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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6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8 10:05:01

수요일 아침 7시, 서연은 여행 가방 바퀴를 들고 현관 턱을 넘었다.

태주가 문을 잡아 주었다. 봄이는 아직 자고 있었다. 가방 위에 묶어 둔 베개가 문고리에 걸려, 서연은 끈을 풀어 옆구리에 끼었다.

“걸린다고 하더니 진짜 걸리네요.”

목소리를 낮춰 말하자 태주가 문을 조금 더 열었다. 서연은 작은방에 짐을 밀어 넣고 시계를 봤다. 출근하려면 곧 나가야 했다.

문을 여는 손이 월요일 밤 허벅지 뒤에 닿았던 손과 같다는 생각을, 서연은 가방 지퍼를 내리는 동안만 했다. 그 이상은 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저녁에 풀게요. 봄이가 깨면 가방 보여 주세요.”

“응. 밥은 먹었어?”

“김밥 사 왔어요. 제 건 가방에 있어요.”

서연은 식탁에 김밥 두 줄을 놓았다. 태주는 하나를 바로 냉장고에 넣고 봄이가 먹을 것은 접시에 덜었다. 어른들이 모두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를 지금 깨우지는 않았다.

다시 신발을 신는데 태주가 세탁한 손수건을 내밀었다. 사각으로 접힌 천에서 희미한 비누 냄새가 났다. 빈소에서 건넸다 돌려받지 못한 그 손수건과 같은 크기였다. 서연은 자기 가방 주머니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가방 속 원룸 열쇠가 손끝에 걸렸다. 어제 상자를 마저 정리할 때 태주는 무거운 것을 건네지 않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서연도 월요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발판, 놓으라는 말, 문 잠근 뒤의 손. 그 순서를 아침 인사에 올릴 자리는 없었다.

오늘부터는 그 사람과 같은 현관으로 돌아온다.

점심시간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짐 가져갔어?”

“응. 아직 풀지는 못했어.”

“네 집은 그대로 두고?”

“응. 옷이랑 베개만 가져왔어.”

어제도 같은 설명을 했는데 엄마는 다시 물었다. 낮에 돕는 것과 거기서 자는 건 다르다는 말까지 똑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밥솥 여는 소리가 들렸다.

“네 언니 옷은 건드리지 마.”

서연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안 건드려.”

“누가 가져가라거나 치우자고 해도.”

“알았어, 엄마.”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연은 사무실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 먼저 끊지 않았다.

“내가 가야 하는데. 무릎만 이렇지 않아도.”

“나 일하고 있어. 밥도 먹고 있고.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는 저녁에 봄이와 통화하게 해 달라고 했다. 서연은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식은 반찬을 다시 집었다. 엄마가 멀쩡하게 밥을 먹었는지는 끝내 묻지 못했다.

젓가락을 다시 들었을 때 월요일 밤이 불쑥 올라왔다. 작은방에서 형부라고 부르며 끝을 낸 손. 그 손을 오늘 같은 현관으로 가져간다는 사실이 반찬보다 먼저 목에 걸렸다.

저녁에는 유치원에서 데려온 봄이가 먼저 작은방으로 뛰어갔다. 문 앞에서 멈추고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빠가 보여 줬어. 내 키보다 작아.”

“이모 옷은 작게 접을 수 있거든.”

서연이 지퍼를 열자 봄이가 가방 옆에 둔 베개를 가져다 바닥에 놓았다. 아이는 그 위에 앉으려다가 일어나 먼지를 손으로 털었다.

“여기서 자?”

“밑에 이불 깔고. 지금은 짐부터 풀자.”

창가에는 얇은 요와 새 커버를 씌운 이불이 놓여 있었다. 어제 명자가 가져다준 것이라고 태주가 메시지를 보내 두었다. 서연은 사진을 찍어 명자에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 답은 조금 뒤에 왔다. 춥게 자지 마라.

책상 옆 상자들은 벽 쪽으로 정리돼 있었다. 어제 태주와 열어 보니 언니 회사의 소품 견본과 지난 계절 장식들이 들어 있었다. 버린 것은 없었다. 서연은 상자 뚜껑이 열릴 만큼 간격을 두고 여행 가방을 세웠다. 발판은 벽 쪽에 밀어 둔 채였다. 그 위를 다시 밟지 않겠다고 정해 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늘은 그 각도를 보지 않기로 했다.

봄이가 서랍 하나를 열었다.

“여기 엄마 거.”

서연이 다가가자 아이는 손바닥만 한 수첩을 꺼냈다. 노란 고무줄이 늘어나 표지 아래로 처져 있었다. 봄이는 수첩 안쪽의 스티커를 찾았다.

“이거 내가 붙였어. 삐뚤게.”

“잘 붙였는데.”

“토끼 발이 접혔잖아.”

서연은 접힌 발끝을 펴 주었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언니 글씨가 있었다. 물병 뚜껑 고무, 여벌 양말, 봄이 머리끈. 어떤 줄은 지워졌고 어떤 줄에는 별이 두 개 그려져 있었다.

봄이가 물병을 가리켰다.

“나는 새 거 있어.”

“맞아. 어제 아빠랑 샀지.”

노란 물병은 싱크대에서 마르고 있었다. 태주가 어제 사진과 영수증을 보내 줬다. 서연은 수첩의 오래된 줄을 지우지 않았다. 새 물병 이름표는 다른 종이에 쓰면 됐다.

“이건 여기 둘까?”

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아이가 본래 꺼낸 서랍에 수첩을 넣었다. 자기 충전기와 화장품은 여행 가방 안쪽 주머니에 두었다. 내일 퇴근길에 작은 수납함을 하나 사기로 했다.

태주가 돌아오자 서연은 씻어 둔 쌀을 밥솥에 넣었다. 그는 봄이와 손을 씻은 뒤 프라이팬을 꺼냈다. 명자가 두고 간 반찬에 달걀말이만 더하기로 했다.

태주가 달걀을 말다가 옆구리를 터뜨렸다. 봄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엄마도 저렇게 됐는데.”

서연은 접시를 쥔 채 아이를 봤다.

“그랬어?”

“아빠가 너무 빨리 뒤집는다고 했어.”

태주가 불을 줄였다. 달걀 밑으로 얇은 뒤집개를 다시 밀어 넣었다.

“맞아. 아빠가 그랬지.”

그는 터진 쪽을 안으로 접었다. 봄이는 한동안 지켜보다가 다시 앉았다. 식탁에는 그 달걀말이가 올라왔다. 가운데가 빈 조각은 태주가 자기 접시로 가져갔다.

식사 뒤 봄이는 외할머니와 통화했다. 서연은 옆에서 우유컵을 헹구었다. 엄마가 울까 봐 몇 번 돌아봤지만 아이는 오늘 블록으로 만든 주차장 이야기를 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엄마가 어디에 문을 달았느냐고 물었다.

8시부터는 문을 닫고 일했다. 태주는 봄이에게 칫솔을 보여 주며 욕실로 데려갔다. 서연은 상품 사진 두 장을 고쳐 보내고 9시에 문을 열었다.

소파에서 기다리던 봄이에게 잘 자라고 인사했다. 책은 아빠가 읽어 주기로 했다. 작은방에 요를 펴고 가방을 책상 아래 밀어 넣자 겨우 누울 자리가 났다.

집 안이 조용해진 뒤 서연은 물을 마시러 나왔다.

욕실 문도 그때 열렸다. 태주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멈췄다. 반소매 티셔츠와 편한 바지 차림이었다. 물이 목덜미를 따라 쇄골 안으로 들어갔다.

“안 잤어?”

“물 좀 마시려고요.”

서연은 벽으로 붙었다. 태주가 지나갈 만큼 비켰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가까이 오자 옷자락이 스칠 것 같았다. 월요일에 닿았던 거리가 그대로 복도에 다시 놓였다. 서연이 팔을 모으는 것을 보고 태주는 욕실 안으로 물러났다.

“먼저 가.”

“네.”

이번에는 몸을 붙잡을 일도, 손을 뻗을 이유도 없었다. 서연은 그 앞을 지나 부엌으로 갔다. 월요일의 일을 자기만 기억하는 것 같아서 컵을 꺼내는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태주가 수건을 목에 걸고 나왔다.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긴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낯설었다. 서연은 물을 받다가 시선을 늦게 거뒀다. 거둔 자리에는 이미 티셔츠에 밴 물의 선이 남아 있었다.

수도꼭지를 잠근 뒤에도 태주는 그 자리에 있었다.

“왜 그렇게 봐?”

“머리…… 안 말리셨어요.”

그는 수건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서연은 컵을 내려다봤다. 머리가 아니라 얼굴을 보고 있었다는 걸 스스로는 알았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물이 내려간 가슴의 천까지 봤다.

“불편해?”

“네?”

“잠자리. 바닥이 딱딱해서 못 자는 건가 하고.”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그는 요가 얇으면 말하라고 했다. 서연은 괜찮다고 대답하면서도 컵을 들고 서 있었다. 들어가면 되는 쪽은 자신이었다.

“아까 서랍에 언니 수첩 넣어 놨어요. 봄이가 꺼내서요.”

“응. 그대로 두면 돼.”

말이 끝나자 냉장고 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한마디를 더 찾는 대신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물이 턱에 조금 흘러 급히 손등으로 닦았다.

태주의 손이 움직였다. 서연이 먼저 고개를 들자 그는 식탁의 휴지를 집어 내밀었다.

“여기.”

“고맙습니다.”

휴지를 받아 드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무엇을 하려던 거라고 생각했는지, 서연은 스스로도 묻고 싶지 않았다.

태주는 바닥에 떨어진 물을 보고 마른 행주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닦는 동안 잠깐 기다렸다가 부부방으로 향했다.

서연은 한 번 더 마시려고 컵에 물을 채웠다. 그 사이 태주의 방문이 닫혔다.

작은방으로 돌아왔을 때 침구 곁에는 내일 입을 셔츠가 걸려 있었고, 서랍에는 언니 수첩이 있었다. 서연은 컵을 든 채 서 있다가 문을 닫았다.

잠시 뒤 문밖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복도 불 끌게.”

서연은 문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잠자리 말고도 불편한 게 있다고 하면, 그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손잡이에 손이 올라갔다. 원룸에서 샤워하다 멈췄던 손가락이 그 차가운 쇠를 잡았다. 다시 나가면 물을 핑계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핑계를 버렸다.

문을 열자 태주가 스위치 앞에 서 있었다. 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

“형부.”

“왜. 이불 모자라?”

“저 물 아니에요.”

태주의 손이 스위치에서 떨어졌다. 서연은 문틀을 잡은 채 그 말을 주워 담지 못했다. 담으면 월요일의 손만 남은 채로 잠들어야 했다.

태주가 작은방 쪽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문을 닫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잠금장치까지 내리지는 않았다. 완전히 잠그면 이 집이 다른 집이 될 것 같아서였다.

“봄이 방이야.”

“알아요.”

“그러면.”

“그러면 안 되는 일인 거, 형부가 저보다 먼저 알잖아요.”

태주가 웃지 않았다. 서연의 손목을 잡아 문에서 떼어 냈다. 잡은 자리가 월요일과 겹쳤다. 그는 그 겹침을 피하지 않고 서연을 요 쪽으로 밀어 세웠다.

키스는 복도에서보다 급했다. 젖은 머리의 찬 물이 서연 뺨에 묻었다. 태주의 손이 셔츠 밑단으로 들어가 허리를 쓸었다. 서연은 그의 바지 허리를 내리다가 멈췄다.

“부부방은 안 돼요.”

“안 가.”

“언니 이불.”

“알아. 그래서 여기야.”

요 위에 무릎을 꿇자 공간이 좁았다. 서연의 셔츠는 올렸을 뿐 벗지 못했다. 태주도 바지만 중간까지 내렸다. 준비된 밤이 아니었다. 참다 틈이 난 밤이었다.

태주가 지갑을 찾았다. 작은방에는 지갑이 없었다. 복도에서 들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그가 문을 열려다 서연이 소매를 잡았다.

“어디에.”

“현관.”

삼십 초가 그렇게 길 줄 몰랐다. 서연은 올린 셔츠를 내리지 못한 채 요 위에 앉아 있었다. 문 너머로 현관 수납장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포장지를 찢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태주가 돌아와 문을 닫고, 그제야 얇은 비닐을 이빨로 뜯었다.

왜 들고 다녔는지 묻지 않았다. 물으면 월요일 이후의 며칠을 설명해야 했다. 서연은 콘돔을 씌우는 그의 손가락만 봤다. 반지 자국이 형광등 아래 희게 남아 있었다. 빈소 다음에도 그는 아직 끼고 있지 않았다. 끼지 않은 빈자리가 더 분명했다.

서연이 속옷을 옆으로 밀었다. 태주가 허벅지 사이에 들어왔다. 한 번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서연이 이름을 먼저 불렀다.

“태주 씨.”

허리가 내려갔다. 채워지자 숨이 깨졌다. 숨이 깨지며 다른 호칭이 나왔다.

“형부…….”

태주가 더 깊어졌다. 동시에 얼굴을 돌렸다. 돌린 얼굴의 귀끝이 붉었다. 서연은 그 귀를 보지 않으려고 천장 몰딩을 봤다. 작은방 천장은 원룸보다 낮았다.

움직임은 짧고 조심스러웠다. 요 밑 바닥이 손으로 짚으면 차가웠다. 서연의 셔츠가 가슴 위에서 뭉쳤다. 유두가 천에 스칠 때마다 허리가 먼저 반응했다.

봄이 방 쪽에서 이불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둘 다 멈췄다.

들어간 채로 허리를 붙잡고, 숨만 고렸다. 서연의 안이 긴장해 조여들었다. 태주가 이를 악물고 그 조임을 견뎠다. 복도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두 번째 쓸림은 없었다. 아이가 돌아누운 소리였다.

몇 초인지 세지 못했다. 서연이 아주 작게 말했다.

“간 것 같아요.”

태주는 대답 대신 이마를 서연의 이마에 붙였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보다 느렸다. 느린 것이 더 깊었다. 서연이 신음을 삼키려 그의 어깨를 물었다. 티셔츠 천이 이 사이에 물렸다.

끝이 왔을 때 서연은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호칭도 삼켰다. 안이 접히며 허벅지가 그의 허리를 조였다. 태주가 그 조임 안에서 허리를 한 번 더 밀어 넣고 숨을 끊었다.

빼낸 뒤 콘돔을 휴지에 싸 여행 가방 옆 비닐에 넣었다. 서연은 셔츠를 내리고도 다리는 모으지 못했다. 요 커버가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태주가 일어서며 바지를 올렸다. 문을 열기 전에 서연을 봤다.

“내가 잘못했어.”

“형부만 들어온 거 아니에요.”

“그래도.”

“불은…… 끄셔도 돼요.”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로 나가 스위치를 눌렀다. 문 아래 가늘게 남아 있던 빛도 사라졌다.

서연은 끝내 마시지 못한 물을 내려놓았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대답할 말 하나를 더 찾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가 뗐다. 다시 나가면 물을 핑계로 삼을 수는 없었다.

이미 핑계가 끝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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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일 아침, 냉장고의 주말 칸은 비어 있었다.태주는 주간표 앞에서 커피를 마셨다. 서연은 식빵 봉지를 닫으며 물었다.“오늘 장은 누가 봐요?”“내가 봐야지.”“봄이는요?”“같이 가거나 엄마한테 잠깐 부탁하고.”소파에서 그림을 그리던 봄이가 고개를 들었다.“나 이모랑 갈래.”태주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서연은 먼저 제 일정을 떠올렸다. 오전에 원룸에 가서 우편물을 챙기고 세탁물을 가져오려 했다.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다.“형부는 집에 있을 거예요?”“오전에 회사 서류만 좀 볼게. 오후엔 봄이랑 있을 거고.”“그럼 제가 장 봐 올게요. 원룸도 들러야 해서.”태주는 휴대전화에 적어 둔 목록을 보냈다. 쌀, 우유, 달걀, 봄이가 먹는 김, 두부. 서연은 자기 샴푸와 세제를 따로 적었다.“장 본 건 봄이 봉투 돈으로 쓰면 돼.”“공동으로 먹는 것만요.”“알았어.”그가 고집하지 않아 대화는 금방 끝났다. 태주는 봄이에게 마트에서는 이모 손을 놓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보다 카트를 잡겠다고 했다.원룸에 들르자 봄이는 작은 집이라고 했다. 서연은 보일러를 잠깐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우편함에서 가져온 고지서를 책상 위에 놓고, 세탁 바구니에서 필요한 옷만 골랐다. 봄이는 창가에 서서 아래 골목을 봤다. 그 사이 서연은 욕실 선반만 확인했다.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가 보이는 집에서는 어제 밤을 다른 방에 두기로 했다.싱크대에는 언니가 준 반찬통이 그대로 포개져 있었다. 봄이가 노란 뚜껑을 알아봤다.“우리 집 거.”“이모 주라고 엄마가 가져온 거야.”“그럼 이제 이모 거야?”서연은 통을 가방에 넣으려다 다시 내려놓았다.“응. 이모가 쓰는 거지.”봄이는 뚜껑을 하나씩 맞춰 보고는 가장 작은 통을 골랐다. 마트에서 딸기를 사 담아 가자고 했다. 서연은 씻은 통을 장바구니에 넣었다.주말 마트에는 사람이 많았다. 봄이는 약속대로 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과자 진열대 앞에서는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서연은 과자 하나를 고르게 하고 목

  •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제008화. 보호자

    금요일 오후, 봄이의 담임은 작은 봉투 하나를 서연에게 건넸다.“다음 주 수요일에 가까운 숲으로 산책을 가요. 동의서와 전에 쓰시던 비상 연락 카드를 넣었어요. 바뀐 연락처 확인해서 월요일까지 보내 주세요.”서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려다 멈췄다.“제가 이모라서요. 아빠에게 그대로 전할게요.”“네. 보호자분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이모도 보호자야.”봄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은 비상 연락 카드에 이모 번호도 적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신 아빠가 확인해서 보내 달라는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놀이터를 지날 때 아이가 다시 물었다.“보호자가 뭐야?”“봄이가 아프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챙겨 주는 어른.”“그럼 이모도 보호자네?”서연은 걸음을 늦췄다. 아이 손이 장갑 안에서 꼼지락거렸다.“그럼. 오늘 봄이를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추운데 혼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아빠는?”“아빠는 봄이랑 같이 살면서 매일 챙겨 주잖아.”“엄마는?”찬 바람이 모자 아래로 파고들었다. 서연은 봄이의 귀를 덮어 주었다.“엄마도 그랬지.”봄이는 잠시 바닥의 보도블록만 밟아 걸었다. 검은 칸은 건너뛰고 회색 칸에만 발을 놓았다. 서연도 아이 속도에 맞췄다. 보호자라는 말이 수요일 밤의 문 닫힌 작은방과 겹쳐, 그녀는 장갑 안에서 아이 손을 더 정확히 쥐었다. 정확히 쥘수록 밤에 한 일이 보호와 멀어졌다.집에 돌아오자 봄이는 물병 이름표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다. 서연은 동의서 봉투를 냉장고 위에 두었다. 자기 이름은 직접 쓰겠다며 연필을 가져온 아이에게는 연습할 종이를 내줬다.아이가 강봄을 세 번 쓰는 동안 서연은 사과를 깎았다.태주는 오늘은 7시 10분쯤 들어오겠다고 미리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주간표의 저녁 칸에 그 시간을 적었다. 8시부터 할 일은 예정대로 할 수 있겠다는 걸 확인하고 봄이와 먼저 밥을 먹었다.7시가 조금 넘어 현관문이 열렸다. 태주는 작업복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친 채였다. 봄이가 봉투를 들고 달려가자 그는 신발도 벗기

  • 언니, 나 어떡하지 형부가...   제007화. 아침

    서연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천장이 낯설었다. 얇은 요 아래로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고, 닫힌 문 너머에서 수도관을 타고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몇 초가 지나서야 작은방에서 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다음으로, 이 요 위에서 그를 받아들인 밤이 떠올랐다.시계는 6시 12분이었다.허벅지 안쪽이 딴딴했다. 요 옆 작은 휴지통에 티슈가 구겨져 있었다. 태주가 새벽에 몰래 치우지 못한 것이었다. 서연은 그 티슈를 더 깊이 눌러 넣었다.복도에서 먼저 소리가 나는지 잠깐 귀를 기울였다. 물 한 컵을 마시러 나갔다가 옷차림까지 신경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의 감각까지 아침의 일이 되어 있었다.서연은 셔츠를 챙겨 욕실로 갔다.문 앞의 작은 발 받침을 비켜 디뎠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잠을 설친 티가 났다. 태주와 마주치기 전에 씻으려고 일찍 나온 것이 더 민망했다. 손목 안쪽에 얕은 붉은 자국이 있었다. 그가 붙잡았던 자리인지, 스스로 이를 악물다 남은 자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 불이 켜졌다. 태주가 밥솥을 열어 보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벌써부터 늦으면 사장님이 바로 원래 시간으로 돌려요.”“밥은 해 놨어. 국은 어제 거 데우면 되고.”태주가 냉장고 문을 열려다 그녀를 다시 봤다.“거기.”“뭐 묻었어요?”“옷깃. 안으로 접혔어.”그는 자기 목 옆을 가리켰다. 서연은 반대편 깃을 만졌다가 손을 바꿨다. 태주가 한 번 더 자기 옷깃을 가리켰다. 서연은 그가 다가올 것처럼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다가온 손끝이 깃을 펴다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 얇은 셔츠 아래로 유두의 윤곽이 잠깐 섰다. 형광등이 그 자리를 그대로 비췄다. 태주의 시선이 그 점을 스치고 냉장고로 도망갔다. 서연도 본 척하지 않았다. 못 본 척하는 공기가 어제 밤보다 더 짙었다.“됐어.”태주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섰다. 서연은 멀쩡해진 옷깃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가 손을 뻗은 것도 아닌데, 혼자 기다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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