. 아르셀리아는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 경고 없이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아.” 아스테리온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 거 묻지 마.” “왜요.” “짜증 나니까.” “질문이요?” “버린다는 말.” 아르셀리아가 똑바로 그를 쳐다봤다. “드래곤은 자기 보물 안 버려.”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다물렸다. “부러지든.” 한 걸음. “망가지든.” 또 한 걸음. “아무 쓸모 없어지든.” 두 사람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금빛 눈을 올려다봤다. “내 거면 내 거야.” 정적. 아스테리온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주 느리게. 그리고 그 순간. 아르셀리아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그와 너무 가까이 서 있다는 것을. 평소라면 아스테리온이 먼저 가까이 왔을 텐데. 지금은 자신이 다가왔다. 가슴과 가슴 사이가 손바닥 하나 남짓. 체온이 느껴졌다. 아스테리온의 신성력도. 그리고 그 안쪽에서. 쿵. 금빛 심장. 분명하게 한 번 뛰었다. 아르셀리아의 용핵도 반응했다. 쿵. 두 박동이 겹쳤다. 손목의 문양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스테리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르셀리아.” 목소리가 전보다 낮았다. “왜.” “조금 물러나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 “마력이.” 아르셀리아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의 붉은 마력이 손목을 넘어 팔 위로 흐르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에게. 반대로 금빛 신성력이 자신의 피부를 타고 들어왔다. 너무 자연스럽게. 서로를 찾아가는 것처럼.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목덜미에서 금빛 비늘이 하나 더 돋았다. 그리고 또 하나. 아르셀리아의 눈이 커졌다. “잠깐.” 아스테리온도 목을 짚었다. “무슨 일이죠?” “비늘 늘어났어.” “…….” 아르셀리아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아스테리온이 그 모습을 보고 아주 미묘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허락을 물으실 겁니까?” “만져도 돼?” 그가 순간 말을 잃었다. 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물으라며.” “…예.”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목덜미를 드러내듯. “허락하겠습니다.” 아르셀리아의 손끝이 금빛 비늘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이번에는 아스테리온이 이를 악물지는 않았지만. 숨이 미세하게 끊겼다. 아르셀리아가 바로 물었다. “이상해?” “조금.” “어떻게.” “설명드리기 어렵습니다.” “아파?” “아닙니다.” “그럼.” 아스테리온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 아르셀리아의 입술 가까이. 다시 눈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아르셀리아의 손이 멈췄다. “비늘 만지는 게?” “아르셀리아가 만지는 게.” “….” 그녀는 손을 뗐다. 아스테리온이 아주 작게 웃었다. “아쉽군요.” “황금령이나 가.” “예.” 그런데 아르셀리아가 돌아선 뒤.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들어 목덜미를 만졌다. 아르셀리아의 손끝이 닿았던 자리. 금빛 비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당신은 저를 너무 쉽게 망치는군요.” 황금령으로 가는 길은 화염궁에서 반나절 정도 걸렸다. 드래곤이라면 날아서 더 빨리 갈 수도 있었지만, 아르셀리아는 인간형 아스테리온을 데리고 장거리 비행을 하는 것이 가능한지 몰랐다. “검으로 변해.” 출발 직전.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아스테리온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왜죠?” “들고 가게.” “안아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싫어.” “제안만 해 봤습니다.” “검.” 아스테리온은 순순히 한 걸음 물러났다. 금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촤아악― 빛이 가라앉았을 때. 남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익숙한 성검이 있었다. 공중에 떠 있던 검이 천천히 아르셀리아 쪽으로 기울었다. 아르셀리아가 손잡이를 잡았다. 웅. 검이 가볍게 울었다. “….” 그녀는 순간 어젯밤의 대화를 떠올렸다. 검신의 감각. 전부 느낀다고 했다. 아르셀리아는 성검을 조심스럽게 내려다봤다. 그리고 손잡이만 잡았다. 검신에는 닿지 않았다. 잠시 뒤. 검에서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르셀리아.』 “왜.” 『왜 그렇게 조심스럽게 드십니까?』 “아니야.” 『어제 제 감각 이야기를 들으셔서 그런 것 같은데요.』 아르셀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조용.” 『괜찮습니다. 만지셔도 됩니다.』 “안 만져.” 『왜요.』 “네가 이상하게 반응하잖아.” 잠시 정적. 그리고 검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귀여우시군요.』 아르셀리아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땅에 떨어뜨린다.” 『그건 싫습니다.』 “좋네. 싫은 거 잘 말하고.” 『교육의 성과입니다.』 아르셀리아는 결국 성검을 허리에 찼다. 그 순간. 아스테리온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아르셀리아.』 “또 왜.” 『조금 더 위로.』 “뭐?” 『위치가 애매합니다.』 아르셀리아가 검집을 조금 위로 조정했다. 『거기.』 “…너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태연해서 더 의심스러웠다. 아르셀리아는 결국 무시했다. 본체로 돌아가기 위해 궁 앞 넓은 공터로 걸어갔다. 카르디안과 세레니스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카르디안은 그녀 허리에 매달린 성검을 보자마자 표정이 좋지 않아졌다. “꼭 들고 가야 하나.” 검이 즉시 울렸다. 『저도 당신과 동행하는 건 썩 내키지 않습니다.』 카르디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 상태에서도 말해?” 『유감스럽게도 잘 들립니다.』 “입 없는 게 더 낫겠군.” 『당신도 조용하면 훨씬 낫겠습니다.』 “둘 다.” 아르셀리아가 말했다. 검도. 카르디안도. 즉시 조용해졌다. 세레니스가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너 진짜 둘 다 잘 다룬다.” 아르셀리아가 그녀를 봤다. “나 안 따라와도 돼.” “왜? 재밌는데.” “구경하러 오는 거야?” “반은.” “나머지 반은.” 세레니스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초대 황금룡 이야기는 나도 확인하고 싶어.” 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붉은 마력이 공터 전체를 감쌌다. 뜨거운 바람이 폭발하듯 일었다. 아르셀리아의 몸이 빛 속에서 커졌다. 손가락은 거대한 발톱으로. 등에서는 붉은 날개가 펼쳐졌다. 적발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짙은 적색 비늘이 온몸을 뒤덮었다. 날개 안쪽으로는 금빛 균열 같은 무늬가 용암처럼 빛났다. 잠시 뒤. 화염궁 앞에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테리온은 검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매달린 채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왜.” 한참 뒤. 성검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아름답군요.』 아르셀리아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 봐?” 『제대로는 처음입니다.』 “어제는?” 『싸울 때는 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죽이러 왔다며.” 『저 말고 용사가요.』 “너도 명령 있었잖아.” 성검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다가 낮게 말했다. 『그래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르셀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뒤. 그녀의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콰아아앙―! 한 번의 날갯짓으로 뜨거운 바람이 산맥을 휩쓸었다. 그리고 네 존재는 황금령을 향해 날아올랐다. 황금령의 경계가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검붉은 바위와 용암으로 뒤덮였던 적염령과 달리, 황금령에는 거대한 흰 산맥과 황금빛 숲이 이어져 있었다. 나무의 잎은 실제 금속처럼 빛났고. 하늘에는 작은 빛 정령들이 별가루처럼 떠다녔다. 아르셀리아가 인간형으로 돌아온 것은 황금령 외곽에 도착한 뒤였다. 아스테리온도 다시 인간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몸을 되찾자마자 그가 휘청했다. 아르셀리아가 바로 팔을 잡았다. “왜 그래.”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평소보다 창백했다. 아르셀리아의 시선이 그의 목덜미로 향했다. 금빛 비늘. 화염궁에서 봤던 것보다 늘었다. 이제는 세 장. 아니. 다섯 장 정도가 목선을 따라 드러나 있었다. 세레니스가 먼저 알아차렸다. “저거.” 카르디안의 표정도 굳었다. “아침보다 많아졌군.” 아르셀리아가 아스테리온의 손목을 잡았다. 문양 역시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황금령 들어오니까 이래?” 아스테리온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카르디안이 주변을 살폈다. “용핵이 반응하는 거다.” “왜.” “여긴 골드 드래곤의 땅이니까.” 바로 그 순간. 황금령 깊은 곳에서. 쿵― 거대한 울림이 퍼졌다. 땅이 흔들린 것이 아니었다. 마력이. 공기 자체가 떨렸다. 아스테리온이 순간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스테리온!” 아르셀리아가 그를 잡았다. 그의 무릎이 꺾였다. 아르셀리아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받쳤다. 아스테리온의 이마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숨이 거칠었다. “야.” 아르셀리아가 얼굴을 들여다봤다. “나 봐.” 아스테리온이 힘겹게 눈을 떴다. 금빛 눈. 그런데. 동공이 달라져 있었다. 인간의 둥근 동공이 아니었다. 가늘고 긴. 드래곤의 동공. 세레니스가 숨을 삼켰다. 카르디안도 완전히 굳었다. 아르셀리아만 움직였다. 한 손으로 아스테리온의 얼굴을 잡았다. “정신 차려.” “아르……셀리아.” “응. 나 여기 있어.” 아스테리온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평소보다 훨씬 강했다. “목소리가.” “무슨 목소리.” “들립니다.” “뭐라고.” 아스테리온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금령 중앙. 거대한 황금산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돌아오라고.” 아르셀리아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누가.” 아스테리온의 입술이 떨렸다. “모르겠습니다.” 쿵― 다시. 황금령 전체가 울렸다. 아스테리온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목덜미에서 비늘이 더 번졌다. 쇄골까지. 손등에도. 황금빛 비늘이 하나씩 솟아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르셀리아의 손목 문양이 타오르듯 밝아졌다. 시야가 번쩍였다. 이번에는 네 사람 모두가 들었다. 황금령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아주 오래된 목소리. 『아스테르.』 아스테리온의 숨이 멎었다. 아르셀리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돌아왔구나.』 금빛 바람이 폭발했다. 촤아아아악―! 황금 숲 전체가 한꺼번에 몸을 숙였다. 마치. 누군가를 맞이하듯. 아스테리온은 창백한 얼굴로 그 풍경을 바라봤다. “저 목소리.” 그가 중얼거렸다. 아르셀리아가 옆에서 물었다. “알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스테리온의 손이 자신의 심장 위로 올라갔다. 쿵. 쿵. 이번에는 분명했다. 검의 안에서. 드래곤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아스테리온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왜.” 금빛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왜 이렇게.” 손끝이 떨렸다. “그리운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르셀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마력을 주기 위해서도. 계약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잡았다. 아스테리온은 한동안 황금령 깊은 곳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순간. 멀리 황금산 정상에서. 무언가가 눈을 떴다. 아주 거대하고. 오래된. 황금빛 눈동자가. 그리고. 같은 시각. 성왕국의 가장 깊은 지하.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울리지 않았던 종이. 스스로 울렸다. 댕― 신전의 지하 제단. 검은 석판 위로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 용살성검의 제1봉인 해제. 그리고 그 아래. 두 번째 문장이 나타났다. ― 황금의 심장, 귀환 확인. 흰 옷을 입은 노인이 석판을 내려다봤다.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찾았다.” 주변의 사제들이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천천히 웃었다. 기쁨이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기다린 것을 되찾은 사람의. 서늘한 웃음. “성검이.” 그가 낮게 말했다. “드래곤의 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회수 준비를 시작하라.” 잠깐의 침묵 뒤. “검도.”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검이 선택한 레드 드래곤도.”화염궁으로 돌아온 첫날 밤.아르셀리아는 자신의 침실 앞에서 두 남자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한 명은 검은 머리에 금빛 눈.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색만 놓고 보면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아스테리온은 아주 자연스럽게 침실 문 옆에 서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이 방을 사용하던 사람처럼 태연했다. 반면 카르디안은 팔짱을 낀 채 그런 아스테리온을 노골적으로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아르셀리아는.피곤했다.“왜 둘 다 여기 있어.”카르디안이 먼저 대답했다.“의회에서 정한 동행 감시.”“그래서.”“네가 자는 동안도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내가 잘 때까지?”“그래.”“안 돼.”“뭐가.”“귀찮아.”카르디안이 한숨을 쉬었다.“네 편의를 위해 온 게 아니다.”“그럼 누구 편의인데.”“칠색 의회.”“내 집이잖아.”“그러니까 더 문제다. 신전에서 이미 화염궁 위치와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그 말에는 아르셀리아도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자신은 화염궁의 결계를 믿었다.적염령에서도 가장 깊은 곳.용암 계곡과 붉은 절벽 사이에 숨겨진 궁전.허락받지 않은 인간이 들어오기 어려운 곳.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신전이 아스테리온의 위치를 감지했고, 황금령까지 추적대를 보내지 않았던가.그래도.“침실까지는 안 돼.”아르셀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카르디안이 눈썹을 올렸다.“왜.”“내 방이니까.”“저 검은 들어가면서.”아르셀리아가 즉시 옆을 봤다.아스테리온이 얌전히 서 있었다.너무 얌전해서 더 수상했다.“얘는.”아르셀리아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마력 때문에.”“손 잡고 충전하면 보물고에서도 버틴다며.”아스테리온이 아주 부드럽게 끼어들었다.“요즘은 균열 때문에 인간형 유지가 불안정합니다.”카르디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서 꼭 침실 안이어야 하나.”“주인님의 마력에 가장 가까운 곳이니까요.”“보물고가 더 가까울 수도 있지.”“침실이 더
칠색 의회의 불꽃이 가라앉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정확히는.아르셀리아의 불꽃이 아니라.회의장 안의 분위기가.“그러니까.”아르셀리아는 아직도 붉어진 귀 끝을 숨기지 못한 채 아스테리온을 노려봤다.“다시는 의회에서 그런 말 하지 마.”아스테리온은 매우 온순한 얼굴로 물었다.“어떤 말씀이요?”“키스.”“아.”“아, 하지 마.”“알겠습니다.”너무 순순하게 대답해서 오히려 수상했다.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진짜 알아들었어?”“예.”“다시는 안 해?”“의회에서는.”“아스테리온.”“예.”금빛 눈이 웃었다.아르셀리아가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한 대 치고 싶은데 아직 검신에 금이 가 있었다.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그게 더 짜증 났다.이제는 화를 내다가도 ‘얘 아프지’가 먼저 생각났다.“왜 한숨을 쉬십니까?”“너 때문에.”“그렇게 자주 저를 생각하십니까?”“진짜 검으로 만들어 버릴까.”“그건 원래도 가능합니다.”“…….”“다만 지금은 인간형이 더 좋습니다.”아르셀리아가 이를 악물었다.옆에서는 세레니스가 이미 웃다가 지친 얼굴로 의자에 기대 있었다.“둘이 정말 반려 아니야?”“아니야.”아르셀리아가 즉시 대답했다.“정말?”“응.”“그럼 하나만 물어보자.”“뭔데.”세레니스가 턱으로 둘의 손을 가리켰다.“그건 언제 놓을 거야?”아르셀리아가 내려다봤다.손.아직도 잡고 있었다.정확히는 아스테리온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얽혀 있었다.회의가 거의 끝나 가는 지금까지.한 번도 놓지 않았다.아르셀리아가 바로 손을 빼려 했다.그러자.아스테리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왜.”“아직 마력이 필요합니다.”“진짜?”“예.”아르셀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거짓말 아니고?”“확인해 보시겠습니까?”“어떻게.”“놓아 보시면 됩니다.”아르셀리아가 잠시 고민했다.그리고 손을 놓았다.하나.둘.셋.아스테리온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금빛으로 만들어
“시작됩니다.”에드릭의 말이 칠색 의회 한가운데 떨어졌다.그 한마디 뒤로 이상할 만큼 긴 정적이 이어졌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스테리온의 반환과 아르셀리아의 신전 출두를 두고 팽팽하게 갈리던 시선들이 이번에는 일제히 에드릭에게 모였다. 성왕국의 정식 사절로 들어온 용사가, 정작 자신을 보낸 신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했다.그것도.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말과 함께.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에드릭 옆에 서 있던 사제였다.“용사님.”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에드릭은 그를 보지 않았다.“알고 있습니다.”“성왕국의 공식 사절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그것도 압니다.”“그런데 왕국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을―”“왕국의 뜻입니까.”그제야 에드릭이 고개를 돌렸다.피로가 짙게 남은 얼굴.붕대 아래로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흐리지 않았다.“아니면 신전의 뜻입니까?”사제의 표정이 굳었다.에드릭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제가 알기로 성왕국 의회에서는 아직 드래곤 영토에 대한 공식적인 군사 행동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용사님.”“국왕 폐하의 친서도 없고.”“그만.”“대신관의 명령만 있지요.”낮게 깔린 마지막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바뀌었다.아르셀리아는 옆에 선 아스테리온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세하게 차가웠던 손끝이 지금은 완전히 멈춰 있었다.그도 에드릭의 말을 듣고 있었다.집중해서.아르셀리아는 조용히 물었다.“그게 다른 거야?”에드릭이 그녀를 봤다.“많이 다릅니다.”“인간들끼리는?”“성왕국이라 해도 왕과 신전은 하나가 아닙니다.”“신을 믿는 나라잖아.”“그렇다고 대신관이 왕인 건 아닙니다.”아르셀리아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전이 멋대로 한 거네.”“현재까지는.”에드릭이 대답했다.“그렇게 봐야 합니다.”사제가 결국 앞으로 나섰다.“용사 에드릭 벨로안.”호칭이 바뀌었다.조금
칠색 의회는 드래곤들조차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아르카디아의 일곱 영지가 맞닿는 중앙 산맥, 어느 색의 드래곤에게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 일곱 개의 거대한 첨탑이 원을 그리듯 세워져 있었고, 중앙에는 오래된 원형 궁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전 외벽에는 적색, 은색, 금색, 흑색, 청색, 녹색, 그리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백색의 마력석이 차례로 박혀 있었다.칠색 의회.드래곤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영지 간 분쟁을 조정하며, 인간 왕국과의 외교 문제를 논의하는 곳.아르셀리아는 그 앞에 도착하자마자 생각했다.귀찮다.아주 많이.“왜 그런 얼굴을 하십니까?”옆에서 아스테리온이 물었다.“돌아가고 싶어.”“아직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그래서 더.”아르셀리아는 원형 궁전 위로 떠 있는 일곱 개의 마력 고리를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이 장소에는 가까이 오지도 않는다. 칠색 의회의 소집장이 날아와도 웬만한 문제라면 대리인을 보내거나 아예 무시했다. 레드 드래곤 중에서도 아르셀리아 로하르트의 괴팍함은 제법 유명해서, 최근 백 년 사이에는 굳이 그녀를 부르지 않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져 있었다.그런 자신이.직접 왔다.그것도.아르셀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맞잡힌 손.자신의 왼손과.아스테리온의 오른손.아침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황금령에서 의회까지 이동하는 동안 아스테리온의 인간형이 두 번이나 흔들렸기 때문이다.아직 균열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직접 마력을 공급하면 인간형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고, 손을 잡는 방식이 가장 부담이 적었다.문제는.“또 봅니다.”아스테리온이 말했다.아르셀리아가 고개를 돌렸다.“뭘.”“손.”“확인한 거야.”“무엇을요?”“문양.”“분명 제 손을 보고 계셨는데요.”“문양도 손목에 있잖아.”“그러면 손목을 보셨어야죠.”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놓을까?”아스테리온이 손가락에 힘을 줬다.“그건 안 됩니다.”“그러니까 조용히 해.”“예.”그는 순순히 대답
황금령의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는 순간, 황금수 주변을 가득 메웠던 빛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르셀리아의 인간형 몸이 붉은 마력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커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했고, 목과 어깨를 타고 올라오던 붉은 비늘은 곧 전신을 뒤덮었다. 날개 안쪽의 금빛 균열이 용암처럼 번뜩이자, 황금령의 서늘했던 공기마저 단숨에 뜨거워졌다.곧 황금수 앞뜰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고개를 들었다.붉은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황금령을 둘러싼 하얀 빛기둥은 모두 열두 개.각각의 기둥을 중심으로 신성 문양이 땅을 타고 이어져 있었다. 위에서 보면 아마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인간 몇 명을 잡기 위한 마법진이 아니었다. 영지 하나를 봉쇄하고, 그 안에 있는 드래곤의 마력 자체를 억누르기 위한 규모였다.아르셀리아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다 코웃음을 쳤다.“제법 준비했네.”그 목소리가 인간의 말처럼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드래곤 특유의 마력이 섞인 음성이 황금령 전체를 울렸다.바닥이 떨렸다.멀리 진을 치고 있던 성기사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그런데도 퇴각하지 않았다.대신 가장 앞의 흰 망토를 걸친 남자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경고한다. 레드 드래곤 아르셀리아 로하르트. 즉시 인간형으로 돌아가 투항하라.』아르셀리아의 거대한 머리가 조금 기울었다.“싫어.”너무 간단한 대답이었다.남자의 얼굴이 멀리서도 굳는 것이 느껴졌다.『당신은 현재 성왕국의 신성 유물을 불법 점유하고―』“그거 말인데.”아르셀리아가 말을 끊었다.“계속 내 거 불법 점유라고 하잖아.”『성검 아스테리온은 성왕국이 수백 년간 보관해 온―』“그래서?”『……뭐라?』“보관했다고 네 거야?”붉은 눈이 가늘어졌다.“훔쳐다가 천 년 갖고 있었다고 주인이 바뀌나?”뒤쪽에 있던 세레니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카르디안은 웃지 않았다. 대신 이미 검은 마력을 손끝에 모으고 있었다.에르하르트 역시
검은 빛이 터진 직후.아르셀리아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태양이 꺼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검은 장막이 황금수의 기록실을 집어삼켰고, 몸을 짓누르는 낯선 힘이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올라왔다.차갑다.신성력도 아니고.드래곤의 마력도 아니다.오히려 둘을 억지로 끊어 놓으려는 힘에 가까웠다.아르셀리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아스테리온과 연결된 무언가가.자신을 떼어 내려고 한다.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싫어.”누구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하지만 대답은 즉시 돌아왔다.『계약자와 개체 간 연결을 차단합니다.』낯선 목소리.아스테리온의 안쪽에서 흘러나오던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사람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명령 그 자체.아르셀리아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검날을 더 단단히 잡았다.손바닥이 다시 깊게 베였다.따뜻한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아르셀리아!”카르디안이 그녀의 팔을 잡으려 했다.“손 놔! 검이 이미―”“건드리지 마.”목소리가 낮았다.카르디안의 손이 멈췄다.아르셀리아의 주변에서 붉은 불꽃이 천천히 피어올랐다.폭발하지 않았다.오히려 너무 조용했다.그래서 더 위험했다.불꽃은 그녀의 발끝에서 손목을 타고 올라가 검신을 감쌌다.아스테리온의 금빛과.아르셀리아의 붉은빛.두 색이 검은 장막 안에서 서로를 찾아 얽혔다.『차단 실패.』목소리가 울렸다.『계약자 마력 저항 확인.』아르셀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계약자.”피 묻은 입술 끝이 아주 조금 비틀렸다.“누구 마음대로.”『……』“내가 언제 너희랑 계약했는데.”대답은 없었다.“아스테리온.”그녀가 검을 바라봤다.아직 남자 형태였다.한쪽 팔만 검날로 변한 채.금빛 눈에는 다시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하지만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의 시선은 오직 하나에만 고정돼 있었다.아르셀리아의 손.피.자신의 검날 위에 흐르는.그녀의 피.“손.”아스테리온이 쉰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