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수요일 오후, 팀 회의 자료를 준비하던 제이는 달력의 날짜를 보고 잠깐 손을 멈췄다.
이날이었다. 지난 생에서, 조 과장이 제이와 수정이 밤새워 짠 신규 거래처 확대 기획안을 통째로 자기 것인 양 상무 보고에 올렸던 날.
그때는 회의실 문밖에서 그 보고를 지켜보며 아무 말도 못 했다. 항의하려다가도 "고작 신입사원 주제에 뭘 안다고"라는 말 한마디에 기가 죽어 물러섰다. 그날 이후로도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됐지만, 제이는 매번 그렇게 넘겼다.
이번엔 아니었다.
기획안을 준비하는 두 달 내내, 제이는 흔적을 하나하나 남겨두었다. 수정과 아이디어를 주고받을 때마다 회의록을 남겼고, 논의 중 나온 의견은 반드시 이메일로 정리해 팀 전체에 참조로 걸었다. 사소해 보이는 습관이었지만, 지난 생의 그녀는 이런 걸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현제이 씨, 왜 이렇게 꼼꼼해요? 회의록까지 다 정리해서 보내고."
수정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그냥, 나중에 헷갈리지 않으려고요."
제이는 웃으며 넘겼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팀 회의에서 두 사람이 기획안을 발표하던 날, 반응은 뜨거웠다.
"이거 진짜 괜찮은데? 신규 거래처 쪽 접근 방식이 참신하네요."
"현제이 씨랑 최수정 씨, 두 분이 같이 짠 거 맞죠?"
부장이 흡족한 얼굴로 물었다.
"네, 저희 둘이 같이 준비했습니다."
제이가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 자리에 있던 팀원 전부가 그 대답을 들었다.
문제는 그다음 주였다.
조 과장이 상무 보고를 앞두고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이번 신규 거래처 기획, 내가 상무님께 보고할 거니까 자료 나한테 넘겨."
"과장님이 직접 보고하시게요?"
수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이런 건 과장급이 올려야 힘이 실려. 자료 준비한 사람들도 배석은 해."
제이와 수정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을 뿐, 별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자료를 넘겼고, 배석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대회의실에는 상무를 비롯해 관련 부서 팀장급까지 자리했다. 조 과장이 화면을 넘기며 발표를 시작했다.
"제가 이번에 신규 거래처 쪽으로 접근 방식을 새로 설계해봤습니다. 기존 거래처 대비 회전율이 낮은 곳부터 우선순위를 매겼습니다."
부장은 그 말에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팀장급이 보고 자리에서 "제가"라는 표현을 쓰는 거야 늘 있는 일이었고, 실제로 그 밑에서 누가 만든 자료인지는 부장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은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발표는 매끄러웠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조 과장, 여기 3페이지에 A사가 1순위로 올라와 있는데, 이 업종 특성상 결제 주기가 긴 편이라 우리 쪽 자금 회전에는 오히려 불리하지 않나?"
상무의 질문에 조 과장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그 부분은... 결제 주기보다는 거래 규모를 우선 고려한 부분이라..."
"거래 규모로 보면 오히려 B사가 더 크던데."
"...."
조 과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가 직접 설계했다는 우선순위 기준이, 정작 그 자신의 입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조 과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아니, 실무진들이 자료를 이렇게 대충 올려놓으니까 제가 보고 자리에서 곤란해지는 거 아닙니까."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갔다. 그는 자료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뒤쪽에 앉은 제이와 수정을 돌아봤다.
"거기, 이거 누가 만든 자료야? 이런 기본적인 것도 제대로 설명 못 하게 만들어놓고."
회의실 안이 순간 얼어붙었다. 배석해 있던 제이와 수정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과장님, 그 자료 저희 둘이 만든 게 맞습니다."
수정이 참지 못하고 먼저 대답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러니까! 신입 둘이 만들었으니 이 모양이지."
조 과장이 언성을 높이며 자신만만하게 받아쳤다. 그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오히려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부장이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상무님, 그건 사실과 좀 다릅니다. 지난주 팀 회의에서 현제이 씨랑 최수정 씨가 이 우선순위 기준까지 다 발표했었고, 그 자리에서 저도 직접 들었습니다. 그때 조 과장도 자리에 있었고요."
조 과장이 부장을 홱 돌아봤다. 늘 자기편이라 믿었던 사람이 이렇게 순식간에 등을 돌릴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그 배신감 어린 눈빛도 잠시, 부장은 시선을 피하며 상무 쪽만 바라봤다.
조 과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현제이 씨, 그때 발표한 내용이 뭐였죠?"
상무가 시선을 돌렸다. 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담담하게 답했다.
"결제 주기와 거래 규모를 함께 놓고, 6개월 내 회전율이 가장 높은 순으로 우선순위를 짰습니다. A사는 결제 주기는 길지만 회전율 자체가 가장 안정적이라 1순위로 올렸습니다."
막힘없는 설명에 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방금 조 과장님이 대답 못 하신 걸, 신입사원이 바로 설명하네요."
상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이 자료, 원래 설계자는 조 과장이 아니라 현제이 씨란 소린데."
조 과장은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그래도 전체적인 방향은 제가 최종 확인하고 승인한 겁니다. 신입들이 뭘 안다고..."
"방금 전엔 신입들이 자료를 부실하게 올렸다고 하셨죠. 그런데 지금은 신입들이 뭘 아냐고 하시네요. 어느 쪽이 맞습니까?"
상무의 정확한 지적에, 조 과장은 입을 열었다가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방금 자기 입으로 뱉은 두 마디가 서로 부딪혀 스스로를 옭아맨 꼴이었다.
회의실 안 팀원들은 서로 눈빛만 주고받을 뿐, 아무도 그를 거들지 않았다. 다들 진짜 사정을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상무는 자료를 덮으며 짧게 말했다.
"다음부턴 보고 올리기 전에 원안자 확인부터 하시죠. 그리고 조 과장님, 오늘처럼 언성부터 높이는 거, 좋은 습관 아닙니다."
그 한마디로 상황은 완전히 정리됐다. 조 과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에 앉은 채,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오후, 조 과장은 팀 회식 자리에서도 유난히 조용했다. 평소라면 목소리를 높이던 그가, 그날만큼은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수정이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제이의 팔을 살짝 잡았다.
"저 진짜 속이 다 시원하네. 근데 현제이 씨, 그거 어떻게 그렇게 다 준비해둔 거예요?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어요?"
"그냥, 이런 일 한번쯤 있을 것 같아서요."
제이는 짧게 웃으며 답을 흐렸다. 지난 생의 기억이 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도일이 옆에서 조용히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현제이 씨 진짜 대단하네요. 저였으면 그 자리에서 말도 못 꺼냈을 텐데."
"저도 사실 손이 좀 떨렸어요."
도일의 말에 제이는 옅게 웃었다. 알아챌 수 없는 진실이 그 웃음 뒤에 숨어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그 번호였다.
오늘 회식이라면서요. 재밌었어요?
제이는 화면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회식 소식까지 알고 있다는 게 새삼 신경 쓰였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귀가 좀 밝아서요.
능청스러운 답장에, 제이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수정이 옆에서 "왜 웃어요?" 하고 물었지만, 제이는 휴대폰을 슬쩍 가방에 넣으며 얼버무렸다.
지난 생에서는 이런 자리에서 조 과장 눈치를 보느라 웃을 일도 없었다. 오늘은 달랐다. 준비된 사람은 더 이상 쉽게 당하지 않는다는 걸, 제이는 처음으로 몸소 확인한 셈이었다.
웃느라 가려진 테이블 너머, 술잔을 쥔 채 제이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조 과장의 붉어진 눈빛은 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차갑게 식은 새벽안개를 뚫고 달리는 차 안에서, 제이는 조용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거친 소금바닥을 짚었던 손끝에 여전히 미세한 모래알이 만져지는 듯했다. 몸 깊은 곳에서 피로가 묵직하게 밀려왔지만,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회귀하기 전, 마흔다섯의 나이로 쓸쓸한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시절의 자신이었다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 시절 대기업의 정 회장이라는 존재는 하늘 위에 사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평생을 발버둥 쳐도 말 한마디 섞어볼 수 없었을 절대적인 권력자.하지만 지금의 제이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 거대한 저택의 문을 열고 있었다.회장실의 묵직한 마호가니 문이 열리자, 은은한 침향 냄새와 함께 소리 없는 위압감이 사방을 압도했다.정 회장은 이른 아침부터 흐트러짐 없는 정장 차림으로 집무실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흙먼지와 소금기가 미처 다 가시지 않은 제이와 준호의 옷차림에 닿았다.“이 이른 시간에 예의도 없이 무슨 일이냐.”낮게 울리는 정 회장의 목소리에는 불쾌함과 동시에 손자의 행보를 시험하려는 엄격함이 서려 있었다. 준호가 한 걸음 나서려 했지만, 제이가 먼저 준호의 팔을 가볍게 누르며 정 회장의 정면으로 걸어 나갔다.“안녕하세요, 회장님. 이른 아침부터 정중하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저희의 행색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실 어제 납치를 당했었습니다.”폭탄 같은 선언이 비서도 없는 고요한 집무실 안을 강타했다. 정 회장의 희끗한 눈썹이 찰나의 순간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제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그 구차하고 더러운 곳을 빠져나와, 지금 바로 회장님을 뵙기 위해 달려오는 길입니다.”“…….”“회장님께서 저에게 계열사 사장 자리를 주시며 능력을 입증하라 하셨을 때, 저는 앞으로의 10년 계획을 머릿속에 이미 다 그려두었습니다.” “ 그리고 그 10년을 움직이는
“윽, 컥……!”소금 먼지가 섞인 차가운 흙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이영민은 단 한 줌의 공기도 제대로 들이마시지 못했다. 등허리를 짓누른 준호의 무릎은 거대한 바위 같았다. 이영민의 손발이 비참하게 버둥거릴 때마다 준호의 아귀힘은 목뼈가 부러질 듯 그의 덜미를 바투 조였다.“누구야.”낮게 가라앉은 준호의 목소리는 평소의 비서나 직원들에게 쓰던 정중한 존댓말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섬뜩했다.“이영민 씨. 당신 뒤에서 자금 대주고, 제이 납치하라고 부추긴 쥐새끼. 누구입니까.”“내, 내가…… 미쳤다고 말할 것…… 아악!”말끝이 채 맺어지기도 전에 준호가 그의 팔을 등 뒤로 꺾어 올렸다. 관절이 비틀리는 극심한 고통에 이영민의 비명이 텅 빈 염전 창고 천장을 때렸다. 준호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다.“말해.”“윽! 끄으으윽……!”“내 인내심 바닥내지 마세요. 내 여자가 이런 썩은 소금 구덩이에 갇혀 있었던 시간에 비하면, 당신 손가락 몇 개 부러지는 건 일도 아니니까.”서늘하게 내려앉는 준호의 경고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뼈가 어긋나는 둔탁한 마찰음이 울리자,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가 이영민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돈이고 배후고 간에, 당장 이 괴물 같은 정준호의 손귀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사, 삼촌! 네 삼촌이라고! 정 부회장!”이영민이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그분이 시켰어! 난 그냥 시키는 대로 사람만 보낸 거야! 돈도 다 그쪽에서 대줬단 말이야!”준호의 움직임이 굳어졌다. 제이 역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며 이영민을 매서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준호가 짓누르는 힘을 아주 미세하게 늦추자, 이영민이 흙먼지를 뱉어내며 거칠게 헐떡였다.“정 부회장님이…… 구체적으로 뭐라고 지시했습니까.”제이가 차갑고 일정한 톤으로 물었다. 이영민은 제이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압도되어, 살기 위해
“경호단은 창고 뒤편 갯벌 초입까지 물리세요. 불빛 하나, 담뱃불 하나라도 새어 나가선 안 됩니다.”준호의 명령은 낮고 엄호했지만, 그 음절마다 서린 온도는 섭씨 영도에 가까웠다. 사설 경호원들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동화되어 사라진 후, 폐염전 창고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았다.사방이 바다와 갯벌로 막힌 고립된 지형. 환기창 틈새로 들어오는 밤바람은 끈적하고 짠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부식된 철재의 비린내가 뒤섞인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준호의 턱끝이 단단하게 굳어졌다.평생을 유복하게 자란 그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디뎌본 적 없을 더럽고 음습한 낙후 지대. 제이가 이런 퀴퀴하고 차가운 바닥에 손발이 묶인 채 갇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준호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준호의 눈동자는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배후가 누구인지 사설 정보망을 총동원해 샅샅이 뒤집어엎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준호 씨.”그의 터질 듯한 침묵을 깬 것은 제이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제이는 준호의 다부진 팔뚝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차갑게 식어 있는 준호의 살결에 제이의 온기가 닿았다.“지금 섣불리 움직여서 배후를 캐내려 들면 꼬리가 잘려요. 이영민을 잡으면, 싫어도 그 실체가 제일 먼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조금만 더 침묵을 유지해요.”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이 거부하는 이성적인 제동. 준호는 제이의 손길에 겨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회귀하기 전, 벼랑 끝까지 내몰렸던 구차한 과거를 떠올렸다. 그때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 쥐덫을 놓은 것은 바로 자신들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어둠 속을 지켰다.스산한 바람 소리만 가득하던 염전에 고요를 깨는 이질적인 소음이 틈입한 것은 늦은 새벽, 인적이 완전히 끊긴 시각이었다.사각, 사각.습기를 머금은
가슴뼈 안쪽에서 거친 맥박이 끊임없이 뛰어댔다.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잔상으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경찰에 신고는 마쳤지만, 정식 수사 절차가 개시되고 추적반이 움직이기를 기다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일 분 일 초가 흐를 때마다 제이의 목을 조여오는 시간의 흐름이 사정없이 흘러가고 있었다.준호는 가쁜 호흡을 고르며 운전대를 쥔 손가락 끝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네잎클로버를 찾겠다며 길가에 쪼그려 앉아 있던 제이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에 지독하게 맴돌았다.혼자 두지 말아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가슴을 서늘하게 긁어내렸다.따르릉, 하며 비서실장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연결된 것은 가속 페달을 밟은 지 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본부장님, 통신사 협조를 받아 현 사장님의 휴대전화 기지국 신호 최종 위치를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위치가 생각보다 아주 외딴곳입니다.]"어디입니까. 당장 말씀하세요."[태안 외곽의 버려진 염전 지대입니다. 반경을 좁혀보려 해도 워낙 허허벌판이라 전파가 인근 기지국 하나에만 희미하게 걸쳐 있습니다. 그 주변을 위성 지도로 조회해 보니, 지금은 가동을 멈춘 소금 창고 건물 몇 채와 폐허가 된 집들뿐입니다. 사방이 펄과 바다로 막혀 있는 고립된 구역입니다.]염전 창고.그 단어가 들려온 순간, 제이가 홀로 어둠 속에 결박되어 있을 축축하고 소금기 가득한 공간의 실루엣이 뇌리를 스쳤다. 자금줄이 완전히 묶여 사채업자들에게 코너까지 몰린 이영민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음습한 은신처였다. 사방이 바다와 갯벌로 가로막힌 고립된 영토. 그곳은 침입하기도, 탈출하기도 까다로운 최악의 무대였다."당장 사설 경호팀 그쪽으로 이동시키세요. 저도 지금 출발합니다."준호는 전화를 끊어 조수석 시트 위로 내려놓았다.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도로 바닥을 긁었고, 세단은 붉게 물들어가는 서해안의 도로를 향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생각도 머릿속에 담아둘 여유는 단 한 줌
"니가 나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사장이 됐어? 그 자리가 얼마나 갈지 한번 보자."이영민의 갈라진 목소리가 축축한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기괴하게 울렸다. 늘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는 헝클어져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초점을 잃고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광기와 패배감만이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지금 너를 벼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모르지? 내가 아니어도 너는 그 자리 3개월도 못 지켜. 그럴 수밖에 없어. 나만이 너를 알아봤던 건데."이영민은 제이의 턱밑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쁘고 뜨거운 숨결이 제이의 뺨에 닿았지만, 제이는 그저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떴다. 온몸을 지배하는 약품 냄새와 욱신거리는 손목의 통증이 선명했다. 손과 발은 거친 박스 테이프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고, 몸은 차가운 간이 의자에 묶인 채였다."니가 그리고 있는 그 아이템들…… 이 세상 그 누구한테 들이밀어도 절대 너는 인정 못 받아. 유일하게 너의 안목을 알아본 건 나뿐인데, 나를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넌 그 신선식품 배송도, 너 자신도 지키지 못하게 될 거야."악담을 쏟아내는 이영민을 바라보며, 제이의 머릿속은 폭풍전야처럼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소리를 질러봤자 소용없다. 이영민이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면서 허술한 곳을 골랐을 리 없었다. 묵직하게 닫힌 철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서늘한 공기와 짠내, 옅은 곰팡이 냄새로 보아, 이곳은 인적이 드문 바닷가 창고거나 폐쇄된 물류 컨테이너 내부일 터였다.지금 가장 어리석은 짓은 막다른 길에 몰린 미친개를 자극하는 것이다. 제이는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호흡의 템포를 늦췄다."……내가 지키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뭐죠?"제이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고요했다. 납치당한 피해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담담한 어조에, 오히려 이영민의 눈동자가 이질감으로 크게 흔들렸다."이 대표님처럼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회의실 안에는 차분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현제이를 설득하거나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사내에 아무도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입사한 지 일 년 남짓 된 스물다섯의 신입사원이었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단호한 리더십과 추진력은 노련한 임원들조차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만큼 깊이가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제이는 진짜 초년생이 아니었다. 회귀하기 전 실무 현장에서 이십 년 동안 묵묵히 경력을 쌓아온 베테랑이었기에, 물류 흐름의 미세한 맥을 짚어내는 능력이 누구보다 탁월했다. 상하차장의 복잡한 동선이나 저온 창고의 효율적인 관리법 등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감각들이 고스란히 살아있었다.과거의 기억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가장 확실한 자산이었다. 이전에 겪었던 미래에서 신선식품의 당일 배송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다만 그때는 대형 업체들의 선점 경쟁이 끝난 뒤라 시장의 모퉁이에서 현상 유지에 급급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세부적인 기획력과 실무 운영 경험까지 모두 갖추고 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직은 임원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 답답할 뿐이었다."더는 이견이 없으시면, 금일 자로 설비 예산안 승인하겠습니다."제이가 펜을 소리 없이 내려놓자, 임원들은 조용히 지시 사항을 받아 적으며 고개를 숙였다.* * *회사의 중심에서 성공적인 궤도에 오를수록, 제이는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에 부쩍 정성을 들였다.이전 생에서 겪었던 위암의 기억이 남아있기에, 건강을 잃으면 이 모든 성취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흔다섯에 마주했던 쓸쓸한 끝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식단부터 꼼꼼하게 유기농 위주로 챙겼다.아무리 일정이 바빠도 거르지 않는 약속도 만들었다. 바로 아침 조깅이었다."체력이 제법 좋아지셨네요."옆에서 부드럽게 발걸음을 맞추던 준호가 다정한 미소를 건넸다. 이마에 맺힌 얇은 땀방울이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체력 관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