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이재는 안서희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 차를 대고 기다렸다.호명 가의 주택 단지와는 다른 고급 빌라 단지 앞이었다.도언과 선을 볼 여자는 국내 굴지의 법무법인 대표의 딸이라고 했다.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을 전공하다가 미술로 전공을 바꿨다고 했던가.능력과 재능을 겸비한 아가씨라고 안서희가 말했다.“능력과 재능…….”이재는 안서희가 했던 그 말을 씁쓸하게 되뇌었다.그 말은 왠지 부와 배경이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자신과는 전혀 맞닿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말이었다.시간을 계산해 봤다.7시까지 약속 장소에 여자를 데려다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그러면 동기 모임에 조금 늦더라도 참석할 수는 있을 것이다.동호에게 조금 늦을 거라고 미리 메시지를 보내 놓았다.빌라 입구 쪽을 바라보는 이재의 눈에 한 여자가 걸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긴 머리에 투피스를 입은 가느다란 몸매의 여자가 바로 픽업할 사람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이재는 차에서 내렸다.두리번거리며 내려오던 여자가 차에서 내리는 이재를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왔다.“혹시…….”“호명에서 나왔습니다.”이재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여자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의 여자는 이재를 만난 게 반갑기라도 한 듯 그렇게 웃었다.“안녕하세요? 윤유하라고 해요.”“아……. 한이재입니다.”이재는 통성명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조금 머뭇댔다.그녀가 내민 작은 손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고는 자동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타세요.”“감사합니다.”유하가 차에 타고 문을 닫아준 이재는 운전석에 올랐다.약속 장소까지는 30분이면 도착할 테니 여유가 있었다.천천히 차를 몰아 큰길로 나갔다.“택시 타고 가도 되는데 괜히 여러 사람 불편하게 만드네요.”유하의 말에 이재는 룸미러로 그녀를 보았다.생긋 웃는 그녀의 얼굴엔 천진난만함이 그대로 묻어났다.고민 같은 건 없는 건 전혀 없어 보이는 말간 얼굴은 인형같이 예뻤다.“이모가 좀…… 극성인 데가 있어요. 그렇죠?
토요일은 일주일 중 유일하게 쉬는 날이었다.도경의 수업이 토요일에만 비어 있기 때문이었다.처음 쉬는 날 없이 시간표를 짰을 때 도경은 하루도 쉬는 날이 없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떼를 부렸다.그 바람에 토요일 하루를 비웠다.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고 했지만 덕분에 이재도 하루를 쉴 수 있게 되었다.저녁에 동기 모임에 나가는 것 빼고는 일정이 없었다.모임에 가기 전에 일찍 나가서 미용실에라도 가볼까, 아니면 옷이라도 사볼까 생각했다.오랜만에 나가는 모임이었으므로 아무렇게나 하고 나가고 싶지 않았다.징-.짧게 울리는 진동음은 문자 알림이었다.[한 선생, 사모님 호출.]조 여사의 문자였다.이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이재는 답을 보내고 안채로 건너갈 준비를 했다.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 *“한 선생. 아니 이제 한 대리라고 해야 하나?”안채로 들어가자 안서희가 눙치듯이 말을 하며 소리높여 웃었다.“편하게 불러 주시면 됩니다.”“도언이가 하도 뭐라고 해서.”도언의 이름이 나오자 이재는 저도 모르게 안서희를 보았다가 이내 눈을 내렸다.그녀의 눈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을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쉬는데 불러서 미안해요.”“아닙니다.”이재는 잠자코 안서희의 말을 기다렸다.평소보다 기분이 좋은지 안서희의 얼굴이 밝은 게 어쩐지 더 불안했다.그녀가 변덕을 부리는 날이 결코 좋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오늘 저녁에 시간 좀 어때요?”방금 고용인이 두고 간 찻잔을 들어 향을 맡듯이 코를 대고 안서희가 무심하게 물었다.시간이 있냐고 묻고 있었지만 이재의 스케줄 따위는 상관없다는 걸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말투였다.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었다.하지만 이재는 이미 안서희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리라 짐작했다.그러니 약속이 있다는 얘기는 할 필요도 없었다.“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시키다니 무슨 그런 말을. 부탁.”안서희가 생긋 웃어 보였다.이재는 그녀와 마주친 시선을
도언은 풀썩 웃음을 내뱉었지만, 표정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도경이 말을 이었다.“이재 누나 일에 예민한 거 같아서.”도언이 잠시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빤히 도경을 보았다.“예민하다라……. 그럼 좋아하는 건가?”“뭐, 대충 그런 거 아닌가?”도경이 숟가락을 들며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아님 다행이고.”다행이다, 라는 말이 도언의 귀에 거슬렸다.그런 말을 내뱉고 도경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밥을 먹으며 도언의 시선을 무시했다.“도경아! 말 되는 소리를 해.”듣고 있던 안서희가 도경을 나무라듯 말을 건네며 자못 긴장감이 돌던 분위기를 흩트렸다.“어디 붙일 데가 없어서 그런 사람을 도언이한테…….”“이재 누나가 어때서?”벌컥 짜증 섞인 말투로 돌아보는 도경을 식탁 밑으로 쥐어박으며 안서희가 그만 말하라고 눈치를 보냈다.“이재 누나가 훨씬 아깝지.”중얼거리는 소리였지만 도언이 못 들을 리 없었다.그러나 더 대꾸하지 않았다.“아버지 곧 퇴원하시는데 여행이라도 다녀오시죠.”“여행?”안서희가 도언을 반짝 올려다보았다가 표정을 감추었다.“여행은 무슨. 회장님 오래 쉬셔서 회사 일로 바쁘실 텐데.”“회사 일은 저한테 맡기시고.”안서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도언이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느긋하게 올렸다.“두 분이 오랜만에 좋은 시간 보내셔도 괜찮지 않겠습니까?”“도경이 시험도 얼마 안 남았잖아.”안서희가 애써 거절하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아니야, 엄마. 나는 이재 누나 있잖아.”“그래도 그건 아니지.”“이재 누나가 봐주는데 뭐가 걱정이야. 안 그래 형?”도경이 도언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웃음기는 사라진 얼굴이었다.“그래.”도언이 도경의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재는 습관처럼 수신 확인 버튼을 눌렀다.「읽지 않음」며칠째 도언에게 보낸 보고서는 읽지 않은 상태로 쌓여 있었다.“뭐야…….”허탈함이 지나쳐 조금 조바심이 났다.며칠 전 차
왠지 기운이 빠졌다.도언과의 약속에 나가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던 게 허탈해지고 말았다.그 사람에겐 상관도 없는 일인데 괜히 마음 졸인 건지도 몰랐다.분명 다행인 건데 기분이 이상했다.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은근히 화가 났다.오늘 바람맞은 건 도언이 아니라 이재 자신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잘된 거지 뭐.”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핸드폰을 확인하고, 씻고 나와서도 확인했지만,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그날 밤 잠자리에 든 이재는 까무룩 잠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 *호명 가 안채에서 아침부터 고용인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별채에서 도언이 아침 식사를 하러 들르겠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도언이 온다는 건 식탁에 수저 한 벌만 더 놓으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도언이 안채에 들르는 건 고용인들이 안서희의 히스테리를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도언은 어젯밤에 미리 방문을 예고했는데 덕분에 안서희의 신경질은 아침이 되었을 때 극에 달했다.“도경이 깨웠어요? 아직도 안 일어났어?”아직 일어나지 않은 도경을 깨우러 2층으로 올라갔다.메이크업을 고치러 몇 번이나 거울 앞에 섰다가 옷을 갈아입었다.그러면서도 주방에 가서는 상을 거하게 차리지 말라고 잔소리했다.“괜히 도언이 온다고 특별하게 하지 말아요. 고작 아침 한술 뜨는데 유난 떨 거 없어. 그럼 뭐 매일 그렇게 먹는 줄 알 거 아냐.”안서희는 도언이 어릴 때 좋아했던 계란찜을 하는 조 여사에게 계란 비린내가 싫다며 코를 쥐며 얼굴을 구겼다.조 여사는 주방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아침부터 정말 피곤해 죽겠네.”그러나 안서희의 신경질도 도언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거실 창에서 도언이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것을 본 그녀는 표정을 바꾸었다.호명 가의 안주인이자 어쨌든 그의 어머니로서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도언이 왔니.”“안녕히 주무셨어요, 어머니.”도언이 말끝에 붙인 어머니 소리에 안서희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여전히
도경이 브레이크 반동에 놀라서 이재를 돌아보았다.“미안.”이재는 보지도 않고 말했다.이재의 얼굴에 불안감이 맴돌았다.하필 여기서…….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나마 다행이라면 도경이 함께 있었다.만약 화가 났더라도 도경이 있는 데서 말을 꺼내진 않을 것이다.특히 어제 얘기는.이재는 천천히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도경의 말처럼 앞에 도언의 차가 있었다.시동은 꺼져 있었다.그렇다면 도언이 이미 안으로 들어갔을지도 몰랐다.그러나 이재의 기대는 곧바로 무너졌다.운전석에서 내리는 사람은 김 비서가 아니고 도언이었다.그리고 그는 그대로 서서 주차하는 도경의 차를 바라보았다.“누나, 형한테는 오늘 일 비밀이야.”시동을 끄기 전 도경이 하는 말에 이재는 어떻게 대답할지 정하지 못한 채 그를 보았다.난감한 건 도경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도언만 보면 좋아서 따라다니던 얼마 전과는 부쩍 달라 보였다.“형이 알면 엄마까지 좀……. 암튼 알았지?”“어, 그래.”이재의 대답에 안심한 듯 도경이 차 문을 열었다.“형!”사뭇 반가운 목소리로 도경이 부르자 도언이 천천히 도경에게 다가왔다.도경이 내린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을 주시하면서.“형, 이제 오는 거야?”“그래. 너는? 어디 다녀오는 거야?”“어어. 이재 누나랑…….”달칵-.운전석 문을 열고 이재가 내렸다.그 모습을 보는 도언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마주친 눈에 이재가 얼른 눈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부회장님.”“허.”도언의 실소가 이재의 귀에 박히듯 들어왔다.“오늘 이재 누나랑 데이트했어.”“데이트?”이재를 보던 도언의 눈이 도경에게 옮겨졌다.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나 공부 열심히 했다고 이재 누나가 저녁 사줬어. 그치, 누나?”“어? 어어…….”도경의 거짓말은 꽤 어설펐으나 도언은 크게 상관하지 않는 기색이었다.“뭘 먹었는데?”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마치 동생의 저녁 메뉴가 궁금한 듯 사뭇 다정했다.도
“누나 왜?”핸드폰을 보며 얼어 있는 이재를 보며 도경이 물었다.“어? 아니야.”이재는 핸드폰 액정이 안 보이게 엎어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도언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갑자기 사라진 도경을 찾느라 다른 모든 일이 그녀의 머리를 지워낸 탓이었다.‘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지.’종일 도언과 만날 생각에 긴장했으면서.어젯밤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전화를 받았던 이른 아침부터 내내 그랬다.끝까지 거절하지 못한 걸 후회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은 시간에 당황했다.도경이 사라졌던 그 일만 아니었다면 약속 시간에 맞춰 그를 만날 수 있었다.그래서 안서희의 모욕스러운 말도 참아낼 수 있었다.그녀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으므로.그런데, 도경 때문에 모든 것이 틀어지고 말았다.“누나, 왜 안 먹어? 떡볶이 싫으면 다른 거 시킬까?”“아니야, 먹어. 먹을 거야.”이재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뜨겁기만 할 뿐,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설마 아직도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그럴 리가 없다고 이재는 생각했다.벌써 1시간이나 지났다.차도언이 자신을 그렇게 오래 기다릴 리 없었다.전화도 딱 한 통만 왔을 뿐이었다.‘그 전화를 걸고 바로 일어섰겠지. 그렇겠지, 설마…….’어차피 일방적인 약속이었다.이재는 처음부터 거절했다.그녀의 거절을 무시한 건 도언이었다.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누나 맛있지?”“어, 어. 맛있다.”입술에 양념이 묻은 줄도 모르고 헤헤 웃는 도경이 기가 막혔다.이재는 냅킨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입 좀 닦고 먹어.”“닦아줘.”도경이 냅킨을 받는 대신 장난스레 입술을 쭉 내밀었다.이재가 기겁하며 얼굴을 와락 구기자 이번에는 상체를 숙여 이재에게 더 가까이했다.“나 닦을 손이 없어서 그래. 누나가 닦아줘.”도경이 양손에 든 젓가락과 숟가락을 들어 보였다.그리고 다시 입술을 내밀었다.“정말 너…… 가지가지
여자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별채 2층 계단을 오르며 후회했다."다음에, 다음에 해요......"자신이 한 말이 메아리가 되어 끝도 없이 귓가를 울렸다.‘다음이라는 말은 왜 했을까.’그건 무언가 기약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그를 피하고자 했던 의미 없는 말이었다.하지만 이제 와 설명한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늘 그렇듯 후회는 이미 늦어버렸을 때 하는 것이니까.탁-.여자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순식간에 닥쳐온 어둠에 두려움이 밀려왔다.제 손을 잡은 남자의 희미한 온기마저 빠져나갈까 두려워
그렇게 보는 건 도경 나름의 애교였다.하지만 이재는 그 눈에 넘어가줄 생각이 없었다.“너무한 건 너야. 어떻게 그새를 못 참고 도망을 가니?”“또 내가 잘못한 거야?”“그럼 잘한 거야?”“……미안.”도경이 순순히 꺼낸 말에 이재는 조금 놀랐다.사과하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도경의 그 말을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난 왜 이렇게 잘못만 하는 거지?”“어?”“내가 무슨 짓만 하면 다들 내가 잘못했대. 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뿐인데 내가 하는 건 다 잘못된 거래.”“도경아, 그게 아니라…….”“오늘도
“차도경.”턱을 괴고 테이블에 시선을 두고 있던 도경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이미 취한 듯 풀린 눈으로 이재를 올려다보더니 놀라지도 않고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이재 누나……? 누나가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어떻게 된 거야, 너?”“보면 몰라? 술 마시고 싶어서 도망쳤지. 그런데 또 잡혔네.”도경이 헤헤 웃었다.그 얼굴이 어찌나 천진한지 지금 호명 가에 어떤 난리가 일어났는지 이재마저 잠시 잊어버릴 지경이었다.“나갈 거면 말이라도 하고 가지. 지금 너 없어졌다고 얼마나 난리 난 줄 알아?”“난리는 무슨. 이렇게
짜증을 누르며 이재가 말을 이었다.“도경이 과외 선생님. 나 누군지 알지?”―도경이 과외……? 아아, 이재 누나?“어어, 그래.”거들먹거리던 목소리가 사라지고 홍주가 천진하게 반가워했다.―그런데 왜요? 누나가 나한테 무슨 일로 전화를 했어요?“혹시 도경이랑 같이 있니?”―도경이?“응. 도경이가 연락이 안 돼서 혹시나 같이 있나 해서.”―도경이 못 본 지 꽤 됐는데요?“그래……?”홍주마저 도경이랑 같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를 당장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이재는 막막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도경이 요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