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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Author: hikariky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3 22:00:32

강기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은우, 네가? 넌 보컬이잖아.”

지훈은 옆에 있던 곤에게 소곤거렸다.

“너 은우 형이 랩한 거 들어본 적 있어…?”

“글쎄? 수업 시간에 들어본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딱히 인상적이진 않았어. 솔직히 두팔이 형이 랩은 잘하긴 하니까.”

하지만 은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상금 다 주시는 거 맞죠?”

그러자 팀원들이 깜짝 놀랐다.

“너 갑자기 돈은 왜? 상금 타서 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데? 평소엔 그런 욕심 하나도 없었잖아.”

기연의 날카로운 질문에 은우는 거울 너머로 시선을 살짝 피하며 무심한 척 대답했다.

“그건…… 비밀입니다. 그냥, 지금 당장 제 손에 쥘 수 있는 목돈이 좀 필요해서요.”

그 묘한 여운을 남기는 대답에 기연은 물론이고 멤버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은우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돌 연습생이 데뷔를 한다 해도, 억 단위로 쌓인 회사 투자금을 다 갚고 첫 정산을 받기까지는 기약 없는 시간이 걸렸다.

운 좋게 곡이 떠도 최소 1~2년, 길면 그룹이 해체할 때까지 단돈 10원도 만지지 못하는 바닥이었다.

반면 경연 프로그램의 우승 상금은 세금만 떼면 즉시 통장에 꽂히는 달콤하고도 확실한 현금이었다.

은우에겐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평소라면 묵묵히 소속사의 방침에 따랐을 그였지만, 지금 당장 무대를 찢어발겨서라도 그 돈을 기필코 쟁취해야만 하는 숨겨진 이유가.

하지만 은우의 속내를 알 리 없는 기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은우는 소속사의 비밀 병기와 같은 존재였다.

완벽한 외모와 압도적인 보컬 실력.

그래서 최대한 대중의 눈을 피해 존재를 꽁꽁 숨겼다가 데뷔 무대에서 핵폭탄급으로 터뜨릴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래퍼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니, 자칫하면 이도 저도 아닌 이미지로 소비될 위험이 컸다.

“그래? 정 원한다면 지금 당장 여기서 한번 해봐.”

“여기서요? 반주도 없는데요?”

기연은 일부러 비트도 없이 무반주 랩을 시켜서, 못하면 제풀에 지쳐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 심산이었다. 그녀는 짐짓 차가운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어. 쫄리면 지금 당장 그만두고. 원래 진짜 래퍼들은 비트 유무 안 가려.”

하지만 기연의 예상과 달리, 은우는 흔들림 없이 입술을 열었다.

“네 방아쇠는 너무 부실해, 내 발성은 제철 맞은 부시리.

어설픈 네 실력은 무시해, 난 박자 위를 거침없이 누비지.

입 여는 순간 증명되는 진리, 똑같은 네 패턴 벌써 다 질림.

식은땀 흐르면 알아서 비키길, 여긴 네가 감당할 자리가 아님.”

은우가 라임을 내뱉는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랐다.

'단순한 끝말맞추기가 아니잖아? 모음 구조를 통째로 맞추는 다음절 라임이라고?'

하지만 강기연은 애써 이성을 되찾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경연은 장기전이야. 미리 써둔 가사 몇 줄로는 초반에 반짝할 수 있어도, 경연이 거듭될수록 얕은 밑바닥이 금방 드러나고 말 거야.'

어찌 됐든 은우의 본래 포지션은 보컬이었다.

그가 뼛속까지 래퍼인 참가자들 틈에서 끝까지 살아남기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체인쏘를 내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은우야, 네 랩이 확실히 놀랍긴 한데, 그래도 이번엔 체인쏘가…”

기연이 은우를 설득하기 위해 막 입을 뗀 찰나였다.

방금 전까지 날 선 독기를 뿜어내던 은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이내 그의 입술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거칠게 내뱉던 래핑의 잔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꿀이 떨어질 듯 끈적하고 부드러운 선율이 공간을 채웠다.

방금 전까지 무대를 부숴버릴 듯하던 래퍼는 온데간데없고, 당장이라도 사람을 홀릴 듯한 음색의 보컬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켜보던 멤버들은 아예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미친…… 너 방금 들었어? 비트도 없는데 호흡이 저렇게 바뀐다고?”

조금 전까지 은우의 실력을 미덥지 않게 여기던 지훈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린 채 곤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곤 역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양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역시 우리 형이야.”

늘 은우와 함께 연습실을 쓰며 그의 노래를 들어왔던 멤버들조차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와, 음색 미친 거 아니야? 발성 바뀌는 거 사기캐잖아!”

“보컬이 랩까지 저렇게 씹어먹으면 우리는 뭐 먹고 살라고?”

곧이어 멤버들 사이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환호와 찬사가 터져 나왔다.

더블유 역시 흥분한 얼굴로 연신 박수를 치며 거들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은우 형이 나가도 사고 제대로 칠 것 같은데요? 전 은우 형 나가는 거 완전 찬성!”

모두가 은우를 향해 열광하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체인쏘였다.

'뭐야, 저 쫀득한 리듬감은? 저게 보컬이 할 수 있는 랩이라고?'

자신만의 무대라 여겼던 기회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혼자만 나가겠다고 계속 우겼다간 오히려 옹졸해 보이고 팀 분위기만 박살 날 게 뻔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체인쏘는 애써 여유로운 척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뭐… 나쁘진 않네. 솔직히 정통 힙합 씬에서 저런 스타일로 결승까지 가긴 무리겠지만.”

체인쏘는 짐짓 대인배라도 된 것처럼 쿨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초반 화제성 잡기엔 딱 좋잖아? 우리 팀 홍보용으로는 꽤 쏠쏠하게 먹히겠어. 좋아, 은우도 같이 나가는 거 난 찬성.”

겉으로는 호탕하게 팀을 위하는 척 양보했지만, 등 뒤로 감춘 체인쏘의 두 주먹은 불안함과 초조함에 하얗게 질려 잘게 떨리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강기연의 머릿속에서 맹렬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행복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급식래퍼 출연으로 단숨에 화제성 장악! 이 기세로 우승까지 차지하면 이어지는 음원 차트 올킬! 곧바로 메가톤급 팬덤 결성! 데뷔 앨범 초동 밀리언셀러 달성에 내년엔 고척돔 단독 콘서트 매진! 그리고… 강남 한복판에 우리 회사의 번듯한 신사옥 건립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장밋빛 미래에 기연의 동공이 8.0 강진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흔들렸다. 상상만으로도 엔도르핀이 과다 분비되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위이이잉! 푸쉬시식, 펑!

머릿속 톱니바퀴가 너무 한계치까지 돌아간 나머지, 결국 과부하를 이기지 못한 행복회로가 새까맣게 타버리며 연기를 뿜어내는 환청마저 들렸다.

이제 그녀의 눈에 은우는 단순한 연습생이 아니라, 소속사를 단숨에 상장시킬 ‘걸어 다니는 1인 기업’이자 ‘황금알을 낳는 거위’ 그 자체로 빛나고 있었다.

은우는 그저 랩도 조금 할 줄 아는 단순한 보컬이 아니었다.

랩과 보컬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허물어버리는 압도적인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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