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으니 내가 휴가를 너무 오래 썼나 싶었다.어젯밤까지만 해도 허진호가 이렇게까지 내 출근을 관대하게 봐주는 이유가 진정우가 그의 뒤에 있는 대주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내심 어색함을 느끼며 허진호에게 대답했다.“혹시 고객이신가요? 지금 바로...”“고객이 아니라 여자입니다. 화려하게 꾸미고 마치 아내가 첩을 잡으러 온 것처럼 기세가 대단하더군요.”허진호는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말을 이어갔다.“윤 부장님, 제가 부장님과 정우 씨의 관계를 아는 만큼 오해는 없어요. 그냥 혹시 엮이신 분이 있나 해서 미리 알려드리는 겁니다.”순간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며 물었다.“그 여자의 이름은요?”“이름은 모르겠고 성이 함씨라고 하더군요. 근데 딱 봐도 꽤 까다로운 사람 같았어요.”허진호는 마치 그 여자의 분위기에 기가 눌린 듯했다.‘함씨?’아무리 생각해도 ‘함씨 성을 가진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하지만 꺼림칙한 일을 하지 않았기에 불안감은 없었다. 나는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저 지금 병원이에요. 그분이 정말 저를 만나고 싶다면 병원으로 오라고 하세요.”“네?”허진호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만약 오기 싫다면 그냥 알아서 돌아가게 하세요.”머릿속으로 허진호가 당황하는 모습이 그려졌다.“그건 좀 그렇지 않나요?”나는 웃으며 말했다.“허 대표님께서 그 여자를 잘 모시고 싶으시면 마음껏 하셔도 돼요. 저는 오늘 회사에 못 갈 것 같네요. 내일 출근할게요.”진소영이 곧 수술을 앞두고 있어 내가 있어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검사나 준비는 진정우가 곁에서 충분히 도울 수 있을 테니까.“서두르지 않으셔도 돼요. 가족 먼저 챙기세요. 회사엔 별일 없어요. 게다가 마케팅팀 직원들이 워낙 잘해서 윤 부장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문제없습니다.”허진호는 내게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정말요? 그렇다면 제가 굳이 필요 없겠네요. 부장 자리 없어도 되지 않을까요?”나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그건 안
문뜩 그녀가 떠올라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가 맞구나.’함소은은 내가 병원 앞에서 햇볕을 쬐고 있을 때 나타났다. 명품으로 치장한 그녀는 나를 도도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윤지원 씨, 당신이 그렇게 잘났나 봐요? 내가 직접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잘못 알고 계시네요. 제가 오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요. 직접 오신 거잖아요.”함소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그럼 내가 왜 온 건지는 알겠지?”그녀가 서 있는 바람에 내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의 볼륨감 넘치는 몸매는 내가 봐도 눈길을 끌었다.이런 모습이라면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봐도 매력적이라고 느낄 만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글쎄요. 설마 딸이랑 놀아달라는 부탁이라도 하려는 건가요?”솔직히 말해, 그녀와 내가 대화할 이유는 딸 때문이었다. 예전에 그의 딸과 처음 만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용진표도 있었다.“착한 척은 다 하네요.”함소은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제가 뭘 어쨌다고요? 착한 척?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리지널이예요. 당신과 달리.”그녀의 몸매는 너무나도 완벽해 보였고 솔직히 말하면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내가 부러워서 그러는 거죠. 하지만 말해두는데 난 전부 자연 그대로예요. 믿지 못하겠으면 검사라도 해볼래요?”그녀의 대답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외모와 몸매는 흠잡을 데 없었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의 사고 방식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사실 그녀의 상황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현실적이었다면 용진표 같은 남자와 함께하며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을 테니까.나는 더 이상 그녀와 말다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장난스러운 태도를 접고 차분하게 물었다.“그래서, 저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당신이 더 잘 알 텐데.”함소은의 목소리는 여전히 화가 가득 담겨
함소은의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그리고 나는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지 느껴졌다. 아니었다면 한순간에는 나에게 소리를 높이다가 갑자기 친구가 되고 싶다며 손을 내밀었을 리가 없었다.“저는 친구가 거의 없어요. 진표 씨가 절대 친구 사귀지 말라고 해서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진표 씨는 지원 씨를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지원 씨랑 친구가 되고 싶어요. 그러면 진표 씨도 괜찮다고 할 거예요.”함소은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지원 씨, 정말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친구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 아이도 지원 씨를 정말 좋아하잖아요. 며칠 전에도 지원 씨 얘기를 몇 번이나 했다고요.”그녀는 딸 이야기를 꺼내며 간절함을 더했다.“제가 별로인 건 알지만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저랑 친구가 되어줄 수 없나요?”함소은은 더 이상 처음의 거만한 태도도 뻔뻔함도 없었고 오히려 불쌍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죄송하지만 제가 좀 바빠서요.”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녀와 엮이는 건 딱 봐도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특히 용진표 같은 사람과 관련된 일에 휘말리는 건 정말 좋을 게 없어서 피하고 싶었다.함소은의 눈빛 속의 기대감은 꺼진 촛불처럼 확 사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비웃는 듯 웃었다.“알아요. 저 같은 사람은 지원 씨 같은 분과 어울리지 않겠죠.”그녀의 말에는 자기 비하가 담겨 있었고 그걸 통해 나의 동정을 사려는 듯했다. 나에게 그런 수단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쉽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다.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걸어갔다. 거리를 두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내 등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해가 질 무렵 아줌마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지원아, 그 녀석 돌아온 거 알고 있니?”나는 전날 밤, 차 안에서 본 익숙한 실루엣이 떠올랐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네. 알아요.”“그럼 그 녀석이 너를 찾아갔어?”그날 밤은 나를 찾은 게 아니라 단순히 우연히 마주친 정도
수술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진정우의 손을 꼭 잡았다. 그에게 아무 말 없이 힘이 되길 바랐다.구안석이 말하기를 이 수술은 최소 여섯 시간 이상 걸린다고 했다. 세 시간이 지나자 진정우가 갑자기 코피를 흘렸다.긴장감이 극에 달한 탓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진소영이라는 동생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달았다.“물 좀 가져올게.”우리는 이 시간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전날 밤 진소영이 금식 중이었기에 진정우도 그녀와 함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난 괜찮아. 너나 가서 잠깐 쉬어. 나중에 다시 와.”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먼저 챙기려 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병원 매점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수술실 복도에 기대 서 있는 소지훈을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나는 이틀 전 병실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희연이 이미 세상을 떠났을 텐데 소지훈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혹시 또 다른 가족이 수술 중인 걸까? 아니면 유희연에게 기적이라도 일어난 걸까?기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지훈 씨.”그는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스친 불안감은 사라졌지만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야위어 있었다.“지원 씨...”“여긴 왜 왔어요? 혹시 누가 수술 중이에요?”그는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피로와 슬픔이 뒤섞인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유희연 씨인가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거예요?”그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끝났어요.”비록 기적을 바라고 있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소지훈은 고개를 숙이며 낮게 말했다.“지원 씨를 기다렸어요.”“저를요? 왜요?”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냥... 지원 씨를 보고 싶어서요.”나는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를 통해 유희연을 떠올리려는 것이 분명했다.“지훈 씨,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요
“환자 가족분 계셔요?”진정우가 막 물병을 열어 한 모금을 마시던 중, 수술실 문이 급히 열리며 소희연이 바쁘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오늘 구안석을 보조하며 수술에 참여하고 있었다.“접니다!”진정우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가 서두르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몸이 잠시 흔들렸다.나는 그의 팔을 부축하며 소희연 앞으로 다가갔다.“소희연 씨, 무슨 일이죠?”소희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수술 중 환자에게 심각한 출혈이 발생했습니다. 심리적으로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건 동의서입니다.”그녀의 말에 진정우와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상황이 아주 위험한가요? 지금은 어떻게 되고 있죠?”때마침 안리영이 수술 가운 차림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오늘 수술 일정이 없었지만 동료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대신 투입되었던 상황이었다.“현재 계속 수혈 중이고 출혈 부위를 찾는 중입니다.”소희연은 의학적 상황 설명을 덧붙이며 동의서를 내밀었다.진정우는 손을 뻗지도 못한 채 멈칫하며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리영을 바라봤다.그녀가 눈빛으로 나에게 동의서를 받으라고 신호를 보냈다.내가 손을 내밀려는 찰나 진정우가 먼저 동의서를 받았다. 그의 손은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수술 중 이런 일이 흔히 있나요?”그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 교수님과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빨리 동의서에 서명해 주세요.”소희연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진지했다.나는 진정우의 손을 꼭 쥐고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와 눈을 마주친 후, 그는 빠르게 서명했다.“수고 부탁드립니다.”소희연이 돌아서려 할 때, 안리영이 대신 감사 인사를 건넸다.“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희연 선생님.”소희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안리영이 우리를 다독였다.“이건 절차일 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 구안석 교수님을 믿어보자.”하지만 진정우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는 듯
진정우에게 기대어 있던 순간, 소희연의 굳은 표정과 꽉 쥔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그 표정에는 분명히 질투가 가득했다.나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지며 무심코 그녀를 불렀다.“소 교수님.”그러자 소희연은 안리영과 구안석을 바라보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내가 묻기도 전에 그녀는 냉정한 말투로 말했다.“환자는 30분 후에 관찰실로 옮겨질 예정입니다.”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 뒷모습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뚜렷하게 묻어 있었다.나는 진정우를 살짝 건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질투하나 봐.”진정우는 동생의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덕에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내 손을 꼭 잡았다.“그래. 구 교수님이 잘하셨네.”어?나는 놀란 눈으로 여전히 안리영을 안고 있는 구안석을 보다가 다시 진정우를 바라봤다.진정우는 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구안석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안리영을 껴안은 것은 단순히 그녀를 사랑해서만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며 안리영에게 안심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진정우의 말을 듣고 나니 역시 남자는 남자를 더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구안석은 그제야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수술 중 환자가 과다 출혈이 있었고 거의 전신 수혈 두 번에 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관찰실에서 상태를 지켜볼 겁니다. 이식 후 78시간이 가장 중요한 거 아시죠? 간호사가 계속 관찰하면서 이상이 생기면 바로 대처해야 합니다.”그의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태도에 우리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만약 거부반응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요?”나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물었다.“대응 방안은 충분히 준비돼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구안석은 침착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그의 말에 진정우도 마음이 한결 놓였는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구안석은 미소를 지으며 안리영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안리영 선생님 친구들이라면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
진소영은 3일 후에 관찰실을 나왔다.다행히도 거부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고 몸 상태도 아주 좋아서 구안석의 예상을 뛰어넘는 회복 속도를 보였다.“보아하니 다른 사람의 심장이 아주 잘 맞나 봐.”안리영도 감탄하며 말했다.나는 꽃다발을 들고 가며 살짝 농담처럼 말했다.“아마도 심장 주인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안리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기증자의 정보를 알 수 있어?”안리영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단호히 말했다.“몰라. 그런 건 철저히 비밀로 하니까.”사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냥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니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준 그 숭고함이 경이로웠다.그때, 관찰실 문이 열리고 진소영이 밖으로 나왔다.3일 동안 우리가 종종 그녀를 보러 갔었지만 이번은 특별한 순간이었다.그 문은 진소영에게 다시 태어나는 문이었다.그 문을 통해 그녀는 새로운 건강한 삶으로 나아갔다.“오빠! 언니! 리영 언니!”진소영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마치 돌고래의 울음소리 같았다.진정우는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며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나는 꽃다발을 건네며 그녀를 안아주었다.“새로운 삶을 시작한 걸 축하해!”안리영도 손을 내밀어 그녀와 악수하며 말했다.“좋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진소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흘렸다.수술 때조차 울지 않았던 그녀가 새 삶을 맞이한 이 순간 눈물을 흘린 것이다.그녀의 눈물은 마치 새 생명이 세상에 첫울음을 터뜨리며 인사하는 것 같았다.수술 후 2주가 지나고, 마침내 놀이공원이 개장할 준비를 마쳤다.그 소식은 강진혁을 통해 들었다.“지원아, 개장식에 와줄 거지?”강진혁이 물었다.나는 이미 결정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네. 갈게요.”이번 개장은 나에게도 중요한 의미였다.강유형과 KS 그룹과의 마지막 이별을 그리고 나의 과거와의 작별을 의미했다.그리고 난 단지 앞만 보고 달리고 과거에 다시는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혹시 강유형도 오나요?”나는
진소영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회복 과정에서 여전히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가능성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손길이 필요한 상태였다.진정우는 낮에는 간병인을 고용했지만 밤이 되면 직접 병원에 가서 동생을 챙겼다.그래서 요즘 우리 둘이 함께 보내는 시간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낮에는 각자 일 때문에 바쁘기도 했다.“시간 있어?”내가 신지태 오빠의 경기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을 때 진정우가 의외로 대답했다.“있어.”그의 대답에 나는 의아하면서도 기뻤다.“근데 소영이는...”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진정우는 단호히 말을 잘랐다.“내가 알아서 할게.”그의 확신에 찬 말에 나는 마음이 든든해졌다.“너랑 제대로 데이트를 못 한 지 너무 오래됐잖아.”그가 이마를 내 이마에 맞대며 속삭이자 나는 마음이 찡해졌다.맞다.요즘 그는 동생을 돌보느라 바빴기에 자연스레 나와 있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물론 내가 이것을 가지고 질투를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지태 오빠의 경기는 풍진에서 열렸다.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든 픽업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둘 다 의아해하며 물었고 기사는 지태 오빠가 직접 준비했다고 설명했다.“와, 진짜 세심하네. 오길 잘했어. 안 그랬으면 이렇게 정성껏 준비한 걸 헛되게 할 뻔했잖아.”나는 그의 배려에 감탄하며 말했다.게다가 같은 비행기를 탄 승객 중 상당수가 지태 오빠의 팬이었다.나는 그제야 그의 인기가 이렇게 많다는 걸 실감했다.아직 경기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팬들의 뜨거운 열정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지태 오빠가 이렇게 인기 많을 줄은 몰랐네. 그냥 당구장 관장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말이야.”나는 감탄하며 말했고 진정우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하지만 나는 그의 조용한 성격을 알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는 지태 오빠와 친한 사이도 아니니 굳이 흥미를 보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나
조시언은 아예 강진혁과 정면으로 맞붙을 작정으로 보였다.강진혁은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일이 끈질기게 따라붙는다면 그도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이 강진혁의 영역에서 이토록 기세등등한 걸 보면 분명 무언가 대비책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조시언이 귀국한 지는 겨우 몇 달 남짓한데 어떤 수를 숨기고 있는지, 무슨 힘이 있는지 궁금했다.잠시 혼란스러웠다. 강진혁은 조시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고 귀국한 후에도 특별히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강진혁은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그런데 그가 이렇게 자기 발목을 잡는 존재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강진혁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 별의별 인간들을 다 상대해 봤고 그런 그에게 이름도 낯선 조시언 따위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파도를 일으키기는커녕 물결 하나 일렁이기도 어려운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조시언 씨께서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추시겠다고 하시니 그럼 이 자리에서 내일 장례식까지 천천히 기다리시죠.”말을 마친 그는 손을 살짝 내저었다.그 즉시 출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고는 조시언 쪽 사람들과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나도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게 끌려 나와 강유형의 뒤에 숨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기 어려운 처지였다.나는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키 차이가 이렇게나 많이 났다는 것을 말이다. 널찍한 등 너머의 세상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듬직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는 늘 이정도 키 차이를 유지했었던 것 같다. 그는 늘 이렇게 내 위를 지키고 있었다.학창 시절에 나는 어떤 불량 학생의 고백을 거절해 골목길에서 애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할 뻔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도 강유형이 나타나 나를 자기 뒤로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녀석들과 맞붙
“안리영 씨가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조시언 씨가 직접 오셨으니 이제 그쪽 사람 데리고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강진혁의 말투엔 조시언이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속내가 담겨 있었다.조시언의 맑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은 우리 조씨 가문을 우습게 보시는 모양이네요. 사람을 붙잡았다 풀었다, 본인 마음대로 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강진혁도 알고 있었다. 조시언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안리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서로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며 겉치레투성이인 말만 주고받는 것도 결국엔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계산에서였다.하지만 지금 보니 조시언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리고 지금 강진혁의 입지는 예전만 못했다. 용준호와의 협력도 끊겼고 강유형과도 더 이상 같은 편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혼자 싸우는 상황이었다.그러니 적이 하나라도 줄면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줄어들 터였다.“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내가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겁니까?”강진혁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그러자 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안리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건 저한테 물을 일이 아니죠. 얘한테 물어보셔야죠.”강진혁의 턱 근육이 일렁였다. 명백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강진혁더러 안리영에게 사과하라고 한 건 사과를 원하는 게 아니라 그의 자존심을 짓밟으려는 의도였다.그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조시언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오랫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터지려 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조시언 씨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라 우리 강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려는 거군요?”강진혁은 노골적으로 말을 꺼냈다.조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럴 생각은 없습니다.”“없으면 그만 가시죠.”강진혁은 대놓고 내쫓는 듯한 말을 뱉었다.조시언은 바지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꺼내곤 안리영을 바라보았다.“리영아, 가자.”하지만 안리영은 곁에 있는 친구를 두고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소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부터 그와 함께 끝장을 볼 각오를 했다.강진혁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함께 파멸로 끌고 갈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지원아.”강유형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무모하게 나서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그가 두려워한 건 내가 강진혁을 해칠까 봐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하지만 내 위협은 강진혁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우리를 깔보듯 훑어보며 한심한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럴 만도 했다. 강유형은 그에게 당해 지금 몸조차 가누지 못했고 가사도우미는 나이가 지긋했다. 게다가 나는 임신 중인 몸이었다. 그러니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윤지원, 사람은 눈치를 살필 줄 알아야 해. 지금 상황을 봐, 내 편에 서는 것만이 네가 살 길이야. 너도 네 아이가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가길 바라진 않을 거 아니야.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길 원하니?”“진정우가 준 물건만 내놓으면 너희 세 식구를 무사히 지켜줄게. 게다가 부귀영화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지. 그때 가서 계속 여기에서 살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 마음대로 해도 좋아.”이런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나를 유혹하려 들었다.“강진혁, 그렇게는 안 돼. 그런 식으로 살다간 나중에 내 아이 앞에서 고개도 들 수 없을 거야. 만약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희생으로, 더러운 거래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그 말을 내뱉는 순간 아랫배가 꿈틀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한 달을 채운 아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생각해 보면 이 아이의 존재는 하늘이 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진정우가 배성재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왔던 그날,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생겨난 기적이었다.강진혁은 코웃음을 쳤다.“그래? 그렇다면 더 할 말은 없군.”그 말과
이 차는 강씨 가문의 아름다웠던 기억인 동시에 강진혁이 부모님과 강유형을 원망하기 시작한 사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강유형을 이곳에 가둬뒀을 거라 확신했다.나는 곧장 그 차를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차 문 가장자리의 먼지가 문질러져 벗겨진 흔적이 보였다.내 예상이 적중했다.“강유형.”나는 그를 부르며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나는 손으로 유리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뒷좌석에 누워 있는 강유형이 보였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강유형, 강유형...” 나는 다급히 그를 불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듯했다.어떻게 강유형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강진혁은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한 셈으로 보였다.이제 와서 열쇠를 찾으러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고 구석에 놓인 소화기를 발견했다. 곧장 달려가 그것을 들고 차 유리에 힘껏 내리쳤다.차 유리의 강도를 너무 얕본 탓일까, 두 번을 내리쳤는데도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내리칠 수도 없었다. 내 뱃속의 아기는 작은 충격에도 버티기 힘들 테니 말이다.“지원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집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제가 할게요.”그녀는 내 손에서 소화기를 받아 들고 전보다 더 힘차게 차 유리를 내리쳤다. 두어 번의 충격 끝에 유리는 방사형으로 금이 가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내리쳐 마침내 유리에 구멍을 냈다. 그녀는 손을 넣어 안쪽의 잠금장치를 열었다.“강유형, 정신 차려, 정신 좀 차려봐.”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지원아...”나와 가사도우미는 그를 부축해 앉혔고 손발에 묶인 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을 되찾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이 한 짓이야.”“아마 삼촌 장례식을 이
강유형이 여태껏 안 보이던 이유가 드디어 밝혀졌다. 강진혁이 그를 가둬둔 것이다.안리영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는 정말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까지 수작을 부렸다.용준호는 이미 처리됐고 강유형마저 가둬두었으니 이제 남은 건 강진혁, 그 혼자뿐이었다. 모든 결정권이 그의 손에 넘어갔다.사람들은 말한다. 사내는 독해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말이다. 언제나 점잖고 다정하기만 했던 그가 지금은 혈육도 모르는 체하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지원아, 그이를 구할 사람, 너밖에 없어...”김희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몰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자신도 강진혁한테 잡혀 갇힐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눈을 감고 못 본 척해야만 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자식에게 두려움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아직 다하지 못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강두식은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먼저 떠났으니 그녀에게 삶은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저 가장 사랑했던 이의 곁을 지키고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을 뿐이었다.나는 그녀를 달래고는 조용히 안리영 곁으로 다가가 속삭였다.“내가 강진혁을 붙잡고 있을게. 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강유형을 구해.”안리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내가?”지금껏 메스만 들어본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곳엔 우리 둘뿐이었고 그녀 외엔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망설임도 잠시 안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김희연은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척했다.강진혁은 얼른 그녀를 안아 침실로 옮겼고 안리영은 의사라는 이유로 당연히 함께 불려 들어갔다.나와 안리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역할을 바꿨다. 그녀가 강진혁을 붙잡아두는 사이, 나는 강유형을 구하러 나섰다.“혈압이 너무 높아요. 혹시 혈
“의료사고는 병원이나 의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고 도 선생님도 복직하셨어. 다만...”안리영은 말을 잠시 멈췄다.“다른 병원으로 전근 가셨어.”며칠 동안 병원에 머물면서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이번 사고 때문에 전근 가신 거야?”“응. 조사 결과 산모의 죽음은 도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냥 그녀 손에 죽었다는 사실만 보고 이 모든 게 그녀의 책임이라고 여기는 거지.”안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히 말했다.“사람들의 입이 제일 무서워. 가볍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몰라.”그 말의 뜻은 도 선생님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지난 세월 동안 유가족들에게 오해받고 괴로워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우리 리영이, 마음고생 많았겠네.”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맞는 말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가장 고달프다고 느끼지만 정작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 세상 온갖 아픔 중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출관하는 날, 하늘에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늘조차 이 아픔을 가엾게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안리영과 함께 강씨 가문에 도착했다. 저 멀리 길 양쪽으로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두식은 평생을 업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를 애도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강씨댁 대문 앞엔 흰 보가 드리워져 있었고 양옆에는 추모의 글귀가 붙어 있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가슴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조금 있다가 아주머니 뵙게 될 텐데 감정 조절 잘 해야 해. 흥분하면 안 돼.”안리영이 걱정된다는 듯이 당부했다.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거라면 이 세상엔 그렇게 많은 희로애락도 없었을 것이
강유형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입술을 살짝 떨며 말을 꺼냈다.“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돌아가셨대.”강진혁은 이미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반응도, 놀라움도 없었다.둘은 말없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강진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자.”그때 마침 강유형이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잠결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다. 나는 어지럽고 복잡한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그 전화는 마치 구명줄처럼 나를 그 혼란스러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꿈에서 너무 많은 힘을 빼버려서 그런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여보세요...”“지원아.”강유형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고 그 뒤로 말이 없었다.“무슨 일이야?”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흐물거리며 물었다.“아빠... 오늘 가셨대.”강유형의 목소리는 깊고도 낮았다. 하지만 내게는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시간조차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강두식은 내 부모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그는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그 애매한 감정은 늘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래서 김희연이 나더러 집에 한번 들르라고 부탁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지만 결국엔 가지 못했다.이제 강두식은 세상을 떠났다. 더는 그를 볼 수도, 마주할 수도 없게 되었다.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그 틈 사이로 강유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이제 난 아버지가 없어.”이런 영원한 상실이라는 감정은 직접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안다. 우리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때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지만 그날 느낀 망연자실한 공포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깊
김희연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 약속한 거야...”나는 인터넷에서 용준호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진과 영상도 함께 올라왔고 댓글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이 줄을 지었다. 조직 연루설도 떠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강유형이 사람을 시켜 한 짓이었다.나만 아는 것도 아니었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강진혁은 그 일로 그를 찾아왔다.“네가 용준호를 건드렸지? 살 만큼 살았다는 거야? 죽고 싶은 거냐고.”그는 날 선 질책을 던졌다.“그런가 봐. 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이야.”강유형은 비웃는 듯한 말투로 빈정거렸다.강진혁은 그 말속의 숨은 뜻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따로 더 설명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은신처 마련해줄게. 용진표가 널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해.”“오라고 해.”강유형은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였다.“허.”강진혁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넌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예전 그 모습인 줄 아는 거야? 지금 어떤 상황인지 너도 잘 알잖아. 용진표는 더 이상 우리 아버지를 봐주지 않을 거라고.”강유형은 소파에 늘어져 앉아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두 다리를 교차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도 몇 개 풀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태평한 모습이었다.“내가 언제 아버지 힘을 빌린 적이 있었나?”그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말했다.“형, 형은 늘 부모님이 나를 더 사랑하고 유산도 나한테 물려준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넘겨받은 건 용씨 가문에 다 털리고 껍데기만 남은 KS 그룹이었어. 내가 하나하나 다시 살을 붙이고 키워서 지금처럼 만들어낸 거야. 결국엔 용씨 가문을 내 발밑에서 기어다니게 만들었지.”강진혁의 길고 가는 눈이 안경 너머로 조소를 띠며 번뜩였다.“지금 그 말은 모든 걸 네 실력으로 해냈다고 자랑하는 거야? 부모님이 KS를 너한테 물려준 게 네가 나보다 더 유능해서라고 주장하
“아무 일도 아니야”안리영은 휴대폰을 끄며 말했다.저 말의 뜻은 대개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기에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아마 구안석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연이 끊겼어도 실처럼 미련이 남는 건 아주 흔한 일이다. 나도 강유형과 헤어진 지 꽤 되었고 이미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와 완전히 끝맺지 못한 채 이리저리 얽히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외의 다른 끈들이 남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임신한 사실을 김희연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보양식을 한가득 들고 나를 찾아왔다.“참 잘됐다. 지원이도 이제 엄마가 되는구나.”“지원아, 병원은 아무래도 환경이 좋지 않고 먹는 것도 부실하잖니. 집으로 돌아가렴. 아줌마가 돌봐줄게.”...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감격으로 흘러넘쳤다. 내 아이가 강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난 더 이상 그녀의 며느리가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가 키운 딸이나 마찬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기쁨이었다.비록 우리 부모님의 죽음에 강씨 가문의 책임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강씨 가문에서 보낸 10년 동안 나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 준 것만은 진심이었다. 그게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지라도 나는 그 사랑을 절실히 느꼈고 실감하며 받아들였다.“아줌마, 삼촌도 돌보셔야 하잖아요. 저까지 돌보시면 너무 힘드실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에 있는 게 더 안전할 거예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 선생님이 바로 달려올 수 있으니까요.”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과 나 사이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었다.강유형은 나를 향한 마음을 다 떨쳐내지 못했고 강진혁은 나를 노리는 듯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다시 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야말로 스스로 불길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게다가 어떤 일들은 내려놓았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