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한여름 밤, 가르나르 영지의 꽃들이 지천에 널려 청명하고 향기로운 기운이 밤공기 속에 넘실거렸다.
“그래, 스테이터스를 오늘 확인해 봐야겠어.”
· 주인님, 레벨이 더 대단해졌을 게 분명해.일단 시작한 것은 마무리를 지어야 했기에, 스틸은 은근한 기대를 품은 채 지니와의 달콤한 호흡을 이어 나갔다.
스틸의 온몸에는 지니의 살결과 꽃향기가 깊게 스며들어, 마치 향수 속에 몸을 담근 듯 아찔한 감각이 가득했다. 서로를 뜨겁게 품어 안고 결국 황홀한 절정에 이른 뒤에야, 두 사람은 노곤해진 몸으로 옷을 대강 추슬러 입고 꽃밭에 누웠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고르는 스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사람을 아주 극락으로 보내버리는 지니의 손길바람은 실로 엄청났다. 엘프가 이토록 은밀한 학습력이 좋을 줄이야.
지니는 아이처럼 맑게 웃으며 스틸의 품으로 파고들
“아······! 이럴 수가!”재생되는 영상 속 지니는 가히 충격적인 모습이었다.지니의 가냘픈 목과 가느다란 손목, 그리고 발목에는 시퍼런 마력이 감도는 쇠사슬이 무거운 수갑 형태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쇠사슬이 살을 파고든 자리에는 거무스름한 피가 맺혀 깊은 멍 자국이 처참하게 들어 있었고, 늘 깨끗하던 하얀 튜닉은 마치 썩은 나뭇잎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상자를 내려놓는 그녀의 손가락은 뼈대만 남은 듯 앙상해 보였으며, 그녀가 뿜어내던 황금빛 마력은 마치 마지막 생명력을 억지로 쥐어짜 내듯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스틸은 화면 속 지니의 텅 비어버린 공허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 가슴 한복판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 잔인한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피가 배어 나오는 손으로 간신히 인벤토리를 열어 예복이 담긴 상자를 내려놓고 있었다.그것은 도저히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끔찍한 학대를 당한 죄인이나 노예의 몰골에 불과했다.어쩌다 그녀가, 대체 어떤 지옥을 겪었기에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찾아온 거란 말인가. 스틸의 눈빛이 피비린내를 풍기며 싸늘하게 뒤집혔다.“세상에······! 지니 양이 어쩌다 저런 꼴로······.”리노 역시 깊은 안타까움에 탄식을 뱉었고, 스틸은 가슴이 먹먹하게 막혀와 차마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화면 속 지니는 온 힘을 쥐어짜 황금빛 마력을 모으더니, 연미복에 가녀린 요정력을 불어넣고 있었다.“지
“스틸 대공······! 대체 가르나르 영지가 어떻게 이토록 평화롭고 번성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 눈으로 보고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군요!”상단의 마차를 타고 가르나르에 당도한 리노는, 영지의 현재 모습을 목도하자마자 정신이 완전히 나간 듯 막대한 충격을 토해냈다.도저히 순간이동으로 좌표를 생성할 수 없었기에 이렇게 물리적인 도구를 이용해서 나타난 것.늘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던 기괴한 영지 입구로 스틸이 직접 마중을 나갔을 때만 해도 리노는 내내 의아한 안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검은 연기의 경계를 넘어 영지 내부로 들어선 순간부터는 경이로운 감탄만을 연발할 뿐이었다.“뭐······ 그리되었습니다. 상단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텐데, 제 급박한 요청에 한달음에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스틸은 덤덤하게 대꾸하며 리노에게 영지의 상징인 광활한 꽃밭을 안내했고, 가르나르를 굳건히 수호하는 천리장성의 위용을 보여주었다.새로이 올린 대공저의 본채와 호화로운 별채는 물론, 향후 영지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살게 하기 위해 밤낮으로 비옥하게 개간해 둔 토지들까지 전부 리노의 눈앞에 가감 없이 공개했다.“스틸 대공, 아니 전하! 이제는 제대로 대공 전하로 대접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위용이라면 이 레투카 제국에 캔도르 대공가의 건재함을 당장 선포하셔도 될 정도로 차고 넘칩니다!”“저는 이 꽃들을 대륙 전역에 유통시킬 계획입니다. 곧 캔도르 상단도 발족하여 길드를 직접 운영할 예정이니, 제게는 리노 사장님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습니다.”“암요! 당연히 온 힘을
상자 안에는 캔도르 대공 가문의 위엄 넘치는 상징, 불사조 문양이 아주 정교하게 새겨진 최고급 예복이 정갈하게 개어 있었다.대공가의 유서 깊은 기본 복색과 완벽히 일치하는 고혹적인 색감, 그리고 황금빛 실로 한 땀 한 땀 수놓인 불사조의 형상이라니.최상급 비단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완벽한 핏을 자아내는 예복의 자태에도 위엄이 느껴져 스틸의 입술 사이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아무래도 너의 그 엘프와 관련이 아주 깊은 듯하다.]“그럼 지니가······ 지니가 돌아온 건가? 지니! 지니 어디 있어!”스틸은 이성을 잃고 사방을 둘러보며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외쳤다.그러나 목걸이는 여전히 스틸에게 걸려 있지도 않았고, 주변의 마력 흐름 속에서도 지니의 인기척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워 투명화 마법이나 은신 탐지 스킬까지 발동해 보았으나, 허공에는 그 어떤 흔적도 포착되지 않았다.하지만 연미복의 옷깃을 끌어 안는 순간, 그곳에 깊게 배어 있는 그녀 특유의 포근하고 달콤한 향기가 말없이 모든 진실을 증명하고 있었다.예복을 품에 부서질 듯 안아 내리자, 마치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해 가슴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스펙터······. 그래도 이건 희망의 증거야. 맞지?”자신을 냉정하게 버리고 가버린 줄만 알았는데, 이토록 눈부신 예복을 남겨두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그래, 아무래도 사정이 있는 것 같다.]그녀는 어째서 자신의 얼굴 한 번을 보여주지 않고, 오직 이 서글픈 흔적만을 남긴 채 또
리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고 보니 자신이 지니에게 귀한 옷감을 맡겼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깜빡 잊고 있었다.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리나는 시녀 소르도가 건넨 커다란 종이 상자 속에서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꺼내 올렸다.은은한 보랏빛이 감도는 최고급 원단이 화려한 금빛 자수, 그리고 풍성한 실루엣을 자랑하는 드레스로 완벽하게 탈바꿈해 있었다.“어쩜······ 이리도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 수 있단 말이야?”누가 보아도 금화를 치러야만 손에 넣을 수 있을 법한 대작이었다.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허술한 재봉 흔적 따위는 단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 공인 최고의 디자이너가 온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완성도였다.이음새와 솔기 처리는 어찌나 정교한지, 옷의 앞뒤를 아무리 번갈아 보아도 원래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었던 것처럼 무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맞아떨어졌다.“소르도 할멈, 이거 대체 누가 전해준 거야?”“아가씨, 저도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만······ 웬 낯선 아가씨가 문 앞에 상자를 살짝 내려놓고 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답니다.”그럼 지니인데!“뭐? 그랬으면 당장 날 불렀어야지!”“그게······ 누구시냐고 말을 붙이기도 전에,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찰나의 순간에 사라져 버리셨거든요. 그리고······.&r
붉은 인장이라니.“······안젤루스가 보낸 초대장이야.”[황가에 초청을 받다니. 축하한다, 스틸.]나름 위상이 올라갔다는 증거인가.지니를 만나기 전 폐급에 망나니에 거지 대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게 입지가 다져진 스틸이었다.제국의 황녀가 자신의 데뷔탕트 초대장을 스틸의 앞으로 보냈다니.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세계에 그저 지니와 사랑 타령이나 하며 유유자적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숙적 아쳐를 향한 처절한 복수, 레투카 황실의 콧대를 꺾어놓으며 붕괴한 캔도르 가문을 대륙 위에 찬란하게 재건하는 것.그것이 그가 다섯 번째 삶을 부여받으며 가슴에 새긴 본연의 목표였다.이대로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기회를 헛되이 날려버린다면, 설령 지니가 돌아올 여건이 마련된다 한들 이 한심한 모습을 보고 다시 발길을 돌리지 않겠는가.“······정신 차려야겠어. 어디 보자. 여기나 가볼까?”[사교 활동에 발을 들이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고위 관료들과 거물들이 죄다 모일 테니 말이다.]황실의 심장부이자 권력의 집약체인 북관 응접실.스틸은 오랜만에 캔도르 대공 가주의 지배자다운, 결의에 찬 눈빛을 두 눈에 담았다.지니가 북돋아준 능력이 빛을 발했고, 램프가 없어도 스틸은 대단한 고위 귀족으로 입지도 다진 상태였다.제대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서 전장으로 향한다면, 이 지독한 우울감도 마침내 떨쳐낼 수 있으리라 믿으며 초대장을 꽉 움켜쥐었다.***그 시각,
[부르도 영지, 두 번째 던전 폐쇄 전격 성공! 이번에도 스틸 대공의 압도적 활약 돋보여······.][부르도 영지의 주인, 마 리나 로테 여공작 드디어 사교계 전면 데뷔? 황실에서 발송된 황녀 데뷔탕트 초대장에 응해······.][스틸 반 가드 캔도르 대공, 리노 상단과 손잡고 화훼 산업 본격 전개! 사교계의 이목 집중][소문과 진실: 가르나르 영지에 거대한 뽕나무 군락지가 존재한다는 설에 대륙 섬유업계 술렁······.][가르나르 영지와 부르도 영지 개발 초읽기. 베일에 싸인 가르나르의 내부 공개 소문, 과연 진짜인가 가짜인가?]며칠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스틸에게는 이제 시간도, 공간도 무의미한 껍데기에 불과했다.그저 가르나르 성벽 안에 스스로를 잔인하게 고립시킨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마티어스와 리나가 여전히 지니를 찾고 있다며 끈질기게 연락을 취해왔지만, 스틸은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의 연락도 서서히 뜸해졌다. 시곗바늘은 무자비하게 굴러갔고, 스틸은 그 가차 없는 속도감을 외면했다.지니의 부재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곁을 지키던 존재의 무게를 뼈아프게 각인시켰다.24시간 내내 붙어 있었던 존재가 지니였는데.과거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했을 때조차 이 정도로 참혹한 박탈감을 느끼진 않았었다.어제 같은 오늘, 그리고 내일 역시 전혀 기대되지 않는 무채색의 나날들이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있었다.달력은 어느덧 7월 중순을 가리키고 있었다.
간밤에 대체 자신이 지니에게 얼마나 질척거렸던 걸까. 아무리 제 머릿속을 헤집어 보아도 지니의 하얀 살결을 탐했던 감촉만이 손끝에 남아 스틸을 괴롭혔다. 민망함을 애써 누르며 스틸은 차분하게 던전으로 향했다. 반면 지니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아침부터 들뜬 기색이었다. 카나리아처럼 재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고요한 숲길에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여기 사장님은 정말 주인님을 좋아하나 봐. 이렇게 잔뜩 챙겨주다니, 대단하지 않아?”곱고 고운 지니는 그저 스틸이 좋아 옆에 꼭 붙어서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그러고보니 리노의 호의는
지니는 지금 인간의 술을 맛보고 나서 안 그래도 어지러웠는데 리노의 스테이터스를 보니 더 현기증이 생겼다.하지만 리노의 스테이터스는 지니의 상상을 초월했다. 79레벨이라니.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대마법사급의 수치였다.‘게다가 흑마법이라니······.’젊은 나이에 이 거대한 길드를 일궈내고, 서슬 퍼런 황태자의 영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배짱의 근원이 비로소 보였다. “뭐 놀랄 일이라도 있었나······ 예쁜 지니 양?” “아, 아니에요. 어깨를 슬쩍 두드렸는데, 생각보다 너무 단단해서요······. 단련을 아주
스틸은 지금 묘하게 고조된 기분에 미칠 듯이 입꼬리가 올라갔다.망나니라는 비난과 손가락질을 한 몸에 받던, 인성마저 저렴하다 평가받던 ‘거지 대공’이 정의롭지 못한 황태자에게는 발끈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제 권리를 법적으로 반박할 정도면 꽤나 명민해야 할 텐데, 대체 입학 성적은 왜 300명 중 꼴찌를 기록했는지 의문이었다.잔을 부딪치고 타는 듯한 독주로 목을 축이며 스틸은 길드 안을 느긋하게 훑었다. 지니는 어느새 레나, 시에라와 어울려 즐거운 듯 수다를 떨고 있었다. “리노 사장. 참, 내가 황태자에게 2골드라는 빚이
스틸은 리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가늘게 눈을 떴다. 예상치 못한 환대에 기분 좋은 반문이 뒤따랐다.“내가 리노 사장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니, 그 술 한잔ㅇ,ㄴ 기꺼이 받기로 하겠습니다.”전생의 애주가이자 강철신이라 불렸던 영혼이 속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대낮부터 기울이는 술잔.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석 잔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지니는 레나와 시에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느라 멀리 떨어져 있는 사이 스틸은 리노와 술잔을 맞닿게 되었다.혀끝을 감도는 술맛도,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알싸한 취기도 완벽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