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월 3일 금요일, 오후 책 납품 포장』
나는 물통을 든 채 이헌에게 걸어갔다. 자판기 앞에 닿기 전에 이헌이 벽 쪽으로 비켜섰다. 지나갈 자리를 내주는 움직임에 나도 멈췄다.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요. 아버님은요?”
“주무세요. 수액 맞으면서 오늘 밤 지켜보자고 했어요.”
이헌이 병실 쪽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들어가실 거예요?”
“당신이 괜찮다면요.”
나는 물통 뚜껑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지금은 주무시게 두고 싶어요.”
“그럼 여기 있을게요.”
아버지를 깨우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헌 옆을 지나 정수기로 갔다. 물이 차는 동안 이헌은 오지 않았다. 통이 넘치기 전에 버튼에서 손을 뗐다.
“오늘 회의는 끝났어요?”
“네.”
“공장 얘기도 했어요?”
이헌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물통에 뚜껑을 돌려 끼웠다.
“아버지가 쓰러진 날인데, 그것부터 물어보네요.”
“물어봐야 하는 일이에요.”
“그럼 대답해 주세요.”
복도 건너에서 병실 문이 열렸다. 보호자가 전화기를 귀에 대고 나왔다. 이헌은 내 대답을 기다렸고, 나는 물통을 든 손을 내렸다.
“아버지한테 물만 갖다 놓고 올게요.”
◈
아버지는 옆으로 누워 있었다. 입원할 때 벗어 둔 작업복이 의자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나는 옷을 접어 사물함에 넣고 물통을 침대 옆에 놓았다.
아버지가 눈을 조금 떴다.
“집에 가.”
“안 가요. 잠깐 바람만 쐬고 올게요.”
“춥다.”
“외투 입고 갈 거예요.”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 드렸다. 아버지가 다시 눈을 감은 뒤에야 휴대폰을 확인했다. 공장에서 온 새 연락은 없었다.
나는 병동 안내대에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알렸다. 간호사는 연락받을 번호를 확인하고, 옥상 정원에 갈 거면 곧 닫는 시간을 확인하라고 했다.
복도로 돌아오자 이헌이 자판기에서 떨어져 섰다.
“옥상에 정원이 있대요. 거기서 얘기해요.”
“추운데 괜찮겠어요?”
“길게 안 할게요.”
엘리베이터 안에는 우리 둘만 있었다. 나는 층수 버튼 옆에 섰고 이헌은 문 쪽에 섰다. 금속 벽에 외투 소매가 비쳤다. 손을 내밀면 닿는 거리였지만 주머니에 넣었다.
“저녁 드셨어요?”
이헌이 물었다.
“주먹밥 먹었어요. 주원 씨가 사다 줘서.”
“다행이네요.”
“병원 일도 다 해 줬어요.”
“들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나는 문이 다 열린 뒤에 나갔다.
◈
정원에는 잎이 떨어진 나무와 벤치가 있었다. 건물 안쪽 유리문에 이용 시간이 붙어 있었다. 아직 닫을 때는 아니었다.
바깥으로 나가자 외투 깃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이헌은 문을 잡은 채 내가 나가기를 기다렸다.
“여기요.”
나는 벽 가까운 벤치를 골랐다. 앉으려던 자리 한쪽에 털모자가 놓여 있었다. 회색 실로 뜬 모자였다. 가장자리에 이름표는 없었다.
이헌이 모자를 집어 들고 주변을 살폈다.
“누가 두고 갔나 봐요.”
“다시 찾으러 올 수도 있어요.”
나는 모자 아래가 젖었는지 벤치를 짚어 봤다. 나무판은 말라 있었다. 벤치 밑에도 다른 물건은 없었다.
유리문 안쪽으로 경비원이 지나갔다. 이헌이 문을 열고 불렀다.
“정원 벤치에 있었습니다. 경비실에서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경비원이 모자를 받아 안쪽을 확인했다.
“어느 벤치였습니까?”
이헌이 자리를 가리켰다. 경비원은 발견 장소를 적고 경비실에 보관하겠다고 했다.
“찾는 분 오시면 그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헌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나는 벤치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앉으세요.”
이헌은 내 옆에 앉지 않고 벤치 반대쪽에 앉았다. 사이에 한 사람이 더 앉을 자리가 남았다.
나는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회의에서 무슨 얘기 했어요?”
“해윤 상환 계획이요.”
“아버지는 여기 누워 계시는데요.”
“그래서 오늘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헌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시집을 꺼낼 때와 같은 쪽이었다. 봉투 입구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받지 않고 물었다.
“아버지가 모르는 일이에요?”
“일부는 짐작하실 겁니다. 정확한 금액과 돈이 간 곳은 모르실 거예요.”
이헌이 봉투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내가 손을 뻗었다.
◈
서류는 복사본이었다. 나는 바람에 날리지 않게 가방 위에 펼쳤다. 첫 장에는 해윤제지 이름과 대출금이 적혀 있었다.
“3년 전, 처음 빌린 돈은 40억이에요.”
“알아요. 그때 기계 바꾸고 밀린 대금 갚았어요.”
“그 대출은 아버님이 직접 계약하셨습니다. 문제는 뒤에 붙은 두 건이에요.”
이헌이 다음 장을 넘겼다.
나는 금액부터 확인했다. 두 장에 적힌 돈을 더하면 35억이었다. 채무자는 모두 해윤제지였다.
“이걸 아버지가 빌렸다는 거예요?”
“서류에는 그렇게 돼 있어요.”
“아버지는 빌린 적 없다고 하셨어요.”
“맞아요. 두 건 다 서명을 위조했습니다.”
나는 서명란을 가까이 들었다. 복사하면서 생긴 검은 점이 획 주변에 붙어 있었다. 아버지 이름은 읽을 수 있었다.
받침 끝이 유난히 길었다. 아버지는 이름을 급히 쓸 때도 마지막 획을 짧게 거뒀다. 서명 연습을 해 드린 적이 있어 나는 그 버릇을 알았다.
“원본은요?”
“서진캐피털에 있어요. 제게 있는 건 사본입니다.”
나는 첫 장의 서명과 다음 장의 서명을 번갈아 봤다. 닮은 부분은 있었지만, 이것만 보고 위조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이걸 누가 썼는지 알아요?”
“직접 펜을 잡은 사람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위조라고 해요?”
“아버님이 서명한 날짜에 어디 계셨는지 확인했습니다. 계약을 처리했다는 기록과 맞지 않아요. 돈을 지급한 내역도요.”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글자가 빽빽한 표에 날짜와 금액이 이어졌다.
“해윤 통장으로 들어왔어요?”
“들어왔다가 같은 날 빠져나갔어요.”
“공장에 쓴 게 아니고요?”
“네. 형님 쪽으로 갔습니다.”
서류 모서리가 가방에서 미끄러졌다. 나는 손바닥으로 눌렀다.
“강석진 부회장님이요?”
“형님이 관리하는 회사들을 거쳤어요. 해윤이 지급할 이유가 없는 돈입니다.”
“아버지 도장도 찍혀 있는데요.”
“그 도장이 어떻게 찍혔는지도 확인해야 해요.”
나는 인영을 들여다봤다. 흐릿한 복사본으로는 테두리조차 온전히 볼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짚으려다 종이를 내려놓았다.
“확인한 거하고, 아직 모르는 거 나눠서 말해 주세요.”
이헌이 내 손에서 서류를 가져가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 대출 두 건의 서명은 아버님 것이 아닙니다. 35억은 공장에 쓰이지 않았고요. 형님 쪽으로 넘어갔습니다. 원본을 빼내고, 누가 어떤 지시로 만들었는지 입증할 자료는 더 필요해요.”
“이걸 아버지한테 보여 드렸어요?”
“아직요.”
“왜 저부터예요?”
“지금 아버님께 말씀드리면 직접 형님을 찾아가실 것 같았습니다.”
나는 입원실에 둔 작업복을 떠올렸다. 서류를 들고 병원을 나설 아버지를 말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럴 수 있어요. 그렇다고 계속 모르시게 둘 수는 없어요.”
“퇴원하시고 몸이 회복되시면 같이 말씀드리고 싶어요. 당신이 원하면요.”
나는 서류를 순서대로 포갰다. 모서리가 어긋나 다시 맞췄다.
“그래서 지금 빚이 75억이 된 거네요.”
“네.”
“우리는 쓰지도 않은 돈을 갚느라 공장 월급부터 걱정했고요.”
이헌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봉투에 서류를 넣지 않았다. 금액이 적힌 장을 맨 위에 남겨 뒀다.
“약혼하면 기다려 준다고 했어요. 부회장님이 아버지한테 직접.”
“그 약속 때문에 약혼을 정하신 것도 압니다.”
“알면서 왜 이제 말해요?”
이헌이 벤치 가장자리에 놓았던 손을 거뒀다.
“의심만으로 아버님 계약을 뒤집을 수 없었어요. 돈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요.”
“저한테는 의심이라도 말할 수 있었잖아요.”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판단할 수 있게 더 일찍 말했어야 합니다.”
바람이 불어 서류 윗장이 들렸다. 이헌이 손을 들었다가 멈췄다. 나는 직접 장을 내려 눌렀다.
“부지 때문이죠?”
“네.”
“전에 본 도면. 공장 자리에 아파트가 있었어요.”
“서진건설이 추진하는 사업입니다. 형님은 해윤 땅을 넘겨받으려 해요.”
“정상적으로 사면 되잖아요.”
“아버님이 팔지 않으시니까요. 빚 때문에 버티지 못하게 만들고, 가족이 되면 도와주겠다고 한 겁니다.”
나는 발끝을 벤치 아래로 당겼다. 구두 밑창이 바닥에 긁혔다.
“결혼하고 나면요?”
“상환을 도와주는 대신 땅을 담보로 더 묶거나, 넘기는 서류에 동의하도록 할 겁니다. 가족 재산을 정리하는 일로 만들기 쉬워져요.”
“제가 며느리가 돼서 아버지를 설득하면 더 좋고요.”
이헌은 부정하지 않았다.
나는 봉투에 적힌 것도 없는 앞면을 봤다. 약혼식에서 건네받았던 반지 상자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그 안의 반지는 지금 목에 걸려 있었다.
“주원 씨도 알아요?”
“어디까지 아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어요.”
“모른다고는 못 하는 거네요.”
“네. 모른다고 말할 근거는 없어요.”
나는 가방 끈을 풀고 서류를 넣었다. 이것을 본 뒤에는 다시 돌려줄 수 없었다.
“제가 가져갈게요.”
“그러세요. 원본이 아니라는 점은 기억해 주세요. 바로 위조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자료는 아닙니다.”
“알아요. 종이부터 확인할 거예요. 계약 날짜에 쓰일 수 있던 종이인지, 서명 위에 도장이 찍혔는지도요. 원본을 보게 되면.”
이헌이 나를 보았다.
“원본을 볼 방법을 찾겠습니다.”
“그때 저한테 먼저 말해 주세요. 제 아버지 이름이에요.”
“그렇게 할게요.”
◈
유리문 안쪽에서 직원이 정원 이용 시간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병동에서 온 연락은 없었다. 화면을 끄려는데 이헌이 입을 열었다.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나는 휴대폰을 쥔 채 기다렸다.
“제가 왜 이 일을 확인했는지요.”
“처음부터 해윤을 돕던 건 아니었어요?”
“형님 쪽 자금 집행을 살피다가 해윤 대출을 알았습니다.”
“회사 일로요.”
“네. 하지만 회사 일만은 아닙니다.”
이헌이 접힌 소매 끝을 한 번 더 눌렀다. 나는 가방 안의 봉투가 구겨지지 않도록 손을 뺐다.
“형님이 한 일이 드러나면 그룹에서 물러나야 할 겁니다.”
“그래야죠.”
“그러면 제가 앞서게 돼요.”
나는 이헌을 봤다. 이헌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뭘요?”
“후계요. 형님이 내려오면 제게 기회가 옵니다.”
대답은 짧았다. 나는 다시 물을 말을 고르다가 가방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부회장님을 조사한 게 그거 때문이었어요?”
“그 이유도 있습니다.”
“도면을 보여 줬을 때도요?”
“그때도 알고 있었어요.”
나는 외투 안으로 손을 넣었다. 목에 건 실을 빼내자 약혼반지가 딸려 나왔다. 작업할 때마다 풀과 먼지가 묻지 않게 넣어 두던 반지였다.
백금 테두리에 벤치 위 조명이 비쳤다. 나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지 않고 쥐었다.
“이 약혼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네.”
“그 말을 믿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 말은 지금도 같습니다.”
“약혼을 깨면 아버지한테 빚 갚으라고 할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땅을 가져가고요. 저는 어느 쪽을 골라도 부회장님하고 싸워야 하네요.”
“나경아. 혼자 하게 두지 않겠습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헌도 일어나려다 내 손을 보고 앉은 채 멈췄다. 반지를 쥔 손은 외투 밖에 나와 있었다.
“실장님은 도와주고, 부회장님이 무너지면 후계자가 되고요.”
“제가 얻는 게 있다는 걸 숨긴 채로 도움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까지는 숨겼잖아요.”
“네. 늦었습니다.”
문 안쪽에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헌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치 끝을 사이에 두고 멈췄다.
나는 실에 꿴 반지를 외투 안에 넣었다.
“그럼 나는 당신한테도 수단이에요?”
(37화 끝)
『오늘 일정: 1월 6일 월요일, 생일 문집 복원, 저녁 아버지 댁』“아니에요.”이헌은 벤치 끝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외투 안에 넣은 반지를 놓았다. 실에 매달린 반지가 옷 위로 내려갔다.“그럼 뭐예요.”“좋아하는 사람이에요.”유리문 안에서 직원이 손을 들었다. 정원을 닫을 시간이었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 넣어 둔 서류 모서리가 옆구리에 닿았다.“그 말하고 이 서류는 따로 생각할게요.”“그래도 됩니다.”“지금은 내려갈게요.”이헌이 먼저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았다. 나는 문 앞에 멈췄다. 몇 분 전에는 나란히 들어온 문이었다.“혼자 갈 수 있어요.”손잡이에서 이헌의 손이 떨어졌다.“아버님 곁에 계세요. 저는 여기서 가겠습니다.”붙잡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간 뒤 바로 걷지는 못했다. 유리에 비친 이헌은 벤치 쪽을 보고 있었다.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뒤에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만 났다.◈월요일 오후, 작업대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풀을 묻힌 붓을 내려놓았다.아버지였다.“점심 드셨어요?”“먹었다. 네가 갖다 놓은 것 데워 먹었어.”“약도요?”“먹었어. 네가 적어 놓은 대로.”퇴원한 아버지의 목소리는 병실에서보다 나았다. 그래도 통화 너머로 기침이 들리면 나는 붓을 쥔 손을 멈췄다.“공장 아니죠?”
『오늘 일정: 1월 3일 금요일, 오후 책 납품 포장』나는 물통을 든 채 이헌에게 걸어갔다. 자판기 앞에 닿기 전에 이헌이 벽 쪽으로 비켜섰다. 지나갈 자리를 내주는 움직임에 나도 멈췄다.“언제 왔어요?”“조금 전에요. 아버님은요?”“주무세요. 수액 맞으면서 오늘 밤 지켜보자고 했어요.”이헌이 병실 쪽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들어가실 거예요?”“당신이 괜찮다면요.”나는 물통 뚜껑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지금은 주무시게 두고 싶어요.”“그럼 여기 있을게요.”아버지를 깨우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헌 옆을 지나 정수기로 갔다. 물이 차는 동안 이헌은 오지 않았다. 통이 넘치기 전에 버튼에서 손을 뗐다.“오늘 회의는 끝났어요?”“네.”“공장 얘기도 했어요?”이헌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물통에 뚜껑을 돌려 끼웠다.“아버지가 쓰러진 날인데, 그것부터 물어보네요.”“물어봐야 하는 일이에요.”“그럼 대답해 주세요.”복도 건너에서 병실 문이 열렸다. 보호자가 전화기를 귀에 대고 나왔다. 이헌은 내 대답을 기다렸고, 나는 물통을 든 손을 내렸다.“아버지한테 물만 갖다 놓고 올게요.”◈아버지는 옆으로 누워 있었다. 입원할 때 벗어 둔 작업복이 의자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나는 옷을 접어 사물함에 넣고 물통을 침대 옆에 놓았다.아버지가
『오늘 일정: 1월 3일 금요일, 오후 책 납품 포장』나는 휴대폰을 내리고 이헌을 보았다.“옆에 있는데 문자로 해요?”“말로 하면 대답 안 할까 봐요.”식당 뒷문이 열렸다. 우리는 동시에 공장 쪽을 돌아보았다. 염 반장이 문을 잠그는 동안 나는 휴대폰에 답을 썼다.『오늘 의자 나른 값으로 해 둘게요.』이헌이 화면을 확인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나는 먼저 주차장으로 걸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조금 늦었다.◈새해 첫 금요일 오후, 제본소에서 책을 포장하고 있을 때 염 반장에게 전화가 왔다.풀칠한 덧종이가 마르지 않아 나는 휴대폰을 어깨에 끼웠다.“반장님, 아버지 점심 드셨어요?”“나경아. 지금 병원으로 와.”종이를 누르던 손을 뗐다.“누가 다쳤어요?”“네 아버지. 사무실에서 쓰러지셨어. 구급차 타고 가시는 중이야.”“어느 병원이요?”반장이 이름을 말했다. 나는 작업대에 놓인 종이 뒷면에 받아 적었다.“의식은요?”“눈 뜨셨어. 대답도 하시고. 내가 뒤따라갈 테니까 넌 바로 와.”전화를 끊고 앞치마 끈을 풀었다. 매듭이 손톱에 걸려 한 번 더 당겼다.다은이 내 손에서 끈을 받아 풀어 줬다.“가방 챙겨. 여긴 내가 할게.”“창가 책은 누르지 마. 아직 젖었어.”“알아. 택시도 불렀어. 아래에 곧 온대.”나는 갈색 가방을 들었다가 작업대 쪽으로 돌아섰다. 무엇을 챙기려
『오늘 일정: 12월 31일 화요일 저녁, 해윤제지 송년 모임』“약혼을 끝내면 다시 갚으라는 거예요?”아버지가 독촉장 아래를 보았다.“담당자는 형식이라고 했어. 집안끼리 약속한 걸 적어 둔 거라고.”“그럼 왜 대출 서류에 찍어요.”나는 날짜와 도장이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도장을 손으로 가리지 않았다.“이것도 확인받아라.”“원본은 아버지가 갖고 계세요. 다른 서류하고 섞지 마시고요.”나는 빈 봉투에 독촉장을 넣었다. 겉에 받은 날짜를 적어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펜을 들었다.“연말에 직원들하고 밥 먹기로 했는데.”“그날도 서류 갖고 오실 거예요?”“아니.”“그럼 저도 갈게요. 끝나면 같이 집에 가요.”아버지가 날짜를 적은 봉투를 서랍 안에 넣었다.◈화요일 저녁, 공장 식당 문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오늘은 일 얘기 금지』아래에 작은 글씨가 더 있었다.『반장님도 금지』나는 가방을 어깨 뒤로 돌리고 문을 밀었다. 식탁을 붙이는 소리와 수저를 나누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염 반장이 종이를 가리켰다.“저거 네가 썼냐?”“저 이제 왔어요.”“누가 썼는지 글씨만 보면 모르냐?”“종이 고치는 사람이에요. 글씨 주인 찾는 사람 아니고요.”안쪽에서 웃음이 났다. 염 반장은 문에 붙은 종이를 떼지 않고 의자를 들었다.
『오늘 일정: 12월 27일 금요일, 해윤제지 아버지 서류 확인』“무슨 거래요?”나는 문턱에서 발을 돌렸다. 주원은 흰 휴대폰에 얹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여기서 본 거,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파일 이름밖에 못 봤어요.”“그것도.”열린 문 너머에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났다. 주원은 의자를 당겨 문 쪽을 보았다. 발소리는 복도 반대편으로 멀어졌다.“대신 뭘 해 주실 건데요?”“나경 씨가 어디서 누구 만나는지 안 물을게.”나는 가방끈을 쥔 손을 내렸다.“아버지에 관한 일이면요?”주원이 내 얼굴을 보았다.“우리 아버지?”“제 아버지요. 해윤 일.”주원은 뒤집힌 휴대폰을 서랍에 넣었다.“그건 나경 씨한테 먼저 말할게. 내가 아는 건.”“저도 여기서 본 건 말하지 않을게요. 다만 저한테 해윤 일을 숨기라고 하지는 마세요.”“그 정도면 됐네.”주원이 일어났다. 나는 먼저 복도로 나갔다. 계단 아래에서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금요일 새벽, 공장 사무실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택시에서 내려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작업실에 가져갈 공장 문서를 받기로 한 건 아침이었다. 전날 밤 아버지에게 시간을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공장 안내 방송이 들렸다.아버지는 집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새벽에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도 같은 방송이 들렸다.현관문을 밀자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네. 나갈게요.”내 대답에 문밖 그림자가 옆으로 물러났다.나는 이헌을 돌아보았다. 이헌은 건조기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문을 조금 열어도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내 손이 손잡이에서 멈추자 고개만 끄덕였다.나는 혼자 문밖으로 나갔다.주원은 복도 벽에 기대 있었다. 셔츠 목의 단추가 풀려 있었고, 손에는 검정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화면이 켜졌다가 꺼졌다.“왜 여기서 나와?”“할머니가 수건 정리하셔서 잠깐 도와드렸어요.”할머니가 우리 때문에 꺼낸 수건이 떠올랐다.주원은 문보다 내 얼굴을 보았다.“손까지 씻고 나온 줄 알았네. 한참 안 오길래.”“화장실에 회장님이 계셨어요.”“아. 그래서.”주원이 눈을 감았다 떴다. 세탁실 안에서는 건조기가 돌아갔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끝까지 닫았다.“거실에 가실 거예요?”“거기 말고. 나 잠깐만 앉아 있고 싶은데.”주원이 손으로 뒷목을 눌렀다. 손등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아까 수건으로 바닥을 닦던 손이었다.“나경 씨도 좀 쉬어. 얼굴 굳었어.”나는 주원이 가리키는 계단을 보았다.“어디서요?”“내 방. 아래에 있으면 엄마가 계속 뭐 시키잖아.”주원이 계단 쪽으로 먼저 걸었다. 나는 세탁실 문을 한 번 보고 따라갔다. 문 아래로 불이 새어 나왔지만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거실 앞에 놓아 둔 가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