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촤르륵, 촤르륵-!
능력이 한층 향상된 스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웅장한 물대포가 일제히 커튼에 붙은 불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화염이 꺼진 자리로는 칠흑 같은 검은 연기와 붉은 잔상이 공존하며 기묘한 에너지가 피어올랐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원지를 단숨에 제압한 스틸은 그곳을 시작으로 불길을 차례로 잡아 나가며 벽을 따라 당당히 걸어갔다. 화염이 치솟은 곳곳마다 집중적으로 물대포를 퍼부어대자, 장내에 남아있던 이들은 경악에 찬 눈으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이 압도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어머나! 스틸 대공이······ 마법을······!”
“윽! 한꺼번에 물을 저렇게나 많이 뿜어내다니!” “마력을 저 정도로 자유자재로 쓸 줄은 몰랐어! 우린 살았다!” “저 정도면 거의 마지션 교수님급 아니야?”사람들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물대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스틸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물줄기는 마치 번뜩이는 폭포수 같았고, 압도적인 수량과 수압은 순식간에 화재를 진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불이······ 거의 꺼지고 있어······.”
“······아카데미 꼴등으로 입학한 거 아니었어? 이 정도면 마력 학부 수석 입학감 아니야?”사람들의 술렁거림이 커질수록 사납게 치솟던 불길은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감탄사는 사그라드는 화염의 기세만큼이나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갔다.
스틸은 물기둥을 내뿜는 와중에도 바람 마법을 함께 응용할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자, 곧바로 창문 쪽을 향해 거대한 물회오리를 쏟아부었다.
와장창-!
화염에 휩싸여 있던 커다란 창문이 단숨에 깨져 나가며, 사람들을 위한 완벽한 탈출구가 순식간에 확보되었다.
“제가 마지막 진화를 마저 맡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십시오! 차례대로 질서를 지켜 이동하면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고 나갈 수 있습니다!”
스틸의 통제 아래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불길은 완벽하게 잡혀갔다.
이윽고 강당 바닥은 흥건하게 물로 젖어 들었고, 장내에 남아 있던 이들은 거친 숨을 내쉬며 차분하고도 경외 어린 눈빛으로 스틸을 바라보았다. 혹시 모를 잔불까지 꼼꼼하게 다 꺼뜨린 스틸은 그제야 사람들을 하나하나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저 쓰레기는 빨아도 못 쓸 물건이군! 이 망할 새끼!’
반대편, 불길이 전혀 미치지 않은 구석진 곳에 서서 희끗희끗한 투명화 장막 뒤로 빤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아쳐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스틸은 손을 뻗어 불씨 하나 없는 그 방향을 향해 거대한 물기둥을 쏘아보냈다.
콰아아아-!
“저곳에 왜 잔불이 남아있는 거냐! 이런 재앙의 원흉 같은 놈! 사라져! 이 원수!”
다시 한번 강당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커다란 호통을 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빈 공간으로 쏠렸다. 화들짝 놀란 아쳐가 급히 물줄기를 피하느라 순간적으로 마력이 옅어져 황금빛 망토의 실체가 허공에 슬쩍 드러났다 사라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망나니 거지 대공'을 향한 멸시 따위는 남겨두지 않았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순수한 감사와 존경이 담긴 눈빛으로 인사를 건네며 차례차례 강당을 빠져나갔다.
스틸은 어느 정도 위기가 일단락되었다고 판단한 뒤, 출입구 쪽에 서서 사람들의 대피를 돕고 있는 지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몸도 온전치 못할 텐데 타인을 진심으로 돕는 그녀의 고결한 모습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마지막 사람까지 무사히 대피시킨 후에야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정면으로 마주쳤다. 지니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향해 살며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역시 우리 주인님, 최고잖아?”
“마법이 꽤 유용하군.”마법이란 게 원래 이렇게 만능인 건가.
‘내가 쓸 수 있는 게 물과 바람이라······.’
전투기와 검만 잡아보았던 스틸로서는 마법의 편리함에 누구보다 스스로가 가장 얼떨떨할 뿐이었다. 스틸은 화재는 진압되었으나 강당 바닥이 온통 물바다인 것을 보고, 마법을 조금 더 연습해 볼 겸 자신이 내뿜는 바람에 따뜻한 열기를 더해보기로 했다.
손끝에 마력을 집중하며 은은한 온기를 떠올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드라이어 기계처럼 손끝에서 주변의 수분을 단숨에 날려버릴 만큼 따스한 훈풍이 활활 불어 나가기 시작했다. 스틸은 순식간에 강당에 고여 있던 물기들을 깔끔하게 건조하며 지니를 향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 레투카 아카데미가 새 학기를 시작한 지 단 한 달 만에 발생한 연쇄 화재 사건. 방금 전 강당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소동은 순식간에 온 아카데미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배심원들이 돌아간 후, 10여 명의 교수들은 강당 정비를 마친 뒤 3층 세미나실로 자리를 옮겨 긴급 회의를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 마법학과의 마지션 교수님이 계시지 않아 정말 큰일이 날 뻔했는데, 물 마법을 저토록 능숙하게 구사하는 스틸 대공이 있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중년의 여성인 역사학 교수 히스테리아 살로테가 교수들을 향해 나지막이 말하며 장내의 분위기를 살폈다.
“아무런 마도구도 없이 거대한 불길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오늘 구경하러 온 학생들이 유난히 많았기에, 자칫하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뻔했지요.” “그런데······ 저렇게 의롭고 뛰어난 스틸 대공이 그동안은 왜 그리 불량하게 행동했던 걸까요?”히스테리아의 질문에, 3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미남 군사학 교수 밀로투스 루크스가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자조적으로 흔들어 보였다.
“스틸 대공은 어쨌든 지금까지 무단결석과 무단이탈 5회, 거기다 황태자인 아쳐 가를리아 폰 레투카 전하와 세 번이나 결투를 벌이며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입학 후 한 달 동안 보인 행적은 분명 불량하기 짝이 없었지요.”
밀로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옆으로 요염한 자태의 여교수 한 명이 스르륵 다가왔다. 풍만한 몸매와 사람을 현혹할 만큼 화려한 외모를 지닌 수학 교수 메스메리아 에이리가 서류철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보니 다 나름의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요? 무엇보다 우선은 진짜 방화범부터 찾아내는 게 시급해 보이네요.”
“아직 스틸 대공의 방화 혐의가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증인이잖아요? 스틸 대공은 불을 지른 범인이 아니라, 그 불을 꺼서 모두를 구한 영웅이라는 걸요.”메스메리아의 날카로운 지적에 밀로투스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웅얼거렸다.
“뭐······ 정확한 조사 결과가 나오면 알 수 있겠지요.”
그때, 턱 밑으로 흰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정치학 교수 팔로시 부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나섰다.
“어쨌든 스틸 대공에 관한 처벌 건은 그의 말대로 벌이 아닌 '상'으로 결론짓는 것이 마땅해 보이는군요. 오늘은 이만 해산합시다.”
팔로시의 말에 다른 교수들도 한 마디씩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났다.
모두가 세미나실을 빠져나가고, 마침내 팔로시 교수 홀로 남겨졌다. 장내에는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팔로시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옷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서 작고 정교한 마도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잠시 후.
― 팔로시 교수님, 부르셨습니까.
마도구가 황금빛으로 미세하게 번뜩이며, 묵직하고 나지막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전해왔다.
하마터면 이가 부러질 정도로 악물며 욕설을 삼켰다. 역시나 눈앞의 이 자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미친놈이 틀림없었다.자신과 지니, 그리고 스펙터까지 미궁 깊은 곳으로 끌어들여 놓고는 겨우 한다는 소리가 ‘놀아 달라’며 떼를 쓰는 것이라니.인간의 기억을 능욕하고 가장 아프고 그리운 파편을 헤집어 놓아 영원히 환상 속을 헤매게 만드는 가학적인 악취미.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너 뭐 하는 자식이냐? 던전에 발을 들인 자들에게 절망이나 퍼붓는 게 네놈의 취미인가?”스틸의 쏘아붙이는 일갈에 하데스의 말간 얼굴 위로 냉랭한 침묵이 스쳤다.“글쎄.”속내가 비틀린 신이 번개처럼 손을 뻗어 허공을 갈랐다.쉬이—!주변의 공간이 기형적으로 일그러지더니, 공기 자체가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순식간에 형성된 절대 무중력의 공간 속에서 스틸의 몸이 둥둥 떠올랐다. 허공을 차며 발버둥 칠수록 아득한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전신의 근육이 파르르 경련했다.“컥—!”목구멍을 찢고 터져 나온 신음은 공기를 잃은 진공 속에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흩어졌다. 시간이 초침을 잃고 기이하게 늘어졌다.폐부가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참혹한 갈증과 압박에 전신을 비틀었다. 눈앞이 희게 탈색되어 갈 무렵, 하데스의 입가에 걸린 오만한 냉소가 귓가를 서늘하게 파고들었다.“역시 인간은 하나같이 우둔하군. 그래서 짓밟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지만.”‘이 망할 자식이…….’역시 평범한 신 따위가 아니었다.“주인님! 조금만 참아!”
칠흑 같은 어둠이 사위를 삼켰다.광활한 실내 강당을 방불케 하는 공간이었으나, 공허가 맴도는 적막만이 지배적이었다. 저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왕좌의 윤곽이 눈에 띄었다.그 위에 우뚝 선 존재는 마치 조각상처럼 굳건했으나, 그 눈동자만은 살아있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 왕좌의 주인은 스틸과 지니만 지켜보고 있었다.지니의 떨리는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며 흘러나왔다.“주인님, 늦었잖아.”정신을 흔들리게 하는 환각이나 정신 조종을 하는 흑마법의 기운이 아닐까 싶었는데, 용케 스틸은 그것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미안, 지니. 환상 속에 있었어. 기분 좋은 꿈이었는데······ 네가 등장했지만, 너만의 향기가 없었어. 그래서 알아차렸어.”스틸의 환상 속에 지니가 있어서 하마터면 그곳에 안주하며 살 뻔했는데, 이리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네가 있는 이곳이 내게 천국이야. 끝까지 함께해야지.”“주인님, 현실은······ 지옥이야. 오기 싫었을 텐데······. 와줘서 고마워.”스틸은 그 말에 울컥하여 지니를 품에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이미 한번 죽은 데다 이런 일까지 겪으니 스틸은 이곳의 주인을 꼭 만나고 싶었다.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감히 시험에 들게 하다니.슬슬 속내가 뒤틀리기 시작했다.***스틸은 지니의 손을 잡고 당당하게 왕좌에 앉아 있는 존재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여전
작은 허름한 외갓집 낡은 방에서 스틸은 드디어 지니를 품고 있었다.외할머니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 사관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물론 이것이 꿈이고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도 깨어나고 싶지 않고, 어쩌면 지금까지 자신이 힘겹게 복수를 꿈꾸며 살아온 그것이 꿈이 아닌가 시간이 지나니 그리 착각하게 되었다.무엇이 중요한가. 현실이 중요하지.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 봤자 다가오는 것은 질척한 고통뿐이 아니겠는가.외할머니와 청국장찌개도 먹고 지니까지 있으니 그저 완벽했다. 그래서 그냥 믿고 싶었다.“지니, 너 진짜 맞지?”“당연히 진짜지.”“너 요정계 가야지.”“여기가 더 좋아.”그저 진짜인가 살짝 건드려 보니, 그녀는 여전히 폭신하게 굴었고 가슴이 여전한가 싶어 만져보자 역시 몰캉몰캉 똑같은 감촉을 선사해 주었다.“주인님, 간지러워.”“잠깐만.”스틸은 천천히 그녀의 제복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며 진찰이라도 하듯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평소처럼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지니의 뺨에는 살짝 홍조가 피어올랐다.이토록 생생한 감각이 현실이라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살짝 몸을 뒤틀며 고개를 갸웃했다.단추가 풀리자 브래지어 윤곽 위로 부드럽게 도드라진 곡선이 드러났다. 스틸은 숨을 죽인 채 두 손으로 그 온기를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말랑한 탄력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경이로웠다. 그는 손끝으로 가볍게 원을 그리며 탐닉하듯 그 감촉을 음미했다.“아읏, 주인님도 참.&rdquo
제논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어차피 스틸은 살아서 나올 확률은 낮아 보였다. 그럼 지니는 주인 없는 엘프이니 자신이 취해도 될 일 아니던가.그저 가르나르는 그저 버려도 되고 레투카 자체를 집어삼키면 되니 행운이 넝쿨째 온 것 같다고 생각하자 그저 입꼬리만 계속 올라갔다.“폐하, 으읏······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샤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반듯이 누운 채, 제논의 움직임을 응시했다.그의 손길이 목선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가 쇄골에 머물렀다가, 다시 가슴 계곡을 스치는 순간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떨림이 번졌다.제논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듯 입 맞추고 애무하며, 점차 깊어지는 호흡과 함께 몸을 밀착시켰다. 어느새 단단해진 욕망이 은밀하게 맞닿은 순간,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확인하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음······. 그렇지. 기분이 최근 들어 제일 괜찮은 날이지.”“다행이네요, 주인님.”제논은 어둠의 요정(Dǫkkálfr)이라 그런지, 첫 번째 빛의 요정 지니에 비해서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대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제 감정을 잘 표현하지도 않는 그녀였다.이미 500살은 넘어 그런가. 원숙미가 흘러서인지 엘프로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았던 지니와 비교되는 것이 많았다.“너의 이전 주인은 어떠했느냐.”자신도 몇 번째 주인인지 그녀가 인간을 대하는 게 익숙해 이제야 묻게 되었다.“비슷하게 대하셨습니다. 요정력을 취하거나 침대를 달구는 용도
울컥한 스틸은 자신도 모르게 그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몇 번의 인생을 사는 동안 그래도 늘 등장한 외할머니였다. 자신을 늘 돌봐 주시다 돌아가셨는데, 늘 애잔한 마음뿐이었다.부모보다 더 오래 자신을 돌봐주신 분이었는데.“외할머니! 이런······. 이럴 수가······.”이곳은 지옥이 아닌 천국이 확실했다. 그리고 스틸은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스틸이 발걸음을 내디뎌 집 안으로 들어가자 전경은 바로 외할머니댁 그대로였다.낡고도 허름한 집안 내부도 그렇고, 자신의 키가 커져서인지 나지막한 천장은 어린 시절 보았던 집 자체가 축소된 느낌이었다.세상 제일 푸근하고 안정적이었던 그 시절.학교에 갔다 돌아오면 들판엔 외할머니가 계셨고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밥 먹으라고 알려주었던 그때.작은 상을 보자, 고봉밥과 청국장. 그리고 갓 무쳐낸 겉절이와 더불어 청양고추와 부추가 들어간 지짐이 한가득 스틸을 반겼다.“잘 먹어야 나라에 큰일꾼이 되지.”그 말씀도 똑같네.“외할머니, 잘 먹겠습니다!”“그래, 오냐. 내 강아지.”울컥. 스틸은 그리 외할머니의 깊게 파인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보고는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청국장 한술 크게 뜬 뒤 밥과 비비자, 외할머니는 스틸을 보며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손으로 겉절이를 쭉쭉 찢어 그의 밥 위에 놓아주셨다.한입 크게 벌리고 소박한 밥상을 만끽하기 위해 한술 먹자 천상의 행복이 밀려왔다.
철컹!쇠사슬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스틸과 스펙터는 미궁의 철문에 부딪혔다.“어? 지니는 아직인가?”스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순간이동으로 동시에 도착했을 텐데, 미궁의 이상한 공간 왜곡 때문인지 지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스펙터가 의아해하며 그 역시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그대의 엘프가 좀 늦는군.”“그러게. 뭐 곧 오겠지. 지니의 마력도 회복되었으니까.”스틸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며 주변을 경계했다. 미궁의 벽면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의 손가락이 검 손잡이에 파고들었다.저승의 입구라기에는 너무 이른 장소에 거대한 돌문이 등장했다. 사람 키의 네 배는 됨직한 그 문은 마치 산을 깎아 만든 것처럼 위압적인 모습으로 앞을 가로막았다. 스틸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위험한지 아닌지 먼저 확인해야겠어.”스펙터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하지만 듀라한과 벤시도 늦는군. 준비를 마치고 하데스를 만나는 게 안전하겠지.”스틸은 아직 이곳이 하데스가 있는 마지막 층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래 목표는 탑층이었지만, 중간 지점인 이곳에서 좌표가 지정되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그는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여기서부터 달려가면 탑층까지는 금방이겠지.”“안을 한번 미리 봐야겠군.”“그래, 뭐가 불안하다면 도로 이곳으로 나오면 되니까.”스틸은 힘껏 스펙터와 같이 문에 손을 대고 밀어 보았다.그러자, 돌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세 쌍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극단의 조치!“지니, 너는 요정이잖아? 소원 같은 거 당장 못 이뤄주나?”이건 사심을 품고 물어 보게 되었다.“당연히 마력이 높으면 주인님 원하는 것을 많이 들어줄 수 있지.”어쨌든 옛날부터 내려오는 이야기든 천일야화 판타지든 간에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지니, 이왕이면 돈이나 외모를 어찌해 봐야겠어.”인간에게 가장 필요한게 아니겠는가.“어머, 드디어 주인님! 욕망이 생긴 거야?”지니는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스틸에게 더욱 바짝 의자를 붙였다. 보통 다들 그렇지 않나? “그래. 너와 힘을
스틸은 죽음과 동시에 이세계로 떨어졌다. 환생을 겪으면서 이렇게 기사들에게 끌려가 본 적은 없었는데 그 대단한 경험을 지금 하게 되었다. 스틸을 체포하러 왔을 때만 해도 살기등등하던 기사들은 그가 순순히 항복하자 머쓱한 듯 거리를 좁히며 따라붙었다.나름 고위 귀족이라 그런지 포박은 안 하고 수 미터 거리만 둔 채 걷는 수준이었다.전생에는 죄짓고 산적이 없어 이런 자들도 만난 기억이 없었다.스틸은 현재 자신이 마구간 방화범으로 몰려 있긴 하지만, 사실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딱 봐도 건초만 탄 정도지 어디가 무너져 내린
스틸은 군중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 광장을 둘러싼 대리석 건물들은 마정석의 푸른 빛으로 반짝였고, 학생들은 걸어서 이동하는 반면 귀족들은 마차에 올라탄 채 지나갔다.이곳 건물은 현대 건축 양식처럼 꽤 잘 정비된 데다가 전기라는 개념은 없는 대신 마정석이라는 마력을 이용하여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확실히 자신이 기억하는 전생의 레투카 제국과는 차이가 있었다. 눈앞의 풍경에서 낯선 위화감을 느꼈다.현생의 이 몸이 지닌 기억 따윈 전혀 없었기에 스스로 이 상황을 살펴야 하니 그건 머리가 복잡
마구간 아래, 공기가 무겁게 감도는 비밀스러운 지하 공간.황태자의 은밀한 아지트인 침대 위에서, 아쳐는 억눌린 짐승 같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리나를 제 육체 아래로 뜨겁게 가두었다. 그는 옷가지가 채 다 벗겨지지도 않아 날것의 살결과 옷감이 뒤엉킨 그녀의 몸을 거칠게 뒤돌려 세웠다. 매끄러운 척추 라인이 쾌락의 예감으로 잘게 떨렸다.질척, 찌걱.밀폐된 정적을 깨는 노골적인 파찰음과 함께 리나의 하얀 둔덕이 아쳐의 손자국대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쳐의 뜨거운 손길에, 그녀의 가녀린 신음은 축축한 지하의 공기 중으로 애처롭게 흩어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