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Author: 비담

제1화

Author: 비담
강루인은 자궁 외 임신 진단서를 든 채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로 법적 남편인 주영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 초 동안 울린 후에야 전화기 너머로 주영도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진단서를 꽉 움켜쥔 강루인은 목이 메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 병원에 와줄 수 있어?”

주영도가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여자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도 오빠, 이거 혹시 내 생일 선물이야?”

주영도는 더는 묻지 않고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 했다.

“나 지금 바쁘니까 노 비서한테 연락해.”

전화가 끊기기 직전 강루인은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마음에 들어?”

“영도...”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다시 한번 진단서를 꽉 움켜쥐었다.

강루인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바로 주영도의 첫사랑 구아정이었다.

“보호자분 안 오셨어요?”

의사가 혼자 돌아온 강루인을 보며 물었다. 강루인의 안색이 여전히 핏기없이 창백했다.

“제가 사인할게요.”

의사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별로 놀라지 않았다.

강루인은 차가운 수술대에 누워 천장만 멍하니 쳐다봤다. 차가운 기구가 몸 안으로 들어온 순간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더니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비웃었다.

‘하긴. 나랑은 액땜하려고 결혼했는데 어찌 진정한 사랑이랑 비교할 수 있겠어.’

사실 강루인과 주영도의 결혼은 미신에서 비롯되었다.

5년 전 주영도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했고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젊은 나이인 그가 홀로 세상을 떠나는 게 안타까워 죽기 전에 완전한 인생을 만들어주려 했다.

단지 강루인의 사주가 주영도와 잘 맞는다는 이유로 그녀는 액땜 신부로 선택되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신분으로는 절대 주씨 가문에 시집갈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혼 한 달 후 주영도는 기적처럼 회복하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을 미신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은혜 덕분에 강루인은 사모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그녀에게 이런 ‘복’이 있는 걸 어찌하겠는가?

사실 구아정이 귀국하기 전까지 주영도는 그녀에게 꽤 잘해줬다. 남녀 간의 사랑은 없어도 서로 존중하며 지냈다.

하지만 구아정이 귀국하면서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가 던져진 것처럼 그들의 평온했던 삶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수술대에서 내려온 강루인은 창백한 얼굴로 병원을 나섰다.

“사모님.”

갑자기 나타난 노윤환을 본 강루인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희미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저도 모르게 그의 뒤에 있는 검은색 차를 쳐다보았다.

노윤환이 말했다.

“대표님 지금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요.”

그 한마디에 강루인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고 자신을 비웃듯 맥없이 피식 웃었다.

‘지금 무슨 기대를 하는 거야?’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 강루인은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구아정의 셀카였는데 이런 메시지를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삭제해야 할 연락처라는 걸 알면서도 강루인은 바보처럼 저장했다.

상대의 의기양양한 미소보다 눈에 더 들어온 건 목에 한 목걸이였다.

[예쁘지? 영도 오빠가 선물해준 거야.]

강루인은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단번에 알아봤다. 한 달 전에 주영도와 함께 경매에서 직접 낙찰받은 것이었다.

5주년 결혼기념일 선물로 그녀에게 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착각이었다.

선샤인 빌리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도우미 진경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사모님, 재료는 모두 준비해 놨습니다.”

강루인이 멈칫하다가 말했다.

“다 치워요. 이젠 필요 없어요.”

오늘은 주영도와 결혼한 지 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원래는 직접 근사한 저녁을 만들어 그와 함께 축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영도에게 있어서 첫사랑의 생일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강루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본 진경자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으려 했지만 강루인은 이미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올라가기 전 강루인이 한마디 했다.

“내 저녁은 준비하지 않아도 돼요.”

달이 휘영청 밝은 밤, 주영도가 집에 들어왔다.

진경자는 다가가 그의 외투를 받아 들었다. 늘 맞이하러 나오던 사람이 보이지 않자 주영도가 물었다.

“집사람은요?”

진경자가 대답했다.

“사모님은 방에서 쉬고 계십니다.”

안방.

강루인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잠귀가 밝은 터라 차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깨어났다. 주영도가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방 문이 열리더니 침대가 갑자기 푹 꺼졌다. 익숙한 냄새가 풍겨 왔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오랫동안 한 이불을 덮고 잔 그녀가 그의 뜻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강루인이 그의 손을 잡고 거부 의사를 밝히자 주영도는 크게 당황한 듯했다. 평소에는 참 적극적이었으니까.

“왜 그래?”

강루인이 덤덤하게 답했다.

“생리 중이야.”

“오늘이 배란일이 아니었어?”

그 말에 그녀의 두 눈에 다시 한번 조롱이 스쳐 지나갔다. 전에는 그의 ‘관심’을 그녀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했지만 이젠 깨달아야 할 때가 됐다.

사실 주영도가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주씨 가문에서 아이를 원했기 때문이었고 주영도 역시 좋은 날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여 매달 이맘때쯤이면 그는 발정 난 황소처럼 부지런히 노력했다.

하지만 몇 시간 전에 아버지가 될 기회를 잃었다는 걸 주영도는 알지 못했다.

강루인은 몰래 배를 어루만졌다. 그녀와 인연이 없는 아이만 생각하면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임신 사실을 알고 자궁 외 임신 진단을 받기까지 불과 30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절망과 고통에 빠져 있을 때 남편은 그녀를 버리고 첫사랑과 사랑을 속삭였다.

순간 목이 메었고 코끝이 찡해졌다.

주영도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물었다.

“병원에는 왜 갔어? 어디 아파?”

뒤늦은 안부에도 강루인의 마음은 한없이 차갑기만 했다.

그녀의 시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5년 짝사랑에 결혼 생활 5년까지 더하면 어언 10년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주영도에게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혼하자, 우리.”

강루인은 더 이상 주영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주영도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지금 열나?”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 영도 씨 사랑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아. 이혼하면 숨길 필요 없이 구아정 씨랑 당당하게 만날 수 있어.”

그 말에 주영도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질투? 나한테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

구아정이 말한 것처럼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야말로 내연녀다. ‘내연녀’인 그녀에게 자격이 있을 리가.

“나랑 아정이는 아무 사이 아니야. 그냥 친구일 뿐이야.”

‘친구? 그럼 잠자리하는 친구야?’

강루인은 가슴속의 아픔을 억누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내일 변호사를 만나서 이혼 합의서를 작성할 거야. 이혼은 내가 먼저 요구했지만 잘못한 건 영도 씨니까 받아야 할 위자료는 다 받을 생각이야.”

‘난 성모가 아니라서 절대 빈손으로 못 나가.’

사랑은 얻지 못해도 돈마저 놓칠 수는 없었다.

이혼 후의 물질적인 생활이 주씨 가문에 있을 때보다 못할 거라는 걸 알기에 돈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늘 무표정하던 주영도의 얼굴이 드디어 흔들렸다. 억지를 부리는 그녀를 보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병원에 같이 안 가서 그래? 노 비서를 보냈잖아. 예전에는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순간 강루인은 심장이 멎는 듯했고 두 눈에 조롱이 스쳐 지나갔다. 비서를 보낸 게 아주 큰 은혜라도 베푼 것처럼 말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주영도의 눈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 강루인은 그걸 놓치지 않았고 조롱이 더욱 짙어졌다.

“네 생일?”

강루인이 드물게 날카로운 말투로 말했다.

“주 대표 머릿속에는 그 여자밖에 없어?”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100화

    강루인이 눈앞의 해산물 죽을 밀어냈다.“육개장 먹고 싶어요.”주영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강루인이 고마워할 거라 생각했지만 돌아온 건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그 말에 진경자의 표정도 변했다. 주영도의 눈치를 살피면서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사모님, 지금 육개장을 만들려면 시간이 꽤 걸려서 아침 식사로 못 드실 수 있어요.”강루인이 말했다.“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진경자는 다시 주영도를 쳐다봤다. 그가 손을 흔들며 가서 하라고 하자 더 말하지 않고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주영도가 깁스한 그녀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지금 다니는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요양이나 해. 다 나은 후에도 지금 하던 일 계속하고 싶다면 다른 자리 알아봐 줄게.”‘무슨 뜻이지? 내 주변에 이성이 나타나서 영도 씨 이미지에 안 좋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나의 인간관계를 정리하려는 거고?’강루인은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영도가 말했다.“예전처럼 말 잘 들으면 주씨 가문 사모님 자리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해.”주영도는 아침을 먹고 회사로 출근했다. 강루인은 여전히 식탁 앞에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주씨 가문에 시집왔을 때 박정금이 말했었다. 주영도의 남은 인생을 잘 돌보고 말을 잘 들으면 주씨 가문 사모님 자리는 누구도 넘볼 수 없다고.그녀는 영원히 주영도의 아내이자 주씨 가문의 며느리일 거라고 했다. 그때 강루인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말 꿈을 이룬 것처럼 기뻤다.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뜨거운 열정을 잊었다. 마음이 식어버려 더 이상 끓어오르지 않았다.한 시간 후 그녀가 먹고 싶다던 육개장이 상에 올랐다. 하지만 몇 입 먹지 않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입맛은 변하게 된다.강루인은 뒷마당에서 햇볕을 쬐었다. 흔들의자가 흔들려 하늘의 구름도 따라 움직였다.바로 그때 갑작스러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삐쩍 마른 얼룩 고양이였다.어찌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99화

    ‘내가 영도 씨랑 결혼한 게 몸을 파는 거라 생각하는 거야? 대체 날 뭐로 보는 거지? 술집 아가씨?’강루인이 이를 악물었고 마음이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눈을 크게 뜨고 억지로 참았다.“나 후회해.”주영도와 결혼한 걸 후회했다.그녀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렇게 그녀의 마음을 짓밟아서는 안 되었다.그동안 강루인은 헛된 기대를 했다. 정성을 다하면 그의 마음도 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의 심장은 돌보다 더 단단했다.그녀의 눈에 선명히 드러난 절망을 본 주영도는 잠시 멈칫했다.강루인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나 후회해.”주영도는 그 후회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갑자기 그녀를 덮쳤다.반응이 느린 강루인은 옷이 벗겨지고 나서야 그가 뭘 하려는지 깨닫고 바로 저항했다.“안 해.”주영도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올리고 한쪽 다리로 그녀의 다리를 제압했다.“이혼은 꿈도 꾸지 마. 주씨 가문에 이혼은 절대 없어.”주영도가 조롱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리고 네 아버지 말이야. 우리 가문과의 혼사를 포기할 것 같아?”말이 끝나자마자 주영도는 그녀를 침범하기 시작했다.“너 계속 아이를 원했잖아. 안 하면 아이가 어떻게 생겨?”‘지금 너무 한가해서 이런 잡생각이나 하는 거야. 아이가 생기면 얌전해지겠지.’흥분이 최고의 윤활제지만 강루인은 흥분하기는커녕 고통스럽고 괴롭기만 했다. 그 바람에 주영도도 쉽게 침입하지 못했다.한쪽은 강제로 밀어붙였고 다른 한쪽은 계속 저항했다. 이번 잠자리는 누구에게도 즐겁지 않은 시간이었다.일을 마친 후 강루인의 눈빛은 공허하기만 했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몸의 떨림이 아직 남아있지 않았다면 주영도는 실리콘 인형과 잔 게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주영도는 베개를 꺼내 그녀의 허리 아래에 받쳐 엉덩이를 높였다. 이런 자세가 임신 확률을 높인다고 들었다.욕정을 풀고 난 주영도는 감정이 안정되었다. 적극적으로 뒷정리하는 그와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98화

    비몽사몽 눈을 뜬 강루인은 지금 어디 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의 기억은 차성열이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던 순간에서 끊겨 있었다.“선배, 집에 데려다줘서 고마워요.”강루인은 혀가 꼬여 끈적하게 말했다. 하지만 주영도의 눈에는 차성열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빨리 가요. 영도 씨가 보면 선배를 괴롭힐 거예요.”그 말에 주영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내가 왜 그 사람을 괴롭혀?”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강루인의 흐릿했던 정신이 약간 맑아졌다. 주위를 둘러보고서야 안방 침대에 누워있다는 걸 알았다.강루인은 머리가 어지러워 머리를 흔들었다.“술 냄새나니까 오늘 밤은 옆방에서 자.”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주영도가 술 냄새를 싫어한다는 걸 기억했다.예전에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들어오면 주영도가 싫어할까 봐 항상 다른 방에서 잤다.강루인이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그때 주영도가 어깨를 누르면서 다시 침대로 밀쳤다.가뜩이나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데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가 윙 해져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몇 시간 전에야 주영도는 강루인이 고용한 대리 변호사가 누구인지 알아냈다. 바로 고원겸이었다.처음엔 고원겸이 왜 이 사건을 맡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차성열을 떠올린 순간 바로 깨달았다.차씨 가문과 고씨 가문은 오랜 친분이 있었다.강루인의 복숭앗빛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의 아내가 남자를 유혹할 매력이 충분하다는 걸 알았다.물기 어린 눈빛과 붉게 달아오른 볼, 살짝 벌어진 붉고 촉촉한 입술은 마치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 그녀의 맛을 아는데도 여전히 질리지 않았다.주영도의 눈빛이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다.‘그러니까 오늘 밤에 이런 모습으로 차성열을 유혹했던 거야?’몸을 숙여 강루인의 턱을 잡고 강제로 시선을 맞춘 후 싸늘하게 말했다.“어쩜 이렇게 상스러운 짓만 골라 해?”바로 코앞이라 강루인은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강루인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상스럽다고?”주영도의 목소리는 여전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97화

    “루인아.”강루인이 멍하니 있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차성열과 눈이 마주쳤다.“선배.”“여기서 뭐 해?”강루인이 가볍게 대답했다.“바람 쐬러 나왔어요. 선배는요? 여긴 어쩐 일이에요?”“방금 거래처를 만났어.”그러고는 그녀의 차 안을 힐끗 봤다.“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혼자 차 몰고 나왔어?”“액셀 밟는 발은 멀쩡해요.”강루인이 물었다.“이따 바빠요?”차성열이 되물었다.“무슨 일 있어?”“술 한잔하고 싶은데 같이 갈래요?”차성열은 분위기를 깨지 않았다.“어디로?”두 사람은 조용한 바에 갔다. 바 안의 조명이 어두워 강루인의 쓸쓸한 분위기를 감췄다.차성열은 말없이 그녀 곁에 있어 줬다.강루인이 감정을 쏟아내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저 너무 외로워서 누군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차성열은 그녀의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사실 강루인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그녀는 말이 별로 없었다. 늘 조용했고 튀는 걸 싫어했다.그럼에도 그녀에겐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강루인은 주영도와 결혼한 후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다른 재벌 사모님처럼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는 게 아니라 여전히 소박했다.오늘도 트렌치코트 밑에 심플한 흰색 티를 입었고 아무 액세서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들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지금도 바 안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그녀는 알지 못했다.사실 강루인은 주량이 셌다. 주영도의 밑에서 일하면서 단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몇 잔 마셨을 뿐인데 벌써 취기가 오른 듯했다.차성열은 눈빛이 흐릿하고 볼이 붉어진 강루인을 보며 그만 마셔도 되겠다고 판단했다.“집에 데려다줄게.”“집?”조명이 강루인의 눈을 밝게 비췄다. 강루인이 나약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집이 없어요.”그녀는 가정을 간절히 원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온전한 가정을 주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96화

    강루인은 박정금의 말이 그녀를 겨냥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박정금의 눈에 강루인은 작은 가문 출신보다도 못한 존재였다.박정금은 주초원을 위해 강루인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그녀를 괴롭혔다.그래도 강혜미는 건드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남의 집 딸이었으니까. 하지만 강루인은 주씨 가문의 명실상부한 며느리였기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조강지처 자리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점심 식사 준비도 그녀가 직접 했다.허리 부상과 다리 부상까지 겹친 상태에서 고된 일을 하자 강루인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박정금은 그녀의 아픈 척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그렇게 얼굴을 찌푸려? 내가 일 시켜서 불만이야?”강루인이 답했다.“아니에요.”말을 마치자마자 이마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박정금이 싫은 티를 팍팍 냈다.“됐어. 됐어. 너 필요 없으니까 그냥 가.”강루인은 굳이 보지 않아도 구아정이 엄청 고소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강혜미와 함께 본가를 나왔다.강혜미가 직접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지만 정신적인 학대는 충분히 느꼈다. 본가를 나오자마자 참지 못하고 불평을 쏟아냈다.“어쩜 이렇게 쓸모가 없어? 너처럼 약해빠진 사람도 없을 거야.”‘정말 도우미들보다도 못해.’강루인이 말했다.“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게 누구 때문인지 잊었어?”죄책감이라는 단어는 강혜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죄책감은커녕 강루인의 무능함을 비웃었다.“우리 집안에서 널 키워줬는데 당연히 날 감싸야 하는 거 아니야? 짜증 나. 너 때문에 온 오전 시간만 낭비했어.”“혜미야.”그때 강혜미의 친구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녀는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 차에 올랐다.운전하는 친구가 백미러로 강루인을 보며 말했다.“네 언니 꽤 예쁘게 생겼네. 그러니까 주씨 가문에 시집갔지.”강혜미가 코웃음을 쳤다.“시집가면 뭐? 그래봤자

  • 아이를 잃은 날, 남편은 다른 여자 촛불 앞에   제95화

    주영도의 관심은 6월의 날씨처럼 변덕스러웠다. 조금 전까지 서리처럼 차갑다가 다음 순간엔 태양처럼 뜨거웠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정말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식사가 차려졌다. 주영도가 강루인을 안고 내려오자 진경자의 눈에 안도감이 스쳤다.식탁까지 온 이상 강루인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초원이 아직 어려. 새언니인 네가 좀 더 너그럽게 이해해.”그 말에 강루인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조명이 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부드럽게 비췄지만 강루인은 전혀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다. 입안의 음식도 맛이 없어졌다.다시 말해 주영도는 여동생이 잘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옳고 그름을 모르는 게 아니라 단순한 편애였다.강루인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다 먹었어.”주영도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을 보며 뭐라 하려 했다. 그런데 강루인은 이미 진경자를 불러 부축해달라고 했다.말재주가 없는 주영도의 모습에 진경자는 속이 터졌다. 주영도는 강루인이 그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다고 여겼다.주초원은 그의 유일한 여동생이고 아직 어려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 당연했다.‘고작 액세서리 몇 개 가져간 걸 가지고 왜 이리 소란인지, 참. 가져가면 다시 사면 되는데. 내가 언제 안 사줬어? 이렇게까지 속 좁게 굴 필요가 있나?’2m짜리 침대에서 강루인과 주영도는 양 끝에 누웠다. 둘 사이의 거리가 은하수만큼 멀었다.다음 날 강루인은 안방에서 나오자마자 강혜미와 마주쳤다.어제 그 난리를 피운 후 강혜미가 보이지 않아 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있었다.강루인은 그녀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박정금에게서 전화가 와 강혜미를 데려오라고 했다. 그 소리에 강혜미가 바로 거부했다.“내가 거길 왜 가? 안 가.”강루인이 덤덤하게 말했다.“어제 사람을 때릴 땐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 것 같더니.”“그거야 언니 대신 화풀이해주려고 그런 거지, 날 위해서가 아니야.”이십 년 넘게 자매로 지냈는데 강혜미의 속내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강루인을 위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