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영은 그 질문을 받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시언아, 그게 무슨 말이야? 리영이는 내 딸이야. 내가 낳고 내가 키운 아이인데 내가 어떻게 걔를 해치겠니?”“그럼 오늘 왜 그러셨어요?”조시언의 말투와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네 누나도 리영이가 구안석한테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이번엔 안성수가 나섰다.“맞아, 시언아. 네 누나랑 형부가 리영이를 해치려고 그러겠니? 사실 여씨 집안도 조건이 나쁜 집안은 아니잖아. 근데 오늘 왜 인지 안색도 안 좋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돋혀있으니...”지금껏 말이 없던 조시언의 아부지인 조수현도 입을 열었다.그러자 당사자인 안리영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다 알아요. 다들 절 걱정해서 이러시는 거... 그런데 전 아직 연애할 생각 전혀 없어요. 그렇다고 옛날 감정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에요. 제가 연애를 하든 말든 그냥 자연스럽게 두시면 안 될까요?”“그래, 네 마음만 편하면 됐다. 우리도 더는 안 간섭할게.”최진희가 나서며 말하자 안리영은 환하게 웃었다.“그럼 됐어요. 럼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최진희가 웃으며 핀잔을 줬다. 그러다 시선을 조시언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그리고 넌 오늘 좀 심했어. 어쩜 그렇게 참을성이 없니?”“전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어요.”조시언은 당당하게 말했다.“그래, 너는 늘 옳지. 여자 안 만나는 것도 말이야. 전에 소개해 준 사람은 다 마음에 안 든다며? 네가 직접 고른다더니...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네가 고른 여자는 도대체 어디 있어?”조시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직 찾는 중이에요.”“또 그러네. 맨날 그렇게 넘어가려고!”최진희의 언성이 높아졌다.“할머니!”안리영이 나섰다. 아까는 외삼촌이 자신을 지켰으니 이번엔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그만하세요. 외삼촌이 아무 여자나 데려와서 힘들게 사는 거 보고 싶으세요?”“데려오기만 하면 행복하
“네!”안리영과 조시언이 입을 맞춰 동시에 대답했다.현진영의 얼굴이 순간 굳더니 곧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두 사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니까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겠지만 이제는 다 컸으니 각자 공간이 필요하지 않나요? 시언 씨가 여자 친구라도 데려오면 불편하지 않겠어요?”그녀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면서 말했다.“여자 친구 없습니다. 불편해할 것도 없고요.”조시언은 딱 잘라 대답했다.“그래도 남자랑 여잔데 거리를 둬야죠.”여준은 안리영을 보는 눈빛부터 벌써 달라져 있었다.“그렇게밖에 생각을 못 하시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죠.”안리영은 바로 그의 말을 받아쳤다.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짜증을 내자 여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그러자 조민영이 어쩔 수 없이 나섰다.“며칠 전 병원에서 진상 환자가 리영이한테 시비를 걸었거든요. 그게 걱정돼서 잠시 시언이 집에 머물게 한 거예요.”“그런 거군요.”현진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 속뜻을 정확히 알아챈 안리영은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을 열었다.“저 앞으로도 삼촌 댁에서 살 거예요.”그녀의 한마디에 분위기는 다시 얼어붙었다. 그러자 현진영은 굳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지금은 시언 씨한테 여자친구가 없으니 괜찮겠지만 생기면 그땐 곤란해질 수도 있어요.”“칠칠이가 언제까지 우리 집에 살든 간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조시언은 마치 릴레이라도 하듯 안리영의 말을 바로 이어받았다.이쯤 되자 여씨 가족도 두 사람의 생각을 알아챘다. 안리영은 맞선을 볼 생각조차 없다는 것도 말이다.더군다나 안리영이 조시언과 함께 산다는 말을 듣고선 아무리 삼촌과 조카라 해도 성인 남녀가 함께 지내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영 껄끄러웠다.“시언 씨가 리영 씨를 참 잘 챙기시네요. 두 사람 관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괜찮겠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인 사이인 줄 알겠어요.”현진영은 입이 아주 독했다.조시언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표정에도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그 말 들으니 저
“리영아, 왔구나. 시언이도...”조민영은 곧장 안리영을 향해 손을 흔들며 얼른 오라고 했다.안리영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마침 조시언이 다가와 그녀 곁에 섰고 주위를 한번 훑어보았다.그의 옷자락이 안리영의 손등을 스치며 우연히 닿았고 그 작은 접촉에 안리영은 불현듯 용기가 생겼다.‘뭘 두려워해... 어차피 삼촌이 옆에 있는데. 엄마가 또 뭐라고 하면 삼촌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안리영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 조시언만 곁에 있으면 엄마도 무섭지 않았다.사실 안리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시언은 친자식이 아닌데도 어째서 다들 그에게 유난히 신경을 쓰는 건지 말이다.그가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아무도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조시언 덕분에 안리영도 어깨를 펴고 서 있을 수 있었다.“여 회장님, 사모님...”조시언은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여성민 회장님과 현진영 사모님, 그리고 그 아들인 여준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안리영은 조시언 옆에 바짝 붙어 있었는데 여전히 어린 애 같은 모습이었다.그걸 본 조민영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네 삼촌도 인사했는데 너는 왜 그러고 있니? 여기는 여 회장님네 가족이야. 준이 기억 안 나? 어릴 때 널 업고 다니기도 했었는데...”안리영은 속으로 불쾌했지만 예의상 가볍게 인사를 했다.조시언은 자리에 앉으면서 안리영을 불렀다.“칠칠아, 이리 와.”그 말에 안리영은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조민영한테 잡혀서 끌려갔을 테니 말이다.“리영이 말이에요. 정말 예뻐졌네요. 밖에서 보면 못 알아보겠어요.”현진영은 안리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팔꿈치로 몰래 여준을 툭툭 건드리며 신호를 보냈다.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리영은 벌써 눈치챈 듯했다. 조민영이 왜 그렇게까지 해서 자기를 집에 데려오려 했는지 말이다.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로 하여금 여준과
“안 아파. 다 나았어.”안리영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오늘 새로 생긴 문제나 뭐 발견된 거 있어?”“없어.”구안석이 그녀를 바라보는 어두운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안리영은 이를 알아챘지만 모르는 척했고 물어보지도 않았다.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일을 시작하자 구안석도 시선을 돌렸다. 퇴근 시간까지 구안석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이런 태도는 평소와 달랐다. 이번에 연구 홍보를 위해 돌아온 이후 구안석은 항상 안리영 앞에서 미안한 마음에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그냥 평범한 동료처럼 완전히 달라 보였다.비록 그 모습이 안리영이 바라던 바였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의심이 들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안리영은 어제 상처를 치료하며 구안석과 조시언을 내쫓았던 일을 떠올렸다. 혹시 조시언이 구안석에게 뭔가 말한 걸까? 조시언이 그녀를 집에 데려다줄 때 안리영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삼촌, 어제 선배한테 뭐라고 했어? 그 사람 오늘 좀 이상해.”하얀 폴로 셔츠를 입은 조시언은 반짝이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뭐가 이상해?”“나랑 거리를 두고 예전처럼 죄책감에 사로잡힌 모습이 아니야.”안리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검은색 핸들은 조시언의 손아래에서 부드럽게 돌아갔다.“네가 적응이 안 돼? 아니면 불안한 거야?”“그런 건 아니야. 그냥 너무 이상해.”안리영은 그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물었다.“삼촌이 진짜 뭐라고 한 거 아니야? 설마 겁준 거야?”“겁주긴 뭘 겁줘.”“삼촌!““그럼 네가 직접 물어봐.”“그 사람이 날 무시하는데 어떻게 물어봐? 게다가 물어보는 것도 이상해.”앞만 바라보던 조시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빛이 반짝이는 듯한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놈이 그렇게 행동하니까 불편하고 기분이 안 좋아?”그의 눈길에 안리영은 많이 당황한 눈치였다.“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 난 그 사람이랑 이미 끝난 거고 다 잊었어.”“그럼 구안석이 어떻게
조시언은 구안석에게 정확한 답을 주지 않았지만 그의 침묵이 곧 답이었다.얼마 뒤 안리영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다행히 몸 안에서 독성물질은 발견되지 않았고 상처도 처리되어 모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미안해. 내가 캠핑을 망쳤어.”뱀에게 물렸을 때 안리영의 비명소리가 모두를 놀라게 했고 안리영이 걱정된 그들은 급히 짐을 챙겨 캠핑장을 떠났다. 한창 좋았던 캠핑이 결국 엉망으로 끝나버렸다.“그럼 나중에 시간 되면 우리한테 보상해 줘야지.”조시언의 대답을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안리영을 위로해 줘야 하는 게 맞지 않나?그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안리영도 평소와 다른 태도를 보였다.“보상할 생각 없어. 오히려 삼촌이 나한테 보상해야 할 것 같은데.”“어떻게 보상해 주면 좋을까?”조시언의 정상적인 물음에 안리영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아직 생각 못 했어. 일단 빚으로 남겨둘게.”말을 마친 그녀는 한숨을 쉬며 한마디 더 했다.“아마 이번 생에는 다시 캠핑 안 할 것 같아.”조시언의 맑은 눈빛 속에 이상한 흐름이 감돌았다.“한 번 뱀에 물렸다고 평생 밧줄도 무서워할 거야?”“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지.”안리영은 한 번 실패했다고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뱀과 관련된 일만큼은 자신이 겁이 많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며칠 휴가 내줄 게 푹 쉬어.”조시언이 병원장과 어떤 관계인지 모르지만 그가 휴가를 내준다면 문제없을 거다.하지만 안리영은 거절했다.“안 돼. 지금 과에 일이 많고, 임산부 수술도 곧 있어. 내가 주치의라 꼭 있어야 해.”일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조시언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설득하지 않았다.“그럼 몸조심해. 몸이 안 좋으면 휴가 내고, 내가... 사람을 시켜서 지켜보게 할 거야.”“알았어.”안리영이 장난스럽게 대답했다.“내일 내가 데리러 갈게.”조시언의 한마디에 안리영은 그의 SNS에 달린 긴 댓글이 떠올랐다. 댓글 속 엄마의 말투를 생각하
구안석은 안리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표정과 행동으로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지만 그래도 물었다.“발목을 물렸다며? 상처를 좀 볼게.”그는 말하며 몸을 굽혔지만 안리영에게 손이 닿기도 전에 그녀가 옮겨졌다.구안석은 고개를 들어 조시언을 바라보았다.“시언 씨, 독이 없는 뱀이라고 해도 이빨에는 많은 세균이 있습니다.”“그래서요? 안석 씨가 세균을 보고 대화를 하면서 꺼지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맨손으로 그 세균을 다 없앨 수 있나요?”조시언의 한 마디에 구안석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말을 마친 조시언은 구안석에게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안리영을 품에 안은 채 걸어갔다.구안석은 잠시 멍하니 쪼그려 있다가 일어나 발걸음을 재촉해 그들을 뒤따랐다.안리영이 의자에 앉자 의사가 그녀의 다리를 들어 올렸다. 구안석이 그녀의 바지 끝을 걷어 올려주기 전에 조시언이 먼저 해버렸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렸다.의사가 소독약으로 상처를 청소하는 동안 조시언은 손으로 안리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아프면 말해.”안리영은 조금 쑥스러웠다. 의사인 자신이 평소 환자들에게 해주던 처치를 돌려받으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삼촌, 선배 둘 다 먼저 나가 있어.”안리영은 참다못해 둘을 내쫓았다.게다가 구안석이 여기서 아주 어색해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그녀를 돕고 싶어 했지만 조시언이 그를 가로막았다.그를 안쓰럽게 여긴 게 아니라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기 때문이다.“두 분은 밖에서 기다리세요. 여러분이 여기 있으면 저도 긴장돼서 감시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의사도 농담을 던졌다.조시언은 구안석을 힐끗 보더니 발걸음을 옮겼고 구안석도 의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두 사람은 복도에 마주 서 있었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몇 초의 침묵 후, 구안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시언 씨, 지금 저를 굉장히 싫어하시죠?”“안석 씨, 안석 씨와 리영이는 이제부터 연인이 아니라 동료일 뿐이에요. 지켜야 할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