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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기억의 유통기한

作者: Jino
last update 公開日: 2026-10-18 12:08:46

찢어질 듯한 고통이 뇌수를 헤집고 지나갔다. 고주파 발생기가 뿜어낸 불쾌한 진동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경계의 말초까지 파고들어 강제로 뇌파를 동기화하는, 일종의 강제적인 데이터 주입기였다. 한결은 민호를 감싸 안은 채 바닥에 처박혔다. 입안에서 비릿한 철분 향이 감돌았다. 귓속에서 들려오는 이명은 70년이라는 영겁의 틈 속에서 들었던 그 고요한 정적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파괴적이었다. 민호의 몸이 덜덜 떨렸다. 의식 없는 민호의 뇌마저 시스템에 강제로 연결하려는 놈들의 수작이었다. 한결은 이를 악물고 손목의 흉터 칩을 확인했다. 옅게 빛나는 푸른 불빛이 그의 피부 아래에서 맥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상처가 아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가 훔쳐온, 시스템을 무너뜨릴 열쇠이자 낙인이다.

문을 넘어 들어온 목소리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분명 3년 전, 관리국에 의해 불온분자로 분류되어 처형당했다던 동료, 박준석의 목소리였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한결이 직접 확인했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시신을 안고 오열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 목소리가, 저 비릿한 조롱이 지금 이 자리에서 들려오는 것인가. 한결은 고개를 들어 문 너머를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실루엣은 준석의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마치 잘 짜인 코드처럼 텅 빈 눈동자.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의 기억을 갈아 넣어 만든 관리국의 꼭두각시였다.

"강한결, 001번 실험체. 네가 이곳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최 국장님은 이미 예견하고 계셨지." 박준석의 목소리는 기계적인 노이즈가 섞인 채 울려 퍼졌다. 한결은 민호의 어깨를 더욱 강하게 부여잡았다. 민호의 맥박은 위태롭게 뛰고 있었다. 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억을 추출하고 있었다. 데이터라는 미명 아래 인간의 인격과 추억을 도살하고 있는 것이다. 한결은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틈에서 보냈던 70년의 시간, 그 지옥 같은 고독 속에서 그가 견뎌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바로 이 시스템을, 이 지독한 도살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나직이 읊조렸다. "네놈은 준석이가 아니야. 그저 그자의 기억을 훔쳐서 만든 가짜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지."

한결은 마스터 키가 박힌 손목을 바닥에 강하게 내리쳤다. 흉터 칩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기장이 주변의 공기를 뒤틀었다. 요원들이 설치한 고주파 발생기가 과부하를 일으키며 붉은 스파크를 튀겼다. 이것은 도박이다. 시스템의 방어망이 역으로 그를 추적해 뇌를 태워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였다. 하지만 한결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그 깊고 서늘한 틈의 기억을 끌어올렸다. 70년 동안 보았던 무수한 죽음과 행복의 파편들이 뇌리를 스쳤다. 누군가의 첫사랑, 누군가의 아이가 태어난 순간, 누군가가 가장 행복했던 그 짧은 1분의 기억들. 그 아름다운 조각들을 관리국은 더러운 데이터로 치환해 영생의 연료로 쓰고 있었다.

"보여주지. 기억이 어떻게 정제되는지, 그 더러운 과정을 말이야." 한결이 손목을 비틀자 격리실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들이 미친 듯이 돌아갔다. 관리국 중앙 서버와 한결의 뇌가 실시간으로 동기화되었다. 그 순간, 한결의 시야가 확장되었다. 단순히 이 방만이 아니라, 지하 4층 전체의 풍경이 데이터의 흐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캡슐 속에 갇힌 사람들. 그들의 머리 위로 연결된 튜브를 통해 무언가가 쉴 새 없이 추출되고 있었다. 그것은 금빛으로 빛나는 응축된 감정의 결정체, 즉 '행복 데이터'였다. 인간의 가장 고결한 영혼이 기계의 기름처럼 착취당하는 현장이었다.

한결은 그 처참한 광경에 숨이 막혔다. 저 기계들은 단순히 기억을 가져가는 게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았던 그 모든 흔적을 말소하고, 껍데기만 남겨둔 채 폐기하는 것이었다. 박준석의 모습을 한 꼭두각시가 다시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든 총을 한결의 이마에 겨누었다. 하지만 한결은 웃었다. 아니, 웃음보다는 비틀린 분노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너희는 이게 영생인 줄 알지? 이건 영생이 아니라, 끝없는 고통의 복제일 뿐이야." 한결은 손목 칩을 이용해 역으로 서버의 코어에 침투했다. 70년 동안 갈고 닦은 틈의 논리가 시스템의 보안 코드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것은 파멸을 향한 시작이었다.

"시스템 셧다운을 명령한다. 강제 동기화 프로토콜, 역방향 실행." 한결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의지가 칩을 통해 네트워크망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관리국 내부의 모든 조명이 깜빡거리며 요동쳤다. 지하 4층에 가득 차 있던 정제 장치들이 비명을 지르듯 기계음을 쏟아냈다. 추출되고 있던 기억들이 거꾸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풍경을 되찾았고, 누군가는 잊어야 했던 아픈 상처를 다시 마주했다. 시스템은 패닉에 빠졌다. 질서 정연하게 분류되어야 할 데이터들이 서로 엉키며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관리국은 자신들이 쌓아올린 거대한 지식의 탑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너, 지금 무슨 짓을..." 박준석의 모습을 한 요원이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그의 신체 역시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목에서는 붉은 빛과 푸른 빛이 뒤섞인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었다. 한결은 그에게 다가갔다. 공포를 느끼지 않는 눈빛으로, 그는 오직 파괴만을 생각했다. "기억은 상품이 아니야. 누군가의 삶이지. 그걸 돈으로 바꾸고 데이터로 환산하는 너희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은 없지. 나는 오늘, 그 지옥 같은 시스템을 뿌리째 뽑아버릴 생각이다." 한결의 손이 요원의 가슴팍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 순간, 벽면 전체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관리국 지하 4층의 격리실 벽이 무너져 내렸다. 뒤편에서 숨어 있던 요원들이 당황하며 총구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한결이 칩을 통해 전송한 바이러스는 시스템의 보안 관제탑을 점령했다. 자동 방어 포탑들이 오작동을 일으키며 요원들을 향해 화력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뒤로하고, 한결은 민호를 업었다. 그의 등 뒤로 느껴지는 동료의 체온은 아직 미약하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다. "조금만 더 버텨, 민호야. 이 지옥을 끝내고 나면, 우리 다시 밖으로 나가는 거야." 한결은 무너진 잔해를 밟고 올라서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그는 지금 심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는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관리국의 심장부인 중앙 통제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최진혁이 기다리고 있을 그곳. 한결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길목마다 배치된 자동화 로봇들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흉터 칩에서 쏟아지는 데이터 파동이 그들을 멈추게 했다. 시스템은 이미 한결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가 틈에서 70년 동안 경험했던 모든 물리 법칙의 왜곡이, 지금 현실의 시스템을 유린하고 있었다. 한결은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타인들의 고통을 느꼈다. 뇌파 동기화의 부작용이었다. 낯선 이들의 비명, 눈물, 그리고 죽음의 순간들이 그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한결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은 그가 이 시스템을 부숴야 할 정당성을 더욱 확고히 만들어주었다. "보이지 않나? 너희들이 만든 이 데이터의 바다가, 사실은 인간의 피로 채워진 웅덩이라는 것이." 한결은 공허한 복도를 향해 외쳤다. 그 목소리는 스피커를 타고 관리국 전체에 울려 퍼졌다. 곳곳에서 근무하던 요원들이 멈춰 서서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단말기를 확인하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추출해온 데이터들의 실체가, 그들의 개인 단말기로 전송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행복이 도둑질당한 기록, 그 추악한 증거들이 모두의 눈앞에 펼쳐졌다.

한결의 손목에 박힌 흉터 칩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최진혁이 매일같이 복용하던 그 약의 정체, 시스템을 동기화하기 위한 강제 연결 장치라는 사실 또한 네트워크망을 통해 관리국 전체에 폭로되고 있었다. 한결은 통제실의 거대한 문 앞에 섰다. 그 문 뒤에는 이 모든 비극의 설계자가, 자신의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며 앉아 있을 터였다. 한결은 손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등 뒤로는 여전히 민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문을 열기 전, 마지막으로 틈 속의 고요함을 떠올렸다. 이제는 그 지옥조차 그리워질 만큼, 현실의 도살장은 잔혹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나온 것은 서늘한 공기가 아닌, 기계적인 소음과 비린내였다. 거대한 서버실을 연상케 하는 통제실 안쪽, 수십 개의 수조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안에는 알몸의 실험체들이 뇌에 복잡한 전극을 꽂은 채 부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뇌파가 실시간으로 그래프화되어 거대한 중앙 모니터로 전송되고 있었다. 한결은 그 광경을 목격하는 순간, 구역질을 참기 위해 입술을 짓이겼다. 이것은 데이터 센터가 아니었다. 인간의 영혼을 쥐어짜 내어 그 진액만을 추출하는 거대한 도살장이었다. 수조마다 흐릿하게 점멸하는 불빛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평온한 환상들이었다. 관리국은 그것을 '행복 데이터'라고 불렀지만, 한결의 눈에는 그저 죽어가는 이들의 단말마처럼 보였다.

한결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깔린 케이블들이 꿈틀거렸다. 민호는 뒤에서 비틀거리는 몸을 벽에 기대며 낮게 신음했다. "한결아, 저것 좀 봐. 저게... 우리가 잃어버렸던 기억들이야." 민호가 가리킨 모니터에는 어린 시절의 소풍, 첫사랑의 떨림,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 같은 것들이 파편화되어 떠다니고 있었다. 관리국은 타인의 소중한 기억을 수확하여 자신들의 시스템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행복을 배양하고, 그것을 다시 추출하여 시스템의 효율을 높이는 루프를 만들었다. 인간은 그저 시스템의 연료에 불과했다. 한결은 자신의 손목에 박힌 흉터 칩을 움켜쥐었다. 칩이 불규칙하게 진동하며, 시스템 내부의 데이터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통제실 중앙에는 최진혁이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다. 그는 한결의 침입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는 여러 개의 스크린이 떠 있었고, 그중 하나에서는 방금 전 한결이 폭로한 진실이 실시간으로 관리국 전체 요원들의 단말기로 전송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고 있었다. 최진혁은 천천히 의자를 돌렸다. 그의 눈은 놀라움이 아닌, 지루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한결, 너는 정말 비효율적인 존재야. 70년의 시간을 틈 속에서 보냈으면서도, 여전히 감정에 휘둘리는 법을 버리지 못했군." 최진혁의 말투는 건조했고, 그가 평소 복용하던 알약의 영향 때문인지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알약 하나를 집어 들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게 뭐라고 생각하나? 나를 시스템과 동기화해주는 연결 장치? 아니, 사실은 내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지." 최진혁은 알약을 입에 넣지 않고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나는 이 시스템의 창시자이자, 동시에 첫 번째 희생자야. 관리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가 가장 먼저 타인의 고통을 공유해야만 했거든. 70년? 너는 그 시간을 고통이라 부르지만, 나는 그것을 완벽한 질서라고 부른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배제된 사회, 기억의 파편이 없는 인간들. 그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최종 단계다." 한결은 그 말을 들으며 분노보다 앞서는 허탈함을 느꼈다. 최진혁은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는, 그 신전의 기둥을 자신의 뇌로 세우고 있었다.

한결은 민호를 돌아보고는, 다시 최진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너는 질서를 말하지만, 이건 그저 학살일 뿐이야. 네가 얻은 영생이 타인의 삶을 빼앗은 대가라면, 그건 영생이 아니라 영원한 감옥이다." 한결은 흉터 칩을 통해 시스템의 메인 서버로 바이러스를 주입했다. 붉은 경고등이 통제실 내부를 휩쓸었다. 모든 수조가 일제히 경보음을 내며 과부하를 알렸다. 수조 속 실험체들의 뇌파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강제로 연결되었던 기억들이 역류하며 시스템 내부의 논리 구조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네가 만든 이 모든 데이터가, 이제 원래 주인들의 기억으로 돌아가서 너를 파괴할 거다." 한결의 손목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최진혁은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서둘러 콘솔을 조작하려 했지만, 한결이 이미 시스템의 마스터 키를 확보한 상태였다. 보안 프로토콜이 마비되고, 추출되었던 모든 기억이 데이터의 홍수가 되어 네트워크망을 역류했다. 관리국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지하 4층의 격리실부터 최상층의 집무실까지, 전력 공급이 차단되면서 비상등만이 깜빡였다. 시스템의 붕괴는 곧 최진혁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는 뇌에 동기화된 모든 기억의 정보를 잃고, 빈 껍데기가 될 운명이었다. "안 돼, 멈춰! 이건 복구 불가능한 데이터야! 인류의 진화가 여기서 끝난다고!" 최진혁이 소리를 지르며 제어판을 붙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민호가 휘청이며 한결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결아, 저걸 봐. 데이터가... 사라지고 있어." 모니터 속에서 흩어지던 행복의 파편들이 빛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것은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관리되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틈 속에서 70년을 버티며 한결이 보았던 것은, 기억이 데이터화되어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잊히지 않는 고통의 반복이었다. 이제 그 반복을 끊어낼 시간이었다. 한결은 흉터 칩을 통해 남은 모든 에너지를 서버의 핵심 코어에 집중했다. 관리국의 심장이 멈추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진동처럼 울려 퍼졌다. 이제 모든 것은 끝이었다.

최진혁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더 이상 관리국장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기억을 모두 소진하고 남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빈 그릇에 불과했다. 한결은 그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연민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겪었던 70년의 지옥보다, 최진혁이 겪을 기억 없는 삶은 훨씬 더 짧고 가벼운 것이었다. 시스템은 이제 침묵했다. 더 이상의 비명도, 강제적인 행복의 주입도 없었다. 한결은 천천히 손목의 흉터 칩을 확인했다. 이제 이것은 마스터 키의 기능을 잃고, 그저 흉측한 살점의 흔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틈 속에서 보았던 멸망의 예언이, 지금 이 자리에서 현실이 되어 구현되고 있었다.

지하 4층의 모든 문이 동시에 개방되었다. 실험체들이 멍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왜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한결은 그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기억을 잃은 그들이 과연 자유를 얻은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지에 빠진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시스템의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한결은 민호의 어깨를 잡고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관리국의 서버들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매캐한 연기가 복도를 가득 채웠고, 최진혁은 텅 빈 눈으로 멈춰버린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관리국이라는 거대한 지옥은 그들만의 무덤이 되었다.

복도를 따라 밖으로 나가는 길은 멀고도 길었다. 한결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고통을 짊어지고 이 자리까지 왔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한결의 뇌 속에 깊은 흉터로 남았을 뿐이다. 그는 이제 진정한 죽음을 맞이할 자격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남은 생을 이 기억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누군가의 행복을 도둑질하던 기계의 엔진을 멈췄다. 한결은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보며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스템이 무너지며 들려오는 파열음은, 그에게는 마치 오래된 족쇄가 풀리는 해방의 음악처럼 들렸다.

한결이 관리국 정문에 다다랐을 때, 하늘에서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얼굴을 때리자, 틈 속에서 느꼈던 영겁의 감각이 조금씩 무뎌지는 것이 느껴졌다. 민호는 옆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결은 민호의 손을 잡고 빗속을 걸어 나갔다. 그들의 앞에는 무너진 관리국과, 기억을 잃은 채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은 혁명인가, 아니면 그저 또 다른 파멸의 시작인가. 한결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빗소리만이 귓가를 가득 채울 뿐이었다.

그는 멈춰 서서 손목의 흉터를 문질렀다. 이제 더 이상 시스템의 신호는 들어오지 않는다. 70년의 시간 동안 갇혀 있었던 영겁의 1분은 드디어 끝났다. 그는 이제 평범한 인간으로, 혹은 기억을 잃은 파편으로 이 세상에 남을 것이다. 한결은 고개를 들어 무너지는 관리국 건물을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시스템을 부수기 위해 그 지옥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처럼, 이제는 그 지옥을 뒤로하고 현실이라는 또 다른 불확실성 속으로 사라질 시간이었다. 관리국이 저지른 수많은 악행은 이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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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41화. 20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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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주치의가 상담실 문을 열어 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어제 입은 스웨터를 그대로 입고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원탁 위에는 식은 커피 두 잔과 종이 뭉치가 흩어져 있었다. 벽의 뇌 단면 그림 옆에 누군가 모니터 기록을 출력한 긴 종이를 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초록 선을 검은 잉크로 옮긴 띠가 벽을 가로질러 문 쪽까지 이어져 있었다."밤새 계셨어요?""집에 갔다가 다시 왔습니다. 잠이 안 와서요." 그가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두 가지를 말씀드려야 합니다."나는 앉았다. 그는 수첩을 펼쳤다. 어제 적은 시각들이 빽빽했다."첫째, 어제 그 새 파형이요. 밤 열한 시 이십 분쯤 마지막으로 나오고 멈췄습니다. 오늘 새벽엔 없었어요." 그는 수첩의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런데 시각을 늘어놓고 보니까 좀 이상한 게 있습니다. 네 시 오십이 분부터 여덟 시까지, 그러니까 정하윤 씨가 병실에 계시던 동안에 제일 촘촘하게 나왔어요. 가시는 뒤로는 점점 드물어지고요.""제가 있어서요?""모릅니다. 우연일 수도 있어요. 하루치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수첩을 덮었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였다. "그런데 두 번째가 더 큽니다."그는 벽에 붙은 긴 종이 앞으로 갔다."어젯밤에 그 새 파형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확실히 하려고, 1년 치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봤습니다. 이 모니터에 분석 기능이 있어요. 파형을 쪼개서 겹쳐 있는 성분을 따로 보여 주는 기능입니다. 평소에는 쓸 일이 없어서 한 번도 안 켰어요. 선 모양이 1년 동안 똑같았으니까."그가 종이의 왼쪽 끝을 가리켰다. 거기서는 선이 가늘었다."이게 작년 11월, 강한결 씨가 처음 오셨을 때입니다. 선 하나예요. 깨끗한 한 줄." 그는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선이 조금 굵어져 있었다. 눈으로 보면 여전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38화. 새 파형

    다음 주 목요일 아침, 나는 은평 시장에서 귤을 샀다.트럭 것 말고 시장 것으로.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과일 가게 확성기는 여전히 귤 한 바구니에 오천 원이라고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는 한 바구니를 샀다. 두 개가 아니라 스무 개쯤 되는 귤이 검은 봉지 안에서 묵직하게 흔들렸다.생선 가게 앞을 지나다 멈췄다. 파란 천막 아래에서 문순자 할머니가 얼음을 깨고 있었다. 두꺼운 고무장갑, 목까지 올린 털 조끼, 머리에 두른 수건. 쇠꼬챙이로 얼음 덩어리를 내리칠 때마다 작은 조각이 튀어 할머니의 앞치마에 붙었다. 며느리가 옆에서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님, 병원에서 무리하지 말랬잖아요. 할머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아가씨!" 할머니가 먼저 나를 보았다. 쇠꼬챙이를 든 채로 손을 흔들었다. "귤 거기서 샀어? 잘했네. 거기가 싸.""할머니, 얼음 깨셔도 돼요?""이거 안 깨면 내가 죽어." 할머니가 얼음을 한 번 더 내리쳤다. "병원에서 누워 있으니까 자꾸 그 하얀 게 생각나. 여기서 이거 깨고 있으면 안 나. 손이 시리고, 비린내 나고, 저 여편네가 잔소리하고. 그래야 여기가 내 데인 줄 알지."며느리가 한숨을 쉬었고, 할머니는 웃었다. 이 몇 개 빠진 입이었다."오늘은 어디 가?""아빠 보러요. 요양원."할머니가 쇠꼬챙이를 내려놓고 나를 오래 보았다."잘 생각했네. 가서 손 한번 잡아 드려. 늙으면 그게 제일 좋아."솔밭요양원 2층 거실에 들어섰을 때, 창가 끝 의자 옆에 엄마가 서 있었다.1년 사이에 엄마는 작아져 있었다. 머리가 반쯤 하얘졌고, 등이 조금 굽었다. 회색 누빔 점퍼를 입고, 손에는 보온병을 들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고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온병을 창턱에 내려놓고 걸어와, 내 팔뚝을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아프지 않게."살 빠졌네.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37화. 두 번째 소생자

    이송 병원은 성진대학병원이었다.무전에서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마을버스에 올랐다.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사십 분, 서울까지 한 시간 반. 버스 안에서 나는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쥐고 있었다. 이어폰 속 무전은 이미 다른 출동으로 넘어가 있었다. 창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고속도로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나갔다. 하나, 둘, 셋, 넷.안식의 남자는 패치가 작동하면 자동으로 연락이 간다고 했다. 새벽 두 시에도 머리를 빗고 봉투를 챙겨 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패치는 지퍼 백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비공개 동의서에는 서명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섬망입니다. 흔한 일입니다.나는 휴대전화를 열어 철웅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 가고 그가 받았다."왜.""아저씨 지금 병원이에요?""어. 엄마 옆에.""성진대 응급실에 방금 소생자가 들어왔어요. 라스트 미닛. 스물네 살이래요. 오토바이."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병실의 기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그래서.""제가 한 시간 반 뒤에 도착해요. 그 전에 안식 사람들이 먼저 올 거예요. 그 사람 어디로 옮겨지는지만이라도 알아봐 줄 수 있어요?"철웅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전화를 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 귀 뒤에는 그 패치가 붙어 있었다. 그는 그 하늘이 자기 어머니의 하늘보다 낫다고 말한 사람이었다."구급 7이면 서교 쪽 애들이네." 그가 말했다. "알았어."전화가 끊겼다.아홉 시 반, 나는 성진대학병원 본관 로비에 도착했다. 철웅이 엘리베이터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회색 스웨터 위에 검은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지팡이가 무릎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구급 7 반장이 내 후배야." 그가 먼저 말했다. "애 이름은 오재민. 배달하다가 합정 사거리에서 혼

  • 영겁의 1분: 정지된 잔상   36화. 행복 공책

    마을버스는 정류장 앞에 섰다가, 아무도 타지 않자 문을 닫았다.기사가 창밖으로 나를 한 번 보았다. 나는 벤치에 앉은 채 손만 들었다. 괜찮다는 뜻인지, 가라는 뜻인지 나도 몰랐다. 버스가 짧게 경적을 울리고 떠났다. 산모퉁이를 돌아 불빛이 사라졌다.이어폰 속에서 무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송 준비. 들것. 잡음. 산속이라 신호가 자꾸 끊겼다. 스물넷. 그 숫자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어느 병원으로 가는지 들어야 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귀 가까이 들었다. 지지직. 목소리의 반쯤만 들어왔다가 흩어졌다.정류장 기둥의 시간표를 보았다. 다음 버스는 사십 분 뒤였다.해는 이미 산 뒤로 넘어가 있었다. 주황색이던 하늘이 잿빛으로 식어 갔다. 정류장 지붕 밑 형광등이 깜박이다 켜졌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발끝이 시렸다. 벤치 끝에 누가 두고 간 목장갑 한 짝이 얼어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손바닥 쪽 빨간 고무가 반쯤 닳아 있었다. 밭일을 하던 누군가가 버스를 타면서 떨어뜨렸을 것이다. 나는 그걸 한참 보았다. 다른 할 일이 없었다.십 분쯤 지났을 때 산길 위쪽에서 헤드라이트가 내려왔다. 흰 승합차였다. 옆구리에 초록 글씨로 솔밭요양원. 차가 정류장 앞에 서더니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분홍 조끼가 보였다."따님! 아직 계셨네. 버스 놓쳤어요?"면회 신청서를 받던 요양보호사였다. 그녀는 비상등을 켜 두고 차에서 내렸다. 한 손에 종이컵 두 개를 포개 들고, 겨드랑이에 무언가를 끼고 있었다."병원 가는 어르신 모셔다 드리고 오는 길이라서요. 원장님 차 빌렸어요. 저녁 배식 전에 올라가야 돼서 오래는 못 있어요."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 "자판기 거예요. 율무차."나는 컵을 받았다. 손바닥이 녹았다. 달고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아까 어머님한테 전화드렸어요. 따님 오셨다고." 그녀가 자기 컵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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