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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요망해서 돌아버리게]

Autor: silver구슬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4-09 19:47:42

세미나실의 육중한 문이 닫히고, 팔로시 교수만이 홀로 남겨졌다. 

창밖으로 저무는 노을빛은 마치 쏟아진 와인처럼 붉게 번져 방 안의 정적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그래, 마티어스 군. 조사해 줄 게 하나 생겼네.”

팔로시의 낮은 음성이 텅 빈 세미나실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마티어스의 단호한 목소리가 팔로시의 귓전을 스쳤다.

“스틸 대공을 관찰하게. 오늘 그의 눈빛과 행동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어. 단순히 결백을 주장하는 이의 당당함이라기엔, 그 깊이가 너무도 심오하더군. 내 학자적 호기심이 자극될 정도로 말이야.”

통신을 종료한 팔로시는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 뭉치를 집어 들었다. 

제국의 망나니라 불리던 사내, 스틸 대공에 대한 기록들이었다.

그는 돋보기를 꺼내 오늘 사건의 진상이 담긴 문구들을 하나하나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이······ 단숨에 어찌 저리 다른 영혼이라도 깃든 것처럼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눈빛은 분명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전사의 그것이었어.”

그러자 마티어스는 대답이 간극이 길었다.

하지만 이내 팔로시가 원하는 말이 다시 귓가에 닿았다.

-최선을 다해 뒤를 캐보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답을 듣고서야 팔로시는 스틸에 대한 기록을 천천히 덮어 두었다.

***

스틸은 다행히 다시 그 삭막한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혐의를 벗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지니와 함께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노스트 에어리어의 가장 구석진 곳, C동 지하 109호. 그곳이 대공이라는 허울뿐인 껍데기를 쓴 스틸의 보금자리였다.

철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스틸은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했다. 전생에서 그토록 동경했던 아카데미였건만, 이번 생의 현실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제국에 단 둘뿐인 대공의 거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기숙사는 낡고 비좁았다.

“심각하군.”

낮게 읊조리는 스틸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지니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러게. 주인님은 그래도 대공인데.”

지하라 창문조차 없는 방 안에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목재의 탄내가 뒤섞여 감돌았다. 한 사람이 겨우 몸을 구겨 넣고 씻을 만한 좁은 욕실과, 앉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비명 소리를 내는 낡은 침대 하나가 끝이라니. 

스틸은 안쓰러운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지니의 시선이 못내 괴로웠다.

“너, 지금이라도 주인 바꾸고 싶으면 솔직하게 말해. 언제든 보내줄 테니까.”

그것은 자조 섞인 농담이 아니었다. 34년간 프로 짝사랑러로 살다 허망하게 추락사하고, 이제는 숙적 아쳐에게 복수를 꿈꾸는 밑바닥 인생인데. 

누군가를 책임지고 건사할 여유 따위 스틸에겐 사치였다. 

“주인님은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품목이 아니야. 주인님은 나랑 각인된 사이인걸? 그리고 내 눈엔 지금의 스틸 대공 전하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어.”

지니가 장난스럽게 웃어넘기려 했지만, 스틸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설마, 이리도 착한 엘프가 다 있다니.

“세상 평판이라는 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스틸이 씁쓸하게 고개를 돌려 이부자리를 정리하려 하자, 지니가 해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스틸의 거친 소매 끝동을 살며시 붙잡았다.

“주인님. 인간 남자 중에서는 두 번째지만 난 주인님이 최고라고 생각해. 아주 많이 감동했어.”

스틸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려 짐짓 무심하게 대꾸하며 침대 위를 정리했다. 

장을 열어보니 먼지 내려앉은 낡은 여벌 이불이 보였다. 그는 그것을 차가운 바닥에 정성껏 펴서 깔았다.

“아픈 몸으로 현신까지 한 너를 이 딱딱한 바닥에서 재울 순 없지. 넌 침대에서 자.”

“주인님?”

지니가 팔짱을 낀 채 단호한 눈빛으로 스틸을 불러 세웠다. 

좁고 밀폐된 지하 방,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며 지니의 달콤하면서도 신비로운 체향이 스틸의 감각을 예민하게 자극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우리는 몸과 마음의 친밀도를 더 높여야해. 마력을 운용하려면 서로의 기운이 섞여야 하잖아? 오늘은 같이 자.”

“······친밀도? 같이······ 자자고?”

스틸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가늘게 떨렸다. 지니는 대답 대신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제 상의 단추를 하나씩, 아주 천천히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달각, 단추가 풀릴 때마다 공기는 팽팽한 현처럼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하얀 목덜미와 매끄러운 쇄골 라인이 드러날 때마다 스틸은 숨 쉬는 법조차 잊은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 오늘 밤 뜨겁게 한번 엉겨 붙어서 자는 게 어떨까? 주인님도 내 몸이 궁금하잖아.”

34년 동안 동정으로 수양해 온 전생의 이성이 머릿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스틸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의 지니는 비록 외모는 앳되어 보였으나, 신비로운 엘프 특유의 관능미를 숨기지 않고 뿜어내고 있었다. 

마력을 높이기 위해 스킨십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이론적으로 이해했지만,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는 것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지니, 멈춰. 이건 너무 빨라.”

“주인님은 내 몸이 싫어?”

“그럴 리가 없지. 오히려 너무 아름다워서 문제지. 하지만······.”

“그럼 좋다는 거네. 좋아하면 잠자리도 같이할 수 있는 거잖아?”

순수함과 도발이 뒤섞인 기적의 논리였다. 스틸은 눈을 감고 뜨거운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본능이 날뛰는 대로 이 고운 엘프를 품어버린다면, 전생의 구질구질한 짝사랑 기억 따위는 단숨에 씻겨 나갈지도 몰랐다. 

복수를 위해 하루빨리 능력을 키워야 하는 그에게, 지니와의 ‘육체적 합일’은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은 마지막 양심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잠시만······.”

“어?”

“내가 혈기 왕성한 남자긴 하지만······ 일단 내 이성이 오늘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어.”

“어? 그럼 오늘은 안 되고, 내일은 되는 거야?”

눈동자를 반짝이며 묻는 지니의 질문에 스틸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눈을 꾹 감고, 목 끝까지 차오른 열기를 식히며 나지막하고도 진중하게 읊조렸다.

“조만간, 내 마음의 결심이 확실히 서면······ 그때 정식으로 사랑을 나누자.”

‘사랑’이라는 단어가 스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순간, 지니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도발적으로 단추를 풀던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복숭아처럼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사랑이라니······?”

지니는 멍하니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서 있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스틸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한참을 민망함에 서성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불과 몇 걸음이었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공기는 밤이 깊어갈수록 어느 때보다 뜨겁고 농밀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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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92. [꽃을 품은 대단한 남자들]

    순간이동의 여운이 스틸의 내장을 뒤흔들었다. 꽃밭 한가운데 서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참아냈다.인벤토리 안에 장비들을 바리바리 집어넣고, 램프 안에 지니가 잘 잠든 것까지 확인한 데다 스펙터까지 데리고 이동했으니 몸에 부담이 없을 리가 없었다.지금 시각은 밤. 다행히 던전을 빠져나오면서 스펙터를 밖으로 이동시켜도 문제가 없었기에, 이리 가르나르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었다.“후우······ 다 왔어, 스펙터! 무사하지?”[던전 밖 풍경을 다시 보게 될 날이 오다니.]이건 또 새로운 발견이었다. 스펙터는 무사했다. 인벤토리 안에서도 바깥세상이 보이는 건 지니와 비슷한 원리인 듯 보였다.“여기가 나의 영지야. 꽃밭이 찬란하지? 한밤중이니까 나와 봐. 마력도 풍부할 거야.”스틸은 가쁜 숨을 가라앉히며 인벤토리의 문을 열었다. 그때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니 스펙터가 모습을 드러냈다.인간 체형의 두 배 정도 크기에, 검은 망토를 머리까지 덮어쓴 그는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며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마치 눈이 있는 존재처럼, 해골의 텅 빈 안와 속에서 푸르스름한 안광이 뿜어 나오는 것 같았다.[좋은 기운이군.]스틸은 자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의 시선을 통해 느꼈다.어쩌다 그를 품게 되었을까. 그냥 부르도 영지의 던전 따위는 내버려 두고 왔어도 그만이었다. 지니도 쓰러졌고, 다른 누군가가 던전에서 무얼 하든 난리가 나든,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하지만 스펙터가 전직 군인인 데다가 자신처럼 시공을 넘나든 초월자라 그런지, 제 능력이 닿는 한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그래. 마력이 풍부한 영지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91. [밤에는 무적이 될 영주 탄생]

    일단 스틸은 스펙터를 자신의 인벤토리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그러자 갑자기 스펙터는 기분 좋은 웃음을 다시 흘렸다.[꽃내음이 대단하군. 마력도 상당하고. 너의 인벤토리도 너처럼 특이하구나.]당연히 가르나르의 꽃이 가득하니 그럴 터.그때 스틸은 번쩍 섬광처럼 제 뇌리에 스쳐 지나간 뭔가가 하나 있었다.스펙터를 인벤토리에 넣는 것뿐만 아니라, 이 던전 안에서는 그가 지배자이니 못 갈 곳이 없지 않은가 했다.그래서 내린 결론이 있었다. 뭐든지 시도를 해볼 가치는 있어 보였다.“스펙터, 내 영지는 이런 꽃이 지천이야. 밤에는 인벤토리 밖으로 나와 다녀도 돼. 실험 한번 해 봐. 어차피 난 그대를 못 없애니까 안심해. 아, 참! 혹시 너의 기사나 더 데려가고 싶은 존재 있어? 구원해 주고 싶은데.”스틸은 미친 척하고 생각해 낸 것이지만, 그에게는 어쩌면 이런 모든 시도가 절실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았다.그때 스펙터는 팔짱을 끼고 고개까지 갸우뚱하더니, 정말 어이없다는 분위기를 풍겨 내었다.[넌 정말 이상한 놈이다. 다른 존재까지 구원하려 하다니. 그런데 나 때문에 여기 갇힌 다른 것들이 신경 쓰이기는 한다. 이곳에 있는 만 명의 수하들도 감당할 자신이 있는 건가?]만 명의 수하라면 저 유령 기사 듀라한을 말하는 건가?“당연하지! 내가 가르나르 영지에 저 듀라한 유령 기사들이 전부 다 들어갈 수 있도록 밀폐된 공간을 벽처럼 만들어줄게! 대신 나중에 밤에 누군가 쳐들어오면 날 도와주면 되잖아?”이건 소름 돋는 군사력의 확보가 되는 순간이었다.친구의 친구는 다 친구가 아니겠는가. 스펙터가 거느리는 군사가 도움이 된다면 밤에는 무적이 되는 스틸이었다.기분 탓인가, 스펙터는 웃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90. [적의 적은 내 편, 강력한 아군 등장]

    스틸은 그렇게 여유롭게 말을 뱉고 손을 들어 심장에서 두근대는 램프의 목걸이에 손을 갖다 대었다.따뜻하게 자리하고 있는 지니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입꼬리만 올렸다.다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인데 무슨 소리냐는 눈빛이었지만, 마티어스는 스틸을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대화가 통할 것 같아?”“가능할 것 같습니다.”놀란 마티어스는 리나를 안고 일어서며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듯 주변에 멈춰 선 듀라한들을 바라보았다.조금 전보다 개체 수는 더 늘어나 있었고, 마티어스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이 한가득 맺혀 있었다.“미안, 여기는 저주의 기운도 가득해, 스틸······. 오늘 미션은 실패야. 돌아가자.”“먼저 가십시오. 곧 따라가겠습니다.”그때 더욱 어두운 표정으로 마티어스는 입을 달싹이더니 고개를 숙였다.“······지니 양은?”“제가 알아서 챙기겠습니다.”스틸은 차분하게 그리 말하며 마티어스와 리나를 먼저 돌려보내고자 손을 휘저었다. 마티어스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마력을 피워 올렸다.자신은 지니가 제 품에 안전하게 있으면 그만이라 생각하며, 스틸은 그제야 스펙터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으니 이제 대화는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자, 이제 우리 둘만의 시간이야. 스펙터! 원래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89. [내 여자는 내 품에 있어야지, 안 그래?]

    ‘아! 소환 능력?’스틸은 그런 스킬이 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 어찌해야 하나 당황스럽기만 했다.하지만 지금 지니가 쓰러져 있었다. 자신을 위해, 오직 인간을 구하려고 온몸이 부서지도록 요정력을 쥐어짜 내고 저 차가운 바닥에 홀로 버려져 있다니.상상만으로도 스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이럴 때 쓰지 못한다면 이까짓 힘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두 눈을 감고 제 손에 마력을 피워냈다.제발. 제발, 내게로 와 달라고 그리 염원하고 바랐다.하지만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었다. 계속 마력을 어떻게 일으켜야 할지, 지니를 데려오는 곳의 좌표도 몰라 푸스스― 마력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처음 쓰는 건가? 머릿속에서 떠올려 봐라. 네 소중한 존재를.]어쩌다 스펙터에게 개인 지도까지 받게 되었는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스틸은 오직 지니만을, 숨이 막힐 정도로 곱고 가녀린 제 요정만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그때 몽글몽글 제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은 거대한 힘이 요동치기 시작했다.그러자 영혼의 각인처럼 그녀의 존재가 선명하게 와닿았다.생각하고 또 하고. 그녀의 얼굴, 그녀의 향기, 그녀의 친근한 말, 예쁜 몸, 그리고 함께 나눈 뜨거운 시간까지.짧은 시간 동안 지니와 함께한 수많은 황홀한 경험이 머릿속에 부유했다.‘원해! 지니, 너를 다시 내 품에 안고 싶어!’그 순간, 4층 문 앞, 몸이 투명하게 비칠 만큼 희미해진 채 쓰러져 있는 지니의 형상이 느껴졌다.다행히 주변에 밴시는 없었으나, 그녀의 가냘픈 숨결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웠다.‘이런, 대체 왜 이리 무리한 거야!’자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88. [복수의 영혼(The soul of revenge)]

    스틸은 진심으로 정보가 필요했다.제 인생이 왜 이리 아쳐라는 그 인간하고 꼬여 비극만 반복하면서 복수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직전 전생에서는 나라를 구했고, 이번 생도 가문을 다시 되살리고 사람을 구하면 이 비극은 마침내 막을 내리는 건지.조력도 필요한 법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형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나를 귀찮게 하는 너희들은 여기서 죽어줘야겠다!]‘잠깐! 대화를······!’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펙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을 확 뻗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 복장의 자들이 점점 마티어스와 리나, 그리고 스틸을 포위하기 시작했다.[공격하라. 저것들을 모두 베어버려라!]“이봐! 나랑 대화 좀 해!”[저것들을 일단 물리치면 고민해 보지. 이 던전에 저런 것들이 만 체가 있으니, 고작 몇백 체만 가지고 우선 놀아 보든가.]뭔 만 체? 스틸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며 욕지기만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도망쳐야 하나.“일단 싸워야 할 것 같아! 스틸 대공! 난 관절을 노려서 쓰러뜨리겠어!”“으, 으, 윽, 조, 좋아요! 흐흑, 무섭지만······ 불 마도구라도······!”지금 마티어스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달려드는 기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고, 리나 역시 울면서 공격형 마도구를 던지며 처절하게 발악했다.의지 없이 무조건 공격만 퍼붓는 기사는 대략 이삼백 체. 이 기사들 역시 인간이 아니라 자유의지 없이 스펙터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유령 기사, 듀라한 같은 존재들이

  • 요망한 엘프랑 리벤지 리부트(Revenge Reboot: My Seductive Elf)   #87.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절망]

    역시 던전 폐쇄의 핵심은 던전 주인을 소멸시키는 것.최종 보스를 드디어 마주하게 되자, 스틸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제단처럼 높은 계단 위에는 검은 망토를 머리끝까지 눌러쓴 자가 군주처럼 앉아 있었다.“아, 던전의··· 주인···이라니, 아무것도 없는데.”“드디어···, 그런데··· 여기··· 너무 무섭네요.”잠깐, 마티어스와 리나의 눈에는 저 존재가 안 보이는 건가?이곳을 감도는 기운은 충격적일 만큼 서늘했으나, 스틸의 눈에는 마물도 마수도, 거대한 이형의 존재도 아닌 그저 한 남자의 형상이 똑똑히 보였다.“아니요, 던전의 주인은 저기 있습니다. 사람처럼 보여도··· 느껴지는 마력은··· 괴물이 맞는 것 같습니다. 혹시··· 선배님들 눈에는 안 보입니까?”스틸은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다섯 번째 환생한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아무것도 없는데?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스틸 대공.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이건 새로운 국면이었다. 지금 제 눈에는 던전의 주인이 떡하니 저 앞 계단 맨 꼭대기에 검은 망토를 두른 채 앉아 있는데, 안 보인다니 무슨 소리란 말인가.스틸은 홀로 앞으로 나아가며 그자를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자신에게만 목소리가 들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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