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세미나실의 육중한 문이 닫히고, 팔로시 교수만이 홀로 남겨졌다.
창밖으로 저무는 노을빛은 마치 쏟아진 와인처럼 붉게 번져 방 안의 정적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그래, 마티어스 군. 자네가 조사해 줄 게 하나 생겼네.”
팔로시의 낮은 음성이 텅 빈 세미나실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마티어스의 단호한 목소리가 팔로시의 귓전을 스쳤다.
“스틸 대공을 관찰하게. 오늘 그의 눈빛과 행동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어. 단순히 결백을 주장하는 이의 당당함이라기엔, 그 깊이가 너무도 심오하더군. 내 학자적 호기심이 자극될 정도로 말이야.”
통신을 종료한 팔로시는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
제국의 망나니라 불리던 사내, 스틸 대공에 대한 기록들이었다.
― 최선을 다해 뒤를 캐보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답을 듣고서야 팔로시는 스틸에 대한 기록을 천천히 덮어두었다.
= = = 스틸은 다행히 다시 그 삭막한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혐의를 벗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지니와 함께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노스트 에어리어의 가장 구석진 곳, C동 지하 109호. 그곳이 대공이라는 허울뿐인 껍데기를 쓴 스틸의 보금자리였다.
철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스틸은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했다. 전생에서 그토록 동경했던 아카데미였건만, 이번 생의 현실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제국에 단둘뿐인 대공의 거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기숙사는 낡고 비좁았다.
“심각하군.”
낮게 읊조리는 스틸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지니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러게. 주인님은 그래도 대공인데.”
지하라 창문조차 없는 방 안에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목재의 탄내가 뒤섞여 감돌았다. 한 사람이 겨우 몸을 구겨 넣고 씻을 만한 좁은 욕실과, 앉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비명을 지르는 낡은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스틸은 안쓰러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니의 시선이 못내 괴로웠다.
“너, 지금이라도 주인 바꾸고 싶으면 말해. 언제든 보내줄 테니까.”
자조 섞인 농담이 아니었다. 34년간 프로 짝사랑러로 살다 허망하게 추락사하고, 이제는 숙적 아쳐에게 복수를 꿈꾸는 밑바닥 인생이지 않은가.
누군가를 책임지고 건사할 여유 따위 스틸에겐 사치였다.
“주인님은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랑 각인된 사이인걸?”
지니가 장난스럽게 웃어넘기려 했지만, 스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설마, 이리도 착한 엘프가 존재할 줄이야.
“세상 평판이라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스틸이 씁쓸하게 고개를 돌려 이부자리를 정리하려 하자, 지니가 해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스틸의 거친 소매 끝동을 살며시 붙잡았다.
“주인님. 인간 남자 중에서는 두 번째지만 난 주인님이 최고라고 생각해. 아주 많이 감동했어.”
스틸은 듣기 좋은 소리라 대답을 건넬까 하다 말을 삼켰다. 그리고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침대 위를 정리했다. 장을 열어보니 먼지 내려앉은 낡은 여벌 이불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차가운 바닥에 정성껏 펴 깔았다.
“아픈 몸으로 현신까지 한 너를 이 딱딱한 바닥에서 재울 순 없지. 넌 침대에서 자.”
“주인님?”지니가 팔짱을 낀 채 단호한 눈빛으로 스틸을 불러 세웠다.
좁고 밀폐된 지하 방,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며 지니의 달콤하면서도 신비로운 체향이 스틸의 감각을 예민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우리는 몸과 마음의 친밀도를 더 높여야 해. 마력을 운용하려면 서로의 기운이 섞여야 하잖아? 오늘은 같이 자.”
“……아직은 안 돼.”스틸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가늘게 떨렸다. 지니는 대답 대신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제 상의 단추를 하나씩, 아주 천천히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달각, 단추가 풀릴 때마다 공기는 팽팽한 현처럼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34년 동안 동정으로 수양해 온 전생의 이성이 머릿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스틸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의 지니는 비록 외모는 앳되어 보였으나, 신비로운 엘프 특유의 관능미를 숨기지 않고 뿜어내고 있었다.
마력을 높이기 위해 스킨십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이론적으로 이해했지만,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는 것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지니, 멈춰. 이건 아니야.”
“주인님은 내 몸이 싫어?” “그럴 리가 없지.” “그럼 좋다는 거네. 좋아하면 잠자리도 같이할 수 있는 거잖아?”순수함과 도발이 뒤섞인 기적의 논리였다. 스틸은 눈을 감고 뜨거운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본능이 날뛰는 대로 이 고운 엘프를 품어버린다면, 전생의 구질구질한 짝사랑 기억 따위는 단숨에 씻겨 나갈지도 몰랐다.
복수를 위해 하루빨리 능력을 키워야 하는 그에게, 지니와의 ‘육체적 합일’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남은 마지막 양심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잠시만…….”
“어?” “내가 혈기 왕성한 남자긴 하지만…… 일단 내 이성이 오늘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어.” “어? 그럼 오늘은 안 되고, 내일은 되는 거야?”눈동자를 반짝이며 묻는 지니의 질문에 스틸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눈을 꾹 감고, 목 끝까지 차오른 열기를 식히며 나지막하고도 진중하게 읊조렸다.
“조만간, 내 마음의 결심이 확실히 서면…… 그때 정식으로 사랑을 나누자.”
‘사랑’이라는 단어가 스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순간, 지니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도발적으로 단추를 풀던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복숭아처럼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사랑이라니……?”
지니는 멍하니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중얼거리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스틸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한참을 민망함에 서성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불과 몇 걸음이었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공기는 밤이 깊어갈수록 어느 때보다 뜨겁고 농밀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스틸이 손님맞이를 위해 정성껏 꾸며 둔 준의전실(Semi-State Room)의 소파 위에서는, 아슬아슬한 스릴을 즐기며 밀로투스와 메스메리아가 은밀하고 질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어머, 밀로투스 교수님. 무시무시한 가르나르 미궁을 바로 앞에 두고 목숨을 걸고 나눌 때의 이 열기가 너무 짜릿하네요.”“이곳은 더 이상 무시무시하지도,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하지도 않으니…… 내게만 집중하십시오, 메스메리아 교수님.”소파 위에서 서로의 뜨거운 숨결을 탐닉하던 두 사람은 은밀한 열기를 드레스 자락 속에 감춘 채 농염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스틸의 초대석에서 펼쳐진 화려한 광경과 입안을 가득 채우던 와인의 그윽한 풍미를 떠올리자, 메스메리아의 붉은 입술 끝에 절로 유혹적인 미소가 번졌다.밀로투스의 손길이 그녀의 매끄러운 허리선을 따라 미끄러지며 드레스 아래로 은밀하게 파고들자, 메스메리아의 숨소리가 한층 가늘고 낮게 잦아들었다.격정이 고조될수록 그들의 움직임은 더욱 치밀하고 대담해졌으며, 피부 위로 피어오른 열꽃은 은은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하아…… 우리 스틸 대공은 참으로 멋진 제자가 아닐 수 없어요. 이번 학기 수학 시험에서도 무려 만점을 받았지 뭐예요. 심지어 제가 수식을 배워야 할 정도로 고차원적인 풀이 과정을 선보여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군사학 역시 만점이었습니다. 수업 시간 내용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완벽히 외웠더군요. 게다가 방어술은 이미 전문 기사의 경지를 훌륭히 넘어섰습니다.”절정에 다다른 교밀의 순간에도 두 사람의 대화 속에는 스틸을 향한 찬사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메스메리아의 날카로운 손끝이 밀로투스의 턱선을 스치자, 둘 사이로 묘하고 팽팽
시간은 흘러 마침내 연회가 끝나고 귀족들이 하나둘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황족인 안젤루스가 먼저 자리를 터주자, 고위 귀족들 역시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아쳐는 독기가 오른 술에 가득 취해 비틀거렸고, 결국 마지션 교수에게 끌려가듯 저택을 나섰다.“전하, 발을 디딤에 넘어지실까 두렵습니다. 천천히 걸으십시오.”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스틸의 영지는 정비가 어찌나 완벽한지, 아쳐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거슬리는 것뿐이었다.볼룸(Ballroom)을 나와 웅장한 복도를 지나치자, 귀족들이 쉬어 가도록 마련된 준의전실(Semi-State Room)이 눈에 들어왔다.“쳇,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제 주제에 황제라도 된 줄 아나?”“스틸 대공은…… 연금술이나 독자적인 건축 스킬을 터득한 듯합니다. 참으로 경탄스러운 양식이군요……”아쳐는 그 칭찬마저 듣기 싫어 홧김에 마력을 피워 올렸다. 순간이동으로 단번에 황궁 침실로 돌아갈 셈이었다. 하지만 마력이 지지직거리며 불꽃을 튀기더니 허무하게 사그라들고 말았다.“전하! 마력을 억지로 끌어쓰지 마십시오! 타바로 채운 흑마법이 정화되는 과정에서 전하의 잔여 마력까지 모조리 사라지는 수가 있습니다!”“뭐? 쳇, 번거롭긴!”아쳐는 마지션을 대동한 채 어수선하게 비틀거리며 성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상하게도 제 주변에 늘 늘어서 있던 호위 기사나 피닉스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회색 망토를 두른 호위대의 숫자가 부쩍 줄어든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충성심이 식어 버린 것 같았다.황태자인 자신이 이렇게 홀로 비틀거려도 신경 쓰는 자 하나 없다니.&
휘청휘청, 건들건들.추태를 부리며 비틀거리는 아쳐의 뒤를 따르는 것은 다름 아닌 마지션 교수였다.“다들 전하께서 취해 그러신 것이니 괘념치 마시고 즐겁게 연회를 즐기십시오. 하하, 그런데 이 성은 볼수록 훌륭하군요. 새로운 건축 양식이라 제국 역사에 유서 깊게 남을 듯합니다.”마지션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자, 사람들도 그제야 스틸이 구축한 이 화려한 저택으로 관심대를 옮겼다.아쳐는 마지션의 손에 이끌려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하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것은 자존심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기 때문이다.귓가를 울리는 건 전부 스틸에 대한 찬사뿐이었다. 스틸이 대단하다, 그의 마력이 경이롭다, 등등. 하나같이 피가 거꾸로 솟구칠 만큼 듣기 싫은 소리뿐이었다.그때, 세도르가 귀족들에게 나누는 대화가 아쳐의 귀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전 실은 스틸 대공 전하 덕분에 시력을 거의 회복했습니다.”세도르의 말에 안젤루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스틸 대공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황궁에 드리웠던 저주까지 거두어 주신 덕에 어머니께서 지금은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셨답니다.”아쳐의 발길이 오뚝 멈춰 섰다.저주를 거두고, 치유를 행하고.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자신의 이 비참한 몸을 고칠 수 있는 자가 오직 스틸뿐이라는 현실이 절망처럼 그를 짓눌렀다.이제는 마지션 교수마저 뛰어넘어 버린 것이 스틸이었다.제발 살려 달라고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은 참담함에 아쳐는 이를 악물었다.***살다 살다 저승의 입구를 지키는 괴수를 치료하러 가게 될 줄이야.죽
“오늘 가르나르가 사납게 요동치는구나.”황제 골타르는 황궁 제 침실의 은밀한 어둠 속에서 자드키엘을 품에 안은 채, 자못 흥미롭다는 듯 나지막하게 읊조렸다.조금 전, 통신 마도구를 통해 아쳐를 호위하던 피닉스로부터 그곳의 소식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가르나르 한가운데 SS급 미궁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으며, 스틸이 직접 미궁 속으로 들어가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선언하며 연회가 정리되었다는 보고였다.골타르는 기분 좋은 만족감에 젖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하지만 오늘따라 품 안의 자드키엘이 유독 조급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도도하고 당당하던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태도였다. 흔들리는 눈동자, 가늘게 떨리는 밭은 숨결 속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넘실거렸다.“그러게 말이에요. 전 오늘 이상할 정도로 겁이 나네요. 저 멀리서 거대하고 추악한 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져서요.”“겁은 무슨. 레투카의 품 안에서 네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골타르는 그저 느긋하게 응수할 뿐이었다.얼마 전, 황궁 의원에게 명령해 자드키엘의 상태를 진찰하게 했을 때 그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황홀함이 그를 사로잡았고, 여전히 자신이 건재하며 아쳐 따위가 아니더라도 제국을 이을 후계자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는 오만한 자부심이 솟구쳤다.그러니 도른의 마법사인 그녀가 미궁의 출현에 불안해하며 떠는 것도 그저 애교스럽게 보일 뿐이었다.“스틸 그 가엾은 자식은 곧 완벽한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 염려 마라. 너는 그저 내 씨앗이나 고이 품어 키우면 돼.”그 순간, 자드키엘은 골타르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조용히 창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스틸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되면 지니 네 안전이 위협받게 되는 거야.”램프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 사실을 안 이상 미궁에 안 갈 수가 없었다.“역시 주인님 말대로 플로럴 스피릿이 다 사라지는 중인가 봐. 하지만 주인님이 미궁에 가면 위험하잖아. 가지 마.”지니는 벌써 현신을 마친 뒤 스틸의 팔을 붙잡았다.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플로럴 스피릿은 전멸할 것 같았다. 제논으로부터 지니를 지켜 주는 존재가 플로럴 스피릿인데, 그것들이 사라지면 지니도 위험해지니 스틸은 머리가 아찔해졌다.심지어 죽음의 기사들이 영지로 흘러나온다고? 말 그대로 데스 나이트(Death Knight)가 아닌가.램프가 알려준 정보는 절망적이었기에 그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스펙터, 내가 알고 있는 ‘케르베로스’는 저승을 지키는 개가 맞지?”“그래. 조만간 죽음의 기사단이 영지 밖으로 나온다니, 이건 초대된 사람이 전부 죽게 된다는 의미다.”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를 어쩌나.이제야 미궁의 등장이 납득되었다. 그리고 이 영지의 인간이 0명이었던 이유도 다 밝혀진 셈이었다.저것이 나타나면 가르나르 영지의 인간들도 저승으로 끌려가게 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게다가 병든 케르베로스의 마력이 떨어져 플로럴 스피릿을 흡수하고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그렇다면 더 이상 치유의 꽃은 남아나지 않게 되고, 지니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함과 동시에 가르나르의 영험한 가치도 사라지게 된다.“케르베로스가 있다는 건 저기가 저승문이나 다름없다는 뜻이야. 이제 이해가 가. 누가 이 영지에 발이라도 들이고 싶었겠어? 내가 초
하늘도 무심했다.스틸의 인생에는 평온할 날이 없었다. 전생을 거치는 동안 평범한 일상조차 특별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사다난했다.그 결과 부모도 없이 고생만 하다가 결국 단명했다.어제 지니를 만났으니 이제 좀 사람다운 삶을 사나 했더니, 난데없이 공간이 뒤틀리며 미궁이 나타났다.행사가 한창 무르익어 사람들과 어울리며 가르나르 영지의 위대함과 캔도르 상단의 출범을 대대적으로 알리려던 찰나인데.“어떻게 이런 일이.”눈앞이 캄캄해졌다.하늘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쏟아지며 시야가 물에 젖은 종이처럼 일그러지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산이 공간 한가운데 우뚝 솟아올랐다.이어 무지갯빛 오색 광선이 미궁 입구로 빨려 들어가자, 주변은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사람들의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미궁의 등장에 스틸의 가슴은 공포로 옥죄어 왔지만, 손님들은 다행히 시간이 흐를수록 몽환적인 신비로움에 매료되어 가고 있었다.천리장성의 위용, 각종 마도구의 신비, 가르나르 꽃밭의 화려함이 이미 그들의 시선을 완벽히 사로잡은 덕분이었다.다행히 미궁은 그들에게 단순한 눈요깃거리에 불과했다.공포는 오롯이 스틸만의 몫이었다. 그것만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조금 전까지 땅을 울리던 두려움은 화려한 빛의 춤사위 속에 녹아내린 덕에 금세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이것도 스틸 대공의 연출일까요? 너무 아름답네요.”“원래 가르나르 영지 자체가 미궁이라고 하니 이런 게 수시로 발생하나 봅니다.”“저렇게 빛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되니 참으로 장관입니다.”“매일 밤마다 영지 한가운데에서 이런 쇼가 펼쳐지는 게 아닐까요?”사람들은 아주 대단한 착각을
마구간 아래, 공기가 무겁게 감도는 비밀스러운 지하 공간.황태자의 은밀한 아지트인 침대 위에서, 아쳐는 억눌린 짐승 같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리나를 제 육체 아래로 뜨겁게 가두었다. 그는 옷가지가 채 다 벗겨지지도 않아 날것의 살결과 옷감이 뒤엉킨 그녀의 몸을 거칠게 뒤돌려 세웠다. 매끄러운 척추 라인이 쾌락의 예감으로 잘게 떨렸다.질척, 찌걱.밀폐된 정적을 깨는 노골적인 파찰음과 함께 리나의 하얀 둔덕이 아쳐의 손자국대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쳐의 뜨거운 손길에, 그녀의 가녀린 신음은 축축한 지하의 공기 중으로 애처롭게 흩어졌
극단의 조치!“지니, 너는 요정이잖아? 소원 같은 거 당장 못 이뤄주나?”이건 사심을 품고 물어 보게 되었다.“당연히 마력이 높으면 주인님 원하는 것을 많이 들어줄 수 있지.”어쨌든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든 천일야화 판타지든 간에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지니, 이왕이면 돈이나 외모를 어찌해 봐야겠어.”인간에게 가장 필요한게 아니겠는가.“어머, 드디어 주인님! 욕망이 생긴 거야?”지니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스틸에게 더욱 바짝 의자를 붙였다. 보통 다들 그렇지 않나? “그래. 너와 힘을
스틸은 죽음과 동시에 이세계로 떨어졌다. 환생을 겪으면서 이렇게 기사들에게 끌려가 본 적은 없었는데 그 대단한 경험을 지금 하게 되었다. 스틸을 체포하러 왔을 때만 해도 살기등등하던 기사들은 그가 순순히 항복하자 머쓱한 듯 거리를 좁히며 따라붙었다.나름 고위 귀족이라 그런지 포박은 안 하고 수 미터 거리만 둔 채 걷는 수준이었다.전생에는 죄짓고 산적이 없어 이런 자들도 만난 기억이 없었다.스틸은 현재 자신이 마구간 방화범으로 몰려 있긴 하지만, 사실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딱 봐도 건초만 탄 정도지 어디가 무너져 내린
스틸은 군중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광장을 둘러싼 대리석 건물들은 마정석의 푸른 빛으로 반짝였고, 학생들은 걸어서 이동하는 반면 귀족들은 마차에 올라탄 채 지나갔다.이곳 건물은 현대 건축 양식처럼 꽤 잘 정비된 데다가 전기라는 개념은 없는 대신 마정석이라는 마력을 이용하여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의 레투카 제국과는 차이가 있었다. 눈앞의 풍경에서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현생의 이 몸이 지닌 기억 따윈 전혀 없었기에 스스로 이 상황을 살펴야 하니 그건 머리가 복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