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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작업실의 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4 19:00:00

『오늘 일정: 1월 6일 월요일, 생일 문집 복원, 저녁 아버지 댁』

“아니에요.”

이헌은 벤치 끝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외투 안에 넣은 반지를 놓았다. 실에 매달린 반지가 옷 위로 내려갔다.

“그럼 뭐예요.”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유리문 안에서 직원이 손을 들었다. 정원을 닫을 시간이었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 넣어 둔 서류 모서리가 옆구리에 닿았다.

“그 말하고 이 서류는 따로 생각할게요.”

“그래도 됩니다.”

“지금은 내려갈게요.”

이헌이 먼저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았다. 나는 문 앞에 멈췄다. 몇 분 전에는 나란히 들어온 문이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손잡이에서 이헌의 손이 떨어졌다.

“아버님 곁에 계세요. 저는 여기서 가겠습니다.”

붙잡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간 뒤 바로 걷지는 못했다. 유리에 비친 이헌은 벤치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뒤에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만 났다.

◈

월요일 오후, 작업대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풀을 묻힌 붓을 내려놓았다.

아버지였다.

“점심 드셨어요?”

“먹었다. 네가 갖다 놓은 것 데워 먹었어.”

“약도요?”

“먹었어. 네가 적어 놓은 대로.”

퇴원한 아버지의 목소리는 병실에서보다 나았다. 그래도 통화 너머로 기침이 들리면 나는 붓을 쥔 손을 멈췄다.

“공장 아니죠?”

“집이야. 텔레비전 소리 들리잖아.”

아버지가 수화기를 잠깐 뗐다. 사람들 웃는 소리가 커졌다가 줄었다.

“저녁에 갈게요.”

“가게 일이나 해. 다은이 혼자 두지 말고.”

통화를 끊고 화면을 내려다봤다. 사흘 동안 이헌과는 연락하지 않았다. 마지막 문자는 송년 모임 날 자정에 주고받았다.

나는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뒤집었다.

“아버지 괜찮으시대?”

창가에서 다은이 물었다.

“집에 계신대. 저녁에 확인하러 가려고.”

“그럼 이거부터 끝내자. 겉장 마른 것 같아.”

다은이 받침판을 들고 왔다. 맡겨진 책은 한 가족이 해마다 생일에 쓴 글을 묶은 문집이었다. 종이마다 두께가 달랐고, 중간에는 색연필로 그린 꽃도 끼어 있었다.

물을 많이 쓰면 색이 번졌다. 나는 꽃이 그려진 장 아래에 종이를 받치고 붓끝의 풀을 덜었다.

다은이 옆에서 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 꽃은 꼭 살려 달라셨어.”

“알아. 전화하실 때도 말씀하셨잖아.”

“책보다 꽃 얘기를 더 오래 하셨지.”

나는 들뜬 모서리에 풀을 먹인 종이를 댔다. 젖은 부분을 누른 뒤 마른 종이로 바꿨다. 손을 떼자 모서리가 조금 올라왔다. 다시 누르고 기다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안 말랐는데 덮으면 붙어.”

“전화는 내가 드릴게.”

다은은 받침판 옆에 작업표를 놓았다. 나는 마르는 동안 확인할 곳을 연필로 표시했다. 마르는 시간은 서둘러도 줄지 않았다. 그동안 할 일을 골라야 했다.

◈

다은이 전화를 하러 나간 뒤 나는 서랍에서 봉투를 꺼냈다.

병원에서 받아 온 사본이었다. 대출금이 적힌 장은 뒤로 넘기고 서명란부터 펼쳤다. 아버지 이름 아래에는 복사된 도장이 겹쳐 있었다.

돋보기를 대도 선명해지지는 않았다. 검은 부분을 오래 본다고 원래 펜 자국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나는 작업용 수첩에 확인할 것을 적었다. 원본 종이, 서명과 도장의 겹친 부분, 장마다 다른 눌린 자국. 사본으로는 확인이 안 되는 것은 옆에 줄을 그었다.

아버지가 서명한 날짜와 계약 처리 기록이 맞지 않는다는 말도 적었다. 그 아래에는 빈칸을 남겼다. 이헌이 확인했다는 자료를 아직 내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펜 뚜껑을 닫는데 다은이 들어왔다.

“수요일에 찾으러 오신대. 천천히 해 달라고 하셔.”

“고맙네.”

“네가 꽃 때문에 하루 더 말려야 한다니까 그러시더라. 꽃만 괜찮으면 된대.”

다은이 웃으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봉투를 덮었다.

“그건 공장 서류야?”

“응. 사본이라 확인이 안 되는 게 있어.”

“원본은 못 받아?”

“방법을 찾아야 해.”

다은은 봉투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신 내 앞에 있던 물컵을 가져가 새 물을 채웠다.

나는 서류를 잠금 서랍에 넣었다. 열쇠를 빼고 나니 작업대에 말려 놓은 종이들이 보였다. 아직 끝낸 것은 없었다.

다은이 내 쪽으로 작업표를 밀었다.

“오늘 이것까지 하려고 했잖아.”

“응. 실만 다시 꿰면 돼.”

“구멍은 내가 확인했어. 아래쪽에 하나 더 뚫린 게 있더라.”

나는 책등을 세워 보았다. 전에 고칠 때 낸 구멍이 원래 구멍 옆에 남아 있었다. 잘못 골라 꿰면 실이 비스듬해졌다.

바늘에 실을 끼우고 책을 펼쳤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낸 바늘을 다시 넣었다가 끝이 가는 것으로 바꿨다. 종이에 남은 구멍을 더 벌리고 싶지 않았다.

작업대 끝에 놓인 휴대폰에 불이 들어왔다. 나는 바늘을 받침에 꽂고 확인했다.

납품 날짜를 묻는 문자였다. 답장을 보낸 뒤에도 한동안 화면을 잡고 있었다.

이헌에게 물어볼 일은 있었다. 원본을 볼 수 있는지, 아버지가 퇴원한 걸 아는지. 문자를 쓰려다가 입력란을 닫았다.

자료가 필요하면 자료를 달라고 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 연락하면 그날 못 한 말까지 묻게 될 수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작업표 아래로 밀어 넣었다.

◈

해가 진 뒤 다은이 외투를 입었다. 나는 책을 옆으로 눕힌 채 실을 당기고 있었다.

“나 잠깐 내려갔다 올게.”

“추워. 목도리 하고 가.”

다은은 의자에 걸린 목도리를 집었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골목에서 문 닫는 소리가 났다.

나는 마지막 매듭을 묶었다. 힘을 너무 주면 책등이 오므라들었다. 실을 조금 풀고 책장을 넘겨 보았다. 가운데 장까지 펼쳤다가 덮었다.

됐다.

잘라 낸 실을 모아 버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제야 어깨가 당겼다. 점심 뒤부터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작업실에는 바늘을 놓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이헌이 앉았던 의자는 책장 앞에 붙어 있었다. 나는 그쪽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집은 보관함 안에 있었다.

덮개를 열자 찢어진 책등이 먼저 보였다. 본문을 받친 종이가 움직이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아직 표지를 갈아입힐 차례는 아니었다.

나는 겉장 위에 올린 종이를 한쪽만 들었다. 남아 있는 원단을 확인하려던 손이 멈췄다. 표지 재료를 정할 때는 이헌과 상의하려고 했다. 낡은 흔적을 어디까지 남길지도 물어야 했다.

보관함 덮개를 다시 닫았다. 오늘 연락하지 않는다고 이 책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작업표에 표지 재료 확인이라고 적었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나는 펜을 놓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좀 열어 줘.”

다은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자 종이봉투가 먼저 들어왔다. 다은은 봉투를 작업대가 아닌 창가 탁자에 올려놓았다. 목도리를 푼 뒤 의자 두 개를 끌어 붙였다.

봉투 안에는 붕어빵이 있었다.

다은은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벌렸다. 안에 든 것을 세어 반씩 나누고, 내 앞에 종이 한 장을 깔았다. 나는 손을 씻고 돌아와 앉았다.

먼저 집은 붕어빵의 꼬리가 부서졌다. 떨어진 조각을 손바닥으로 받자 다은이 빈 봉투를 가까이 놓아 줬다.

나는 조각부터 먹었다. 팥이 든 부분은 아직 뜨거워서 잠깐 내려놨다.

다은은 내 얼굴을 묻지도 살피지도 않았다. 자기 몫을 먹다가 창문에 생긴 김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아래 골목을 보려던 모양이었다.

“오늘 일찍 닫는대.”

한참 뒤에 다은이 말했다.

“붕어빵?”

“응. 반죽 떨어졌대. 내가 마지막이었어.”

나는 남은 것을 다은 쪽으로 밀었다. 다은이 고개를 젓고 도로 내 앞에 놓았다. 봉투에는 각자 먹을 것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베어 물었다. 다은도 다시 먹기 시작했다.

다 먹고 일어날 때 다은이 내 작업표를 집었다.

“이것도 오늘 하게?”

“아니. 내일 할래.”

“잘 생각했어. 마르는 건 기다려야 된다며.”

나는 작업표를 받아 내일 칸에 표시했다.

◈

다은이 퇴근한 뒤에는 아버지에게 가져갈 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뚜껑을 눌러 닫고 갈색 가방에 넣었다. 무거운 책을 넣지 않으니 가방 안에 자리가 남았다.

휴대폰에는 새 문자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출발한다고 보낸 뒤 앞치마를 벗었다. 목에 걸린 실이 옷깃에 걸렸다. 손가락으로 빼내자 반지가 따라 나왔다.

약혼식 날부터 내 물건이 된 반지였다. 그런데 손에 끼고 있는 시간보다 목에 걸어 둔 시간이 길었다.

나는 반지를 옷 안으로 넣었다. 사본이 든 서랍을 한 번 더 당겨 잠긴 것을 확인했다.

창가 프레스기에 눌러 둔 책의 모서리를 살폈다. 내일 아침에도 한 번 더 봐야 했다. 다은이 적어 둔 메모를 잘 보이는 쪽으로 옮기고 난방을 낮췄다.

출입문 옆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가 멈췄다. 시집 보관함이 있는 선반에는 불이 닿지 않았다. 가서 덮개가 제대로 닫혔는지만 확인했다.

병원에서 이헌이 내밀었던 봉투를 받을 때는 손이 닿지 않았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도 나는 그걸 떠올렸다. 왜 그런 걸 기억하나 싶어 층수 표시만 보고 있었다.

나는 보관함에서 손을 떼고 가방을 들었다.

문을 열자 문 앞에 놓인 종이봉투가 발에 걸렸다.

고개를 숙였다. 봉투 입구 사이로 원단 모서리가 나와 있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래층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문을 열어 둔 채 봉투를 집었다. 겉에는 받는 사람 이름도, 보낸 사람 이름도 없었다. 바닥에 닿았던 부분은 말라 있었다.

다은이 두고 간 건가 싶어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를 걸기 전 봉투 안을 먼저 보았다.

원단 샘플이 다섯 장 들어 있었다.

나는 작업실로 돌아와 봉투를 탁자에 놓았다. 가방은 의자에 걸었다. 외투도 벗지 않고 원단을 꺼냈다.

모두 책 표지에 쓰는 원단이었다. 색도 짜임도 달랐다. 짙은 회색은 실이 촘촘했고, 남색은 접힌 곳에 자국이 덜 남았다. 갈색 원단을 뒤집자 뒷면에 얇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시집을 처음 살펴보던 날, 나는 이헌에게 표지 재료를 보여 줬었다. 보기 좋은 색보다 손에 덜 걸리는 것을 골라야 한다고 했다. 가방이나 안주머니에 넣고 다닐 책이라면 더 그랬다.

그때 이헌은 내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원단 이름은 묻지 않고, 오래 써도 되는지를 물었다.

나는 샘플을 한 장씩 펼쳤다. 모두 모서리가 잘려 있어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었다. 완성된 표지를 주문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골라 보고 쓰지 않을 수도 있는 재료였다.

휴대폰을 들어 이헌의 이름을 찾았다. 통화 버튼 위에 손가락을 뒀다가 내려놓았다.

다섯 장을 그대로 보관함 옆에 가져갔다. 시집의 원래 표지와 색을 맞춰 볼 수는 있었다. 그것만 해 보고 가면 됐다.

겹친 원단을 벌리자 사이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굽혔다. 접힌 종이를 집어 탁자 위에 놓았다. 앞면에는 이름이 없었다.

외투 소매를 뒤로 밀고 종이를 폈다.

『수단이었으면 그날 바에서 이름부터 댔을 겁니다.』

(3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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