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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해일은 피곤하다.

Author: 초록 개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4 00:01:22

반란 세력의 정황을 모두 파악하고, 자료 정리와 보고, 감시실 미팅, 왕과의 영상 회의까지

전부 끝났을 때— 해일은 이미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피곤했다.

그런데 영상 통화는 끝나가기는커녕 점점 더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반란 세력이 이렇게 커졌다니요!!!”

“이 우두머리는 처음 보는 뱀파이어입니다!! 왜 정체도 모를 놈이 우리 구역을 해집고 다니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정식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은 뱀파이어들이 우리 사회와 인간 사회까지 어지럽히다니!!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 대통령과 회담부터 하시죠!!!!!”

수십 명의 고위 관료들이 각자의 화면에서 동시에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책상을 치고, 어떤 이는 서류를 던질 것처럼 분노했고, 어떤 이는 심판자 호출을 외치며 소란을 일으켰다.

해일은 머리를 잡고 조용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귀 터지겠네...”

왕좌 앞, 뱀파이어들의 왕 이현명 역시 관료들의 끝없는 샤우팅을 들으며 미간을 깊게 짚었다.

“여러분.”

왕의 목소리가 화면 너머로 차분히 울렸다. 그러나 관료들은 계속 떠들었다.

“즉각 처형해야 합니다!”

“심판자 풀어야 됩니다!”

“신생 뱀파이어들 전수 조사해도 모자라요!”

“인간 사회에 퍼지기 전에 통제 조치 들어가야—!”

이현명은 결국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

해일도 옆에서 지쳐 중얼거렸다.

“폐하.... 관료 분들 너무 시끄러운 것 같은데요? 원래 이렇게까지 흥분하지는 않았는데.......”

이현명은 피곤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해일아, 네가 보기에 지금 조용할 상황이냐?”

해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졌다. 왕은 의자를 조금 뒤로 기대고 딱 잘라 말했다.

“조용.”

순간 화면 너머가 쨍 하고 얼어붙었다. 샤우팅하던 관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입을 닫았다.

이현명은 천천히 다시 말했다.

“상황은 파악했다. 자료는 방금 지율이 보냈고, 해일 너도 현장 파악을 완료했지.”

해일은 고개를 숙였다.

“네, 폐하.”

“좋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소리 지르는 게 아니라—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

관료들 사이에서 조용히 숨소리만 들렸다. 이현명은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그리고 이 우두머리... 처음 보는 뱀파이어라고 했지.”

해일이 말했다.

“네. 혈통도 기원도 기록이 없습니다.”

왕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그래.”

이현명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일단 저들이 눈치채기 전에 우리 쪽에서 정리에 들어가야 한다.”

왕의 붉은 눈이 깊게 빛났다.

“루비 아워 쪽 안전 지대는 평소처럼 움직이게 하고, 왕실 최고 심판자들을 추가로 파견해라.

나는 인간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이번 사건에 대한 지원을 받도록 하겠다.”

이 지시가 떨어지자 고위 관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 한 관료가 손을 들었다.

“폐하.”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자존심이 섞여 있었다.

“이 반란 세력은 우리 쪽과 인간 정부 모두에 미등록된 뱀파이어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도 우리 왕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계속 말하라.”

관료는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들은 우리가 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 관료들의 힘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됩니다. 혹여라도 반란 세력들이 이 궁까지 밀고 들어온다면... 저희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영상 속 여러 관료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영상 통화 속에 보이는 이들은 겉으로만 보면 그저 관료— 문서 보고받고, 회의하고, 법령을 만드는 행정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뱀파이어 세계가 처음 생겨나던 혼란의 시대,

온갖 사냥꾼과 괴물, 반란과 암살을 겪으며 수백 년 동안 전투를 견뎌낸 왕실의 살아 있는 전사들이었다.

누군가는 수십 명의 헌터를 동시에 상대해 살아남았고, 누군가는 도시 하나를 피로 물들인 흉악한 뱀파이어를 단독으로 사냥해 끝장낸 전설적인 존재였다.

지금 수염이 희끗한 노관료처럼 보이는 이도 실은 뱀파이어들은 전설로 떠받드는 “그림자 학살자”라는 이름을 가진 원로 심판자였다.

왕실에 오래 머무르며 행정직을 맡고 있을 뿐, 그들의 몸은 여전히 강철 같고 그들의 오라는 여전히 날카롭고 짙었다.

뱀파이어의 특성상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 그들의 눈빛과 기골은 지금도 전장을 지배할 만큼 거대하고 무서웠다.

반란 세력이 하찮은 신생 뱀파이어들을 만들며 자신만만할지 몰라도, 왕실 최고 전사들이 진심으로 움직인다면— 이 반란은 단 몇 날 안에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한 힘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현명은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위 관료들의 힘을 인정하며 말했다.

“그대들의 뜻은 잘 알겠다. 그러나 성급한 충돌은 피해야 한다. 지금은 ‘전투’가 아니라 ‘통치’를 위한 대응이 필요하다.”

관료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2026년. 뱀파이어와 인간이 같은 사회에서 각자의 영역과 이해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해진 시대였다.

불가피한 전쟁, 세력 간의 충돌, 대규모 사냥극 같은 과거의 혼란은 더 이상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왕실 관료 중 한 명이 조용히 말했다.

“지금 시대는 전쟁이 아닌... 공존을 고민해야 하는 때입니다.”

다른 관료도 그 말에 동의하며 이어 말했다.

“불필요한 신생 뱀파이어는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사회를 어지럽히는 무리만 늘어날 뿐이죠.”

이 말에 이현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생 뱀파이어 문제는 오래된 논쟁거리였다.

약물을 이용해 무분별하게 만들어지는 신생들, 인간 사냥꾼들의 공격에 의한 변이, 혈통·관리·교육 없는 변이, 통제되지 않는 폭주 사례.

이들은 뱀파이어 사회뿐 아니라 인간 사회에도 직접적 위협이 됐다.

뱀파이어의 존재를 모르는 평범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순간의 혼란은 피해야 했고 일어나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반란 세력은 뱀파이어 사회는 물론 인간 사회까지 장악하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이현명의 얼굴은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현명의 굳은 표정에서 그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나자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해일과 관료들도 몸을 굳혔다.

“맞다. 불필요한 신생은 우리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 문제 때문에 인간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하루 이틀 난색을 표한 게 아니지.”

실제로 인간 정부는 새로운 신생 뱀파이어가 늘어날 때마다 대책 회의와 비밀 보고를 반복해야 했다.

뱀파이어와의 조약을 유지하면서도 국민 안전을 고려해야 했고, 뱀파이어의 존재 자체를 아직 완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부담도 컸다.

이현명은 피곤한 듯 설풋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어느정도 답을 찾은 듯 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난 인간 대통령과 회담을 이어가야 하니 그대들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서 대비하도록.”

그렇게 화상 회의는 마무리 되었고 해일은 노트북을 닫고 피곤함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해일은 잠시 두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화상 회의가 끝났다는 안도감보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더 무거워졌다.

“하.... 오늘 진짜 끝도 없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10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인간들은 이미 바쁜 하루를 시작했을 시간.

하지만 해일에게 이 시간은 오히려 퇴근하고도 한참 지났어야 할 시각이었다.

“미쳤네... 또 야근을 넘어 철야였네.”

해일은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밤을 살아가는 존재라지만, 며칠째 제대로 쉬지 못한 몸은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의 눈 밑에도 은재 못지않은 옅은 그늘이 내려오고 있었다.

“빨리 집으로 가서 쉬어야겠다. 오늘은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다.”

해일은 작게 중얼거리며 목을 한 번 굽혔다 폈다. 밤새 이어진 회의, 정보 수집, 계획 수립까지— 신생 뱀파이어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1차 대비책을 마련한 이상, 당분간은 잠시라도 숨을 고를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그래..... 오늘만큼은 좀 쉬어도 되겠지.”

해일은 짐을 어깨에 걸친 채 감시실 쪽에 마련된 작은 방에서 나왔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벽에 기대 서류를 넘기고 있는 은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은재, 너 아직 집에 안 갔어?”

해일의 목소리에 은재가 고개를 들었다. 눈 밑 다크서클은 더 진해져 있었고, 머리는 더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은 듯 서류 더미 위를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형, 이번 주말에 인간 사형수들 사형 집행이 있다고 해서... 목록 좀 보고 있었어. 5명이라는데..... 살인에 강간범에 묻지마 범죄로 죄없는 사람들이 사망했고... 죄질이 심하네.....”

해일은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은재 옆 의자를 끌어와 털썩 앉았다.

서류를 넘겨보며 낮게 휘파람을 흘렸다.

“그래? 그럼 사형 집행 끝나면 당분간은 혈청 커피 안 먹어도 되겠네.”

그 말에 은재가 어깨를 으쓱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글세... 모르겠어. 사형 집행하면 일시적으로는 피에 의한 충족감이 있어. 그래서 짧아지는 주기를 예전처럼 늘려보는 수밖에 없어.”

은재의 말에 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 1년 주기였던게 9개월 정도로 짧아졌으니 우리 조금만 노력해서 늘려보자”

해일은 은재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너 할 수 있을거야. 걱정하지마.”

은재는 자신에게 응원을 해주는 해일을 보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형. 노력해보자.”

은재는 서류를 툭 내려놓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근데 이번 신생들 사냥 가면... 나도 끼워줘야 해. 알았지?”

은재의 안정 주기가 짧아 지는 만큼 사형 집행관으로서 인간 사형수를 사냥하면 괜찮아지겠지만 이번 반란 세력까지 사냥하게 되면 짧아진 안정 주기가 확실히 길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 해볼 수 있는건 다 해보자!”

은재는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자신도 신생 뱀파이어 사냥에 끼워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해일 형. 내 부탁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나 진짜.... 폭주하기 싫어”

“은재야......”

해일은 그동안 은재가 폭주로 인해 이성을 잃고 무너지는 것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힘들어 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너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 이번 사냥할 때 너도 간다고 폐하게 말씀 드려 놓을테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내가 옆에서 잘 봐줄테니까! 알았지?”

해일이 다정한 말에 은재는 걱정과 고민을 한시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형~ 나 한테 형 뿐인거 알지? 진짜 사랑해~~”

해일은 이 진지한 상황에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은재를 보며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동생인 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 그래~ 이제 급한 일은 어느 정도 정리 되었으니 우리도 집으로 가자. 조금이라도 쉬어야 힘을 내지~!”

“그래. 형. 오늘 집에가서 혈청 커피나 먹고 좀 쉬어야겠다. 나 형 집에 있는 혈청 커피 믹스 가져 가도 되지?”

해일은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집에 있는 커피를 가져가겠다는 그의 요구에 황당함을 느꼈다.

“다 가져가라. 그냥..... 환장하겠네.... 우리 집에 있는 믹스 커피의 반은 너한테 가는 건 알고 있냐?”

은재는 집에 가기 위해 자신의 짐을 챙기다가 해일의 푸념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반은 내꺼 아니었어?? 내가 잘못알고 있었나?”

뻔뻔한 은재의 표정과 말에 해일은 할말을 잃었다.

“으휴.... 말을 말자.”

해일과 은재가 티격태격하며 감시실을 벗어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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