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스틸의 인사에 이어 지니 역시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쥐고 인사를 건넸다.
그 극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방에 포진해 있던 소식지 기자들이 스틸과 황녀의 주변으로 떼처럼 몰려들어 마도구 펜을 굴리기 바빴다.
[황녀 전하! 방금 스틸 대공을 은인이라 칭하신 비하인드가 무엇입니까?]
[두 분의 첫 만남은 언제였습니까? 원래부터 두터운 친분이 있으셨던 건가요?]
[최근 황태자의 실종과 맞물려 캔도르 대공 가문과 황가의 기류가 변한 것입니까?]
순식간에 취재의 방향이 황실의 스캔들로 바뀌며 주변이 어수선해졌다. 안젤루스 황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지니를 바라보았다.
“대단하시군요. 스틸 대공 전하는 진정한 제국의 영웅이세요.”
스틸은 황녀의 과분한 칭찬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대외적인 이목이 있었기에 입가에 젠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옆에서 지니도 예의를 갖추어 황녀
수업이 끝난 직후, 스틸과 지니는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한 온기를 만끽하며 학부 식당으로 향했다.아카데미 검술 대회도 기대가 되고, 합법적으로 아쳐에게 철퇴를 내릴 수 있는 앞날도 기대가 되는 그였다.그리고 무엇보다 등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우군들의 존재 덕분일까.가슴 속 깊이 퍼지는 여유는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게 만들었다.다만 그로 인해 얻은 소소한 번뇌가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뇌리를 울리는 차원 인벤토리 속 전력들과 '마음의 소리'로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행복한 비명뿐이었다.스틸의 공간에는 칠흑 같은 오라를 품은 듀라한 기사단과 스펙터, 그리고 덤으로 깃든 플로럴스피릿의 왕이 자리 잡고 있었고, 지니의 공간에는 가르나르의 마정석 꽃밭 수만 송이와 수백 체의 밴시, 심지어 웅크린 레드 드래곤까지 깃들어 있었다.— 인간들의 학문이란 참으로 기이하군.—정치라니, 굳이 머리를 썩혀 배운들 저 실상과 어찌 같겠는가.— 전하, 저편에 불온한 저주의 기운을 품은 무리가 서성입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귓가를 잔잔하게 울리는 정령들과 마물들의 와글거리는 음성은 스틸에게 색다른 즐거움이자, 그 어떤 첩보망보다 완벽한 이중 방어선이 되어 주고 있었다.“주인님, 정말 우리 주변에 많은 존재가 있어 그런지 하나도 심심하지가 않아.”스틸이 능력이 많아질수록 지니 역시도 함께 성장하고 있으니 느낀 바는 똑같은 것 같았다.“그러게. 어수선해도 즐겁군.”그리고 이제 주변 인간들도 스틸에게는 웃으며 다가오는 존재가 많았다.인사하는 사람, 눈을 마주쳐도 찡그리지 않는 학생, 그리고 동경하듯 바라보는 사람들까지.지난봄과 많은 변화를 겪은 그였다.&ldq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그리웠던가.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미궁 안에서 하데스와 마주하느라 생사를 오갔는데, 스틸은 다시 찾은 이 일상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월요일 1교시 『귀족의 의무』 히스테리아 교수의 시간.교수가 도착하기 전, 강의실은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물론 그 수군거리는 소리의 90%는 스틸의 이야기였다.늠름하다, 가르나르 영지가 기대된다, 소식지 봤냐, 스틸이 지난주 미궁에 있다가 돌아온 것 같다는 둥.모두의 시선이 스틸에게 쏠렸다. 지니는 그의 팔을 가볍게 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부드러운 팔의 온기가 전해지자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주변을 살폈다.“우리 주인님 인기가 하늘을 찌르네?”인기가 하늘만 찌를까. 아마 아쳐의 심장도 쿡쿡 찔러 대겠지.지니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묻어났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느껴지는 아쳐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예리하게 와닿았다.그나저나 아쳐도 주변 학생들이 오랜만에 등장했다고 수군거려 대었다.얼굴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고, 그의 몸에서는 더욱 지독한 냄새가 풀풀 풍겨 역겨울 지경이었다.스틸은 가면을 쓴 채 묵묵히 앉아 있는 아쳐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경멸의 빛이 공기 중에 서린 듯 선명했다.사실 이제 아쳐는 스틸의 상대가 아니었다. 어디서 더러운 건 잔뜩 주워 먹었는지 여전히 마력을 지저분하게 탐하고 있는 듯싶지만, 사실 눈으로 봤을 때 굳이 램프에게 뭘 물어보지 않아도 그가 스틸보다는 한참 밑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상태창에 등장한 스틸의 수치는 이미 이 아카데미의 그 어떤 학생들보다도 높은 레벨임이 확실해졌다.지금 스틸은 기타 능력이 다 채워졌기에 뭐라도 필요하면 더 치환할 수 있게 되었고 100 레벨을 훌쩍 넘어선 마력 소유자라 그
이세계의 학창 시절을 즐기고 새로운 경험을 쌓겠다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스틸은 강의동 복도를 유유히 걸어갔다.복도를 오가는 학생들의 시선은 지난 4월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경외와 호기심이 짙게 서려 있었다.“봐, 스틸 대공이야! 곁에 있는 건 그의 시녀고! 선남선녀네.”“가르나르 미궁이라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나 봐?”“연일 소식지에 뜨는 거 못 봤어? 캔도르 대공가는 여전히 건재하다잖아.”“1학기 때 보니 매일 아침 트레이닝을 하고 주말마다 던전에 들어간다던데, 체격이 거의 상급 기사 수준이야.”스틸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훈훈하고 바람직한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스틸과 지니, 그리고 스펙터의 신변에는 천지개벽할 일들이 몰아쳤지만,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그때, 학생들의 속삭임 중 묘한 이야기가 스틸의 귓가를 스쳤다.“이번 아카데미 축제 때 열리는 검술 대회에 스틸 대공도 출전하려나?”잠깐, 검술 대회?“2학기 축제의 꽃은 단연 검술 대회지. 벌써 기대된다. 나도 출전해 볼까?”“황태자 전하께서도 출전하신다고 들었어. 거기서 활약해서 황실 기사단에 눈도장을 찍고 싶어.”이건 놀라운 소식이었다. 아카데미 축제의 꽃이 무두질된 검과 합법적인 투쟁이라니.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전력을 다해 겨뤄도 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날붙이가 오가는 서슬 푸른 전장을 아카데미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준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아쳐가 출전한다고?’스틸의 얇은 입술 끝이 호선을 그리며 서늘하게 올라갔다.
마지션은 목숨보다 소중한 여동생과 재회하기 위해 교수 사택 문 앞에 섰다. 오랜 세월이 흘러간 듯 가슴이 무겁게 먹먹해졌다.얼마나 이날을 기다렸던가.제논의 손에 죽어 가며 고통의 늪에 빠져 있을 때조차, 그를 버티게 한 것은 단 하나, 이 순간에 대한 열망이었다.투명화나 순간이동으로 은밀히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긴 이별 끝의 재회에 예고 없이 나타나는 것은 동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아쳐와의 은밀한 만남을 훔쳐본 것은 미안했으나, 지금만큼은 형식을 갖추어 그녀를 마주하고 싶었다.그의 한 손에는 화사한 꽃다발이, 다른 한 손에는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제 목숨보다 귀한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기에, 세상 무엇을 들려주어도 모자란 심정이었다.[안녕, 나의 동생 마지리안.]누군가 들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저 동생의 눈을 바르게 마주하고 싶을 뿐이었다.“역시!”아쳐에게 미리 귀띔을 들어서였을까. 숙소 안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오더니, 이내 문 앞으로 급하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문이 활짝 열리고,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마지리안이 문가에 우뚝 서 있었다.“정말······ 오라버니가 오셨군요!”이 모든 것은 동생 덕분이었다. 쓰레기 같은 아쳐에게 자신을 구해 오라 요청했던 동생의 집념이 아니었다면, 마지션은 살아남을 의지조차 품지 못했을 터였다.제논이나 마르바스가 쓸모를 다한 자신을 당장 쫓지는 않겠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두 번 다시 도른의 어둠 속에 붙잡힐 수는 없었다.향후의 일은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면 될 터. 지금은 오직 이 행복한 재회의 순간을 누려야 했다.“들어오세요, 오라버니! 우리······ 이제는 정말 행복하게만 살아요.” “그래.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말자.”마지션은 집 안으로 발
다음 날이 밝았다.가르나르 꽃밭에 놓아둔 침대에 쏟아지는 햇빛이 스틸의 맨살에 닿자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지니는 램프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것 같았고, 주변을 둘러보니 꽃밭의 결계 밖에서는 듀라한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어디 보자, 스펙터나 불러 볼까?”지니와의 달콤한 시간을 위해 쳐놓았던 결계를 풀고 옷을 입은 스틸이 스펙터를 불렀다.그러자 잠시 후,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휘몰아치더니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일어난 건가.” “그래, 간밤에 잘 있었어?”스펙터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코웃음을 흘렸다.햇살이 눈부신 낮이었지만, 스펙터는 인간 원스 마이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내 안부까지 묻다니, 여유가 넘치는군. 일단 네 인벤토리 안도 점검해야겠으니 그곳으로 들어가야겠다.”하긴, 듀라한들이 스틸의 인벤토리를 거점으로 지내왔으니 스펙터도 얼른 불러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스틸, 네가 이번에는 잠을 꽤 오래 잔 것 같다.스펙터는 스틸의 잠이 늘었다며 황당해했다.그도 그럴 것이, 스틸이 시각을 확인하자 이미 정오가 지나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놀라 나자빠질 뻔했다.“보름 동안이나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건가. 놀랍군.”- 스틸, 그대도 엄연한 인간이다. 초월적인 존재라 해도 잘 먹고 잘 자야 하는 법이지. 너의 엘프도 피곤해 보이는 것을 보니 휴식은 확실히 필요해 보인다.스펙터도 지금만큼은 인간적인 잔소리를 해 주는 듯싶었다.기묘한 판타지 세계에서는 자신도 정상이 아닌 존재로 취급받는 게 사실이지만, 인간은 엄연히 인간.자야 할 때는 자야 하는 법이었다.일단 스틸은 일어나 대충 씻고 가르나르 영지라도 뛰며 아침 운동을 하기 위해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진짜 도른의 대마법사, 마지션은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투명화 마법을 펼치고 은밀하게 기척을 지운 채, 마구간에서 느껴진 이상한 마력을 추적해 다가갔더니 이런 빌어먹을 광경이 펼쳐져 있을 줄이야.‘이런 개새끼가······!’둘은 지금 침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다행히 옷은 갖춰 입고 있었지만, 밀착해 부둥켜안은 꼴은 누가 봐도 연인의 형상이었다.“흑, 흑······. 전하, 오랜만이라 실감이 나지 않네요. 살아서 돌아오시다니······ 다행입니다.”제 동생은 이 비참한 상황에 벌벌 떨기는커녕, 눈물까지 글썽이며 황태자를 반기고 있었다.“제논 그 썩을 도른 황제 놈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교수님, 정말 그리웠습니다.”마지션은 그제야 아쳐라는 쓰레기가 무슨 의도로 자신을 구출해 냈는지 이해가 되었다.그러나 고맙기는커녕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감히 제 동생을 농락하다니, 은인에서 순식간에 천하의 원수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그런데, 정말 제 오라버니를 만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당당히 개선장군처럼 돌아오지 않았겠습니까.”아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이 보면 제논을 자력으로 제압하고 당당히 탈출이라도 한 줄 알 정도로 허풍을 떨고 있었다.제 여동생과 조금만 더 진도를 나갔다면 불 마법으로 잿더미를 만들어 버렸을 거라 생각하며, 마지션은 이를 잘근잘근 깨물었다.귀하디귀한 여동생 마지리안 픽스는 자신 못지않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법사였다. 그러나 흑마법사가 되어 마탑에 들어가 봤자 도른의 개로 혹사당할 것이 뻔했기에, 마지션은 그녀의 재능을 세상에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몸속 마력 절반을 자신만이 풀 수 있는 강력한 봉인으로 가두어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건만, 결
자신이 알고 있는 ‘소원을 말해 봐!’라고 하는 램프의 요정이 그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어서 빨리 이 소녀를 전문가에게 보여줘야 하는데.“어이, 내가 나이가 많아 보이니 말은 좀 편히 할게. 엘프야, 일단 내가 눈 떠보니 다른 세상에 소환되어 환생한 것 같아서 얼른 적응해야 하거든? 그러니 그쪽도 정신 차려.”넋두리하듯 그리 스틸이 말을 내뱉고 몸을 돌리라 하자, 엘프는 제 두 어깨를 꼭 부여잡더니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어머!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 초월자인가? 나 횡재했잖아? 초월자를 주인님으로 맞이하다니!”
주인님은 무슨. 불이 난 연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스틸은 우선 잠시 목걸이를 들여다보았다.3초 잠깐 고민한 그였다. 누가 봤나? 참 CCTV는 없는 세상이지? 하지만 목숨까지 내던지며 대한민국 영공을 지키던 천하의 파일럿 강철신이 이런 목걸이 하나의 움찔하다니.게다가 망한 영지기는 해도 고위 귀족 대공 인생에 뭘 주워서 넙죽- 꿀꺽할 수 없는 법.일단 이 화재부터 진압하고 주인이나 찾아줘야겠다 싶어 주변을 훑었다.강철신은 일단 구유통이 아닌 우물을 찾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불길에 쫓겨 물을 찾던 그의 눈에 목걸이가 들어
한 달 전, 20XX년 4월 1일 오전. 인생 2번째라 공군 소령 강철신은 오늘이 당연히 올 줄 알았다. 그리고 당연히 적국기 등장으로 출격 명령을 받았다. 전생의 기억이 혈관 속을 맴돌았다. 오늘, 그는 죽을 각오로 전투기에 올라가야 하는 날이다. 분명 적국의 전투기에는 망할 아쳐가 타고 있을 터.정밀유도폭탄(SDB)까지 무장하고 스텔스 전투기로 출격 30분 만에, 지금 그는 사선을 넘나들게 되었다. 여전히 그는 대한민국 영공을 휘저어 놓았고, 심지어 서울 한복판에 미사일을 터트릴 요량으로 북방 한계선을 넘었다. “이
잠깐, 이거 꿈이지?그녀의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주인님, 아읏! 너무 좋아!”그리 곱고 고운 엘프가 눈부신 나신으로 제 밑에 이리 깔려있다니.오 신이시여, 강철신 인생이 너무 불쌍하여 회귀 포함 토털 5번 생애 처음으로 이런 선물을 주시는 겁니까. 그럼 넙죽 받을 수밖에요. 어차피 꿈인데 뭘 못하겠습니까.스틸은 떨리는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지니, 제대로 하는 거 맞겠지?” “응, 내 몸이 너무 뜨거워졌어. 나도 처음이라··· 흐흣! 뭐가 뭔지 모르겠어. 으윽!”두 몸이 얽히는 소리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