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같은 시각,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
르세인은 창밖을 등진 채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전장 보고서를 검토하던 그의 펜 끝은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 그의 뇌리는 방금 목격한 한 장면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짙푸른 녹음 속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튀어 오르던 그 와인빛 머리카락과 루비빛 동공. 그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정의하지 않았다. 미학적 가치는 주관적인 변수일 뿐, 그의 논리 세상에서는 무가치한 정보였다. 그러나… 그 선명함만은 분명 달랐다. ‘가시성이 지나치게 높군.’ 르세인은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엘라엔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찰나의 순간은 인상처럼 박혔다. 자신을 보고 분명 놀랐음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날을 세우던 그 붉은 눈동자. 그건 르세인이 평생 보아온 질서와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것이었다. 무질서하고, 감정적이며, 선명하게 타오르는 생명력. “바델.” 르세인이 입을 열었다. 대기하던 부관 바델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폐하의 다과회에 참석했던 명단 중, 와인빛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는 누구인가.” 바델은 그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숙련된 자세로 답했다. “제국 제일 가문, 라안느 공작가의 영애입니다. 전하께서 전장에 계신 동안 황후 폐하께서 직접 황태자비 후보로 공표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황태자비 후보. 그 수식어를 듣는 순간 르세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황태자비라….” 자신은 곧 황태자가 될 것이고, 자신의 세상은 완벽한 질서 아래 통제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질서의 핵심 조각이 될 후보가 황궁의 하찮은 변수와 섞여 무의미한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건 명백한 오점이었다. “비논리의 극치이군.” 그는 자신이 가져야 할 가장 화려하고도 결함 있는 조각에 이름을 붙였다. 관심도, 연모도 아니었다. 정교한 기계 장치 속에 잘못 끼워진 나사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지독한 강박이었다. *** 황궁 서문을 빠져나온 마차는 거칠게 흔들리며 마레즈나로 향했다. 엘라엔은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은 채 창밖을 응시했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르세인 폰 루카르디아.’ 엘라엔은 그 이름을 입안에서 작게 굴려 보았다. 혀끝의 감각이 이상할 정도로 낯선 이름이었다. 사교계에서는 그가 가진 완벽한 외모를 칭송했다. 하지만 정작 누구와도 온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소문의 주인공. 그에 대한 소문들은 오히려 그가 지닌 것보다 미화되었다고 엘라엔은 생각했다. 그는 차가운 것이 아니라 온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기계 같았으니까. 마침내 마레즈나의 철문이 열리고 익숙한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소라면 안락하게 느껴졌을 장미 향기가 오늘따라 숨이 막히는 듯했다. “영애님, 도착했습니다.” 하녀 마리가 마차의 문을 열자 엘라엔은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현관 앞에는 라안느 공작 에드먼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다녀왔느냐, 엘라엔.” 에드먼의 시선이 엘라엔의 흐트러진 머리칼과 먼지 묻은 구두 끝을 훑었다. 엘라엔은 그의 의심 어린 눈빛을 읽어내며 입매를 늘였다. “네, 아버지. 폐하께서 내주신 차가 유독 향긋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래. 라안느가의 영광은 너에게 달려 있다는 걸 결코 잊지 말거라.” 에드먼은 엘라엔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먼저 들어섰다. 그 짧은 접촉조차 애정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엘라엔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았다. 화장을 지우고 드레스를 벗어던졌으나 등 뒤에 꽂혔던 그 소름 끼치고 따가운 시선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남자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불쾌하고 음습했기에. 이런 알 수 없는 찝찝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그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창가로 쏟아지는 찬란한 여름 햇살은 어제의 오한이 기우였다는 듯 그녀를 안심시켰다. 오늘은 황실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르세인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였으나 엘라엔에게 그 주인공은 르세인이 아니었다. “영애님, 오늘은 이 사파이어 장식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이황자 전하께서 푸른색을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하녀 마리의 들뜬 목소리에 엘라엔은 거울을 보며 수줍게 웃었다. 이황자. 이안 폰 루카르디아. 르세인의 동생이자 황후의 또 다른 적통인 그는 르세인이 전장을 누비는 동안 황궁의 사교계를 지켜온 다정하고 유능한 황자였다. 사교계의 모든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비록 르세인의 무력이 출중하나 제국의 황제가 되기에 더 적합한 인품과 덕망을 갖춘 이는 이안이라고. 엘라엔 역시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니, 동의해야만 했다. 이안이 황태자가 되어야만 그녀가 꿈꾸는 마레즈나의 평화와 카시안의 우정이 안전할 수 있을 테니까. 연회장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엘라엔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르세인이라는 기괴한 변수가 나타나긴 했지만 제국은 여전히 이안이라는 견고한 지휘 아래 돌아갔다. *** 에르디엔의 대연회장은 눈부시게 빛났다. 수많은 촛불이 크리스털 샹들리에에 반사되어 비산했고, 악단의 연주는 잔잔한 호수처럼 부드럽게 홀을 채웠다. 엘라엔은 라안느 문양이 새겨진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어제 정원에서 느꼈던 그 기분 나쁜 시선의 잔상은 화려한 드레스와 샴페인의 거품 속에 녹아드는 듯했다. “라안느 영애. 오늘도 꽃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미모로군요.” 군중을 헤치고 다가온 이는 이안이었다. “이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엘라엔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이안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엘라엔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 르세인의 시선이 닿았을 때 느껴졌던 소름 끼치는 전율과는 정반대의, 익숙하고도 안락한 온기였다. “형님이 다시 돌아오니 사교계가 떠들썩하더군요. 하지만 영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은 곧 다시 전장으로 떠날 것이니. 이 황궁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결국 저의 몫이지요.” 이안의 확신에 찬 어조에 엘라엔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르세인은 지나가는 폭풍일 뿐이야. 제국의 진정한 차기 태양은 이 다정한 황자이고 나는 그의 곁에서 라안느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면 돼. 이건 엘라엔이 상상한 가장 완벽하고 정합적인 미래였다. 이안과 대화를 나누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엘라엔은 비로소 긴장을 완전히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안의 가벼운 농담과 영애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연회장의 분위기는 정점에 달했다. 하지만 그 이면의 서늘함이 도사리는 즐거움의 한가운데에서, 엘라엔은 다시 한번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수천 명의 군중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누군가에게 발가벗겨진 기분. 화려한 음악 소리가 갑자기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먹먹해지고, 주변 공기가 급격히 식어가는 듯한 감각. 엘라엔의 동공이 무언가에 강렬하게 찔러 오는 것을 느끼며 발악하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꽃들 너머 혼자만이 짙고 짙은 색으로 주변을 물들이고 있는 그 때문에…. 르세인. 그는 연회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섞이지 않은 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난간에 팔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르세인은 이안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있는 엘라엔을, 정확히는 엘라엔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이안의 손가락을 지독히도 무심한 눈으로 관망했다. 엘라엔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안도감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다시금 무채색의 심연이 발밑에서 입을 벌리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르세인은 천천히 와인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붉은 액체가 그의 입술을 적시는 순간, 엘라엔은 그것이 와인이 아니라 평화를 찢고 흘러나온 선혈처럼 느껴져 몸을 얕게 떨었다. 이 안온한 질서는 허상이었다. 이안이 약속한 평화 위로 르세인이라는 거대한 포식자의 그림자는 이미 소리 없이 드리워졌다.엘라엔의 낮은 속삭임에 르세인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더욱 껴안았다.달빛이 창틀에 머물다 녹아내리는… 카르네티아의 밤은 그렇게 가장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누구도 넘볼 수 없고, 누구도 나갈 수 없는 위협적인 소유의 완성.제국의 태양과 달은 그렇게 서로를 집어삼킨 채, 영원히 깨지 않을 아름다운 지옥의 한복판에서 사랑의 감정보다 더 깊은 영원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함께 채웠다.그들을 서로를 구원하지 않았다.대신 서로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체계를 세웠다. ***카르네티아의 겨울은 유독 길었으나 황궁 내부는 엘라엔이 조율한 온기 덕분에 계절을 잊은 듯 평온했다.르세인은 집무실 창가에 서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그라면 불필요한 생명력이라 치부하며 베어냈을 정원수들이 이제는 엘라엔의 취향에 따라 붉은 열매를 맺은 채 햇살을 머금었다.“폐하, 또 정무를 멀리하고 계시는군요.”부드러운 실크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엘라엔이 들어섰다.그녀의 목에는 로잘린이 직접 채워주었던,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사파이어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 푸른빛은 그녀의 루비빛 눈동자와 대비되어 기이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품을 뿜어냈다.르세인은 돌아보지 않고 그녀의 체향을 느꼈다.장미 향기에 섞인 잉크 냄새.그건 이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지적인 포식자의 향이었다.“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짜놓은 이 완벽한 체계가 나를 한가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황후. 남부의 조세권과 북방의 광산 채굴권까지 당신의 인장 아래 움직이니, 내가 검을 휘두를 명분이 사라졌지 않습니까.”르세인이 다가와 엘라엔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이제 그녀의 배는 제법 불러 있었고, 그 안에서 맥동하는 새로운 생명은 르세인에게 생전 처음 느껴보는 모호한 공포와 경외를 동시에 선사했다.“무력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니까요. 폐하께서는 그저 상석에 앉아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제 장부 안에서 처리될 테니.”엘라엔은 르세인의 셔츠 깃을 정리해 주며 고개를 들어 그를
황궁의 가장 높은 첨탑 위로 쏟아지는 달빛은 차갑고도 눈부셨다. 대륙의 모든 비명과 환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그 정적의 한복판에 르세인과 엘라엔이 서 있었다.르세인은 엘라엔의 등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손등 위로 보이는 흉터들은 그녀라는 안식처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온 훈장이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가슴에 등을 기대며 펼쳐진 제국의 야경을 응시했다.수만 개의 등불이 일렁이는 카르네티아의 밤은 그들을 축복하는 빛 같았다.르세인에게 엘라엔은 정복해야 할 영토이자, 결코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심연이었다. 그는 그녀를 옥좌 옆에 앉혔으나 사실 자신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가두었고, 엘라엔은 그 위협적인 소유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르세인이라는 괴물의 고삐를 쥐었다.엘라엔은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둘은 제국 안팎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엘레니르 제국에는 완연한 평화가 찾아왔다.“고생 많았습니다, 황후.”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엘라엔은 왠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으나 울지는 않았다. 그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르세인을 올려다보며 하늘에 떠있는 달빛을 품은 것처럼 어둠에서도 환하게 웃음 지을 뿐이었다.“당신도… 당신도 고생 많았습니다, 폐하.”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잘 해냈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위로였다.밖으로는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겨울밤.소복하게 쌓인 새하얀 눈과 달빛….그 광경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눈을 뜨고 있음에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르세인은 엘라엔의 그 웃음 하나에 가슴께가 뻐근하게 무거워졌다.그녀가 웃으면 언제부턴가 두 감정이 교차하곤 했다.고마움과 미안함.그러나 그는 그것을 티 내지 않았다.엘라엔은 엘레니르 제국의 황후로서 더 없는 황실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었고 르세인은 그것이 매우 만족스러웠고 흡족했다. 하지만 그녀의 초반 인생을 설계하고 자신의 논리 안에 가둔 건 분명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뒤늦게 깨달
엘라엔의 목소리는 서늘하면서도 감미로웠다. 그녀는 르세인의 겉옷을 받아 시종에게 넘기며 그가 앉은 책상 위로 새로운 포고문을 밀어 넣었다.그건 바로 제국 무역 연합의 창설안이었다.르세인은 포고문을 읽어 내리며 입매를 부드럽게 늘였다.“무역 연합이라. 말이 좋아 연합이지, 결국 제국의 화폐를 쓰지 않는 자들은 굶겨 죽이겠다는 말이군요, 황후.”“폐하, 주변 소국들이 제국의 화폐 가치에 종속되는 순간, 그들은 군대를 일으킬 자금조차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겁니다.”엘라엔은 르세인의 등 뒤로 다가가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르세인은 그녀의 손길을 황홀하게 느끼면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당신은 내 검보다 더 잔인한 무기를 휘두르고 있어. 적들은 서서히 말라죽어가겠죠.”“폐하, 제 지략이 마음에 드십니까.”르세인은 엘라엔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연합에 가입을 거부하는 속국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특히 동부의 무역 도시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발악하겠지. 그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엘라엔의 눈매가 매혹적으로 가늘어졌다.“이미 그들 내부의 상인 연합을 매수해 두었습니다. 경제적 파멸은 아주 확실한 통제 수단이죠.”르세인은 고개를 얕게 저었다가 얼굴를 돌리고 엘라엔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추었다. 점차 달아오르는 분위기 속에서 책상 위에 흩어진 수많은 장부와 채권 증서들이 두 사람의 움직임에 눌려 바스락거렸다.*** 대륙을 뒤덮었던 전쟁의 화마가 잦아들고 제국의 수도 카르네티아는 전례 없는 고요와 풍요에 잠겼다.하지만 황궁의 가장 깊은 곳, 르세인의 집무실만큼은 여전히 지독하게 농밀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르세인은 옥좌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단 한 장의 양피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카르노스의 인장이 찍힌, 그러나 공식적인 외교 문서가 아닌 밀약서였다.[카르노스는 엘레니르 제국의 영구적인 속국임을 자처합니다. 다만, 제국의 검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국을 향
같은 시각, 제국 황궁에서 엘라엔은 사흘 밤낮을 이어진 정무의 피로조차 잊은 듯 마지막 숙청 대상자들의 명단을 검토하고 있었다.그녀의 책상 위에는 해카테의 문양이 박힌 금고 열쇠들과 남부 상단 연합의 지배권 양도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그때, 집무실 문이 예고도 없이 열렸다. 기사들의 제지도 뚫고 들어온 이는 태후 로잘린이었다.로잘린은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해카테 파산 보고서를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황후, 정말로 한 부족의 숨통을 장부 하나로 끊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황제가 전장에서 그들의 숨통을 조이는 동안, 그대는 그들의 가치 자체를 말소시켰군요.”엘라엔은 펜을 내려놓고 로잘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태후 폐하, 폐하의 제국에는 가난한 속국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오직 폐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생산 기지만이 필요할 뿐이지요. 해카테는 이제 완벽한 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로잘린은 엘라엔에게서 르세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위엄 그 자체였다.“황제가 돌아오면 황후를 두려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쥔 이 장부들이 황제의 검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말이죠.”“폐하께서는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기뻐하시겠지요. 태후 폐하, 이제 시작입니다.”엘라엔은 창밖을 보았다. 멀리서 승전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탓이었다.르세인의 함대가 개선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엘라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르세인에게 바칠 가장 화려한 전리품인, 파산한 해카테의 항복 문서를 손에 쥐고서.***황궁의 정문, 개선의 가도를 메운 것은 승전의 함성보다 더 무거운 경외였다.칠흑 같은 군마 위에 올라탄 르세인이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그의 말 안장 곁에는 해카테 족장이 평생을 지켜온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이 볼품없는, 하찮은 물건처럼 매달려 덜렁거렸다.르세인은 고개를 들어 황궁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그곳엔 제국의 휘장을 배경으로 엘라엔이 서 있었다. 그녀는 승전의
엘라엔은 온몸을 떨며 주저앉은 공작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안색이 단번에 창백하게 굳은 공작을 보는 엘라엔은 잔인하게 번들대는 눈으로 웃음을 내보였다.“감히 나를 독살하려 하다니. 그대의 가문은 제국 법에 의해 멸문될 것이며 그대가 아끼던 그 비축 식량과 금괴 모두 전장의 군자금으로 귀속될 것이다.”“화, 황후 폐하…!”“폐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광장에 걸린 그대의 잘린 얼굴은 폐하께 바칠 나의 첫 번째 전리품이 되겠지.”엘라엔은 짙게 웃으며 공작의 떨리는 턱밑을 쓸었다.공작은 엘라엔의 드레스 자락을 붙잡으며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쉴 새 없이 같은 말을 토해냈다. 급박하고 절절함이 가득 묻어 나오는 어투였다.연회장에 모인 모든 이들은 그 모습을 제대로 목도하며 숨을 편히 쉬지도 못할 만큼 굳어버렸다.무언가에 결박 당한 것처럼 그 어떤 움직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동안 여인의 몸으로 정치를 논하는 황후의 코를 납작하게 해야 한다며 호기롭게 얘기했던 지난날의 제 입들을 마구 잡아 뜯고 싶었다. 지금 엘라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살기였다.모든 것이 음습해서 오싹했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아둔했었는지를 비소로 깨달았다.***베리튼 공작에서 시작된 피의 숙청은 동이 트기도 전에 제국 전역의 상권으로 번져나갔다.엘라엔은 잠을 자는 대신 집무실의 커다란 책상 위에 대륙의 경제 지도를 펼쳤다.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마다 금권을 쥔 가문들의 몰락이 결정되었다.“황후 폐하, 해카테 부족의 주력 함대가 멈췄다는 소식입니다.”정보 상단의 수장 리논이 나타나 보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외심과 함께 미세한 전율이 섞여 있었다.“채권 매집 소식이 그들의 함대에 닿자마자 급료를 받지 못한 용병들이 기함을 포위했습니다. 해카테 부족이 발행한 어음은 이제 쓰레기 조각이 되었으니까요.”엘라엔은 찻잔을 들어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으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명징했다
엘라엔은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다. 르세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기보다 철저히 계산된 확신이었다.르세인이 해카테 부족 함대를 바다 밑으로 가라앉히는 동안, 엘라엔은 해카테의 경제적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제국 내부의 반대파 귀족들, 특히 문제가 아주 많은 파브르 공작 일가의 사유 재산을 몰수해서 그 자금으로 해카테의 채권을 매입하세요. 그들이 돈을 갚아야 할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해카테 족장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군요.”엘라엔은 펜을 들어 서명을 하고 명령서에 인장을 찍었다. 쿵, 소리와 함께 금사의 인장이 찍힐 때마다 해카테라는 거대한 부족의 기둥이 하나둘씩 꺾여 나갔다.*** 이틀 뒤, 집무실에 태후 로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잘린은 엘라엔이 벌이고 있는 이 거대한 경제 전쟁의 규모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엘라엔의 책상 위에 놓인 장부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황후, 그대는 황제보다 더 지독한 사냥꾼이 아닙니까.”로잘린은 엘라엔의 어깨를 부드럽게 짚었다.“태후 폐하, 오셨습니까.”“남부 귀족들이 그대를 누르기 위해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돈줄을 죄어오는 것에 미쳐버린 모양이지. 어떻게 할 셈입니까, 황후.”엘라엔은 서류를 정리하며 차분하게 대꾸했다.“제 발로 그 연회장에 가야지요. 남부 전체의 상권 지배권을 완전히 가져올 절호의 기회인 것을요, 태후 폐하.”엘라엔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로잘린은 그런 엘라엔을 보며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며칠 뒤, 남부 귀족들이 마련한 연회는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베리튼 공작의 별관에서 열렸다. 겉으로는 황후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명분이었으나 연회장 곳곳에서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엘라엔은 호위 기사를 최소화한 채, 시녀들만을 대동하고 그 독사들의 굴로 발을 들였다.별관의 연회장은 그녀가 등장함과 동시에 수군거리던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