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뭐가 이렇게 불편한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여자 하나가 방 안에 잠들어 있을 뿐인데, 그런데도 손끝에 닿았던 설화의 부드러운 살결과 입술의 촉감이 기어이 잔상처럼 달라붙었다.
아주 오래전 닫아 둔 문 안쪽에서, 누군가 조용히 손잡이를 건드리는 것처럼. 비가 내렸다. 회색 하늘 아래, 굵은 빗방울이 낡은 식당 문을 쉼 없이 때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바쁘게 스쳐 지나갔다. 누구도 그 작은 식당 앞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열 평 남짓한 식당은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년이 몸을 누일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엄마는 평생 단 한 번도 강현을 그 남자에게 데려간 적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이었고, 어쩌면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품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아홉 살의 강현이 학교에서 눈이 퉁퉁 부은 채 돌아온 날이었다. 작은 운동화는 흙탕물에 젖어 있었고, 책가방 끈을 움켜쥔 손가락 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울음을 참느라 턱 끝만 자꾸 떨렸다. "엄마." 아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도 아빠 있지?" 엄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무슨 뜻인지, 어린 강현은 다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학교에서 들었던 말들이 다시 목구멍을 긁고 올라왔다. "애들이 나보고 없는 애라고 해." 끝내 강현의 볼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근데 나…… 없는 애 아니잖아." 그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울먹이던 아이의 손을, 엄마는 끝내 놓지 못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여자는 낡은 우산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여기서 기다리면…… 아마 들어오라고 할 거야." 엄마는 젖은 우산을 강현의 어깨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자신은 거의 비를 맞고 있으면서도, 아이가 젖는 것만은 막으려 애썼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가락은 자꾸 우산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차가운 빗물이 틈새로 스며들어 손등을 때렸고, 어깨는 이미 절반쯤 젖어 있었다. 엄마의 손도, 아이의 손도 조금씩 식어 갔다. 얼마 뒤 문이 열렸다. 깔끔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두 사람을 혀를 차고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동정도, 연민도 없었다. 귀찮은 일을 다시 마주한 사람처럼 얼굴에는 피로만이 가득했다. "여긴 왜 또 오셨어요. 연락드렸잖아요." 엄마는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젖은 입술이 몇 번 달싹였고,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오늘만은…… 그 사람에게 꼭 좀 전해 줘요." 비에 젖은 목소리는 낮고 희미했다. "아이를 위해서, 단 한 번만 문을 열어 달라고요. 제발…… 정말 한 번만." 남자는 대답 대신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아주 잠깐 고개를 돌렸고, 곧 문을 닫았다. 철컥. 단단하고 무심한 소리였다. 소년은 그 소리를 평생 잊지 못했다. 사람의 말은 거짓을 섞을 수 있었지만, 문이 닫히는 소리는 언제나 정직했다. 들어오지 말라는 뜻. 너희 자리는 여기 없다는 뜻. 엄마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작고 젖은 등이, 그날따라 세상에서 가장 외로워 보였다. "괜찮아. 아들." 힘겹게 나온 목소리가 빗속에서 희미하게 떨렸다. "엄마가 있잖아." 그 손끝은 이미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다. 강현은 그 말이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이상하게도 그때 이미 알았다. 비에 젖은 옷처럼 차갑고 무거운 말이었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찮다고 말해야만 버틸 수 있는 사람의 마지막 거짓말. 그날 이후, 강현은 사람의 말보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더 믿었다. 그 소리만은 단 한 번도 그를 속이지 않았다. 세상은 언제나 정확하게 문을 닫았다. 녹아내린 얼음이 잔 안에서 작게 흔들렸다. 강현은 그 투명한 조각들을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씨발." 낮은 욕설이 유리잔 가장자리에서 부서졌다. 그는 술을 한 번 더 들이켰다.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오래전에 끝난 일이고, 닫힌 문은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설화의 온기가, 그 낡은 기억의 틈을 아무렇지 않게 건드렸다. 그 여자가 웃었다. 그걸 본 순간, 아주 잠깐 무너질 뻔했다. 강현은 빈 잔을 내려다보며 짧게 웃었다. 자신을 속이는 일에는 익숙했다.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정작 자신 역시 같은 방식으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창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재즈 선율은 낮게 흐르고, 빗소리는 유리창 너머에서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밤, 강현은 끝내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어제 내리던 비는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밤새 도시를 적시던 빗물의 흔적은 아직 도로 가장자리와 가로수 잎끝에 남아 있었지만, 유월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높았다. 투명한 햇살이 빌딩 숲 사이로 쏟아지고, 씻겨 나간 공기는 유난히 상쾌하기만 했다. 강현의 검은 세단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차를 세운 그는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 미래드림 13층으로 향했다.그때였다. 책상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잠금 화면 위로 서강현의 이름과 문자가 떠올랐다.[지금쯤이면 일어났겠지.][오후에 시간 돼? 할 일이 있어.]똑같은 말투, 똑같은 거리감.언제나 ‘시간’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통보였다.방금 가족사진을 덮으며 애써 다잡았던 마음이, 그의 메시지 하나에 속절없이 현실로 곤두박질쳤다.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필요할 때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손을 뻗어왔다. 하지만 그 손끝이 구원일지 벼랑 끝일지는 매번 부딪혀 보기 전엔 알 수 없었다.설화는 한참 동안 메시지를 내려다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자 봤어? 왜 답이 없어.재촉인지 다그침인지 모를 건조한 어조였다. 설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늘 그렇듯 알겠다고 대답하려다, 이번에는 입술을 다물고 손끝에 힘을 줬다.“대표님, 오늘은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요.”순간, 수화기 너머의 숨소리가 멎었다.— 급한 일?짧은 침묵 끝에 낮은 웃음이 짧게 섞여 있었다.— 내가 시키는 일보다 더 급해?질문처럼 들렸지만, 선택권을 묻는 말은 아니었다. 설화는 창가에 기대선 채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거절 한 번으로 채무와 생활이 다시 흔들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나요?”— 문자로 보낼게.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기고 곧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오후 5시. L호텔 더 라운지.]설화는 화면을 끄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쥐어짜 낸 용기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자신이 그의 세계에 들어간 게 아니라, 한쪽 발목만 붙잡힌 채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하루를 전부 내줄 수는 없었다.설화는 낡은 맨투맨 대신 대학 시절 입던 셔츠를 꺼내 다림질했다. 오후 약속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원한 백화점 아르바이트가 확정되면 입고 갈 옷도 필요했다.***여름의 끈적한 열기는 한풀 꺾여 있었고 대학가 거리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작은 샌드
화장대 거울 속 정유라는 티 하나 없이 완벽했다.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머리와 붉은 입술, 태성건설그룹 막내딸이라는 이름까지. 태어나 단 한 번도 남의 자리를 부러워해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조금 전 L호텔 VIP 자선 파티에서 서강현 곁에 서 있던 여자를 보기 전까지는.‘유설화입니다.’거울을 바라보던 유라의 미간이 가늘게 일그러졌다. 검은 드레스도, 목에 걸린 푸른 보석도 그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강현은 그런 설화를 몇 번이나 돌아봤고, 정유라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방식으로 앞을 막아섰다.유라는 손에 쥔 머리빗을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다. 달칵,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리자, 오래전 연회장의 풍경이 거울 위로 겹쳐 보였다.6년 전, 스무 살의 정유라는 아버지를 따라 정·재계 연말 모임에 참석했다. 아부와 웃음이 넘쳐나는 연회장 한가운데서 유독 혼자 다른 결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네이비색 슈트, 샴페인 잔을 무심하게 쥔 손,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지 않는 서늘한 눈.“안녕하세요. 서강현입니다.”의례적인 첫인사였지만 낮게 깔린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 순간, 유라는 잠깐 숨을 놓쳤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과 웃을 때만 얕게 패이는 보조개가 이상할 만큼 어울리지 않았다.서강현은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고, 사적인 감정은 더더욱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유라는 상관없었다. 처음에는 비즈니스를 핑계로 멀리서 맴돌았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파티와 골프 자리에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섰다. 그렇게 이어진 시간이 여섯 해였다.언젠가는 그 자리가 당연히 자신의 몫이 될 거라고 믿었다.“감히, 근본도 없는 게…….”유라의 붉은 입술 사이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작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의 시간이 밀려나는 꼴은 볼 수 없었다.그녀는 협탁 위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미래드림 내부에 심어 둔 사람의 번호를 누르자 연결음이 두 번 울린 뒤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정유라 씨.“유설화.
강현이 L호텔 1층의 Noir Lounge에 들어선 것은 밤 11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은은한 황색 조명이 흐르는 바 테이블 구석에 진우가 앉아 있었다.셔츠 단추를 두어 개 푼 진우는 잔을 느리게 돌리고 있었다. 입가에는 평소처럼 느슨한 기색이 걸려 있었다.“왔어?”강현은 대답 없이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빗물이 몇 방울 튄 재킷을 가볍게 털어내는 몸짓은 흐트러짐 없이 정돈돼 있었다.“용건만.”진우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리고 와인병을 기울였다. 붉은 액체가 잔을 채우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깼다.“아까 설화 씨랑 잠깐 얘기해 봤는데.” “그래서.” “생각보다 단단하더라.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도 있고.”강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진우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신선했어.” “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한 사람 아니야.”확실한 선긋기였다. 진우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예민하게 받을 말은 아니었는데.” “그만해.” “알았어. 일 얘기나 하자고.”강현은 시선을 노트북으로 돌렸다.“내가 넘긴 건부터.”진우는 더 묻지 않고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에는 마약 유통 경로와 해외 거점들이 복잡하게 연결돼 있었다.“네가 제보한 건 거의 세탁이 끝났어. 다음 주부터 돌리기에 들어가.” “경로.” “라오스 찍고, 중국 거쳐서 다시 국내로 들어와. 중간에 한 번 더 돌려서 흔적을 지우는 식이지.”강현은 트랙패드를 움직여 숫자와 날짜를 확인했다. 방금 전까지 날이 서 있던 눈빛은 순식간에 업무용으로 정리됐다.“입찰 전에 들어오겠네.” “그럴 가능성이 커.” “이 건은 크게 써.”진우가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짚었다. 강현은 와인잔을 매만지며 낮게 말했다.“한 번에 목을 잡아야 다시는 못 움직여.” “여전히 무섭다, 너.” “칭찬으로 들리네.”그 말에 진우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말을 고르듯 짧게 침묵했다.“근데 강현아.”진우가 천천히 물었다.“설
김 기사가 VIP 발렛 대기 구역에서 뒷좌석 문을 열었다. 설화가 올라타자 검은 세단은 L호텔을 천천히 빠져나갔다.조금 전까지 맑았던 여름 밤하늘에는 어느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창 위로 번진 불빛이 길게 흔들렸다.차 안에는 음악도 흐르지 않았다. 김 기사는 룸미러를 한 번 확인한 뒤 시선을 도로에 고정했다. 설화는 손끝으로 드레스 위의 작은 주름을 펴고 또 폈다. 조금 전 파티장에서 들었던 웃음과 낮은 속삭임이 빗소리 사이로 자꾸 되살아났다.강현은 그런 설화를 보지 않는 척했지만, 창문에 비친 시선은 몇 번이나 그녀 쪽으로 움직였다.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설화는 창밖만 보다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천천히 말아 쥐었다.“오늘 같은 자리에 저를 왜 데려간 거예요?”강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앞에 둔 채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은색 슈트의 옷깃은 여전히 반듯했고, 표정에도 흔들림이 없었다.설화는 입술을 한 번 눌렀다가 말을 이었다.“대표님이 시킨 대로 웃고, 옆에 서 있었어요. 그런데 정유라 씨는 계속 저를 건드렸고요.”강현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어디서 굴러온 건지 모르겠다고 했어요.”설화는 끝까지 창밖을 봤다. 울음도 분노도 섞지 않으려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더 또렷했다.“제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빚에 일부예요?”차 안이 조용해졌다. 와이퍼가 빗물을 밀어내는 소리만 일정하게 이어졌다.강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시선은 차갑고 정확했다. 설화는 피하지 않았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지만, 턱은 들려 있었다.“그건 아니야.”짧은 대답이었다. 설화는 마른 웃음을 삼켰다.“그럼, 뭔데요?”강현은 입을 다물었다. 설명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다시 앞을 봤다. 설화는 그 침묵이 대답이라는 걸 알았다.“역시 말 안 해주시네요.”강현은 턱관절을 단단히 맞물린 채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가볍게 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그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창밖 빗줄기에 멎어 있었다.
설화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유라는 그 침묵을 어떻게든 잡아내려는 듯 거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립스틱 끝으로 입술 라인을 다시 정리한 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냥 봐도 티 나거든.”설화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손등에는 얼마 전 고깃집 불판에 스치듯 데인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밝은 조명이 그 작은 상처까지 또렷하게 드러냈지만, 유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겉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야. 네가 아무리 꾸며도, 숨길 수 없는 건 있거든.”설화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물소리가 끊기자, 파우더룸 안이 더 조용해졌다. 그녀는 핸드타월로 손을 천천히 닦고는 거울 너머의 유라를 똑바로 봤다.“저한테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유라의 입가가 아주 조금 틀어졌다. 설화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아니면 불편하셨나요? 제가 당신 자리라도 뺏은 것처럼 보여서.”유라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설화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한 걸음 더 다가왔다.“강현 오빠 옆에 서 있는 게 네 자리라고 생각했어?”설화는 드레스 자락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목까지 차오르는 수치심을 삼키는 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그건 대표님이 정하신 일이에요.”유라가 립스틱 표면을 거칠게 손톱으로 긁었다.“그래? 여기서 제일 안 어울리는 사람이 누군지, 너만 모르는 것 같네.”그녀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향수 냄새가 짙게 번졌다.“사람들이 다 봐.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유라는 말을 부드럽게 흘렸지만, 그 안에 박힌 조롱은 더 날카로웠다.“그러니까 괜히 애쓰지 마. 오래 못 버틸 테니까.”그 말에 설화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세면대 아래로 숨긴 손은 떨렸지만, 목소리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불만 있으시면 대표님한테 직접 하세요.”설화는 젖은 타월을 휴지통에 내려놓았다.“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요.”유라의 얼굴이 굳었다. 몇 초 뒤,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설
연회장 입구 쪽의 공기가 미세하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일정한 보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의 대화가 한 박자씩 늦어졌고, 샴페인 잔을 들던 손들이 조용히 멈췄다.설화가 고개를 들었을 때 은빛 머리를 정갈하게 넘긴 남자가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삼청동의 그 넓은 저택에서 마주쳤던 남자, 이재영이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틈이 없는 눈빛으로 강현과 설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설화는 그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숨이 얕아졌다. 삼청동 저택의 조용한 거실, 난잎을 닦던 손, 자신을 보며 “눈이 닮았다”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한 번에 떠올랐다. 그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재영의 시선은 여전히 사람을 홀로 남겨 두는 방식으로 차가웠다.강현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설화보다 반걸음 앞에 선 자세가 자연스럽게 시야를 가렸다. 노골적으로 막아서는 동작은 아니었지만, 이재영이 설화에게 곧장 다가올 틈은 사라졌다.“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설화는 드레스 자락을 가만히 쥐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검은 실크가 그 흔들림을 대신 드러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세 사람에게 모였다.강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은색 슈트의 옷깃도, 반듯한 넥타이 매듭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만 그의 손이 설화의 손등을 짧게 눌렀다. 괜찮다는 뜻인지, 움직이지 말라는 뜻인지 알 수 없는 압력이었다.“드디어 오셨네요. 이재영 의원.”곁에 서 있던 진우가 낮게 말을 꺼냈다. ‘의원’이라는 호칭이 주변의 정적 위로 무겁게 떨어졌다.이재영은 진우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설화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눈빛에는 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내가 자네에게 선택하게 될 거라고 말했지.” "……."설화는 반사적으로 강현의 팔을 잡았다. 차가워진 손가락이 단단한 소매 위로 감겼다. 강현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 설화의 손등 위를 짧게 한 번 스쳤다. 버티라는 뜻인지, 움직이지 말라는 뜻인지 알 수 없는 짧은 접촉이었다.이재영의 시선이
비 오는 거리를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목적지인 고깃집 앞에 도착했다. 설화는 낡아빠진 우산을 접고, 눅눅해진 옷을 추슬렀다. 기름진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고기 냄새, 연기가 한꺼번에 얼굴을 덮쳤다.사장님이 설화를 보고 눈짓으로 인사했다. 가게 안은 이미 손님들로 북적였고, 빈 테이블 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굳은 고기와 빈 소주병, 흩어진 쌈 채소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불판을 들고 움직이던 지원 언니가 설화를 보자 장난스럽게 볼을 한 번 잡아당기며 피식 웃었다."왔어? 오늘따라 손님 오지게 많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사무적인 목소리. 정중한 척했지만, 그 안에 숨기지 못한 냉랭함이 섞여 있었다. 설화는 허리를 들고 돌아서 남자를 올려다봤다. 서류가방을 든 남자가 슈트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딱 봐도 용건이 무엇인지 말해 주는 얼굴이었다."네, 맞는데요.“남자는 설화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안 볼을 혀로 밀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 가방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설화 앞으로 내밀었다."내용증명입니다. 확인해 보시죠.“흰 종이 위에는 채무자 유설화라는 이름이 박혔고, 그 아래로 선명하게 찍힌 주식회사
경기도 외곽에 자리한 사설 장례식장은 한산했다. 빈소 안에는 향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문객보다 빈 곳이 더 많았다. 한때는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안달 나던 사람들조차 아무도 없었다. 이름도 낯선 몇 명만이 어색한 얼굴로 다녀갔다. 설화는 영정 사진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생전에 집 안에서 쉽게 보여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화한 미소가 이상하게 낯설어서, 설화는 헛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거면서. 이렇게 다 놓고 갈 거면서. 그동안 엄마와 나를 왜
일상적인 며칠이 지나갔다. 여름 햇살의 열기는 여전했고, 매미 소리도 여전히 귀가 따가울 만큼 울어댔다. 골목을 채운 낡은 빌라들, 담벼락 위로 엉켜 늘어진 전선, 쓰레기봉투 옆을 지나쳐가는 고양이까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다른 건 하나뿐이었다.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고, 낯선 사람들이 집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압수수색영장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낮고 딱딱한 목소리가 좁은 현관을 파고들었다. 설화는 처음에는 그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압수수색. 영장. 협조. 뉴스에서나 들었을 법한 단어들이,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