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뭐라도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지만 오히려 안 하는 게 나았을 말을 하고 말았다.“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엔 모르죠.”그러자 용진표가 크게 웃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용은서도 그를 따라 해맑게 웃었다.“아빠, 언니는 좋은 사람이에요! 언니가 은서랑 놀아줬어요!”이 아이는 사람 마음을 녹이는 데에 정말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용은서의 엄마는 얼굴이 점점 굳어가며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아마 내가 용진표의 새로운 관심사라도 되는 줄 오해한 모양이었다.“좋아. 은서가 놀고 싶으면 이 언니랑 같이 놀아.”용진표는 마치 내가 이미 그의 사람이라도 되는 듯 당연하게 말했다.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이 앞이라 그의 말을 대놓고 부정할 수도 없어서 그냥 흘려듣기로 했다.그는 용은서를 품에 안고 내 앞으로 걸어왔다.“시간 있을 때 우리 딸이랑 놀아줄 수 있겠어? 네가 원하는 대로 돈은 얼마든지 줄게.”정말 진지하게 나를 아이의 놀이 친구로 고용하려는 건가?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한가하고 돈이 많다고 생각하나 싶었다.하지만 아이 앞에서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면 그의 체면도 상하고 용은서도 상처를 받을 테니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농담이죠, 대표님. 은서랑 노는 건 기쁜 일이지만 돈은 필요 없어요.”용진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용은서의 엄마를 돌아봤다.“연락처 받아둬. 은서가 놀고 싶으면 데리고 갈 수 있게.”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당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아시다니, 정말 놀랍네요.”그녀의 목소리는 질투가 가득했다. 용진표는 그녀를 무시하며 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자, 오늘 아빠랑 약속했던 대로 호주산 대하 먹으러 가자.”그는 딸을 한 번 더 품에 안고 입을 맞췄다. 그의 딸에 대한 애정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넘쳐났다.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용준호가 떠올랐다. 자기보다 훨씬 어린 여동생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게다가 새엄마가 자기 또래라면... 정말
삼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순간 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삼촌, 삼촌!”그제야 삼촌이 무겁게 숨을 들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몽롱했고 숨을 고르며 힘겹게 말했다.“지원아, 방금 정말 다시 못 깨어날 뻔했어.”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제가 의사 선생님을 불러올게요!”그러나 삼촌은 내 손목을 잡으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너무 호들갑 떨지 마. 이런 거 처음도 아니야. 그냥 가위눌린 거야.”'가위눌림?' 전에 농담처럼 들었던 말이었지만 지금처럼 아프신 상태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단순히 가위눌림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새로운 병의 징조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삼촌, 그래도 의사를 한번 불러야 해요. 너무 걱정돼요.”나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고 결국 삼촌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의사가 와서 기초적인 검사를 한 뒤 말했다.“특별한 문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방금은 깊은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기 어려웠던 상황 같습니다.”삼촌은 내가 과장한다고 하며 웃음을 지었다.“거봐라, 별일 아니랬잖아.”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차마 그에게 걱정을 드러낼 수 없어 태연한 척하면서 말했다.“그래도 조심하셔야죠. 그렇게 괜찮다고만 하시다가 이렇게 병원에 계신 거잖아요.”삼촌은 담담하게 말했다.“나이가 들면 몸의 ‘부속품’들이 고장이 나는 거야. 수리받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그의 여유로운 태도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삼촌은 언제나 여유롭고 듬직한 모습이었지만 아픈 몸을 누르며 버티고 있을 그의 속내가 느껴졌다.“삼촌, 이제는 좀 내려놓으셔야 해요. 자식들 일도, 세상일도. 그냥 신경 끊으시고 편히 쉬세요.”그리고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저랑 강유형 문제도요. 유형이가 누굴 선택하든 삼촌과 아줌마는 신경 쓰지 마세요.”삼촌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 속에서 마음 한구석에 담아둔 고집이 느껴
삼촌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아버지가 딸을 볼 때처럼 따뜻한 시선이었다.“지원아, 삼촌 눈엔 넌 언제나 어린아이 같아. 하지만 하나만 말하자면, 네 고집과 진지함이 일이 아니라 일상에서는 꼭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어.”삼촌의 말이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마다 지키고 싶은 고집과 성격이 있는 법. 쉽게 바뀔 수 없는 본성을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지원아, 살다가 말이야. 조금은 모른 척하는 게 더 행복할 때가 있어. 모든 걸 다 밝혀내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해.”그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다.삼촌이 아프단 사실이 떠올라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삼촌.”“지원아.”삼촌이 내 이름을 불렀다.“네?”그는 잠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뭔데요? 분명히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죠?”삼촌이 말하려다 망설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넌 정말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구나.”“그럼요! 삼촌, 혹시 비밀이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아줌마나 진혁 오빠한테도 말 못 할 일이면 저한테 털어놓으셔도 돼요. 비밀은 꼭 지킬게요!”내가 손을 들며 장난스럽게 약속하자, 삼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내가 무슨 비밀이 있겠니?”나는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졌다.“예를 들어 삼촌이 밖에 다른 여자를 두고 아이까지 낳으셨다든가?”“헛!”삼촌은 깜짝 놀라 헛기침을 했다.“지원아, 그런 소리 하지 마! 삼촌은 절대 그런 사람 아니야.”“정말 없으세요?”나는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정말 없다니까!”그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그렇지만 삼촌 친구 중엔 그런 분 있잖아요. 그래서 좀 걱정돼서요. 혹시라도...”내 말에 삼촌은 잠시 멈칫했다.나는 더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아까 정원에서 용진표 씨 딸이랑 잠깐 놀았어요. 그 아이 정말 귀엽더라고요.”삼촌은 한숨
“청수원 아파트 재개발 사무소입니다. 이전에 재개발 공고가 붙었었죠? 아직 서류가 마무리되지 않았어요. 지금 와서 처리해 주셔야 합니다. 지원 씨만 남았어요.”이 말에 내 기분은 더더욱 가라앉았다. 재개발 서류를 처리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일부러 미뤄왔다.나에게 있어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면 그곳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곳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부모님과의 추억이 담긴 우리 집도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언제까지나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고 서명해야 했다.내가 고집을 부리는 마지막 사람이 된다면 재개발 전체가 지연되고 다른 사람들이 새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될 테니까.그곳은 오래되고 낡은 동네였다. 모두가 새 아파트로 가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네, 지금 바로 갈게요.”나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차를 몰고 재개발 사무소로 향했다.사무소에서 요구하는 대로 서류에 서명을 했지만 문제는 내 집의 등기 명의가 부모님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처리하려면 부모님의 사망 증명서와 화장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이 절차가 정당한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일이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주민등록등본을 취소하지 않고 있었다.세 사람의 이름이 같은 종이에 적혀 있으면 마치 부모님이 여전히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그런데 이제 그들의 이름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야 한다니. 그건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잔인한 일이었다.그러나 아무리 괴롭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관할 주민센터를 찾아가 부모님 주민등록등본 취소를 요청했다. 하지만 담당자는 사망 증명서와 함께 해당 센터에서 발급한 사고사 보고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하는 수 없이, 다시 교통사고 자료를 조회했던 부서로 발길을 돌렸다. 이번엔 지난번처럼 까다로운 절차 없이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다.그런데 담당 직원이 내게 물었다.“사고가
부모님의 교통사고가 벌써 10년도 더 지났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지금 와서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그러자 담당자가 대답했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드릴 수 있게요."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사고인데 무슨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의 요청대로 연락처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사망 확인서를 들고나왔지만 아직 화장 증명서가 필요했다. 이것은 삼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삼촌은 몸이 아프니, 대신 아줌마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지원아, 어떻게 온 거니?” 아줌마는 내가 방문한 것을 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아줌마,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우리 안으로 들어가 얘기할까요?” 나는 최근 계속된 바쁜 일정 때문인지 몸이 무겁고 어지러운 느낌까지 들었다.“그래, 그런데 방 안은 좀 답답하니까 정자로 가서 얘기하자.” 아줌마는 내 팔을 살짝 붙잡고 정자로 안내하고 장 집사를 불러 말했다.“장 집사, 과일과 내가 끓인 호박죽을 정자로 가져다주세요.”장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간 뒤, 아줌마는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지원아, 얼굴이 안 좋아 보여. 어디 아파?”“생리 중이라 조금 힘들어서요.”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생리통 있어? 마침 호박죽이 몸을 데워 줄 거야. 설탕 조금 넣어서 줄게.” 아줌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지원아, 잠깐만 기다려.”나는 조급한 마음에 아줌마를 붙잡았다.“아줌마, 오늘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빨리 말씀드리고 가려고요.”아줌마는 잠시 멈칫하더니, 내가 가방에서 꺼낸 사망 확인서를 보며 말했다.“이게 뭐야?”“아줌마, 부모님 주민등록을 말소해야 해서요. 화장 증명서가 필요해요.”“말소?” 아줌마는 놀란 얼굴을 했지만 곧 표정이 바뀌었다. 나는 시선을 떨구며 손에 든 사망 확인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우리 부모님 집이 재개발 대상이 됐어요. 이 서류들을 다 처리해야 제가 서명할 수 있거든요.”그녀는 내 손을 꼭
나는 숨을 죽였다.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줌마, 여기 계속 있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유형이를 만나고 싶을 뿐이에요. 만나게 해주시면 바로 떠날게요. 귀찮게 할 생각 없어요.”조나연이었다. 그녀가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강유형을 만나기 위해 집안까지 온 모양이었다.이전엔 강유형과 통화했을 때, 이미 조나연과 연락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내가 완전히 착각했던 것 같다.이 여자의 뻔뻔함에는 정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대체 어떤 배짱으로 이 집까지 찾아왔을까?“네 말은 내가 유형이를 숨겼다는 거야?” 아줌마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아니에요, 그런 의도는 없어요. 그저 유형이를 보고 싶을 뿐이에요.”조나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처음 그녀를 봤을 땐 정말 순수하고 청초한 느낌이라, 세상이 더 깨끗해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고 그 첫인상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유형이는 여기 없어. 이미 여러 번 얘기했잖아.” 아줌마는 점점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알아요, 여기 없다는 건.”조나연은 여전히 태연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그녀의 태도에 더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내가 유형이를 숨겼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조나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 태도가 아줌마의 화를 더 부추겼다.“하,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지원이가 너한테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우리 아들이 지원이 같은 착한 애를 놔두고 너 같은 여자를 택한 이유도 말이야.”아줌마의 말은 독설에 가까웠다. 조나연을 깎아내리면서도 나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며, 강유형과 나의 실패한 관계를 꼬집는 말이었다.“아줌마, 오늘 저를 욕하시든 때리시든 다 받아들일게요. 대신 유형이만 만나게 해주세요.”조나연은 눈물까지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며, 나는 이 여자가 얼마나 교활한 사람인
나는 그녀가 절대 약을 마시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한 행동은 모두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병원에서 그렇게 큰 망신을 당하고도 자존심 하나로 버틴 그녀가 지금 와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리 없었다.이건 단지 강유형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강 아줌마를 협박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녀는 강유형이 삼촌과 아줌마에게 숨겨져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나연 씨, 이런 수단으로 아줌마를 협박하다니.” 나는 차갑게 웃으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내 목소리에 아줌마가 급히 고개를 돌리며 나를 보았다. 얼굴에는 분명한 당황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내가 조나연을 오해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반면 조나연은 그다지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아마 내가 들어오는 것을 미리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떨리는 걸 보니 내 존재가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음은 확실했다.조나연은 이내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연락도 안 되고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잖아요. 지금 저는 막다른 길에 몰렸어요. 지원 씨.”그녀는 또다시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연기는 나에게 통하지 않았다.나는 그녀가 든 초록색 약병을 가리키며 말했다.“길이 없긴요. 나연 씨 손에 들린 게 바로 그 길 아닌가요?”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그녀가 약병을 정말로 마실 의도가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이 더 떨렸다. 예상대로였고 이건 단지 협박이었다.“지원 씨, 당신은 내가 죽길 바라는 거겠죠? 하지만 내가 죽으려면 적어도 유형이가 나와서 한마디라도 해줘야 해요.”조나연은 끝까지 강유형을 보겠다는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가야죠. 여기 와서 이러는 게 아니라.”나는 그녀 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봤다.내가 서 있고 그녀가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녀는 나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 눈빛엔 겁과 억지가 섞여 있었다.“찾을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조나연
내 몸이 잠시 비틀거렸고 아줌마가 황급히 나를 붙잡아 주었다. 감정이 북받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조나연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내가 방금 한 말이 정말 맞았던 걸까?사실 방금 했던 말은 단지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임석진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계획적으로 그 일을 벌인 것이라면, 이 여자는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생각해 보니 임석진 부모님이 그녀를 그렇게 심하게 욕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당신은 지금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어요.”나는 그녀를 더 몰아붙이며 말했다. 지금이 그녀의 실체를 완전히 드러낼 기회였다.조나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정하려 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임석진이 당신이 원하는 부와 명예를 이루는 데 장애물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그를 없애야만 당신이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한 거죠.”“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조나연은 고함을 질렀다.나는 차갑게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그렇지만 당신이 바로 나서면 모든 게 들통날 테니, 교묘하게 일을 꾸몄겠죠. 임석진이 당신의 행동을 목격하도록 의도적으로 상황을 만들었고 그렇게 하면 그의 죽음이 강유형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거라 믿었겠네요. 당신 계획대로라면 강유형은 당신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했을 테니까.”“아니라고 했잖아!”조나연은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임석진이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죠. 하지만 죽었네요.”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반응은 그녀가 임석진의 죽음을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그 사고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나는 그녀의 불룩한 배를 쳐다보며 덧붙였다.“그리고 임석진의 아이를 가질 줄은 더더욱 몰랐겠죠?”조나연은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는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 역력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진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