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연은 자신이 언제부터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한 걸음 앞에서는 여휘가 걷고 있었다.
붉은 등불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그의 검은색 옷자락에 옅은 금빛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여휘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따라오라고 재촉하지도 않았고, 뒤를 돌아보며 제대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도망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여유로운 걸음이었다.
그 태도가 오히려 불안했다.
이연은 몇 계단을 더 오른 뒤 멈춰 섰다.
“저는 따라가겠다고 한 적 없어요.”
여휘도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습니까?”
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연이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런데 따라가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니, 했던가.
기억을 더듬을수록 머릿속에 안개가 차올랐다.
“돌아갈게요.”
“그러십시오.”
여휘는 선뜻 길을 비켜 주었다.
그의 반응에는 아쉬움이 없었다.
예상과 달리 붙잡지 않자 이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막막해졌다.
그래도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연은 몸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길게 이어져 있던 돌계단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발뒤꿈치 바로 아래로 검은 물이 출렁였다.
산 아래에 있어야 할 강도, 계곡도 아니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물이 계단이 있던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가 떨어질 때마다 동그란 파문이 번졌는데, 물결 사이로 붉고 흰 옷자락이 수없이 떠다녔다.
물속에 잠긴 여자들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흔들렸다.
모두 얼굴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물 위로 떠오른 손가락마다 붉은 실이 묶여 있었다.
이연이 숨을 들이켠 순간 여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십니까?”
“저 아래에…….”
그녀가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 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내려가는 돌계단이 멀쩡히 이어져 있었다.
붉은 등불도 이전과 다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 같은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 끝을 노려보다가 여휘를 돌아보았다.
“방금 못 봤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물에 사람들이…… 여자들이 있었어요.”
“산중에서 물이라니, 이상한 것을 보셨군요.”
여휘의 말투는 차분했다. 하지만 놀란 사람의 반응은 아니었다.
“정말 못 봤어요?”
“제가 보았다고 대답하면 안심하실 겁니까?”
그가 한 계단 내려왔다.
“아니면 더 무서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연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려 했다.
구두를 잃은 맨발 아래로 차가운 돌의 감촉이 전해졌다.
그제야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돌계단 위에는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발은 젖지 않았다.
치맛자락도, 머리카락도 처음 비를 맞았을 때보다 오히려 말라 있었다.
이연이 손을 뻗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아 보았다.
물은 손바닥을 통과했다.
“이게 뭐예요?”
여휘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비겠지요.”
“비가 어떻게 손을 통과해요?”
“그렇다면 비가 아닌 모양입니다.”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었다.
이연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질수록 여휘의 눈에는 선명한 생기가 돌았다.
그는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무엇을 의심하기 시작했는지도, 언제쯤 제 기억까지 믿지 못하게 될지도 알았다.
그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오랜만에 손에 넣은 장난감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아이처럼 그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거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어떻게 아십니까?”
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휘가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조금 전부터 본 것이 전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판단만은 틀리지 않았다고 믿으시는군요.”
그 말은 이상하리만큼 깊게 파고들었다.
사라진 예약 내역.
기억나지 않는 버스 기사의 얼굴.
나무 아래로 들어오지 말라던 노파의 경고.
물속에 잠겨 있던 여자들.
하나같이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반면 눈앞에 선 여휘는 처음부터 같은 얼굴로 그 자리에 있었다.
길을 알려 주었고, 돌아가겠다는 그녀를 붙잡지도 않았다.
어쩌면 문제는 이 남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여휘가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감추는 것처럼 보였다.
“왜 웃어요?”
“웃지 않았습니다.”
“방금 웃었잖아요.”
“잘못 보신 것 아닙니까?”
그는 이번에는 숨길 생각도 없이 미소 지었다.
이연은 그제야 자신이 놀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려움보다 화가 먼저 치밀었다.
“재미있어요?”
“조금.”
여휘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훨씬.”
그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이연은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자신이 겁먹었다는 사실도, 혼란스러워한다는 사실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이연이 돌계단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이번에는 계단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 칸.
두 칸.
맨발에 닿는 돌이 점점 차가워졌다.
등 뒤에서 여휘가 따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연이 속도를 높였다.
붉은 등불을 세 개쯤 지나쳤을 때 이상함을 느꼈다.
조금 전에도 똑같은 등불을 본 것 같았다.
등의 오른쪽 아래가 찢어져 있었고, 안쪽 촛불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바로 다음 등불에는 희미한 먹물이 번져 있었다.
세 번째 등불 아래에는 검은 나비가 죽어 있었다.
이연은 계속 내려갔다.
찢어진 등불.
먹물이 번진 등불.
죽은 나비.
아무리 계단을 내려가도 같은 세 개가 반복되었다.
마침내 그녀가 멈추자 바로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전하게 오신 것 같군요.”
계단 위에 남아 있어야 할 여휘가 몇 걸음 아래에 서 있었다.
그녀는 내려왔는데도 오히려 그에게 가까워져 있었다.
“당신이 한 짓이죠?”
여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나가게 해 줘요.”
“나가는 길을 알려 드렸습니다.”
“어디에요?”
“제 뒤에 있습니다.”
여휘가 몸을 옆으로 비켰다.
그 뒤로 돌계단의 끝이 보였다.
기와지붕이 여러 겹으로 이어진 커다란 고택이 숲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열린 대문 양쪽에는 월하재라는 이름이 적힌 등롱이 걸려 있었다.
처음부터 목적지였던 곳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제가 찾던 곳은 저기가 아니에요.”
“예약한 곳의 이름이 월하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약 기록이 없어졌잖아요.”
“기록이 없으면 예약하지 않은 겁니까?”
여휘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기억이 남아 있으면 충분한 것 아닌가요?”
이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가장 믿고 싶어 하는 말을 골라 건넸다.
그녀가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면 기억을 믿으라고 했고, 기억을 붙잡으려 하면 그것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속삭였다.
어느 쪽을 택해도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여휘는 먼저 월하재를 향해 걸었다.
“방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날이 밝은 뒤에도 떠나고 싶으시다면 길을 알려 드리지요.”
“지금은 왜 안 되는데요?”
“곧 밤이 옵니다.”
“이미 어두워졌어요.”
“여기의 밤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여휘가 고택의 열린 대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미소가 아주 조금 깊어졌다.
“시작되면 밖에 있고 싶지 않을 겁니다.”
때마침 월하재 안쪽에서 무언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드르륵.
무거운 물건을 끌고 다니는 듯한 소리였다.
이연이 대문 안을 바라보았지만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마 밑에는 희고 붉은 천이 길게 걸려 있었고, 마당 중앙에는 물이 가득 찬 놋대야가 놓여 있었다.
여휘가 대문을 넘었다.
그녀는 따라가지 않았다.
그가 등을 보인 사이 반대편 숲길로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돌계단은 어느새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등불도 모두 꺼졌다.
어둠 속에서 방울 소리가 하나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딸랑.
한참 아래에서 들렸던 소리가 눈 깜짝할 사이 몇 계단 앞까지 올라왔다.
딸랑.
어둠 속에 하얀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계단을 네 발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목은 기이하게 뒤로 꺾여 있었고, 벌어진 입술 안쪽에는 검붉은 흙이 가득했다.
그녀의 손가락마다 붉은 실이 묶여 있었다.
이연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뒷걸음질 쳤다.
맨발이 대문의 문턱을 넘는 순간 여휘가 문을 닫았다.
쾅.
방울 소리가 끊겼다.
고택 안은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이연은 닫힌 문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대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봤어요? 방금 계단에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휘가 곁에 서서 말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분명 여자가 있었어요.”
“이곳에는 우리 둘뿐입니다.”
그가 그녀의 어깨 너머로 닫힌 대문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지금은.”
불길한 덧붙임이었다.
이연은 대문을 다시 열어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휘는 그녀가 결국 제 발로 월하재에 들어온 것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억지로 데려오면 금세 울고 망가졌다. 이전의 것들은 그래서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게 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진실을 알려 주었을 때 훨씬 재미있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휘가 복도를 가리켰다.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짐은 계단 아래에 두고 왔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의 여행 가방은 이미 대청 앞에 놓여 있었다.
손잡이에는 붉은 실이 묶여 있었고, 젖지 않은 가방 위에는 붉은 꽃잎 하나가 얹혀 있었다.
이연은 다가가 가방을 확인했다.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잠금장치의 작은 흠집까지 그대로였다.
“누가 가져왔어요?”
“직접 가져오셨습니다.”
“저는 계속 맨손이었어요.”
여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물었다.
“확실합니까?”
이번에도 같은 방식이었다.
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방을 끌고 계단을 올랐던가. 처음에는 분명 손잡이를 잡고 있었지만, 언제 놓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을 되짚는 동안 관자놀이 안쪽이 욱신거렸다.
여휘가 그녀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애써 기억하려 하지 마십시오.”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잊는 편이 나은 것도 있으니까요.”
그가 앞장서 복도로 들어갔다.
고택은 밖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길고 어두운 복도 양옆으로 문이 늘어서 있었으며, 문마다 작은 나무패가 걸려 있었다.
매화.
모란.
작약.
봉선.
모두 꽃의 이름이었다.
여휘는 가장 안쪽에 있는 방 앞에서 멈추었다.
그 문에만 나무패가 없었다.
“여기서 지내시면 됩니다.”
그가 문을 열자 은은한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방 안에는 흰 이불이 깔려 있었다. 작은 화장대와 옷장, 창가의 찻상이 전부인 단정한 방이었다.
그러나 한쪽 벽에 붉은 혼례복이 걸려 있었다.
금실로 여우와 달이 수놓인 옷이었다.
이연이 문 앞에서 굳어 있자 여휘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혼례복을 보고도 이상하다는 기색이 없었다.
“저건 뭐예요?”
“옷입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그렇다면 무엇이 궁금하신 겁니까?”
“왜 숙소 방에 혼례복이 걸려 있느냐고요.”
여휘는 혼례복의 소매를 손끝으로 쓸었다.
“주인이 돌아오면 입히려고 두었겠지요.”
“누구한테요?”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입가에는 웃음이 없었지만 눈은 여전히 즐거워 보였다.
“글쎄요.”
이연은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른 방으로 주세요.”
“다른 방에는 손님이 있습니다.”
“아까는 우리 둘밖에 없다면서요.”
“그렇게 말씀드렸습니까?”
이연은 그를 노려보았다.
여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선을 오래 기다렸다는 듯 마주 보았다.
이연의 불안이 분노로 바뀌었다가 다시 의심으로 흐트러지는 과정을 그는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이연이 다시 물었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름 말고요.”
여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굳게 닫혀 있던 창호지가 안쪽으로 부풀었다. 벽에 걸린 혼례복의 빈 소매가 살아 있는 팔처럼 천천히 들렸다.
옷의 소매 끝이 그녀의 어깨를 스쳤다.
이연이 놀라 돌아보는 사이 여휘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 한 올을 귀 뒤로 넘겨 주는 손길이었다.
이연은 즉시 그의 손을 쳐냈다.
“만지지 마세요.”
여휘는 붉어진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화는 내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보는 반응이 마음에 든 사람처럼 웃었다.
“알겠습니다.”
너무 쉽게 물러나는 대답이었다.
이연은 더 불안해졌다.
여휘가 방에서 나간 뒤 문이 천천히 닫혔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안 부를 거예요.”
“그러시겠지요.”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여휘가 덧붙였다.
“처음에는 다들 그랬으니까.”
이연이 문을 열었을 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휘가 사라진 자리에는 젖은 붉은 꽃잎만 이어져 있었다. 꽃잎은 복도 끝에 있는 닫힌 문 앞에서 끊겼다.
그 문에는 다른 곳보다 오래된 나무패가 걸려 있었다.
신부방.
먹으로 쓰인 세 글자 위에 깊은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문 앞에 서 있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잠금장치를 확인한 뒤 여행 가방을 열었다. 충전기와 세면도구, 갈아입을 옷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모두 자신이 챙긴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옷 사이에 처음 보는 사진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낡은 즉석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월하재의 마당이 담겨 있었다. 붉은 천이 걸린 처마 아래로 여휘가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혼례복을 입은 여자가 있었다.
얼굴은 번져 있어 알아볼 수 없었지만, 손에 든 여행 가방만큼은 분명히 보였다.
지금 자신의 앞에 놓인 것과 똑같은 가방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정확히 일 년 전 오늘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자신이 쓴 것이 분명한 글씨가 남아 있었다.
― 여휘를 따라가면 안 된다.
여자는 사진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엎어진 사진 뒷면에는 문장이 하나 더 쓰여 있었다.
― 이번에도 그를 믿었다.
닫아 둔 옷장 안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이연이 굳은 얼굴로 옷장을 바라보는 동안, 문밖에 선 여휘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가 어느 문장을 먼저 믿을지 궁금했다.
일 년 전에도 이곳에 왔다는 흔적일까.
아니면 처음 발을 들였다는 자신의 기억일까.
어느 쪽이든 진실은 아니었다.
여휘에게는 그것이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나를 죽일 수 있다고 하던가요?”여휘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았다.한이연은 월하재로 돌아가는 동안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여휘는 앞서 걷지도, 곁에 서지도 않았다.그러나 짙은 꽃향기가 줄곧 따라왔다.보이지 않을 뿐 가까이에 있었다.이연은 월하재의 대문을 넘기 전 멈췄다.산길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붉은 등불만 나뭇가지마다 걸려 있었다.불꽃은 이연이 움직일 때마다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그녀를 지켜보는 눈처럼 느껴졌다.월하재 안에도 아무도 없었다.마당에는 찢어 버린 혼례복 대신 붉은 꽃잎만 흩어져 있었다.꽃잎 가운데에는 작은 금빛 장식 하나가 놓여 있었다.비녀였다.끝부분에 여우 두 마리가 서로 꼬리를 맞댄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이연이 가까이 다가가자 손목에 남은 붉은 실 자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죽은 신부들이 남긴 물건일지도 몰랐다.이연은 몸을 숙여 비녀를 집었다.금속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손가락이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혼례곡이 울리기 시작했다.산길에서 들은 것과 같은 곡이었다.피리와 북이 느린 장단을 만들고, 이름 모를 여자들이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첫 소절은 알고 있었다.두 번째도.이연은 배운 적 없는 곡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다.입술이 저절로 움직이려 하자 혀를 깨물어 소리를 삼켰다.노래가 멎었다.대신 여자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달이 가장 높이 오르면 동쪽 문을 열어.― 그이의 그림자가 먼저 들어가게 해.― 노래를 끝까지 부른 다음 심장을 찔러.목소리는 비녀를 쥔 손을 타고 뼛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면 우리도 나갈 수 있어.이연은 비녀를 손수건으로 감싸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그 순간 등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느리고 여유로운 소리였다.짝.짝.이연은 놀라지 않으려고 숨을 가다듬은 뒤 몸을 돌렸다.여휘가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한쪽 무릎을 세운 편안한 자세였다.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자리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산 아래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다.평상에서 나물을 다듬던 여자도, 밭에서 일하던 노인도, 자전거를 타던 아이도 흰옷을 입고 있었다.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길에 늘어섰다.손에 든 붉은 등불이 동시에 흔들렸다.바람은 불지 않았다.이연은 여휘가 건넨 혼례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붉은 천이 흙 위로 펼쳐졌다.금실로 수놓인 여우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빛을 받아 일렁였다.“입지 않을 거예요.”이연이 말했다.여휘는 발치에 떨어진 옷을 내려다보았다.“마음에 들지 않습니까?”“그게 문제인 것 같아요?”“당신을 위해 새로 지은 옷입니다.”“저 옷장에 있던 것 중 하나잖아요.”“그 옷들은 당신에게 맞지 않습니다.”“전 주인이 있었으니까요?”여휘의 시선이 혼례복 목깃에 머물렀다.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열두 벌 중 가장 안쪽에 걸려 있던 옷과 같은 흔적이었다.“그렇게 보입니까?”그가 물었다.이연이 다시 내려다보자 얼룩은 사라져 있었다.새로 지은 옷처럼 깨끗한 붉은 비단만 보였다.여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그는 이연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될 때마다 즐거워했다.이제는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내가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네.”처음부터 기다렸다는 듯 빠른 대답이었다.“당신은 곤란해질수록 숨을 천천히 쉬려고 합니다. 화가 나면 오른쪽 입술을 먼저 깨물고, 무서울 때는 내 얼굴을 더 오래 보더군요.”여휘는 이연을 찬찬히 살폈다.“다음에는 어떻게 할지 궁금해집니다.”“그래서 이전 여자들도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았어요?”산길을 오르던 사람들의 발이 일제히 멈췄다.수십 개의 붉은 등불도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고요해진 산에서 여휘만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대답해요.”“죽을 때까지는 아닙니다.”그가 부드럽게 말했다.“죽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 있었으니까.”멀리서 방울이 울렸다.산길에 선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움직임이
이연은 문을 열지 않았다.아침을 알리던 여휘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한동안 방 안에 머물렀다.복도에 아무런 기척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여행 가방을 침대 위로 올렸다.옷을 갈아입고 흩어진 물건을 가방에 넣었다.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분명한 것은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동영상은 삭제하지 않았다.영상 속 자신의 행동은 기억과 전혀 달랐지만, 그것 역시 기록이었다.여휘가 영상을 조작한 것인지, 자신이 실제로 혼자 움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무엇이 진짜인지 판단할 수 없을 때는 어느 쪽도 버리지 않는 편이 나았다.이연은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었다.― 월하재에 온 것은 어제다.― 여휘를 처음 만난 곳은 산으로 올라오는 돌계단이다.― 그는 내 이름을 미리 알고 있었다.― 혼례복은 열두 벌이었다.― 이전의 신부들 중 몇은 여휘가 죽였다.문장을 하나씩 적으며 소리 내어 읽었다.마지막 줄을 입력할 때 손이 잠시 멈췄다.여휘가 정말 죽였다고 말했던가.몇은, 이라고 대답한 것은 분명했다.그러나 그보다 앞서 자신이 어떤 질문을 했는지는 흐릿했다.기억 속 대화는 끝부분이 잘린 실처럼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이연은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대신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기억이 흐려져도 기록을 먼저 의심하지 말 것.메모를 저장한 뒤 화면을 캡처했다.혹시 기록이 사라질 것을 대비해 같은 내용을 종이에도 적으려 했지만 방 안에는 필기구가 없었다.이연은 여행 가방 손잡이를 잡았다.그 순간 방문 밖에서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누군가 바로 앞에 상을 내려놓는 듯했다.“식기 전에 나오시지요.”여휘였다.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떠나려면 배를 채우는 편이 좋을 텐데.”그가 가방을 싸는 모습을 본 것처럼 말했다.이연은 잠금장치에서 손을 떼고 방문을 바라보았다.“훔쳐보고 있어요?”“보지 않아도 압니다.”“내가 뭘 하는지 어떻게 아는데요?”“당신은 내가 말하는 것마다 질문으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어디에서 울리는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깊고 낮은 울림이 월하재의 기둥과 바닥을 타고 번졌다.한 번.두 번.종이 울릴 때마다 방 안의 촛불이 하나씩 밝혀졌다.조금 전까지 없었던 촛불이었다.벽을 따라 놓인 붉은 초에 푸른 불꽃이 붙으면서 방 안의 모습도 달라졌다.흰 이불은 붉은 비단 이불로 변해 있었다.천장에서는 혼례 때 사용하는 청사초롱이 흔들렸고, 창문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천이 길게 늘어졌다.이연이 휴대전화로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다만 화면 속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여휘는 옷장 안에 앉아 있었다.문밖에서도 여휘의 목소리가 들렸다.“이연.”둘의 목소리는 완전히 같았다.높낮이도, 말끝에 밴 미세한 웃음도 구별할 수 없었다.옷장 안의 여휘가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시간이 많지 않습니다.”“왜요?”“밤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그가 가볍게 눈짓하자 방문 손잡이가 다시 돌아갔다.철컥.철컥.밖에 있는 것이 잠금장치를 확인하듯 천천히 손잡이를 흔들고 있었다.“열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이연이 물었다.옷장 속 여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들어가지 못하겠지.”두 여휘가 서로의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이연은 문에서 멀어졌다.“둘이 같은 편이에요?”“아닙니다.”이번에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대답했다.같은 소리가 겹쳐지자 방 안의 공기가 낮게 떨렸다.이연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어느 쪽이 진짜인지 고르려고 해서는 안 됐다.둘 다 여휘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한쪽을 믿는 순간 그것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전화를 주웠다.동영상 촬영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그러나 화면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옷장은 닫혀 있었고 방문 앞도 비어 있었다.붉은 혼례방 한가운데에 이연 혼자 서 있었다.그런데 화면 속 이연은 현실의 그녀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실제 이연은 옷장을 향해 서
옷장 안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이연은 움직이지 않았다.잘못 들은게 아니었다.누군가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그것도 한 번이 아니었다.옷장의 나무문 너머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이어졌다.이연은 발치에 떨어진 사진을 내려다보았다.월하재 앞에 서 있는 자신과 여휘, 그리고 현재보다 정확히 일 년 앞선 촬영 일자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사진 속 자신은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얼굴은 빗물에 번진 것처럼 흐릿했지만, 왼손에 낀 은색 반지는 선명했다.이연은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같은 반지가 중지에 끼워져 있었다.몇 년 전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산 것이었다. 흔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도 아니었다.사진 속 여자가 자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그런데 사진 뒤에는 분명 자신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이번에도 그를 믿었다.문장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글씨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획의 끝이 번지고, 글자 사이의 간격이 좁아졌다.이연은 사진을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았다.확인해야 했다.두려움 때문에 옷장을 열지 않는다면 밤새 안에서 나는 소리에 시달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나았다.그녀는 화장대 앞에 놓인 나무 의자를 들었다.한 손으로 의자를 세워 든 채 다른 손으로 옷장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쇠붙이가 손바닥에 닿았다.안쪽의 숨소리가 멎었다.“누구 있어요?”대답은 없었다.이연은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옷장 문이 열리며 짙은 향 냄새가 밀려 나왔다.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사람이 몸을 숨길 공간조차 없었다.옷장 안을 가득 채운 것은 여러 벌의 옷이었다.흰 저고리와 붉은 치마, 금빛 자수가 놓인 겉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비슷해 보이지만 모양과 색이 조금씩 달랐다.어느 것은 오래되어 소매 끝이 누렇게 변했고, 어느 것은 며칠 전에 지은 것처럼 천의 광택이 선명했다.모두 혼례복이었다.이연은 들고 있던 의자를 천
이연은 자신이 언제부터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한 걸음 앞에서는 여휘가 걷고 있었다.붉은 등불 아래를 지날 때마다 그의 검은색 옷자락에 옅은 금빛이 번졌다가 사라졌다.여휘는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따라오라고 재촉하지도 않았고, 뒤를 돌아보며 제대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지도 않았다.그녀가 도망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여유로운 걸음이었다.그 태도가 오히려 불안했다.이연은 몇 계단을 더 오른 뒤 멈춰 섰다.“저는 따라가겠다고 한 적 없어요.”여휘도 걸음을 멈추었다.“그렇습니까?”그가 천천히 돌아보았다.이연이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분명 그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런데 따라가지 않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아니, 했던가.기억을 더듬을수록 머릿속에 안개가 차올랐다.“돌아갈게요.”“그러십시오.”여휘는 선뜻 길을 비켜 주었다.그의 반응에는 아쉬움이 없었다.예상과 달리 붙잡지 않자 이연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들으니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부터 막막해졌다.그래도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이연은 몸을 돌렸다.조금 전까지 길게 이어져 있던 돌계단이 사라져 있었다.그녀의 발뒤꿈치 바로 아래로 검은 물이 출렁였다.산 아래에 있어야 할 강도, 계곡도 아니었다.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물이 계단이 있던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비가 떨어질 때마다 동그란 파문이 번졌는데, 물결 사이로 붉고 흰 옷자락이 수없이 떠다녔다.물속에 잠긴 여자들이었다.긴 머리카락이 수초처럼 흔들렸다.모두 얼굴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다만 물 위로 떠오른 손가락마다 붉은 실이 묶여 있었다.이연이 숨을 들이켠 순간 여휘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그러십니까?”“저 아래에…….”그녀가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때 물은 사라지고 없었다.내려가는 돌계단이 멀쩡히 이어져 있었다.붉은 등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