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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어느 쪽도 믿지 마

Author: 빵떡순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5 16:52:06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어디에서 울리는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깊고 낮은 울림이 월하재의 기둥과 바닥을 타고 번졌다.

한 번.

두 번.

종이 울릴 때마다 방 안의 촛불이 하나씩 밝혀졌다.

조금 전까지 없었던 촛불이었다.

벽을 따라 놓인 붉은 초에 푸른 불꽃이 붙으면서 방 안의 모습도 달라졌다.

흰 이불은 붉은 비단 이불로 변해 있었다.

천장에서는 혼례 때 사용하는 청사초롱이 흔들렸고, 창문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천이 길게 늘어졌다.

이연이 휴대전화로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

다만 화면 속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여휘는 옷장 안에 앉아 있었다.

문밖에서도 여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연.”

둘의 목소리는 완전히 같았다.

높낮이도, 말끝에 밴 미세한 웃음도 구별할 수 없었다.

옷장 안의 여휘가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왜요?”

“밤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그가 가볍게 눈짓하자 방문 손잡이가 다시 돌아갔다.

철컥.

철컥.

밖에 있는 것이 잠금장치를 확인하듯 천천히 손잡이를 흔들고 있었다.

“열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이연이 물었다.

옷장 속 여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들어가지 못하겠지.”

두 여휘가 서로의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이연은 문에서 멀어졌다.

“둘이 같은 편이에요?”

“아닙니다.”

이번에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같은 소리가 겹쳐지자 방 안의 공기가 낮게 떨렸다.

이연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고르려고 해서는 안 됐다.

둘 다 여휘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한쪽을 믿는 순간 그것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웠다.

동영상 촬영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화면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옷장은 닫혀 있었고 방문 앞도 비어 있었다.

붉은 혼례방 한가운데에 이연 혼자 서 있었다.

그런데 화면 속 이연은 현실의 그녀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 이연은 옷장을 향해 서 있었다.

화면 속 이연은 방문을 바라보았다.

“열어 줘야 해.”

휴대전화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면 속의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내가 기다렸잖아.”

이연이 휴대전화 화면을 끄자 검게 변한 화면에 세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자신과 옷장 안의 여휘.

그리고 바로 등 뒤에 선 또 한 명의 여휘.

이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 있는 것도 당신이에요?”

옷장 속 여휘가 웃었다.

“궁금하면 보십시오.”

“보게 만들고 싶은 거겠죠.”

“영리하시군요.”

“칭찬하지 마요.”

“왜요?”

“당신이 좋아하는 대로 움직인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니까.”

여휘의 웃음이 조금 짙어졌다.

이연은 그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이것은 정답을 맞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휘는 그녀가 겁에 질려 어느 쪽이든 선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를 고르면 살려 주는 것도, 가짜를 고르면 해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게는 놀이에 불과했다.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거예요.”

이연이 말했다.

옷장 속 여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도 됩니까?”

“당신이 정하라고 한 적도 없잖아요. 어느 쪽이 진짜냐고 물었을 뿐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대답할 필요도 없어요.”

이연은 방문과 옷장 사이를 벗어나 방 한가운데로 움직였다.

등 뒤에 누군가 서 있다는 감각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차가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찻상 위에 놓인 놋그릇을 들었다.

음식은 먹지 않았다.

대신 남아 있던 물을 바닥에 원 모양으로 부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귀신은 흐르는 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물이 완전한 원을 이루기도 전에 옷장 속 여휘가 물었다.

“그게 당신을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이연은 그릇을 내려놓았다.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연은 처음으로 자신이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작은 승리였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휘가 옷장 밖으로 나왔다.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몸이 어둠 속에서 미끄러지듯 앞으로 움직였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는데도 까만 옷자락이 소리 없이 펼쳐졌다.

그가 물로 그린 원 앞에 섰다.

“내 반응이 궁금했습니까?”

“다가오지 마요.”

“이제는 내가 궁금해진 모양이군요.”

여휘가 물 위로 발을 내디뎠다.

파문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원 안으로 들어왔다.

이연이 뒤로 물러서자 목덜미에 닿아 있던 숨결이 사라졌다. 까만 휴대전화 화면에 비치던 세 번째 여휘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문을 두드리던 소리마저 멎었다.

방 안에는 이연과 여휘만 남았다.

“당신이 진짜였어요?”

이연이 물었다.

“어느 쪽을 말하는 겁니까?”

“옷장 안에 있던 당신.”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십니까?”

여휘는 끝까지 확답하지 않았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달콤한 꽃향기가 짙어졌다. 이연은 숨을 참았지만 향은 코가 아니라 피부를 통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손끝이 저릿해지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여휘가 손을 뻗었다.

그녀가 피하려 하자 그가 손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뼈 위로 단단히 감겼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기만 하던 태도와 달리 놓아줄 생각이 없는 힘이었다.

“이것도 놀이예요?”

이연이 손을 빼내려 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할 건데요?”

여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재미가 없어질 때까지.”

거리낌 없는 대답이었다.

이연은 손목을 비틀었다. 여휘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 만큼 힘이 강해졌는데도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때가 되면 나를 보내 줄 거예요?”

“전에는 그랬습니다.”

“전에는?”

이연이 되묻자 여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돌아왔다.

“옷장 안의 혼례복을 보셨잖습니까.”

조금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굴던 사람이었다.

이연은 그가 일부러 말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자들을 돌려보냈어요?”

“돌려보냈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살아서요?”

여휘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연의 얼굴이 굳자 그가 손목을 놓았다. 붉어진 피부 위로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여휘는 그 자국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자신이 남긴 흔적이 마음에 든 듯 엄지로 붉은 부분을 천천히 쓸었다.

“무서워졌습니까?”

“처음부터 무서웠어요.”

“그런 얼굴은 아니었는데.”

“당신이 원하는 얼굴을 보여 주기 싫었으니까요.”

여휘가 낮게 웃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어지는군.”

그 말에는 숨기려는 기색이 없었다.

이연은 손목을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여휘가 순순히 놓아주었다.

놓아주는 손길마저 그의 선택처럼 느껴졌다.

그때 방문이 세게 흔들렸다.

쾅.

두 사람이 동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쾅.

나무문이 안쪽으로 휘어졌다. 문밖에서 손톱으로 표면을 긁는 소리가 이어졌다.

문틈으로 들어온 붉은 실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방 안을 기어 다녔다.

여휘는 그것을 바라볼 뿐 막지 않았다.

“저게 뭔데요?”

“내 목소리를 흉내 내던 것.”

“그러니까 정체가 뭐냐고요.”

“이곳에서 쫓겨난 것들입니다.”

“신부들이에요?”

“신부였던 것들도 있지요.”

여휘의 대답과 함께 문 아래로 검게 변한 손가락들이 들어왔다.

손톱이 모두 빠진 손이었다.

손가락들이 바닥을 긁으며 이연을 향해 뻗었다. 손목마다 붉은 실이 여러 번 감겨 있었다.

“당신이 죽였어요?”

이연은 여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몇은.”

“왜요?”

“재미가 없어졌으니까.”

그는 날씨에 관해 말하듯 무심했다.

죄책감도, 변명도 없었다.

문밖에 있는 것들이 그의 대답을 들은 듯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낮고 갈라진 울음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문을 긁던 손가락들이 더 거칠게 움직였다.

이연은 처음으로 여휘보다 문밖의 것들이 덜 무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저것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숨기지 않았다.

“그럼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네요.”

여휘가 이연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왜 걱정해야 합니까?”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재미있는데.”

문이 크게 갈라졌다.

틈 사이로 창백한 얼굴들이 겹겹이 밀려들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마다 붉은 실이 꿰매져 있었고, 벌어진 입에서는 검은 흙이 쏟아졌다.

여휘가 손을 가볍게 들었다.

그 순간 푸른 촛불이 모두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문밖의 울음이 뚝 끊겼다.

이연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곁에 있던 여휘의 기척도 사라졌다.

“여휘 씨?”

대답이 없었다.

이연은 그를 부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무언가 발목을 만졌다.

차갑고 마른 손가락이었다.

이연이 다리를 빼내려 하자 손이 발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또 다른 손이 종아리를 붙잡았고, 머리카락 같은 것이 허벅지를 휘감았다.

그녀는 비명을 참지 못했다.

“여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손도, 머리카락도, 문밖의 울음도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여휘의 손이 이연의 허리를 감쌌다.

그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등이 단단한 가슴에 부딪쳤다.

이연이 몸을 돌리려 하자 여휘의 다른 손이 턱을 붙잡았다. 차가운 손가락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왜 이제야 부릅니까?”

귓가에 닿은 목소리에는 웃음이 배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가까이에 있었다.

이연이 언제 자신을 찾을지 기다리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 알고 있었죠?”

“무엇을요?”

“저것들이 나를 잡을 거라는 것도, 불이 꺼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내버려 뒀어요?”

여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이연의 턱선을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두려움 때문에 차가워진 피부의 감촉을 확인하듯 여유로운 손길이었다.

“내 이름을 부를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요?”

“듣고 싶었으니까.”

이연은 팔꿈치로 그의 몸을 밀어냈다.

여휘는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가까이 붙잡았다.

다정한 포옹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움직임을 완전히 가둔 힘은 위협에 가까웠다.

“놔요.”

“조금만 더 이대로 계시지요.”

“왜요?”

“지금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워서.”

여휘가 낮게 웃었다.

“아주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거든.”

그 순간 방 안의 촛불이 다시 켜졌다.

이연의 눈앞에 화장대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에는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여휘가 비쳤다.

그런데 현실과 달리 거울 속 이연은 웃고 있었다.

그녀는 붉은 혼례복을 입고 여휘의 품에 편안히 기대어 있었다. 여휘의 손 위에는 자신의 손을 겹쳐 놓고 있었다.

현실의 이연은 몸부림쳤다.

하지만 거울 속의 자신은 여휘를 올려다보며 행복하게 웃었다.

거울 속 여휘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이연의 귀 가까이에 닿았다.

현실의 여휘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만 그가 속삭였다.

― 이번에는 네가 먼저 나를 불렀어.

거울 표면에 금이 갔다.

이연이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여휘는 사라지고 없었다.

방은 처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흰 이불.

빈 옷장.

닫힌 방문.

바닥에 물로 그렸던 원도, 붉은 실도 보이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들렸다.

벌써 아침이었다.

이연은 방 한가운데 혼자 서 있었다.

지난밤의 일이 꿈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뿐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촬영한 동영상 하나가 저장되어 있었다.

영상의 길이는 여섯 시간이었다.

이연은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에는 텅 빈 방이 찍혀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연만이 방 한가운데 서서 허공과 대화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영상 속 이연은 제 손으로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혼자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어 붉은 자국을 남긴 것도 이연 자신이었다.

그리고 영상의 마지막 순간.

이연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안기려는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녹음되지 않았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여휘.

자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화면 구석에 검은색 옷자락이 스쳤다.

이연이 영상을 멈췄다.

화면 속에서 여휘가 혼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 네가 선택했어.

방문 밖에서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여휘의 평온한 목소리가 아침을 알렸다.

“이연, 일어나셨습니까?”

마치 지난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밖의 여휘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낮은 웃음소리만 문틈을 넘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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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어디에서 울리는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깊고 낮은 울림이 월하재의 기둥과 바닥을 타고 번졌다.한 번.두 번.종이 울릴 때마다 방 안의 촛불이 하나씩 밝혀졌다.조금 전까지 없었던 촛불이었다.벽을 따라 놓인 붉은 초에 푸른 불꽃이 붙으면서 방 안의 모습도 달라졌다.흰 이불은 붉은 비단 이불로 변해 있었다.천장에서는 혼례 때 사용하는 청사초롱이 흔들렸고, 창문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천이 길게 늘어졌다.이연이 휴대전화로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다만 화면 속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여휘는 옷장 안에 앉아 있었다.문밖에서도 여휘의 목소리가 들렸다.“이연.”둘의 목소리는 완전히 같았다.높낮이도, 말끝에 밴 미세한 웃음도 구별할 수 없었다.옷장 안의 여휘가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시간이 많지 않습니다.”“왜요?”“밤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그가 가볍게 눈짓하자 방문 손잡이가 다시 돌아갔다.철컥.철컥.밖에 있는 것이 잠금장치를 확인하듯 천천히 손잡이를 흔들고 있었다.“열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이연이 물었다.옷장 속 여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들어가지 못하겠지.”두 여휘가 서로의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이연은 문에서 멀어졌다.“둘이 같은 편이에요?”“아닙니다.”이번에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대답했다.같은 소리가 겹쳐지자 방 안의 공기가 낮게 떨렸다.이연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어느 쪽이 진짜인지 고르려고 해서는 안 됐다.둘 다 여휘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한쪽을 믿는 순간 그것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웠다.동영상 촬영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그러나 화면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옷장은 닫혀 있었고 방문 앞도 비어 있었다.붉은 혼례방 한가운데에 이연 혼자 서 있었다.그런데 화면 속 이연은 현실의 그녀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실제 이연은 옷장을 향해 서

  • 여우가 신부를 삼키는 법   3화. 이름을 부르는 것

    옷장 안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이연은 움직이지 않았다.잘못 들은게 아니었다.누군가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옷장의 나무문 너머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이어졌다.이연은 발치에 떨어진 사진을 내려다보았다.월하재 앞에 서 있는 자신과 여휘, 그리고 현재보다 정확히 일 년 앞선 촬영 일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사진 속 자신은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얼굴은 빗물에 번진 것처럼 흐릿했지만, 왼손에 낀 은색 반지는 선명했다.이연은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같은 반지가 중지에 끼워져 있었다.몇 년 전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산 것이었다. 흔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도 아니었다.사진 속 여자가 자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그런데 사진 뒤에는 분명 자신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이번에도 그를 믿었다.문장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글씨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획의 끝이 번지고, 글자 사이의 간격이 좁아졌다.이연은 사진을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확인해야 했다.두려움 때문에 옷장을 열지 않는다면 밤새 안에서 나는 소리에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나았다.그녀는 화장대 앞에 놓인 나무 의자를 들었다.한 손으로 의자를 세워 든 채 다른 손으로 옷장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쇠붙이가 손바닥에 닿았다.안쪽의 숨소리가 멎었다.“누구 있어요?”대답은 없었다.이연은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옷장 문이 열리며 짙은 향 냄새가 밀려 나왔다.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사람이 몸을 숨길 공간조차 없었다.옷장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여러 벌의 옷이었다.흰 저고리와 붉은 치마, 금빛 자수가 놓인 겉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비슷해 보이지만 모양과 색이 조금씩 달랐다.어느 것은 오래되어 소매 끝이 누렇게 변했고, 어느 것은 며칠 전에 지은 것처럼 천의 광택이 선명했다.모두 혼례복이었다.이연은 들고 있던 의자를 천

  • 여우가 신부를 삼키는 법   2화. 월하재

    이연은 자신이 언제부터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한 걸음 앞에서는 여휘가 걷고 있었다.붉은 등불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그의 검은색 옷자락에 옅은 금빛이 번졌다가 사라졌다.여휘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따라오라고 재촉하지도 않았고, 뒤를 돌아보며 제대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그녀가 도망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여유로운 걸음이었다.그 태도가 오히려 불안했다.이연은 몇 계단을 더 오른 뒤 멈춰 섰다.“저는 따라가겠다고 한 적 없어요.”여휘도 걸음을 멈추었다.“그렇습니까?”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이연이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분명 그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런데 따라가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아니, 했던가.기억을 더듬을수록 머릿속에 안개가 차올랐다.“돌아갈게요.”“그러십시오.”여휘는 선뜻 길을 비켜 주었다.그의 반응에는 아쉬움이 없었다.예상과 달리 붙잡지 않자 이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막막해졌다.그래도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이연은 몸을 돌렸다.조금 전까지 길게 이어져 있던 돌계단이 사라져 있었다.그녀의 발뒤꿈치 바로 아래로 검은 물이 출렁였다.산 아래에 있어야 할 강도, 계곡도 아니었다.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물이 계단이 있던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비가 떨어질 때마다 동그란 파문이 번졌는데, 물결 사이로 붉고 흰 옷자락이 수없이 떠다녔다.물속에 잠긴 여자들이었다.긴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흔들렸다.모두 얼굴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다만 물 위로 떠오른 손가락마다 붉은 실이 묶여 있었다.이연이 숨을 들이켠 순간 여휘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그러십니까?”“저 아래에…….”그녀가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 물은 사라지고 없었다.내려가는 돌계단이 멀쩡히 이어져 있었다.붉은 등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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