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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벽 너머의 속삭임

Autor: Jino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10-18 12:08:39

그 정적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한결의 폐부를 짓눌렀다. 흉터 칩이 타버린 자리는 화상 입은 살점의 냄새와 함께 기분 나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시스템의 붕괴를 목격했던 한결의 의식은, 그 찰나의 폭발 이후 끈적하고 어두운 현실의 바닥으로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바닥에 고여 있는 냉기가 손끝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눈을 떴으나 보이지 않았다. 시스템이 마비된 관리국 본부는 비상등조차 켜지지 않은 완벽한 칠흑 속에 잠겨 있었고, 오직 타는 듯한 흉터 칩의 잔열만이 자신이 여전히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비루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손목의 감각은 이미 마비되어 있었으나, 뇌를 찌르는 듯한 환청은 여전했다. 관리국이 수확하던 수만 명의 비명이 칩의 잔해 속에서 마지막 유언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최진혁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한때 완벽한 통제 국가를 꿈꾸며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빛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덜덜 떨며 모니터를 더듬었다. 텅 빈 검은 화면 속에는 오직 절망적인 자신만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시스템을 다시 복구하려고 시도했지만, 한결이 심어 넣은 자정 작용은 그저 단순한 오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관리국이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모든 기억 데이터를 스스로 파괴하는 맹독이었다. 서버실 내부의 기계 장치들이 잇따라 폭발하며 금속 파편을 흩뿌렸다. 박철웅조차 총을 내려놓은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관리국의 요원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역시 시스템의 부속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무너진 위계질서 속에서 오직 한결만이 비틀거리며 출구로 향했다.

한결의 걸음걸이는 불안정했다. 70년이라는 영겁의 시간을 틈 속에서 보냈던 그에게 현실의 중력은 낯설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관리국이 완전히 침묵한 틈을 타서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서지우가 남겼던 마지막 메시지, 관리국 지하 4층의 격리실에는 시스템조차 기록하지 못하는 ‘원본’들이 존재한다는 정보를 떠올렸다. 만약 그곳에 무언가가 살아있다면, 그것은 분명 이 지옥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일 것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복도로 나섰다. 벽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소름 끼치게 생생했다. 관리국의 내부 구조는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으나, 시스템이 멈춘 지금 이 건물은 마치 살아있는 괴물의 식도처럼 느껴졌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한결은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소독약과 부패한 기억의 냄새였다. 흉터 칩이 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뇌 속에는 여전히 틈에서 경험했던 타인의 고통이 잔상처럼 맴돌았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이를 잃고 오열하던 기억, 전장에 홀로 남겨진 병사가 느끼던 극한의 공포, 그리고 영생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데이터로 분해하던 닥터 린의 광기 어린 집착이 뒤섞여 머릿속을 헤집었다. 한결은 벽에 머리를 박고 숨을 골랐다. 이제는 그 누구의 기억도 동기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기억들은 이제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흉곽을 때리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복도 끝 비상구 계단을 지나쳐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통로는 완전히 막혀 있었다. 그러나 한결에게는 흉터 칩의 잔해를 통해 읽어낸 데이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비상구의 잠금장치를 손으로 뜯어냈다. 기계적인 보안 장치는 이미 전력을 잃고 멈춰 있었지만, 물리적인 잠금장치는 꽤나 견고했다. 손가락 끝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고통보다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할 진실이 더 시급했다. 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 그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마치 지옥의 심연으로 향하는 통로 같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무언가의 기계음이 그곳이 여전히 무언가에 의해 가동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지하 4층에 발을 들이자마자, 한결은 한기를 느꼈다. 위층의 서버실과는 공기의 질 자체가 달랐다. 이곳은 관리국의 본래 목적, 즉 인간의 존엄성을 거세하고 데이터를 추출하는 실제 공장이었다. 수많은 캡슐이 복도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각 캡슐 안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데이터의 저장소로 전락한 희생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의 눈은 뜨여 있었으나 초점이 없었다. 관리국은 그들의 뇌를 강제로 자극하여 ‘행복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뽑아내고 있었다. 한결은 그 캡슐 옆을 지나치며 죄책감에 몸을 떨었다. 자신 또한 저들 중 하나였다. 실험체 001번, 관리국이 가장 완벽하게 길들였다고 자부했던 괴물. 그는 캡슐 속의 사람들을 보며 결심을 굳혔다. 이 시스템을 뿌리째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비명 소리가 선명해졌다. 그것은 물리적인 고함이 아니었다. 뇌파를 직접 타격하는 듯한, 영혼이 갈려 나가는 듯한 처절한 통곡이었다. 관리국의 기술자들은 이 고통을 데이터화하여 영생을 설계하는 알고리즘에 활용하고 있었다. 한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저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영생을 위한 배터리, 혹은 데이터의 조각으로만 취급할 뿐이었다. 한결은 벽면에 설치된 데이터 단자를 손으로 쓸었다. 흉터 칩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미세한 전압이 느껴졌다. 서버는 죽었지만, 이곳의 폐쇄 회로에는 아직 잔류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그 흐름을 따라 그는 비명이 시작되는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비명은 지하 4층 구석에 위치한 격리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주변에는 관리국의 요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자기장 차단기가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결은 알고 있었다. 이 차단기를 멈추는 방법은 단 하나, 마스터 키가 되어버린 자신의 신경계 자체를 단자에 연결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주저 없이 손목의 흉터를 단자에 대고 밀어 넣었다. 살점이 짓이겨지고 고통이 뇌를 관통했다. 그러나 동시에, 격리실의 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의 풍경은 그가 보아왔던 그 어떤 지옥보다도 참혹했다. 사방이 온통 데이터의 잔상으로 뒤덮여 있었고, 중앙에는 누군가가 의자에 묶인 채 발작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단순히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자신의 기억이 갈기갈기 찢겨 데이터로 추출되고 있었다. 한결은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격리실 내부의 온도는 극도로 낮아,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영은 눈앞의 참상을 잊으려 애쓰는 듯 보였다. 한결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고문받던 인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순간, 한결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분명히 틈에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니, 관리국이 이미 기억을 폐기했다고 통보했던 나의 가장 친한 동료, 민호였다. 그는 죽은 눈으로 한결을 응시하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마치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저주처럼 한결의 귓가에 박혔다.

민호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치 텅 빈 껍데기만 남은 인형처럼, 그의 시선은 허공의 데이터 입자들을 쫓고 있었다.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이 아니었다. 뇌파가 강제로 동기화되어 자신의 행복했던 유년 시절,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이 실시간으로 시스템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추출된 기억들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천장의 데이터 수집 장치로 빨려 들어갔고, 그 과정에서 민호의 신경계는 불에 타는 듯한 경련을 반복했다. 한결은 차마 그 광경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이 겪었던 70년의 영겁, 그 지옥의 파편이 여기서 실시간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민호야, 정신 차려. 나야, 한결이라고.” 한결이 떨리는 손을 뻗어 민호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민호의 몸에서 강력한 정전기가 튀어 올랐다. 시스템이 동기화 대상 이외의 외부 개입을 차단하려는 방어 기제였다. 찌릿한 통증이 손목의 흉터 칩을 타고 뇌로 직결되었다. 한결은 비명을 삼키며 뒤로 물러났다. 시스템은 민호라는 인간의 자아를 완전히 지우고, 그 안에서 순수한 ‘행복 데이터’만을 추출하기 위해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0과 1로 변환되는 인간의 존엄성은 그저 관리국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아직… 안 끝났어. 시스템이… 내 모든 걸 가져가기 전에… 제발….” 민호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갈라져 있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기억이 삭제당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게 된다. 그것은 육체적인 죽음보다 훨씬 더 잔혹한 영혼의 소멸이었다. 한결은 자신의 손목에 박힌 마스터 키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흉터 칩은 단순한 안테나가 아니었다. 이 지옥의 문을 열 수도, 혹은 이 지옥을 강제로 종료시킬 수 있는 유일한 칼날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시스템의 단자에 다시 손을 올렸다.

손목의 흉터가 격리실의 제어 단자와 맞물리자, 뇌 안으로 수천 개의 데이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민호의 기억들이 한결의 의식 속으로 침범했다. 햇살 아래서 함께 웃던 현장 실습 시절, 처음으로 구조에 성공했던 날의 희열, 그리고 관리국에 납치되기 직전 보았던 가족들의 환한 얼굴들까지. 그 모든 고귀한 감정들이 한결의 의식을 짓눌렀다. 시스템은 한결의 뇌를 매개체로 민호의 기억을 강제로 강탈하려 했다. 한결은 신음하며 바닥을 기었다. 자신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이 뒤섞여 혼란이 가중되었지만, 그는 결코 의식을 놓지 않았다.

“이건… 내가 겪었던 지옥의 연장선이 아니야. 이건… 누군가의 삶을 도둑질하는 시스템의 축제라고!” 한결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격리실의 전력이 과부하를 일으키며 붉은 경고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관리국 요원들이 자기장 차단기를 뚫고 들어오기까지는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한결은 자신의 흉터 칩을 통해 시스템의 중심부로 바이러스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마스터 키의 기능이 활성화되자, 민호의 뇌와 연결된 데이터 파이프라인이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고통의 비명소리가 잦아들고, 대신 기계적인 경고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민호의 몸을 묶고 있던 구속구가 느슨해졌다. 한결은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하지만 민호의 상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추출된 기억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고, 그는 이미 스스로의 의지로 서 있을 수 없는 상태였다. 한결은 민호를 벽에 기대게 한 뒤, 주머니에서 비상용 진정제를 꺼내 그의 목에 찔러 넣었다. 정신이 혼미해진 민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한결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동시에 마지막 안식을 갈구하는 처절한 갈망이 서려 있었다. 한결은 민호의 손을 꽉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다짐했다.

“이제 곧 이 지옥을 끝낼 거야. 네 기억을 훔쳐간 놈들에게 똑같이 돌려주겠어. 최진혁이 설계한 이 시스템은 오늘 여기서 무너질 거다.” 한결의 말에 민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승리의 미소가 아닌,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의 쓸쓸한 안식이었다. 그러나 정적을 깨고 격리실 밖에서 요원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관리국은 한결이 마스터 키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이미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 한결은 다시 손목의 흉터를 꽉 움켜쥐었다. 이제 그는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는 민호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뇌를 미끼로 던질 준비를 마쳤다.

시스템의 메인 서버에서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의 압박이 한결의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동기화 고통이 극에 달하며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그는 민호를 다시금 부축하며 격리실의 비상 통로를 향해 나아갔다. 그 통로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또 다른 고문실이, 혹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틈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타인들의 삶을 위해 이 디스토피아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투쟁이었다.

격리실의 철문이 요원들의 강제 개방 시도로 인해 굉음을 내며 흔들렸다. 한결은 민호를 뒤로 감추고 단단히 자세를 잡았다. 손목의 흉터 칩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이 어둠 속에서 푸른 궤적을 그리며 춤을 췄다. 관리국은 그를 001번 실험체라고 부르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수동적인 실험체가 아니었다. 그는 시스템의 파멸을 부르는 바이러스이자, 이 지옥의 문을 부술 마스터 키였다. 한결은 자신의 신경계에 남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격리실 내부의 모든 센서를 마비시켰다. 완전한 어둠이 그들을 감쌌다.

어둠 속에서 한결은 자신의 호흡 소리에 집중했다. 민호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들의 운명은 이제 실오라기 같은 희망에 매달려 있었다. 한결은 민호의 어깨를 다시 한번 다독이며 속삭였다. “조금만 참아. 지우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야. 우리를 이 지옥에서 꺼내 줄 유일한 사람이지.”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민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채였지만, 그의 손은 한결의 옷자락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한결은 결연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격리실의 문을 노려보았다. 이제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관리국 요원들의 발소리가 멈췄다. 문밖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들은 아마 문을 폭파하거나, 뇌파를 교란하는 음파 무기를 사용할 것이다. 한결은 손목의 마스터 키를 활용해 주변의 자기장을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문이 터지는 순간, 폭발의 충격파를 데이터 신호로 변환하여 역으로 관리국 내부 네트워크에 과부하를 주려는 계획이었다. 그것은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한결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는 눈을 감고, 틈에서 겪었던 그 길고 긴 70년의 시간 속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의식을 침잠시켰다.

그때였다. 격리실 밖의 요원들이 잠시 물러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무언가가 문틈 사이로 굴러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한 폭탄이 아니었다. 관리국이 반체제 인사를 심문할 때 사용하는, 뇌의 통증을 강제로 극대화하는 고주파 발생기였다. 한결은 그것이 폭발하기 직전, 직감적으로 민호를 감싸 안고 바닥을 굴렀다. 둔탁한 소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고, 동시에 문 너머에서 익숙하고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죽은 줄 알았던 내 동료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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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42화. 하도경

    하도경은 마포 기사식당 골목의 해장국집을 골랐다.오후 세 시, 점심 손님이 빠지고 저녁 손님이 오기 전이었다. 가게 안에는 택시 기사 두 명이 구석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고, 주방에서 뼈 삶는 냄새가 김과 함께 흘러나왔다. 벽에 붙은 메뉴판은 기름에 절어 누렇게 변해 있었다. 나는 모자를 쓴 채로 문 옆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오 분 늦게 왔다. 서른여덟쯤, 짧게 자른 머리, 낡은 갈색 가죽 점퍼. 어깨에 멘 천 가방이 불룩했다. 들어오자마자 가게를 한 번 훑고, 나를 찾아 곧장 걸어왔다. 앉기도 전에 말했다."서지우 씨 맞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걱정 마요. 청문회 때 저 거기 있었어요. 방송국 탐사팀이었거든요. 가림막 뒤 목소리 기억해요. 본 사람은 지금 누워 있어요." 그녀가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억양까지. "그 문장, 제가 그날 밤 뉴스 헤드라인으로 올리자고 했다가 까였어요. 너무 감상적이라고."그녀는 점퍼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하나를 입에 넣고,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았다."담배 끊은 지 석 달 됐어요. 이거라도 씹어야 돼." 그녀가 씹으며 말했다. 말이 빨랐다.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오는 사람 같았다. "해장국 드세요? 여기 잘해요. 저 여기 단골이에요. 택시 기사님들 이야기 들으려고."해장국 두 그릇이 나왔다. 그녀는 숟가락을 들기 전에 가방에서 작은 녹음기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빨간 불은 켜지 않았다."켜기 전에 먼저 말씀드릴게요. 제가 왜 여기 있는지."그녀는 숟가락으로 선지를 반으로 갈랐다."보름 전에 방송국 공용 제보 메일함에 메일이 하나 들어왔어요. 소생자 이야기. 모르는 골목, 하얀 하늘, 남의 집 안방. 첨부 파일에 뇌파 그래프 같은 것도 있고. 제가 그거 열어 봤어요. 그리고 팀장한테 가져갔어요. 팀장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41화. 20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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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40화. 명단에 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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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39화. 붐비는 영원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주치의가 상담실 문을 열어 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어제 입은 스웨터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원탁 위에는 식은 커피 두 잔과 종이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벽의 뇌 단면 그림 옆에 누군가 모니터 기록을 출력한 긴 종이를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초록 선을 검은 잉크로 옮긴 띠가 벽을 가로질러 문 쪽까지 이어져 있었다."밤새 계셨어요?""집에 갔다가 다시 왔습니다. 잠이 안 와서요." 그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두 가지를 말씀드려야 합니다."나는 앉았다. 그는 수첩을 펼쳤다. 어제 적은 시각들이 빽빽했다."첫째, 어제 그 새 파형이요. 밤 열한 시 이십 분쯤 마지막으로 나오고 멈췄습니다. 오늘 새벽엔 없었어요." 그는 수첩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런데 시각을 늘어놓고 보니까 좀 이상한 게 있습니다. 네 시 오십이 분부터 여덟 시까지, 그러니까 정하윤 씨가 병실에 계시던 동안에 제일 촘촘하게 나왔어요. 가시는 뒤로는 점점 드물어지고요.""제가 있어서요?""모릅니다. 우연일 수도 있어요. 하루치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였다. "그런데 두 번째가 더 큽니다."그는 벽에 붙은 긴 종이 앞으로 갔다."어젯밤에 그 새 파형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확실히 하려고, 1년 치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봤습니다. 이 모니터에 분석 기능이 있어요. 파형을 쪼개서 겹쳐 있는 성분을 따로 보여 주는 기능입니다. 평소에는 쓸 일이 없어서 한 번도 안 켰어요. 선 모양이 1년 동안 똑같았으니까."그가 종이의 왼쪽 끝을 가리켰다. 거기서는 선이 가늘었다."이게 작년 11월, 강한결 씨가 처음 오셨을 때입니다. 선 하나예요. 깨끗한 한 줄." 그는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선이 조금 굵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면 여전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38화. 새 파형

    다음 주 목요일 아침, 나는 은평 시장에서 귤을 샀다.트럭 것 말고 시장 것으로.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과일 가게 확성기는 여전히 귤 한 바구니에 오천 원이라고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한 바구니를 샀다. 두 개가 아니라 스무 개쯤 되는 귤이 검은 봉지 안에서 묵직하게 흔들렸다.생선 가게 앞을 지나다 멈췄다. 파란 천막 아래에서 문순자 할머니가 얼음을 깨고 있었다. 두꺼운 고무장갑, 목까지 올린 털 조끼, 머리에 두른 수건. 쇠꼬챙이로 얼음 덩어리를 내리칠 때마다 작은 조각이 튀어 할머니의 앞치마에 붙었다. 며느리가 옆에서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님, 병원에서 무리하지 말랬잖아요. 할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아가씨!" 할머니가 먼저 나를 보았다. 쇠꼬챙이를 든 채로 손을 흔들었다. "귤 거기서 샀어? 잘했네. 거기가 싸.""할머니, 얼음 깨셔도 돼요?""이거 안 깨면 내가 죽어." 할머니가 얼음을 한 번 더 내리쳤다. "병원에서 누워 있으니까 자꾸 그 하얀 게 생각나. 여기서 이거 깨고 있으면 안 나. 손이 시리고, 비린내 나고, 저 여편네가 잔소리하고. 그래야 여기가 내 데인 줄 알지."며느리가 한숨을 쉬었고, 할머니는 웃었다. 이 몇 개 빠진 입이었다."오늘은 어디 가?""아빠 보러요. 요양원."할머니가 쇠꼬챙이를 내려놓고 나를 오래 보았다."잘 생각했네. 가서 손 한번 잡아 드려. 늙으면 그게 제일 좋아."솔밭요양원 2층 거실에 들어섰을 때, 창가 끝 의자 옆에 엄마가 서 있었다.1년 사이에 엄마는 작아져 있었다. 머리가 반쯤 하얘졌고, 등이 조금 굽었다. 회색 누빔 점퍼를 입고, 손에는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고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온병을 창턱에 내려놓고 걸어와, 내 팔뚝을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아프지 않게."살 빠졌네.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37화. 두 번째 소생자

    이송 병원은 성진대학병원이었다.무전에서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마을버스에 올랐다.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사십 분, 서울까지 한 시간 반. 버스 안에서 나는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이어폰 속 무전은 이미 다른 출동으로 넘어가 있었다.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고속도로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나갔다. 하나, 둘, 셋, 넷.안식의 남자는 패치가 작동하면 자동으로 연락이 간다고 했다. 새벽 두 시에도 머리를 빗고 봉투를 챙겨 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패치는 지퍼 백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비공개 동의서에는 서명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섬망입니다. 흔한 일입니다.나는 휴대전화를 열어 철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 가고 그가 받았다."왜.""아저씨 지금 병원이에요?""어. 엄마 옆에.""성진대 응급실에 방금 소생자가 들어왔어요. 라스트 미닛. 스물네 살이래요. 오토바이."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병실의 기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그래서.""제가 한 시간 반 뒤에 도착해요. 그 전에 안식 사람들이 먼저 올 거예요. 그 사람 어디로 옮겨지는지만이라도 알아봐 줄 수 있어요?"철웅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전화를 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 귀 뒤에는 그 패치가 붙어 있었다. 그는 그 하늘이 자기 어머니의 하늘보다 낫다고 말한 사람이었다."구급 7이면 서교 쪽 애들이네." 그가 말했다. "알았어."전화가 끊겼다.아홉 시 반, 나는 성진대학병원 본관 로비에 도착했다. 철웅이 엘리베이터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회색 스웨터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지팡이가 무릎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구급 7 반장이 내 후배야." 그가 먼저 말했다. "애 이름은 오재민. 배달하다가 합정 사거리에서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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