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산 아래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다.
평상에서 나물을 다듬던 여자도, 밭에서 일하던 노인도, 자전거를 타던 아이도 흰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길에 늘어섰다.
손에 든 붉은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이연은 여휘가 건넨 혼례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붉은 천이 흙 위로 펼쳐졌다.
금실로 수놓인 여우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빛을 받아 일렁였다.
“입지 않을 거예요.”
이연이 말했다.
여휘는 발치에 떨어진 옷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인 것 같아요?”
“당신을 위해 새로 지은 옷입니다.”
“저 옷장에 있던 것 중 하나잖아요.”
“그 옷들은 당신에게 맞지 않습니다.”
“전 주인이 있었으니까요?”
여휘의 시선이 혼례복 목깃에 머물렀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열두 벌 중 가장 안쪽에 걸려 있던 옷과 같은 흔적이었다.
“그렇게 보입니까?”
그가 물었다.
이연이 다시 내려다보자 얼룩은 사라져 있었다.
새로 지은 옷처럼 깨끗한 붉은 비단만 보였다.
여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이연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될 때마다 즐거워했다.
이제는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네.”
처음부터 기다렸다는 듯 빠른 대답이었다.
“당신은 곤란해질수록 숨을 천천히 쉬려고 합니다. 화가 나면 오른쪽 입술을 먼저 깨물고, 무서울 때는 내 얼굴을 더 오래 보더군요.”
여휘는 이연을 찬찬히 살폈다.
“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이전 여자들도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았어요?”
산길을 오르던 사람들의 발이 일제히 멈췄다.
수십 개의 붉은 등불도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고요해진 산에서 여휘만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대답해요.”
“죽을 때까지는 아닙니다.”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죽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 있었으니까.”
멀리서 방울이 울렸다.
산길에 선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움직임이 한 치의 차이도 없이 같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이연을 걱정하던 눈빛도, 여휘를 두려워하던 기색도 사라지고 없었다.
눈동자는 흐렸고 입꼬리만 어색하게 올라가 있었다.
웃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여휘와 똑같은 얼굴로 웃었다.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이연이 물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게 정상으로 보여요?”
“낮에는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았고, 밤에는 내가 보여 주는 것을 보는 것뿐입니다.”
“결국 당신이 조종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인간도 늘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자기 기억을 스스로 골라요. 당신처럼 남의 머릿속을 헤집지는 않아요.”
“정말 스스로 고른다고 믿습니까?”
이연은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여휘가 원하는 대화였다.
말을 이어 가는 동안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애쓰게 되고, 결국 무엇이 옳았는지조차 잊게 되는 것.
이연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비켜요.”
“어디로 가려고요?”
“여기만 아니면 돼요.”
이연은 여행 가방을 끌고 옆길로 내려가려 했다.
그 순간 산길에 선 사람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누구도 이연을 붙잡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가 가려는 방향으로 한 걸음씩 옮겨 서서 길을 막았다.
이연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그들도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움직이면 그들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표정 없는 얼굴들이 붉은 등불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켜 주세요.”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알고 있다면서요. 내가 여기서 살았고, 엊그제도 같이 이야기했다면서요.”
중년 여자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옆에 있던 노파가 입을 열었다.
“신부가 도망가면 여우비가 내려요.”
그 목소리는 노파의 것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부터 늙은 여자까지 여러 사람의 음성이 한꺼번에 섞여 있었다.
“비를 맞은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요.”
다른 이들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해요.”
“돌아가지 못해요.”
“못해요.”
겹쳐지는 목소리가 산을 가득 채웠다.
여휘는 그 광경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연이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보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연은 결국 여행 가방 손잡이를 놓았다.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서가 아니었다.
손이 자유로워지자 바닥에 떨어진 혼례복을 집어 들었다.
여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입을 생각입니까?”
이연은 대답하지 않고 혼례복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곧이어 옆으로 길게 찢었다.
두꺼운 비단이 종이처럼 갈라졌다.
찢어진 틈에서 검은 연기가 터져 나왔다.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한 명이 아니었다.
열두 명의 목소리가 겹쳐진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혼례복에 수놓인 금빛 여우들이 꿈틀거렸고, 붉은 실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이연의 손목을 휘감았다.
여휘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처음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이연의 손목을 잡아 실을 끊어 냈다.
붉은 실은 그의 손가락에 닿자 불에 그슬린 머리카락처럼 오그라들었다.
찢어진 혼례복이 바닥에 떨어졌다.
검은 연기 속에서 여자들의 얼굴이 하나씩 나타났다.
눈이 없는 여자.
입이 꿰매진 여자.
목이 꺾인 여자.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
얼굴은 모두 달랐지만 똑같은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여휘가 아니라 이연을 바라보았다.
원망과 슬픔이 아니었다.
비어 있는 얼굴마다 기이한 안도감이 번졌다.
마지막 여자가 이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 입지 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뜻은 분명했다.
여휘가 손을 휘저었다.
검은 연기와 여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찢어졌던 혼례복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의 손은 여전히 이연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번에는 전처럼 일부러 아프게 하는 힘이 아니었다.
붉은 실이 감겼던 피부를 확인하는 손길이 빠르고 집요했다.
손목 안쪽에는 가느다란 상처가 여러 줄 남아 있었다.
여휘의 시선이 그 위에서 멈췄다.
“놔요.”
이연이 말했다.
그는 듣지 않았다.
손가락이 상처 위를 천천히 눌렀다.
붉은 피가 한 방울 배어 나왔다.
그 순간 여휘의 눈빛이 달라졌다.
늘 장난스러운 즐거움만 떠돌던 눈동자 안에 짙은 빛이 번졌다.
피를 본 짐승의 눈과도 같았지만 허기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깊었다.
이연이 손을 잡아당겼다.
“아프다고요.”
그제야 여휘가 시선을 들었다.
“그렇습니까?”
“일부러 세게 잡은 거잖아요.”
“놓치기 싫어서.”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여휘 자신도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연은 오히려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옷을 찢어서 화났어요?”
“아닙니다.”
“그런 얼굴인데요.”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습니까?”
여휘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점이 이연을 더 긴장하게 했다.
“당신이 말해 봐요.”
이연이 대꾸했다.
“나는 내 눈도 못 믿게 만들었으면서 왜 자꾸 나한테 물어요?”
잠시 후 여휘가 다시 웃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얼굴로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미소 아래에 얇고 서늘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무섭게 보였습니까?”
“당신은 웃을 때가 더 무서워요.”
“그렇다면 계속 웃어야겠군요.”
여휘가 이연의 손목을 들었다.
입술이 상처 가까이 다가왔다.
이연은 본능적으로 팔을 빼내려 했다.
“뭐 하는 거예요?”
“흔적을 지우려는 겁니다.”
“당신이 치료라도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습니다.”
“필요 없으니까 놔요.”
그녀가 거부했지만 여휘는 손목을 놓지 않았다.
다만 입술을 대지도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멈춰 있었다.
이연이 무엇을 할지 기다리는 듯했다.
“또 내 반응을 보는 거예요?”
“이번에는 아닙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여휘의 엄지가 상처 주변을 느리게 쓸었다.
피가 묻은 손가락이 흰 피부 위로 붉은 자국을 남겼다.
“그 실이 파고든 상처는 오래 열어 두면 안 됩니다.”
“왜요?”
“죽은 신부들이 당신의 몸을 기억하게 되니까.”
“그 여자들은 나를 해치려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압니까?”
“당신과 달리 해치고 싶어 하는 얼굴이 아니었어요.”
여휘가 낮게 웃었다.
“죽은 것들을 믿고 나는 믿지 않으시는군요.”
“당연하잖아요.”
이연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여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웃음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화가 났는지 즐거운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럼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그가 이연의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곧이어 손가락으로 상처를 가볍게 눌렀다.
차가운 감각이 피부 아래로 스며들었다.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그러나 붉은 실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느다란 선들이 손목을 한 바퀴 감싼 채 희미하게 빛났다.
“왜 그대로예요?”
“내가 남긴 것이 아니니까.”
여휘의 시선이 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오늘 밤이 되면 저들이 당신을 찾아올 겁니다.”
“그때 물어볼게요.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말을 못 하면 다른 방법을 찾겠죠.”
이연의 대답에 여휘가 미소 지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는 정말 허락이라도 하듯 길을 비켜 주었다.
산길을 막고 있던 사람들도 동시에 양옆으로 물러났다.
월하재의 대문까지 일직선으로 길이 열렸다.
“대신 하나는 기억하는 편이 좋습니다.”
여휘가 말했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건네는 것은 무엇이든 받지 마십시오.”
“자정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것처럼요?”
“그것도 기억하고 있었군요.”
“당신 말은 믿지 않아도 규칙은 기억해 두려고요.”
“왜요?”
“당신이 내가 규칙을 어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여휘의 눈이 즐거운 빛으로 휘었다.
“이제 나를 조금 아시는군요.”
“기뻐하지 마요. 기분 나쁘니까.”
이연은 그를 지나쳐 월하재로 향했다.
“잠깐.”
여휘가 불렀다.
이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왜요?”
“구두가 풀렸습니다.”
그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두 끈은 멀쩡했다.
고개를 드는 순간 여휘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이연이 물러서기도 전에 그가 허리를 숙였다.
한 손은 이연의 손목을 잡고, 다른 손은 턱 아래에 닿았다.
숨결이 가까워졌다.
여휘의 입술이 이연의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다.
닿지 않았는데도 지난밤 영상 속 장면이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여휘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자신의 팔.
맞닿은 입술.
숨이 모자랄 때까지 이어지던 깊은 감각.
이연은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냈다.
여휘는 저항하지 않고 물러났다.
입술이 닿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연의 아랫입술에는 붉은 피가 맺혀 있었다.
조금 전 긴장한 채 깨물었던 자리가 터진 모양이었다.
여휘의 시선이 그 피에 머물렀다.
“이런 것도 재미있어요?”
이연이 물었다.
그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네.”
솔직한 대답이었다.
“당신은 닿지도 않았는데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해 내는군요.”
“그건 당신이 보여 준 가짜 기억이잖아요.”
“그럴까요?”
여휘의 손가락이 이연의 입술로 향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손목을 붙잡아 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가까이 얽혔다.
“내 허락 없이 만지지 마요.”
이연이 낮게 말했다.
여휘는 붙잡힌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허락을 구하면 됩니까?”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언제까지?”
“계속.”
여휘가 웃었다.
그 웃음은 기분 나쁠 만큼 확신에 차 있었다.
“그 말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나중에 거짓말하려고요?”
“아니요.”
그가 손을 거두며 이연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먼저 허락하는 날에 돌려드리려고.”
여휘는 그녀를 지나쳐 월하재로 걸어갔다.
이연은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불쾌해야 했다.
실제로도 불쾌했다.
그런데 기억한 적 없는 입맞춤의 감각이 아직 입술에 남아 있었다.
여휘의 꽃향기까지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연은 손등으로 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앞서 걷던 여휘가 돌아보지 않은 채 웃었다.
그는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연이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기억을 지우려 애쓰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우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진다는 것까지.
산길 양옆에 선 사람들이 다시 등불을 들었다.
달빛이 비치기도 전에 월하재 위로 둥근 달이 떠올랐다.
여휘가 대문을 넘는 순간 사람들의 입에서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사 없는 혼례곡이었다.
이연은 그 소리를 듣자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섰다.
노래의 다음 가락을 알고 있었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이려 했다.
이연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삼켰다.
그러자 손목의 붉은 자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디선가 여자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 열세 번째는 끝까지 불러야 해.
― 그래야 문이 열려.
― 그래야 그이를 죽일 수 있어.
이연이 걸음을 멈췄다.
죽은 신부들의 목소리였다.
여휘도 그 말을 들은 듯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도 분노도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놀이를 발견한 것처럼 환한 미소가 번졌다.
“들으셨습니까?”
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죽일 수 있다고 하던가요?”
여휘가 물었다.
그는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막을 생각이 없다는 듯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해 보고 싶으면 해도 됩니다.”
달빛 아래에서 그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번뜩였다.
“당신이라면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나를 죽일 수 있다고 하던가요?”여휘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았다.한이연은 월하재로 돌아가는 동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여휘는 앞서 걷지도, 곁에 서지도 않았다.그러나 짙은 꽃향기가 줄곧 따라왔다.보이지 않을 뿐 가까이에 있었다.이연은 월하재의 대문을 넘기 전 멈췄다.산길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붉은 등불만 나뭇가지마다 걸려 있었다.불꽃은 이연이 움직일 때마다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그녀를 지켜보는 눈처럼 느껴졌다.월하재 안에도 아무도 없었다.마당에는 찢어 버린 혼례복 대신 붉은 꽃잎만 흩어져 있었다.꽃잎 가운데에는 작은 금빛 장식 하나가 놓여 있었다.비녀였다.끝부분에 여우 두 마리가 서로 꼬리를 맞댄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이연이 가까이 다가가자 손목에 남은 붉은 실 자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죽은 신부들이 남긴 물건일지도 몰랐다.이연은 몸을 숙여 비녀를 집었다.금속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손가락이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혼례곡이 울리기 시작했다.산길에서 들은 것과 같은 곡이었다.피리와 북이 느린 장단을 만들고, 이름 모를 여자들이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첫 소절은 알고 있었다.두 번째도.이연은 배운 적 없는 곡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다.입술이 저절로 움직이려 하자 혀를 깨물어 소리를 삼켰다.노래가 멎었다.대신 여자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달이 가장 높이 오르면 동쪽 문을 열어.― 그이의 그림자가 먼저 들어가게 해.― 노래를 끝까지 부른 다음 심장을 찔러.목소리는 비녀를 쥔 손을 타고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면 우리도 나갈 수 있어.이연은 비녀를 손수건으로 감싸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그 순간 등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느리고 여유로운 소리였다.짝.짝.이연은 놀라지 않으려고 숨을 가다듬은 뒤 몸을 돌렸다.여휘가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한쪽 무릎을 세운 편안한 자세였다.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자리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산 아래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다.평상에서 나물을 다듬던 여자도, 밭에서 일하던 노인도, 자전거를 타던 아이도 흰옷을 입고 있었다.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길에 늘어섰다.손에 든 붉은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다.바람은 불지 않았다.이연은 여휘가 건넨 혼례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붉은 천이 흙 위로 펼쳐졌다.금실로 수놓인 여우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빛을 받아 일렁였다.“입지 않을 거예요.”이연이 말했다.여휘는 발치에 떨어진 옷을 내려다보았다.“마음에 들지 않습니까?”“그게 문제인 것 같아요?”“당신을 위해 새로 지은 옷입니다.”“저 옷장에 있던 것 중 하나잖아요.”“그 옷들은 당신에게 맞지 않습니다.”“전 주인이 있었으니까요?”여휘의 시선이 혼례복 목깃에 머물렀다.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열두 벌 중 가장 안쪽에 걸려 있던 옷과 같은 흔적이었다.“그렇게 보입니까?”그가 물었다.이연이 다시 내려다보자 얼룩은 사라져 있었다.새로 지은 옷처럼 깨끗한 붉은 비단만 보였다.여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그는 이연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될 때마다 즐거워했다.이제는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내가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네.”처음부터 기다렸다는 듯 빠른 대답이었다.“당신은 곤란해질수록 숨을 천천히 쉬려고 합니다. 화가 나면 오른쪽 입술을 먼저 깨물고, 무서울 때는 내 얼굴을 더 오래 보더군요.”여휘는 이연을 찬찬히 살폈다.“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궁금해집니다.”“그래서 이전 여자들도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았어요?”산길을 오르던 사람들의 발이 일제히 멈췄다.수십 개의 붉은 등불도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고요해진 산에서 여휘만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대답해요.”“죽을 때까지는 아닙니다.”그가 부드럽게 말했다.“죽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 있었으니까.”멀리서 방울이 울렸다.산길에 선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움직임이
이연은 문을 열지 않았다.아침을 알리던 여휘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방 안에 머물렀다.복도에 아무런 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여행 가방을 침대 위로 올렸다.옷을 갈아입고 흩어진 물건을 가방에 넣었다.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분명한 것은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동영상은 삭제하지 않았다.영상 속 자신의 행동은 기억과 전혀 달랐지만, 그것 역시 기록이었다.여휘가 영상을 조작한 것인지, 자신이 실제로 혼자 움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무엇이 진짜인지 판단할 수 없을 때는 어느 쪽도 버리지 않는 편이 나았다.이연은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었다.― 월하재에 온 것은 어제다.― 여휘를 처음 만난 곳은 산으로 올라오는 돌계단이다.― 그는 내 이름을 미리 알고 있었다.― 혼례복은 열두 벌이었다.― 이전의 신부들 중 몇은 여휘가 죽였다.문장을 하나씩 적으며 소리 내어 읽었다.마지막 줄을 입력할 때 손이 잠시 멈췄다.여휘가 정말 죽였다고 말했던가.몇은, 이라고 대답한 것은 분명했다.그러나 그보다 앞서 자신이 어떤 질문을 했는지는 흐릿했다.기억 속 대화는 끝부분이 잘린 실처럼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이연은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대신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기억이 흐려져도 기록을 먼저 의심하지 말 것.메모를 저장한 뒤 화면을 캡처했다.혹시 기록이 사라질 것을 대비해 같은 내용을 종이에도 적으려 했지만 방 안에는 필기구가 없었다.이연은 여행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그 순간 방문 밖에서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누군가 바로 앞에 상을 내려놓는 듯했다.“식기 전에 나오시지요.”여휘였다.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떠나려면 배를 채우는 편이 좋을 텐데.”그가 가방을 싸는 모습을 본 것처럼 말했다.이연은 잠금장치에서 손을 떼고 방문을 바라보았다.“훔쳐보고 있어요?”“보지 않아도 압니다.”“내가 뭘 하는지 어떻게 아는데요?”“당신은 내가 말하는 것마다 질문으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어디에서 울리는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깊고 낮은 울림이 월하재의 기둥과 바닥을 타고 번졌다.한 번.두 번.종이 울릴 때마다 방 안의 촛불이 하나씩 밝혀졌다.조금 전까지 없었던 촛불이었다.벽을 따라 놓인 붉은 초에 푸른 불꽃이 붙으면서 방 안의 모습도 달라졌다.흰 이불은 붉은 비단 이불로 변해 있었다.천장에서는 혼례 때 사용하는 청사초롱이 흔들렸고, 창문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천이 길게 늘어졌다.이연이 휴대전화로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다만 화면 속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여휘는 옷장 안에 앉아 있었다.문밖에서도 여휘의 목소리가 들렸다.“이연.”둘의 목소리는 완전히 같았다.높낮이도, 말끝에 밴 미세한 웃음도 구별할 수 없었다.옷장 안의 여휘가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시간이 많지 않습니다.”“왜요?”“밤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그가 가볍게 눈짓하자 방문 손잡이가 다시 돌아갔다.철컥.철컥.밖에 있는 것이 잠금장치를 확인하듯 천천히 손잡이를 흔들고 있었다.“열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이연이 물었다.옷장 속 여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들어가지 못하겠지.”두 여휘가 서로의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이연은 문에서 멀어졌다.“둘이 같은 편이에요?”“아닙니다.”이번에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대답했다.같은 소리가 겹쳐지자 방 안의 공기가 낮게 떨렸다.이연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어느 쪽이 진짜인지 고르려고 해서는 안 됐다.둘 다 여휘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한쪽을 믿는 순간 그것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웠다.동영상 촬영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그러나 화면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옷장은 닫혀 있었고 방문 앞도 비어 있었다.붉은 혼례방 한가운데에 이연 혼자 서 있었다.그런데 화면 속 이연은 현실의 그녀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실제 이연은 옷장을 향해 서
옷장 안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이연은 움직이지 않았다.잘못 들은게 아니었다.누군가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옷장의 나무문 너머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이어졌다.이연은 발치에 떨어진 사진을 내려다보았다.월하재 앞에 서 있는 자신과 여휘, 그리고 현재보다 정확히 일 년 앞선 촬영 일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사진 속 자신은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얼굴은 빗물에 번진 것처럼 흐릿했지만, 왼손에 낀 은색 반지는 선명했다.이연은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같은 반지가 중지에 끼워져 있었다.몇 년 전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산 것이었다. 흔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도 아니었다.사진 속 여자가 자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그런데 사진 뒤에는 분명 자신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이번에도 그를 믿었다.문장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글씨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획의 끝이 번지고, 글자 사이의 간격이 좁아졌다.이연은 사진을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확인해야 했다.두려움 때문에 옷장을 열지 않는다면 밤새 안에서 나는 소리에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나았다.그녀는 화장대 앞에 놓인 나무 의자를 들었다.한 손으로 의자를 세워 든 채 다른 손으로 옷장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쇠붙이가 손바닥에 닿았다.안쪽의 숨소리가 멎었다.“누구 있어요?”대답은 없었다.이연은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옷장 문이 열리며 짙은 향 냄새가 밀려 나왔다.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사람이 몸을 숨길 공간조차 없었다.옷장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여러 벌의 옷이었다.흰 저고리와 붉은 치마, 금빛 자수가 놓인 겉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비슷해 보이지만 모양과 색이 조금씩 달랐다.어느 것은 오래되어 소매 끝이 누렇게 변했고, 어느 것은 며칠 전에 지은 것처럼 천의 광택이 선명했다.모두 혼례복이었다.이연은 들고 있던 의자를 천
이연은 자신이 언제부터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한 걸음 앞에서는 여휘가 걷고 있었다.붉은 등불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그의 검은색 옷자락에 옅은 금빛이 번졌다가 사라졌다.여휘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따라오라고 재촉하지도 않았고, 뒤를 돌아보며 제대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그녀가 도망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여유로운 걸음이었다.그 태도가 오히려 불안했다.이연은 몇 계단을 더 오른 뒤 멈춰 섰다.“저는 따라가겠다고 한 적 없어요.”여휘도 걸음을 멈추었다.“그렇습니까?”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이연이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분명 그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런데 따라가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아니, 했던가.기억을 더듬을수록 머릿속에 안개가 차올랐다.“돌아갈게요.”“그러십시오.”여휘는 선뜻 길을 비켜 주었다.그의 반응에는 아쉬움이 없었다.예상과 달리 붙잡지 않자 이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막막해졌다.그래도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이연은 몸을 돌렸다.조금 전까지 길게 이어져 있던 돌계단이 사라져 있었다.그녀의 발뒤꿈치 바로 아래로 검은 물이 출렁였다.산 아래에 있어야 할 강도, 계곡도 아니었다.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물이 계단이 있던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비가 떨어질 때마다 동그란 파문이 번졌는데, 물결 사이로 붉고 흰 옷자락이 수없이 떠다녔다.물속에 잠긴 여자들이었다.긴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흔들렸다.모두 얼굴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다만 물 위로 떠오른 손가락마다 붉은 실이 묶여 있었다.이연이 숨을 들이켠 순간 여휘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그러십니까?”“저 아래에…….”그녀가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 물은 사라지고 없었다.내려가는 돌계단이 멀쩡히 이어져 있었다.붉은 등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