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설화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유라는 샴페인 잔을 가볍게 기울이며 설화의 꼿꼿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태도를 흥미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이름도 얼굴도 너무 낯설어서요. 보통 이 바닥은 한 다리만 건너도 다 아는 사이인데, 어느 쪽 분인지 감이 안 오네요.”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말끝에는 노골적인 무례가 배어 있었다. 설화는 잔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했다.“그런 배경은 없습니다.” “아.”유라의 짧은 탄성에는 확인과 무시가 함께 담겨 있었다. 그녀는 샴페인 잔을 매만지며 한 걸음 다가왔다. 진한 향수 냄새가 설화의 숨결을 스쳤다.“그럼, 미래드림 쪽 사람?” “필요한 일을 돕고 있습니다.” “필요한 일?”유라는 설화의 대답이 우습다는 듯 천천히 되뇌었다. 시선은 노골적으로 아래로 흘렀다. 목덜미의 푸른빛 목걸이에서 시작해 드레스의 허리선을 지나, 긴장한 얼굴까지 느릿하게 올라왔다.“강현 오빠는 곁에 둘 사람 고르는 기준이 꽤 까다로운 줄 알았는데.”주변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가까운 테이블에 서 있던 사람들까지 대화에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슬쩍 눈길을 흘렸다. 설화는 어느새 사방이 막힌 듯 숨이 답답해졌다.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덧붙이든 결국 스스로 변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침묵하는 설화를 보며 유라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이런 자리는 처음이죠?” “…….” “너무 티가 나요.”유라의 시선이 설화의 손으로 내려갔다.“샴페인 잔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잖아요.”설화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다봤다. 유리잔의 기둥을 부러뜨릴 듯 움켜쥔 손이 보였다. 수치심이 발밑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유라는 우아하게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나긋하게 말했다.“긴장 풀어요. 옷도 목걸이도 다 오빠가 골라준 것 같은데.”유라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구석에서 조용히 샴페인이나 마시다 가요. 괜히 튀지 말고.”그 순간 등 뒤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정유라.”유라의 어깨
차가운 정적 속에서 차량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창밖으로 이어지던 서울의 야경이 높은 석조 벽 뒤로 사라졌다. 검은 세단은 H호텔 메인 로비를 지나 VIP 전용 진입로 앞에 멈췄다. 인이어를 낀 직원들이 차를 확인하자마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기사가 문을 열기 직전, 설화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강현이 잡고 있던 손바닥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을 의식할수록 가슴 안쪽은 오히려 서늘해졌다.설화는 마른침을 삼키고 옆을 바라봤다. 은색 슈트를 입은 강현은 넥타이 매듭부터 소매 끝까지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차창에 비친 옆얼굴에도 감정은 드러나지 않았다.“제가 해야 하는 역할이 뭐죠?”문이 열리기 직전 던진 질문에 강현은 즉각 답하지 않았다. 그의 무감한 시선이 설화가 입은 검은 실크 드레스의 매끄러운 선을 따라 내려갔다 머물렀다.“내 옆에 있으면 돼.”가라앉은 목소리였다.“웃으라면 웃고, 묻지 않은 말은 하지 말고.”김 기사가 문을 열자, 강현은 먼저 내린 뒤 설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손을 얹자, 그는 짧게 잡아끌어 세웠다. 이어 깊게 파인 드레스 등선 위로 닿는 손길의 감촉에 설화는 순간 걸음을 멈칫했다.“불편하면 지금 말해.”강현의 서늘한 시선이 잠시 설화의 얼굴에 머물렀다.“빚이라고 생각해."빚. 그 한마디에 설화의 입가가 굳었다. 낮 동안 아스팔트 위를 누비며 배달 앱을 켜고 버텨내던 현실의 무게가 화려한 호텔 입구까지 따라온 기분이었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르고, 거울 앞에서 연습했던 미소를 입가에 얹었다.VIP 통로는 낮은 조명 아래 길게 이어졌다. 두 사람 뒤로 수행 직원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설화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또각또각 두드렸다. 강현은 한 번도 보폭을 늦추지 않았다. 설화는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따라붙었다.통로 끝의 문이 열리자 밝은 빛과 잔잔한 클래식, 그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한꺼번에 쏟아졌다.높은 천장 아래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곧 스태프들이 조용히 움직였다. 설화는 안내받은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감기고, 피부를 정리하고, 얼굴을 만지는 손길이 차례로 이어졌다. 누군가 손을 댈 때마다 설화는 어깨를 조금씩 굳혔지만, 스태프들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울 속 얼굴이 조금씩 바뀌었다. 눈매는 또렷해지고, 입술에는 평소와 다른 색이 올라갔다. 목덜미에 남은 잔머리까지 정리되자 설화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췄다.이게 정말 나야.감탄이라기보다 낯섦에 가까웠다. 거울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이었지만, 평소의 유설화와는 달랐다.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얼굴. 누군가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얼굴.드레스룸의 문이 열렸다. 한쪽 벽을 따라 의상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중 검은 드레스 한 벌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 했던 것처럼, 검은 실크는 조명 아래 조용히 빛났다.“오늘 입으실 드레스입니다.”한지우가 말했다.설화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깊게 파인 등선과 얇은 소매, 몸을 따라 흘러내릴 듯한 실루엣. 예뻤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입는 순간, 자신이 어떤 얼굴이 될지 알 수 없었다.“도움 필요하실까요? 곧 도착하실 시간이 되어가서요.”드레스룸 밖에서 한지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설화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더는 미룰 수 없다는 뜻처럼 들렸다.“아니에요. 금방 나갈게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설화는 또렷하게 대답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검은 실크 드레스에 머물러 있었다. 공간 안의 서늘한 공기가 드러난 피부를 스쳤다. 드레스를 입은 뒤, 설화는 실크 천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낯선 감촉이 얇게 손끝에 남았다.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노출된 등에 닿았다. 스태프들이 물 흐르듯 다가와 허리선을 정리하고, 소매를 펴고, 올린 머리를 고정했다. 손길은 가벼웠지만, 설화는 그때마다 조금씩 더 낯선 사람으로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한지우가 검은색 펌프스를 건넸다. 설화는 구두를 신고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굽 소리가
서강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몇 걸음 물러서서 눈치를 보던 최 과장이 나직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건조한 헛기침 소리가 정적을 가른 뒤에야 강현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희고 빳빳한 종이 가장자리에 서늘한 손끝이 닿았다. 사르륵,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두어 번 고요를 깨다 어느 한 페이지에서 흐름이 뚝 끊겼다. 검은 활자들 위로 그의 손끝이 걸린 채 멈춰 있었다.“이대로 진행하면 됩니까?”강현의 물음에 최 과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큰 틀은 그렇습니다. 세부는 대표님께서 보시면 됩니다.”강현은 대답 대신 집게손가락 끝으로 하얀 종이 표면을 눌렀다. 종이 위로 얕은 자국이 생겼다.“나가보시죠.”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최 과장은 더 말을 얹지 못했다. 서류철을 고쳐 잡은 그가 소리 없이 물러나자 묵직한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대표실 안에는 오직 에어컨 바람만 공간에 감돌았다. 잠시 후, 문 너머로 다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오정민 비서실장이 정장 매무새를 가다듬고 단정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내일 일정이 빽빽하게 정리된 태블릿을 책상 한쪽에 조용히 내려놓았다.“대표님, 내일 VIP 자선 파티 동반 파트너는 어떻게 하실까요. 늘 하시던 대로 태성건설그룹 정유라 씨 쪽으로 안내할까요.”태블릿 화면을 넘기던 강현의 손이 잠깐 멈췄다. 화면에 두고 있던 시선이 천천히 오 실장에게로 옮겨갔다. 짧게 눈이 마주친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이번에는 유설화 씨로 하죠. 그렇게 정리해 주세요.”그 이름이 강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자, 오 실장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 반응은 금세 사라졌다.“대표님.”오 실장이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설화 씨는 그 자리가 조금 버거우실 것 같습니다.”강현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입가로 가져갔다. 다문 입술 끝에 비웃음 같은 기색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담
기광의 구둣발이 옆구리를 걷어찼다. 둔탁한 소리가 좁은 슈퍼 안에 울렸다. 과자 봉지가 짓눌리고, 빈 유리병이 바닥을 굴렀다. 강현은 신음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댄 채 가게 형광등을 바라봤다. 의식이 한 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정리해. 장부는 저쪽으로 넘기고, 현장은 그대로 둬.”서기광의 말에 조직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정만수가 봉투를 계산대 아래로 밀어 넣었고, 다른 조직원이 슈퍼 주인의 손에 억지로 장부를 쥐였다. 강현은 바닥에 엎어진 채 그 모든 걸 봤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머리는 차갑게 깨어 있었다.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 같았다. 곧 붉고 푸른 불빛이 깨진 유리창 너머로 번갈아 스며들었다. 조직원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슈퍼 안에는 쓰러진 주인과, 피 묻은 입술로 바닥에 엎어진 강현만 남아 있었다.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그의 어깨를 짓눌렀고, 팔을 뒤로 꺾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목을 파고들었다.철컥.그 소리는 이상하게 선명했다. 오래된 문이 닫히는 소리처럼, 무언가가 완전히 끝나는 소리처럼.강현은 끌려 나가며 고개를 들었다. 겨울 밤공기가 허파 깊숙이 박혔다. 가로등 불빛이 얼어붙은 아스팔트 위에 희멀건 원을 만들고 있었다.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직은 깨끗하게 사라졌고, 남은 죄는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호송차 뒷좌석에 밀려 앉는 순간, 강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겨울눈이 내렸다. 하얀 눈은 타이어 자국 위를 빠르게 덮었다. 더러워진 바닥도, 발자국도, 방금 전의 흔적도 잠깐은 깨끗해 보였다.구치소의 첫날 밤은 차가웠다. 회색 벽은 축축하게 식어 있었고, 얇은 담요에서는 오래된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강현은 벽을 마주한 채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 손목에는 수갑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어쩌다 여기까지 왔지.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숨이 가라앉고 온몸의 감각이 무뎌질 즈음, 복도 끝에서 쇠문이 끌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누군가 잠깐 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늘 눅눅했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 묵은 담배 연기가 벽지처럼 들러붙은, 시장통 뒤편의 사채 사무실. 강현이 손을 뻗어 두꺼운 철문을 밀자, 기름칠이 말라붙은 경첩이 날카롭게 울었다. 문틈 사이로 탁한 열기가 먼저 쏟아져 나왔다.“왔네, 서강현.”검붉은 패딩 조끼를 걸친 차기광이 가죽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주황색 조명 아래서 그의 눈이 강현의 얼굴에서부터 어깨, 손끝까지 천천히 훑고 내려갔다.“요즘 손끝이 굼뜨다며. 돈 받으러 다니는 놈 손이 그렇게 느려서야 쓰겠냐.” “죄송합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는 변명도, 분노의 기색도 없었다. 그 무색무취한 반응이 오히려 기광의 신경을 긁은 듯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짧게 웃었다.“넌 늘 그 말뿐이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옆에 있던 정만수가 강현의 뒷통수를 툭 쳤다.“저러다 언젠가 우리 팔아먹는 거 아닙니까.”옆에 있던 조직원 하나가 전표를 뒤적이며 피식거렸다. 강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조용히 구석진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전표와 구겨진 지폐들이 뒤엉킨 자리 앞에 서서 손을 움직였다.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지폐는 축축했고, 손끝마다 끈적한 기름때가 묻어났다. 역겨움조차 오래 버티면 일상이 되었다.“제대로 세. 할당 못 맞추면 네 손가락부터 세게 될 줄 알아.”강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무줄로 지폐를 묶자 팽팽한 탄성이 손목을 툭 쳤다. 기광은 묶인 돈을 집어 들어 대충 무게를 가늠했다.“그래도 오늘은 모자라진 않았네.”그의 시선이 다시 강현에게 꽂혔다.“내일 3번가 슈퍼. 장부대로 받아 와. 또 울면 진열대 하나 엎고. 그래도 버티면 팔을 꺾어. 알아듣지?”“알겠습니다.”강현이 몸을 돌리자, 뒤에서 웃음이 따라붙었다.“난 저 새끼 눈이 싫어.”차기광의 목소리가 문 닫히기 직전까지 따라왔다.“독한 것도 아니고, 빈 것도 아니고. 꼭 아직 뭘 고르고 있는 사람 눈이야.”골목의 찬 공기가 얼굴을
일상적인 며칠이 지나갔다. 여름 햇살의 열기는 여전했고, 매미 소리도 여전히 귀가 따가울 만큼 울어댔다. 골목을 채운 낡은 빌라들, 담벼락 위로 엉켜 늘어진 전선, 쓰레기봉투 옆을 지나쳐가는 고양이까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다른 건 하나뿐이었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고, 낯선 사람들이 집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압수수색영장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낮고 딱딱한 목소리가 좁은 현관을 파고들었다. 설화는 처음에는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압수수색. 영장. 협조. 뉴스에서나 들었을 법한 단어들이, 갑자기
뭐가 이렇게 불편한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여자 하나가 방 안에 잠들어 있을 뿐인데, 그런데도 손끝에 닿았던 설화의 부드러운 살결과 입술의 촉감이 기어이 잔상처럼 달라붙었다.아주 오래전 닫아 둔 문 안쪽에서, 누군가 조용히 손잡이를 건드리는 것처럼.비가 내렸다. 회색 하늘 아래, 굵은 빗방울이 낡은 식당 문을 쉼 없이 때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그 작은 식당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열 평 남짓한 식당은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년이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엄
설화가 차가운 기운을 느꼈는지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더 둥글게 웅크렸다. 강현의 커다란 재킷 아래로 가냘픈 어깨가 파묻히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강현은 그 위태로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강제로 시선을 뚝 끊어냈다. 그런데도 의지는 배신하듯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확인하듯, 아니면 상황을 부정하려는 사람처럼.……이건 아니야.그는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눈물처럼 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걷어냈다. 닿는 순간마다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고, 단단히 손끝에 들어가 있던 통제력은 허무하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여름의 문턱을 먼저 넘어와 있었다. 인문관 계단은 오후 햇살을 오래 머금어 뜨끈했고, 문을 나서는 순간 에어컨의 냉기는 금세 뒤로 밀려났다. 잔디밭 위로 흘러가는 바람마저 미지근했다. "아… 더워. 진짜 여름 됐네." 설화는 손에 든 과제물을 부채처럼 파닥이며 인문관을 나섰다. 프린트 가장자리가 손바닥을 스칠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강의실 안에서 교수님 목소리에 졸음 섞인 집중을 붙들고 있던 애들이 맞나 싶게 캠퍼스는 벌써 한껏 풀어진 분위기였다. 잔디밭에는 삼삼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