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같은 시각,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
르세인은 창밖을 등진 채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전장 보고서를 검토하던 그의 펜 끝은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 그의 뇌리는 방금 목격한 한 장면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짙푸른 녹음 속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튀어 오르던 그 와인빛 머리카락과 루비빛 동공. 그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정의하지 않았다. 미학적 가치는 주관적인 변수일 뿐, 그의 논리 세상에서는 무가치한 정보였다. 그러나… 그 선명함만은 분명 달랐다. ‘가시성이 지나치게 높군.’ 르세인은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엘라엔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찰나의 순간은 인상처럼 박혔다. 자신을 보고 분명 놀랐음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날을 세우던 그 붉은 눈동자. 그건 르세인이 평생 보아온 질서와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것이었다. 무질서하고, 감정적이며, 선명하게 타오르는 생명력. “바델.” 르세인이 입을 열었다. 대기하던 부관 바델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폐하의 다과회에 참석했던 명단 중, 와인빛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는 누구인가.” 바델은 그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숙련된 자세로 답했다. “제국 제일 가문, 라안느 공작가의 영애입니다. 전하께서 전장에 계신 동안 황후 폐하께서 직접 황태자비 후보로 공표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황태자비 후보. 그 수식어를 듣는 순간 르세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황태자비라….” 자신은 곧 황태자가 될 것이고, 자신의 세상은 완벽한 질서 아래 통제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질서의 핵심 조각이 될 후보가 황궁의 하찮은 변수와 섞여 무의미한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건 명백한 오점이었다. “비논리의 극치이군.” 그는 자신이 가져야 할 가장 화려하고도 결함 있는 조각에 이름을 붙였다. 관심도, 연모도 아니었다. 정교한 기계 장치 속에 잘못 끼워진 나사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지독한 강박이었다. *** 황궁 서문을 빠져나온 마차는 거칠게 흔들리며 마레즈나로 향했다. 엘라엔은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은 채 창밖을 응시했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르세인 폰 루카르디아.’ 엘라엔은 그 이름을 입안에서 작게 굴려 보았다. 혀끝의 감각이 이상할 정도로 낯선 이름이었다. 사교계에서는 그가 가진 완벽한 외모를 칭송했다. 하지만 정작 누구와도 온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소문의 주인공. 그에 대한 소문들은 오히려 그가 지닌 것보다 미화되었다고 엘라엔은 생각했다. 그는 차가운 것이 아니라 온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기계 같았으니까. 마침내 마레즈나의 철문이 열리고 익숙한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소라면 안락하게 느껴졌을 장미 향기가 오늘따라 숨이 막히는 듯했다. “영애님, 도착했습니다.” 하녀 마리가 마차의 문을 열자 엘라엔은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현관 앞에는 라안느 공작 에드먼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다녀왔느냐, 엘라엔.” 에드먼의 시선이 엘라엔의 흐트러진 머리칼과 먼지 묻은 구두 끝을 훑었다. 엘라엔은 그의 의심 어린 눈빛을 읽어내며 입매를 늘였다. “네, 아버지. 폐하께서 내주신 차가 유독 향긋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래. 라안느가의 영광은 너에게 달려 있다는 걸 결코 잊지 말거라.” 에드먼은 엘라엔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먼저 들어섰다. 그 짧은 접촉조차 애정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엘라엔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았다. 화장을 지우고 드레스를 벗어던졌으나 등 뒤에 꽂혔던 그 소름 끼치고 따가운 시선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남자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불쾌하고 음습했기에. 이런 알 수 없는 찝찝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그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창가로 쏟아지는 찬란한 여름 햇살은 어제의 오한이 기우였다는 듯 그녀를 안심시켰다. 오늘은 황실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르세인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였으나 엘라엔에게 그 주인공은 르세인이 아니었다. “영애님, 오늘은 이 사파이어 장식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이황자 전하께서 푸른색을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하녀 마리의 들뜬 목소리에 엘라엔은 거울을 보며 수줍게 웃었다. 이황자. 이안 폰 루카르디아. 르세인의 동생이자 황후의 또 다른 적통인 그는 르세인이 전장을 누비는 동안 황궁의 사교계를 지켜온 다정하고 유능한 황자였다. 사교계의 모든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비록 르세인의 무력이 출중하나 제국의 황제가 되기에 더 적합한 인품과 덕망을 갖춘 이는 이안이라고. 엘라엔 역시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니, 동의해야만 했다. 이안이 황태자가 되어야만 그녀가 꿈꾸는 마레즈나의 평화와 카시안의 우정이 안전할 수 있을 테니까. 연회장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엘라엔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르세인이라는 기괴한 변수가 나타나긴 했지만 제국은 여전히 이안이라는 견고한 지휘 아래 돌아갔다. *** 에르디엔의 대연회장은 눈부시게 빛났다. 수많은 촛불이 크리스털 샹들리에에 반사되어 비산했고, 악단의 연주는 잔잔한 호수처럼 부드럽게 홀을 채웠다. 엘라엔은 라안느 문양이 새겨진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어제 정원에서 느꼈던 그 기분 나쁜 시선의 잔상은 화려한 드레스와 샴페인의 거품 속에 녹아드는 듯했다. “라안느 영애. 오늘도 꽃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미모로군요.” 군중을 헤치고 다가온 이는 이안이었다. “이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엘라엔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이안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엘라엔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 르세인의 시선이 닿았을 때 느껴졌던 소름 끼치는 전율과는 정반대의, 익숙하고도 안락한 온기였다. “형님이 다시 돌아오니 사교계가 떠들썩하더군요. 하지만 영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은 곧 다시 전장으로 떠날 것이니. 이 황궁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결국 저의 몫이지요.” 이안의 확신에 찬 어조에 엘라엔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르세인은 지나가는 폭풍일 뿐이야. 제국의 진정한 차기 태양은 이 다정한 황자이고 나는 그의 곁에서 라안느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면 돼. 이건 엘라엔이 상상한 가장 완벽하고 정합적인 미래였다. 이안과 대화를 나누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엘라엔은 비로소 긴장을 완전히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안의 가벼운 농담과 영애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연회장의 분위기는 정점에 달했다. 하지만 그 이면의 서늘함이 도사리는 즐거움의 한가운데에서, 엘라엔은 다시 한번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수천 명의 군중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누군가에게 발가벗겨진 기분. 화려한 음악 소리가 갑자기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먹먹해지고, 주변 공기가 급격히 식어가는 듯한 감각. 엘라엔의 동공이 무언가에 강렬하게 찔러 오는 것을 느끼며 발악하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꽃들 너머 혼자만이 짙고 짙은 색으로 주변을 물들이고 있는 그 때문에…. 르세인. 그는 연회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섞이지 않은 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난간에 팔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르세인은 이안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있는 엘라엔을, 정확히는 엘라엔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이안의 손가락을 지독히도 무심한 눈으로 관망했다. 엘라엔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안도감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다시금 무채색의 심연이 발밑에서 입을 벌리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르세인은 천천히 와인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붉은 액체가 그의 입술을 적시는 순간, 엘라엔은 그것이 와인이 아니라 평화를 찢고 흘러나온 선혈처럼 느껴져 몸을 얕게 떨었다. 이 안온한 질서는 허상이었다. 이안이 약속한 평화 위로 르세인이라는 거대한 포식자의 그림자는 이미 소리 없이 드리워졌다.르세인은 엘라엔을 자신의 말 위에 올렸다. 사냥은 이미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사냥감을 성역 안으로 끌고 가,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포식자의 광기뿐이었다.르세인은 말을 몰아 황궁으로 향하며 자신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기이한 흥분과 살의를 즐겼다.말발굽 소리가 흙바닥을 짓누르는 소리보다 르세인의 거친 숨소리가 더 가깝게 들렸다.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르세인은 엘라엔을 자신의 앞에 앉혀 단단히 안았다. 그의 한 손은 고삐를 쥐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엘라엔의 허리를 부서뜨릴 듯 끌어안고 있었다.사냥터에서 발견된 카르노스의 단검은 르세인의 이성을 완전히 잃게 만든 듯했다.“전하, 허리가 아픕니다.”엘라엔의 말에도 르세인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되레 그녀의 귓불을 잔인하게 깨물었다.“끊어지는 게 나을지도. 그래야 내 품을 벗어나 그 유령 같은 놈에게 달려가는 상상조차 못 할 테니까.”*** 에르디엔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르세인은 엘라엔을 안아 들고 자신의 집무실 옆, 황태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비밀 침전으로 향했다.그곳은 햇빛조차 허락되지 않는, 오직 촛불의 일렁임과 르세인의 취향으로 점철된 차가운 석재 감옥이나 다름없었다.쾅!철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르세인은 엘라엔을 넓은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듯 던졌고, 엘라엔은 신음을 삼켜야 했다. 그는 상의를 거칠게 벗어던지며 탄탄한 근육을 내보였다.“이제 말해봐. 그 단검을 봤을 때 당신의 그 영리한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그러졌는지. 카시안이 나를 죽이고 당신을 구원하는 영웅적인 결말?”르세인은 침대 위로 올라와 엘라엔의 두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넣으며 목을 틀어쥐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문질렀다.“전하, 참으로 유치하시군요. 고작 단검 하나에 제국의 황태자가 이토록 평정심을 잃다니. 전하가 두려워하는 것이 카시안입니까, 아니면 저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했다는 그 하찮은 자격지심입니까.”
르세인은 활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엘라엔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를 말 위에서 끌어내렸다. 곧, 르세인은 거친 흙바닥 위에 등을 기댄 엘라엔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녀의 사냥복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전하! 왜 이러세요!”“제국을 제패하고 싶다고 했지? 좋아, 나와 함께 그 정점에 서는 거야. 하지만 그 정점에 서는 건 우리가 아니라 오직 나의 논리 아래 굴복한 당신만이 있을 뿐이야.”르세인은 거칠게 저항하는 엘라엔의 입술을 거칠게 짓뭉갰다. 흙냄새와 시린 겨울바람, 그리고 르세인의 뜨거운 욕망이 뒤섞인 사냥터의 한복판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욕망을 증명하려 들었다.엘라엔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지만 르세인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결박하며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그는 소름이 돋을 만큼 매혹적이게 웃으며 속삭였다.“당신이 나를 짐승이라 불렀으니 오늘은 정말 짐승처럼 당신을 유린해 보려고. 제국의 차기 안주인이 사냥터에서 어떤 소리를 내며 무너지는지 기대가 되는군.”“전하!”르세인의 광기 어린 애정 행각이 극에 달하던 순간, 숲속 어딘가에서 누군가 고의로 떨어뜨린 듯한 은제 단검 하나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그 단검의 자루에는 르세인이 그토록 증오하는 카르노스 왕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숲의 바닥은 얼어붙어 너무나 차가웠고 서늘했다. 르세인은 엘라엔의 손목을 여전히 짓누른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사냥복의 거친 가죽 질감이 그녀의 셔츠 너머로 생경하게 전해졌다. 르세인은 짐승처럼 그녀의 살결을 핥고 짓씹으며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려 들었다.“이곳입니까. 당신이 그 유령과 함께 도망치려 했던 숲 말입니다.”르세인의 낮은 목소리에 엘라엔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손은 무자비하게 그녀의 허리선을 더듬어 내려갔다. 엘라엔은 흙바닥의 냉기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르세인은 사과 대신 폭력을, 대화 대신 정복을 택했다. 그는 환멸이 나는 남자였지만 우습게도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엘라엔의 본능을
라비엔 궁의 철창이 걷힌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르세인은 사과 한마디 없이 전보다 더 거대하고 눈부신 인장을 벨모어 백작 부인을 통해 엘라엔에게 돌려보냈다.그건 분명 네가 원하는 판을 깔아줄 테니 어디 한번 발버둥 쳐보라는 거만한 초대장이었다.엘라엔은 차가운 우유로 목을 축이며 거울 앞에 섰다. 목에 남은 멍 자국은 옅은 화장으로 가려졌지만 르세인의 손이 닿았던 그 감각은 여전히 살갗 아래에서 맥동했다.그녀는 건조한 표정으로 짙은 녹색의 승마복으로 환복했다.“전하, 황태자 전하께서 정문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직접 말을 끌고 오셨습니다.”말리트의 목소리가 떨렸다. 엘라엔은 묵묵히 장갑을 꼈다.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을 가두는 것이 실패하자, 이제 그녀를 제국의 가장 화려한 무대 위로 끌어올려 더 거대한 감옥에 가두려 하고 있었다.궁의 정문에는 흑마 위에 올라탄 르세인이 보였다. 그는 거친 소재가 섞인 사냥복을 입고 있었는데, 풀어헤친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목선과 탄탄한 가슴 근육은 겨울의 서늘한 공기와 어우러져 지독하게 이질적인 위압감을 선사했다.“황태자비.”르세인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엘라엔은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자신이 직접 준비한 백마의 고삐를 잡았다.르세인의 눈썹이 기분 좋게 꿈틀거렸다.“여전히 그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있는 모습… 나쁘지 않습니다.”“전하의 호의는 늘 대가가 뒤따르지 않습니까. 그 대가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나왔을 뿐입니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격돌했다. 르세인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머리를 돌렸다.제국의 귀족들이 모여 있는 북부 사냥터로 향하는 길은 르세인의 명령에 따라 황실 근위대만이 삼엄하게 경계태세를 갖췄다.사냥터에 도착하자, 수십 명의 귀족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르세인은 엘라엔의 옆으로 바짝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대중 앞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 다정하고 완벽한 모습이었지만 엘라엔의 귓속에 닿는 숨결은 여전히
르세인은 땀에 젖은 금발을 쓸어 넘기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에메랄드 목걸이를 집어 들어 침대 위에 늘어진 엘라엔의 목에 채웠다.“오늘부터 당신의 구역은 이 방으로 한정됩니다. 베르제든, 라안느든 당신이 기댈 곳은 이제 없어. 오직 나만이 유일한 질서가 될 겁니다.”르세인은 만족스러운 듯 차가운 미소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홀로 남겨진 엘라엔은 차갑게 빛나는 에메랄드를 내려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 대신 서늘한 결의가 맺혀 있었다. 르세인은 자신을 가두었다고 믿겠지만, 엘라엔은 이 고립을 이용해 더 거대한 함정을 계획했다.“짐승을 길들이는 법은 간단해. 무질서한 짐승은 결국 제 집을 허무는 법이야.”*** 며칠간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에서 르세인은 모호한 고독감에 휩싸여 있었다.엘라엔을 굴복시켰고 그녀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새겼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구석이 시리도록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유치한 감정이 아니라, 완벽한 소유에 실패했다는 정복자의 허무라고 자신을 속였다.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그는 독한 술을 잔에 가득 채웠다. 르세인에게 세상은 언제나 명쾌한 체스판이었다. 말이 움직이면 결과가 나왔고, 공포를 심으면 복종이 돌아왔다.하지만… 엘라엔. 그녀만은 달랐다. 그녀는 그가 가장 아끼는 말이었고, 체스판 자체를 뒤흔드는 유일한 균열이었다.‘왜 굴복하지 않은 거지.’르세인은 잔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가 아는 사랑이란 완벽한 소유의 의미였다. 그러니 그녀의 모든 것은 자신의 논리 안에서 통제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베르제에서 그녀의 목을 졸랐을 때 엘라엔의 눈을 통해 보았던 것은 굴복이 아니라 명백한 경멸이었다.그것이 르세인을 미치게 했다. 제국의 황태자로서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그 건조하고 서늘한 멸시.르세인은 술은 단번에 들이켰다. 그는 엘라엔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의 시작이 카시안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는
“…뭐라?”“잘못된 행동을 한 사람과는 자신의 잘못을 인지할 때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죠. 하지만 전하께서는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신이라 믿는, 미쳐있는 짐승에게 무슨 감정을 소비할까요?”엘라엔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르세인의 안색이 굳어져갔다. 뺨을 얻어맞거나, 독설을 듣는 것보다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취급 당하는 이 감각은 그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모욕이었다.“미친… 짐승이라….”르세인은 낮게 읊조리며 엘라엔의 책을 거칠게 뺏어 바닥에 던졌다. “왜요? 또 제 목을 조르시려고요?”“내가 짐승이라면 당신은 그 짐승의 우리 안에 갇힌 먹잇감일 뿐이야. 내가 당신을 이토록 화려하게 치장하고 제국의 절반을 쥐여준 이유를 잊었습니까. 당신은 나의 완벽함을 증명하는 가장 고귀한 장식품이어야 해.”“장식품은 감정이 없죠. 그러니 앞으로 저를 찾지 마세요. 전하의 그 구역질 나는 논리를 받아내기엔… 제 인내심은 이미 베르제에서 바닥났으니까요.”르세인은 이를 악다물었다. 그는 엘라엔의 목에 남은 자신의 손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거칠게 문질렀다.“피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나를 경멸할수록, 나는 당신을 더 깊은 나락으로 끌어내고 싶어지거든.”르세인은 엘라엔을 몰아세우며 그녀의 입술을 탐하려 들었다. 엘라엔은 피하지 않았다. 눈조차 감지 않은 채 죽은 인형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그를 받아냈다.반항도, 순종도 없는 그저 의무 같은 것. 르세인은 되레 그 허무함에 질려버린 듯 그녀를 밀쳐내고 라비엔 궁을 빠져나갔다.“이거였구나.”엘라엔은 한쪽 입매를 치켜들며 웃은 뒤, 그가 던진 책을 주워 읽기 시작했다. 콧노래와 함께.*** 아르젠트 궁 집무실로 돌아온 르세인은 바델에게 광기 섞인 명령을 내렸다.“라비엔 궁의 모든 창문에 철창을 둘러라. 그리고 베르제 대공저로 향하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해. 자신의 오만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지 뼛속까지 새기게 만들 테니!”르세인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그는
시어드가 소리쳤고, 엘라엔의 얼굴은 점차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르세인의 손을 떼어내려 버둥거렸지만 광기에 휩싸인 르세인의 악력은 보통 힘이 아니었다.엘라엔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공포 속에서 그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사랑이 아닌, 오직 상대를 파괴해서라도 소유하겠다는 야만적인 욕망만이 가득했다. 엘라엔은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말해봐. 당신의 그 결백한 눈동자 뒤에 내가 모르는 오답이 숨어 있는지.”“이게… 이게 전하가 말한 논리입니까! 하아. 고작… 고작… 목을 조르는 게… 하아. 하. 전하의 위대한 질서냐고요!”엘라엔이 마지막 힘을 다해 일침을 놓자, 르세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시어드는 엘라엔의 발갛게 충혈된 눈을 보며 르세인을 향해 경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전하! 당장 그 손 놓으십시오! 베르제의 혈통을 죽이시려 한다면 이 자리에서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르세인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멈칫하다가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분노를 삭인 뒤 손을 풀어냈다. 엘라엔이 마른 기침을 토해내며 상체를 숙일 때 그는 이번에 엘라엔의 턱을 잡아 올려 자신을 똑바로 보게 했다. 르세인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하아, 하아.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역시 사람은 바뀌지 않아. 당신은 그저 논리의 탈을 쓴 짐승일 뿐이야!”엘라엔은 목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르세인을 지나쳐 마차로 향했다.르세인은 그녀를 붙잡으려 했고, 엘라엔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말을 덧붙였다.“따라오지 마세요! 궁으로 가긴 하겠지만 이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전하를 볼 때마다 짐승의 썩은 냄새가 나는 듯해 구역질이 나니까!” ***라비엔 궁으로 돌아온 엘라엔은 철저하게 르세인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궁 문은 굳게 닫혔고, 르세인이 보내는 그 어떤 것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벨모어 백작 부인과 시녀들은 르세인이 집무실에서 물건을 부수며 폭주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