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소녀는 자리에 오래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 이 병원 안에서 멀쩡하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몇 안될 이라는 사실이 언제나 아이를 일어나게 만들었다.
제레미의 금발을 닮은 햇살이 창을 비추었다. 따스한 풍광에 마리타는 슬쩍 작은 발을 내밀었다
안으로 당기며 햇빛과 술래잡기를 했다. 온종일 이어질 치료가 끝나면 밤일 것이고 또 달이 기울 새벽에나 그는 마리타를 알아볼 것이다. 요즈음이 줄곧 그랬다.
어제와 그제와 저녁으로 카레가 나온 일주일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고르게 난 눈썹을 찡그리고 햇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갑작스러운 결심은 아니지만 오늘 숨겨둔 계획을 단행할 날임이 분명해보였다. 조용히 풀이 죽은 척 제 병실로 돌아가는 동안 작은 머리는 분주하게 방법을 생각했다.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말이 짤막하고 빠르게 입 밖으로 앞 다투어 나온다.
“크로와상, 전나무, 동전, 모자, 편지,..크로와상, 전나무 편지”
작은 노래를 부르듯 흥얼대는 뺨에 흥분이 발그스레하게 번졌다.
제레미를 위해 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기분이 좋아졌다는 게 스스로 뿌듯해 그녀는 가방에 이것저것 물건을 넣었다. 직접 붉은 색 펜으로 만든 지도에는 옆에 작게 할 일과 작전의 필수사항이 적혀있다.
제레미를 위한 크로와상과 마리타의 슈크림, 편지 우체국 따위의 글자였다.
강아지풀만큼 남긴 꽁지 머리 위로 둥그막한 챙이 있는 모자를 썼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는 이불 안에 베개를 넣어 잠시 저를 대신할 가짜 인형도 만들었다. 마리타는 제법 꼼꼼한 계획이 자랑스러웠다. 그를 위해 제대로 된 무언가를 해주리란 의지가 샘솟아 이제껏 높던 병원의 담과 발찌도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날카로운 이가 달린 물고기가 되어 제 다리를 물고는 짜릿하게 전기도 흘리던 그것이 작게만 보였다. 매번 자신을 달래던 제레미의 말을 떠올리며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바다에 산다는 전기 물고기 따위가 그녀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라며. 소녀가 두꺼운 철문을 민다. 양손으로는 밀리지 않아 다리로 힘껏 바닥을 밀면서 온 몸의 힘으로 밀어야 열릴 만큼 무거웠다. 문을 여는 동안 제레미와 나눈 대화가 귀에 울렸다. 정확히는 그의 목소리만이었다.
바람이 차면 스웨터를 입고 단추를 잠글 것. 목이 마르기 전에 물을 마실 것. 해가 지기 전에 건물 안에 있을 것. 또는 물가를 떠날 것. 또는 먼저 미소를 지을 것. 그의 이야기를 입으로 외우며 다시 느리게 마리타는 그 밖으로 한 발자국씩 걸음을 내디뎠다.
환자복을 벗고 대충 팔을 꿰어 입은 스웨터의 거친 촉감에 자꾸만 팔을 긁게 되고 뻣뻣한 바지에 다리의 움직임이 무뎌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원래의 편한 환자복을 입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참으로 낯선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마리타는 그 생각의 꼬리를 물고 스스로 질문을 던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제레미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초승달 모양의 빵을 사와야겠다고 혼자 중얼댈 따름이었다. 제레미와 크루와상, 들키지 않고 돌아올 것. 그녀는 부러 자기에게 세 가지만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굴었지만 사실은 정반대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병원의 뒷마당에 심은 수많은 나무들 중 전나무는 단 두 그루뿐이었다. 좀 더 뿌리가 단단하고 가지가 유연해 잘 휘어지는 고동색의 나무가 마리타의 탈출을 도울 예정이었다. 나무의 첫 번째 가지보다 작은 마리타는 새삼 긴장되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단단하게 묶은 머리가 풀릴까봐 더 단단히 조여 묶지만 미처 놓고 온 것이라도 있나 싶은지 계속 뒤를 돌아보곤 했다.
“괜찮아. 다녀올 수 있어. 할 수 있어. 제레미, 크루와상.”
반복적으로 외우는 단어에 절실함이 담겨 기원처럼 들릴 때쯤 그녀는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러나 가장 작은 가지에도 닿지 못해 고스란히 떨어졌다. 등으로 퍼지는 충격보다도 들킬 일이 염려되었다. 제레미의 치료가 아니었다면 병원을 돌아보는 경호들이 오늘보다 배는 많았을 것이다. 주위를 몇 번 돌아본 마리타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가방에 넣어둔 비장의 무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보자기였다.
***
그녀는 목에 손수건의 양모서리를 묶어 망토처럼 만들었다. 일전에 베버가 보여준 만화잡지의 장면을 활용한 것이었다. 그는 마리타가 심심할까봐 보여준 것이지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겠지만 새하얀 보자기가 바람에 펄럭이는 그 모습은 마치 책의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마리타는 이번에는 준비 운동을 하듯 땅 위에서 발을 굴렀다. 쿵쿵. 각 소리 사이에 제법 간격이 생겼을 무렵에 이미 전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와 손이 맞닿을 정도였다. 다시 아래로 가라앉기 전 마리타가 가장 길게 자란 가지 하나를 잡고 재빠르게 입을 달싹이려 했다. 그때 가지 뒤에 숨어있던 새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마리타는 제가 말하려던 것을 그만 잊어버렸다.
“아, 까먹었다.”
꽉 동여맨 머리가 어느새 풀려서 이리저리 얼굴에 달라붙고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이럴 때면 동화에 나오던 마법사가 부러웠다. 그녀의 힘이라는, 사실 힘이라곤 볼 수 없을 이 기복이 심한 기운으로 마리타가 안전하게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제 머리가 안 뻗치게 바꾸는 것 뿐이었다.
아버지의 사건을 뺀다면 병원에서 그녀를 데리고 있는 이유도 알 수가 없어 사실 종종 소녀는 불안해하기 까지했다. 언제고 이 힘이 사라져 도로 거리로 내몰리거나 제레미와 헤어지게 될까봐.
벌써 몇 번의 시도가 끝나자 해를 가리던 구름이 지나 뒷마당에도 빛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마리타의 그림자가 진다는 소리였다. 모든 움직임에 검은 빗금이 땅에 그어져 금세 들킬 것만 같았다. 소녀는 나무 그늘로 걸음을 옮기며 다시 위 아래로 뜀박질을 했다. 시간이 없다. 발소리가 들릴까 걱정스러운 지금도 불안해진다.
쿵쿵 뛰던 발걸음에 좀 더 무게를 더한 그녀가 다시 가장 높은 가지를 잡고 새로운 상상을 더한다.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둥근 활처럼 휘어지는 장면을 머리에 새기고 전달하듯 가지를 손으로 꼭 쥐었지만 정작 잘될지 확신은 없어 마리타는 눈을 꼭 감았다. 감은 눈이 열린 것은 바람이 제 머리를 헤집는 감각이 느껴지고 나서였다. 뺨을 어루만지듯 섬세한 바람의 결이 피부를 훑고 갔다. 소녀가 하늘을 날았다. 둥글게 접은 수건처럼 휘게 만든 가지를 지지대 삼아 하늘로 떠오른 것이다.
제레미는 이 기술을 두고 직접 하늘을 나는 상상을 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사람은 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한계에 대한 세뇌가 강한 마리타로서 상상이란 너무도 추상적이고 어려운 일이었다.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들에는 처음부터 하려고 들지도 않았으므로. 그리고 펄럭이는 보자기가 있다한들 멀리 날수는 없었다. 강하고 강한 힘이 필요했다. 병원은 그만큼 크고 강한 공간이었다.
다만 문제는, 말투였다. 최근에 중세식 동화를 자주보고는, 거기 나오는 기사들의 말투를 흉내내는 데 꽂힌 것이다. 제레미를 치료할 때처럼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소년의 주위를 에워쌌고 그가 연맹 측의 사람임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헤게는 소년과 소녀의 앞을 막아선 채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소년의 경호원이 나서려는 것을 한쪽 손을 들어 그가 막았다. 그리고는 먼저 운을 뗐다.“연맹 내 이아고 마르샬라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직계 자녀인 마리타 마르샬라의 동행을 요구합니다.”마리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퍼뜩 올렸다. 아빠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따라붙는 단어가 낯설다. 시신. 동행 명령. 이아고. 세 단어가 뇌리를 어지럽혔다. 윙윙 귀를 울리는 바람에 머리가 세게 조여와 통증을 느꼈다.동행 명령에 놀란 헤게 역시 마리의 한쪽 손을 잡고, 강하게 나갔다.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는 듯 소년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헤게가 마리를 등 뒤로 숨기며 소년의 요구에 반박했다.“본 기관은 환자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이미 자료가 전산에 포함되어 있을텐데 굳이 미성년자인 유가족을 통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요.”“이아고 마르샬라의 경우 사건의 잔혹함을 고려해 정확한 수사를 원한다는 게 연맹의 의견입니다. 헤게 선생님.”“제가 그렇게 유명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미네르바.”“마르샬라 양, 수사와 공익을 위해서 같이 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마르샬라 양. 처음듣는 호칭에 마리타가 진저리를 쳤다. 뒤에서 보던 율리아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노인의 밭은 숨소리가 섞인 웃음소리로 복도가 울리자 모두가 뒤를 돌았다. 휠체어에 앉은 율리아가 손을 뻗자 마리타가 금세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주름진 손을 잡아주었다.“마리타는 사고 당시 무척 어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귀하도 그를 모르시지는 않을 터, 이제와 어린 아이에게 과거를 들여다보라는 건 자비로운 연맹에서도 바라지 않는 일일
마리타는 사계절 중에 겨울을 가장 좋아했다.춥다는 핑계로 제레미의 곁에 온종일 앉아 책을 읽어도 그녀를 내쫓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올해는 예외였다.베버는 문 앞에서 어깨를 잔뜩 치켜세워 한숨을 쉬었다가 노크를 했다. 그는 자고 있고 곁에서 담요를 덮은 소녀가 책을 읽고 있었다.소나무를 닮은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을 만큼 자라고, 혼자서 식사도 치료도 정리할 줄 알게된 아이는 지난 번 사건 이후 부쩍 어른스러워졌다.베버의 뒤를 따르는 무리들을 보고 이미 책을 덮고 있었다.의자 위에 대충 책을 놓아두고 마치 제레미를 위로하듯, 손을 몇 번 두드리고는 베버에게 눈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갔다.문을 열 때면 언제나 아이의 행복을 가져가는 도둑이 된 기분이라 베버는 이 순간을 가장 싫어했다.그가 눈을 질끈 감고 무리들에게 제레미의 상태를 설명하고, 느린 걸음은 뚜벅거리며 복도로 멀어졌다. 헤게는 베버가 제레미의 병실에 가는 걸 보고 서둘러 주머니 가득 사탕을 챙겨다 마리타의 방으로 향했다.“마리! 우리 간식 먹을까?”계절이 하나 흘러갈 동안 서로 애칭을 부르게까지 됐다.이제 베버는 종종 제레미에게서 마리타를 떼어놓고 나면 뒤처리를 그녀에게 맡겼다.문을 열어도 안에는 하얀 침대와 협탁 뿐이었다. 둥글게 솟은 이불 속 언덕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헤게는 마리가 어른스러워졌다는 베버를 볼 때마다 그가 얼마나 눈치가 없고 무심한지 생각했다.“오늘은 누가 우리 황제 폐하를 속상하게 했을꼬?”지난 번 사건, 마리를 데리러 병원 밖으로 제레미가 다녀온 일은 모두가 잘 숨긴 덕에 괜찮았지만 한 번 힘을 쓴 탓일까, 제레미가 그 뒤로 크게 앓아 보름 가까이 의식이 없었다.문 앞에 매번 쪼그려 앉은 아이가 자기 탓이라고 떨고 있는 모습을 헤게는 매일 아침 봐야했다.그 일 때문에 조금 아프게 성장한 마리가 안쓰러워 일부러 황제라고 장난스럽게 불렀다.“베버 씨인가? 아니면 노엘이 그랬을까? 아니면 마담 시몬?”빵을 주기적으로 주러, 또는 마리의 안정을
노엘이 눈을 감자 서늘한 바람이 다시금 불어왔다.그가 잡고 있는 소매 자락도 함께 차가워져 이미 하얀 이의 정체를 대충은 알 수 있었다.노엘은 실눈도 뜨지 않고 오직 소매만을 동앗줄처럼 잡았다. 어머니를 구하고 자기도 살기 위해서.마리타는 힘을 세밀하게 쓸 줄 몰랐다.이 호수의 넓이나 건너편 빵집에 있을 소년 어머니와의 거리를 계산해 그녀가 할 수 있을 만큼만끌어내는 방법은 몰랐다. 다만 당장으로는 도시라면 가능할 법하다.크지만 하나의 단위이니 괜찮을 성 싶어 소녀는 방향을 잡았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눈이 정통으로 연무를 바라보았다.그제야 웅성대는 비명들이 고음의 공명음을 내며 마리타와 노엘에게로 돌진해왔다.소녀는 박수를 치듯 양손을 모으고 그 다음 어떤 말을 중얼거렸는데 웅웅대는 비명 때문에 노엘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눈을 떴을 때 호수의 물 일부가 바람에 휘날리듯 거대한 덩어리로 공중에 떠 있고 연무가 마치 그들을 공격하는 벌레떼처럼 튀어나와 바로 코앞에 굳어져 있었다.그 속에서 바람도 없이 물방울이 떠 있는 허공 속에 소녀는 익숙하고 또 외로워 보였다.왜인지 그는 귓전을 울리고 기분 나쁜 이 공기가 소녀에게 익숙한 종류의 것이라면 몹시 슬플 것 같았다. 이유를 생각할 틈도 없이 마리타가 그에게 말했다.“시간을 벌 거야. 그대로 네...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가.”마리타는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가 말을 건넸다. 꼭 자기는 여기서 끝일 것같은 어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여전히 찌푸린 채로 말이다.노엘은 그제야 헐레벌떡 어머니에게로 뛰어갔다. 얼마나 급한지 정작 마리타를 뒤돌아볼 생각도 못했다.그래서 휘청이는 다리와 약간의 피가 흐르기 시작한 팔꿈치와 완전히 풀린 동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마리타에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전기가 튀는 덕에 아파서 정신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병원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오늘에서야 대충 알 듯했다.병원 안에서 보던 것들보다 훨씬 징그럽게들 생겨서 전부 불 속에 형태도 갖추지 못하고 타고
저녁에는 병원 건물의 밖조차도 나서지 말며, 가장 안전한 구석과 자리만을 골라 지낼 것. 마리타와 그의 약속이었다. 마리타는 힘을 쓰고 싶어 했다. 소녀의 생각에 병원 밖에는 아픈 사람이 넘치고 자신의 힘으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많으리라는 것이다. 자꾸 숨기라는데도 어릴 적 그의 모습을 닮아가는 마리타의 모습이 제레미의 불안을 부추겼다. 그의 계절은 줄어들지만 마리타가 홀로 남을 계절은 늘어만 가 언제라도 시작될 것만 같아서.치료하는 동안 오래된 꿈을 꿨다. 어린 마리타가 병원으로 오고 몇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길고양이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이미 그것이 죽은 줄을 알았기에 보면서도 감흥이 없었지만 마리타가 멀쩡하게 쓰다듬는 장면은 모두에게 숨겨야할 일이었다. 어디서 시작되는 줄도 모르고 어디서 끝나는 줄도 모르는 기원도 없는 능력이 하필 마리타에게 옮은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렇게 믿었다. 가장 많이 마음을 둔 덕에 그를 삼킨 ‘그것’이 새 먹이로 소녀를 고른 것이라고.“마리타, 어딨어.”그런 그가 깨어났을 때 하필 마리타가 없다는 것은 베버를 충분히 긴장하게 만들고 병원 내 모든 경비의 총구가 그를 겨눌 만한 정도의 일이다. 병원의 명분을 가진 감옥이 다른 작은 아이 하나 간수못했다는 점에서 이미 제레미는 그들에게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다. 베버는 그의 생각을 눈치채고 그를 어떻게든 말려보려 했다.“지금 찾는 중이야. 멀리는 못 갔을 거야.”그가 깨어나기 전까지 마리타의 소재를 알아야한다고 보안팀을 재촉했으나 결국 내놓게 된 이 대답을 두고 베버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마저도 제레미의 귓바퀴 근처에도 닿지 못한 듯싶었다.“내가 순순히 죽어주니까, 그 애도 그럴 줄 알았어, 베버?”“실수야. 미안해 그래도 일단 멈춰. 네가 움직이면 어떤 일이든 마리타한테 안 좋은 결과로 돌아와.”“매번 안 된다고만 하는 너희보다는 낫겠지.”이미 그를 지나쳐 가운을 걸치고 있는 제레미는 곧 창을 넘어 탈출할 기세였다. 매번 안된다고만 한다는 말이 베버
어릴 적에는 잘 숨겼지만 점점 기포처럼 올라오는 의문들을 풀 방법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므로 커지는 방울을 차마 터뜨리지도 못한 채 제 영역을 넓히는 꼴만 지켜볼 까닭이었다.해가 지기 전에 빵집에 간 것은 희대의 성취였다. 초승달을 닮은 빵을 달라고 아까 그 소년을 닮은 여인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넸다. 여인의 손목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파리한 안색을 제외하고는 소년을 닮은 그녀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울 듯 말 듯한 얼굴에 미소라 마리타는 이 사람도 퍽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제레미가 짓는 얼굴과 닮았던 것이다.“딱 우리 아들 또래네. 엄마가 만들었다 그러면 이 빵을 제일 좋아하거든.”여운이 남는다고 제레미는 이 집의 빵을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 빵의 주인조차 여운이 남는 사람인지 그 미소가 유달리 인상에 남아 마리타도 감사하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초콜릿이 잔뜩 덮인 떡갈나무 색 초승달과 노오란 초승달을 가방에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딱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정도였다. 마리타는 이제 좀 더 빨리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거리를 지나 맑은 호수로 나아갈 적에 이미 느리게 걷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멀건 뺨에 저마다의 묘한 미소를 지은채로 걷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마리타는 고개를 숙였다.머리로 빠르게 ‘하필’ 저지른 작은 실수들이 떠올랐다. 병원에 오래있던 탓에 현실감각이 떨어져 하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밖에 나와 있었다. 또는 고양이를 봐버린 어릴 적의 어떤 날도 실수라면 실수일 것이다. 소녀는 또다시 익숙한 자세로 허리를 굽힌 채 걸었다. 이미 머리속은 어린 날의 하루로 돌아가 있었다.가장 오랫동안 궁금했다. 어느 순간부터 잘못됐을 지. 다리를 절던 병원의 고양이가 다음날 네 다리로 복도를 거닐던 날에 기쁜 마음에 먼저 손을 댔다.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던 생명은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듯 베버의 언성이 높아지고 제레미가 그녀를 떨리는 손으로 자꾸만 다독
어릴 적에 탑에서 긴 머리카락을 내려 탈출했다는 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마리타는 머리를 길렀다. 때로는 여러 작은 동물을 길러 금세 호박 마차를 기다렸다. 또 어떤 시절에는 지느러미는 없으나 힘을 못 쓰는 평범한 사람이 되면 왕자가 저를 데리러 와줄 줄 알았다.그런데 정작 그녀의 왕자는 저 침대에 앓아누워 매일 밀랍 인형같은 얼굴로 겨우 미소나 짓는 사람이었다.그 무렵에 이미 마리는 알았다. 드레스를 입은 공주로서는 이 곳의 담장을 넘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크게 벌린 입안으로 서늘한 가을 공기가 드나들었다. 잔디밭을 밟고 맡던 공기의 냄새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고 다만 조금 더 차갑고 시원했다. 담장을 충분히 넘고도 그녀는 더 멀리 날았다.처음 해보는 시도인 탓에 계산을 잘못한 건지 전에 생각한 지도하고는 영 딴판인 세상에 도착했다.차가 지나다니는 도로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당황한 마리타는 보자기를 가방에 서둘러 집어넣고 불안한 표정으로 가로수만 잡고 서 있었다.공중에 뜬 네모난 판은 처음 보는 화살표로 가득하고 도로에는 노랗고 하얀 선들로 낙서를 해놓았다.사람은 코빼기도 없어 그녀는 넋을 놓고 높다란 하늘만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소녀는 빵집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마리타의 뺨을 스치고 빵 내음이 거리에 가득했다.도로에 정차한 트럭의 짐칸에는 작은 여자 아이 하나가 들어가도 모를 만큼의 공간이 넘쳤고 마침 마리타가 그 작은 여자 아이였다.부드럽게 달리던 차가 덜덜거리며 돌길을 건널 적에 마리타가 슬그머니 천막을 열고 도로 내린 것이 방금의 전말이었다.이름도 알 수 없는 도시는 온갖 쇠로 된 벽과 사람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빌딩으로 가득 찼다. 그 아래에 몇 가지 기둥으로 받치고 가게가 줄지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은 어느 모로 봐도 예쁘다고 볼 수 없었다.그러나 새하얀 구름이 투명한 유리창에 비치자 하늘이 고스란히 반사되어 비춰졌는데 마리타는 오직 그 모습만은 참으로 자유로워 보였다. 그것이 겉으로 보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