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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허상인 안온한 질서

作者: 이클리프
last update 公開日: 2026-06-25 20:47:50

같은 시각, 아르젠트 궁의 집무실.

 

르세인은 창밖을 등진 채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전장 보고서를 검토하던 그의 펜 끝은 허공에 그대로 멈췄다.

 

그의 뇌리는 방금 목격한 한 장면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짙푸른 녹음 속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튀어 오르던 그 와인빛 머리카락과 루비빛 동공.

 

그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정의하지 않았다.

미학적 가치는 주관적인 변수일 뿐, 그의 논리 세상에서는 무가치한 정보였다.

그러나… 그 선명함만은 분명 달랐다.

 

‘가시성이 지나치게 높군.’

 

르세인은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엘라엔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찰나의 순간은 인상처럼 박혔다.

 

자신을 보고 분명 놀랐음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날을 세우던 그 붉은 눈동자.

 

그건 르세인이 평생 보아온 질서와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것이었다.

 

무질서하고, 감정적이며, 선명하게 타오르는 생명력.

 

“바델.”

 

르세인이 입을 열었다.

 

대기하던 부관 바델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폐하의 다과회에 참석했던 명단 중, 와인빛 머리카락을 가진 영애는 누구인가.”

 

바델은 그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숙련된 자세로 답했다.

 

“제국 제일 가문, 라안느 공작가의 영애입니다. 전하께서 전장에 계신 동안 황후 폐하께서 직접 황태자비 후보로 공표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황태자비 후보.

 

그 수식어를 듣는 순간 르세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황태자비라….”

 

자신은 곧 황태자가 될 것이고, 자신의 세상은 완벽한 질서 아래 통제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질서의 핵심 조각이 될 후보가 황궁의 하찮은 변수와 섞여 무의미한 감정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건 명백한 오점이었다.

 

“비논리의 극치이군.”

 

그는 자신이 가져야 할 가장 화려하고도 결함 있는 조각에 이름을 붙였다.

관심도, 연모도 아니었다.

정교한 기계 장치 속에 잘못 끼워진 나사 하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지독한 강박이었다.

 

 

 

***

 

 

황궁 서문을 빠져나온 마차는 거칠게 흔들리며 마레즈나로 향했다.

 

엘라엔은 가죽 시트에 몸을 파묻은 채 창밖을 응시했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갔다.

 

‘르세인 폰 루카르디아.’

 

엘라엔은 그 이름을 입안에서 작게 굴려 보았다.

혀끝의 감각이 이상할 정도로 낯선 이름이었다.

 

사교계에서는 그가 가진 완벽한 외모를 칭송했다.

 

하지만 정작 누구와도 온기를 나누지 않는다는 소문의 주인공.

 

그에 대한 소문들은 오히려 그가 지닌 것보다 미화되었다고 엘라엔은 생각했다.

그는 차가운 것이 아니라 온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기계 같았으니까.

 

 

 

마침내 마레즈나의 철문이 열리고 익숙한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평소라면 안락하게 느껴졌을 장미 향기가 오늘따라 숨이 막히는 듯했다.

 

“영애님, 도착했습니다.”

 

하녀 마리가 마차의 문을 열자 엘라엔은 조심스럽게 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현관 앞에는 라안느 공작 에드먼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다녀왔느냐, 엘라엔.”

 

에드먼의 시선이 엘라엔의 흐트러진 머리칼과 먼지 묻은 구두 끝을 훑었다.

 

엘라엔은 그의 의심 어린 눈빛을 읽어내며 입매를 늘였다.

 

“네, 아버지. 폐하께서 내주신 차가 유독 향긋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래. 라안느가의 영광은 너에게 달려 있다는 걸 결코 잊지 말거라.”

 

에드먼은 엘라엔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먼저 들어섰다.

그 짧은 접촉조차 애정보다는 확인에 가까웠다.

 

 

 

엘라엔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앉았다.

화장을 지우고 드레스를 벗어던졌으나 등 뒤에 꽂혔던 그 소름 끼치고 따가운 시선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남자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불쾌하고 음습했기에.

이런 알 수 없는 찝찝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건 그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창가로 쏟아지는 찬란한 여름 햇살은 어제의 오한이 기우였다는 듯 그녀를 안심시켰다.

 

오늘은 황실의 승전 축하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르세인의 귀환을 축하하는 자리였으나 엘라엔에게 그 주인공은 르세인이 아니었다.

 

“영애님, 오늘은 이 사파이어 장식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이황자 전하께서 푸른색을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하녀 마리의 들뜬 목소리에 엘라엔은 거울을 보며 수줍게 웃었다.

 

이황자.

이안 폰 루카르디아.

 

르세인의 동생이자 황후의 또 다른 적통인 그는 르세인이 전장을 누비는 동안 황궁의 사교계를 지켜온 다정하고 유능한 황자였다.

 

사교계의 모든 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비록 르세인의 무력이 출중하나 제국의 황제가 되기에 더 적합한 인품과 덕망을 갖춘 이는 이안이라고.

 

엘라엔 역시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니, 동의해야만 했다.

이안이 황태자가 되어야만 그녀가 꿈꾸는 마레즈나의 평화와 카시안의 우정이 안전할 수 있을 테니까.

연회장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엘라엔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르세인이라는 기괴한 변수가 나타나긴 했지만 제국은 여전히 이안이라는 견고한 지휘 아래 돌아갔다.

 

 

 

***

 

 

에르디엔의 대연회장은 눈부시게 빛났다.

수많은 촛불이 크리스털 샹들리에에 반사되어 비산했고, 악단의 연주는 잔잔한 호수처럼 부드럽게 홀을 채웠다.

 

엘라엔은 라안느 문양이 새겨진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어제 정원에서 느꼈던 그 기분 나쁜 시선의 잔상은 화려한 드레스와 샴페인의 거품 속에 녹아드는 듯했다.

 

“라안느 영애. 오늘도 꽃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미모로군요.”

 

군중을 헤치고 다가온 이는 이안이었다.

 

“이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엘라엔은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이안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엘라엔의 손을 잡아 제 입술로 가져갔다.

르세인의 시선이 닿았을 때 느껴졌던 소름 끼치는 전율과는 정반대의, 익숙하고도 안락한 온기였다.

 

“형님이 다시 돌아오니 사교계가 떠들썩하더군요. 하지만 영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은 곧 다시 전장으로 떠날 것이니. 이 황궁의 평화를 지키는 것은 결국 저의 몫이지요.”

 

이안의 확신에 찬 어조에 엘라엔은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르세인은 지나가는 폭풍일 뿐이야.

제국의 진정한 차기 태양은 이 다정한 황자이고 나는 그의 곁에서 라안느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면 돼.

 

이건 엘라엔이 상상한 가장 완벽하고 정합적인 미래였다.

 

이안과 대화를 나누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엘라엔은 비로소 긴장을 완전히 풀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안의 가벼운 농담과 영애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연회장의 분위기는 정점에 달했다.

 

하지만 그 이면의 서늘함이 도사리는 즐거움의 한가운데에서, 엘라엔은 다시 한번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수천 명의 군중 속에서 오직 자신만이 누군가에게 발가벗겨진 기분.

화려한 음악 소리가 갑자기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먹먹해지고, 주변 공기가 급격히 식어가는 듯한 감각.

 

엘라엔의 동공이 무언가에 강렬하게 찔러 오는 것을 느끼며 발악하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꽃들 너머 혼자만이 짙고 짙은 색으로 주변을 물들이고 있는 그 때문에….

 

르세인.

 

그는 연회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섞이지 않은 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난간에 팔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르세인은 이안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있는 엘라엔을, 정확히는 엘라엔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이안의 손가락을 지독히도 무심한 눈으로 관망했다.

 

엘라엔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안도감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다시금 무채색의 심연이 발밑에서 입을 벌리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르세인은 천천히 와인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붉은 액체가 그의 입술을 적시는 순간, 엘라엔은 그것이 와인이 아니라 평화를 찢고 흘러나온 선혈처럼 느껴져 몸을 얕게 떨었다.

 

이 안온한 질서는 허상이었다.

 

이안이 약속한 평화 위로 르세인이라는 거대한 포식자의 그림자는 이미 소리 없이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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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メン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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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캉몰캉
혼자만이 짙게 물들였다니... 표현력 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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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골골
흥미진진해요! 굿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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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63. 철저히 아무것도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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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62. 정치적인 동반자

    바델은 예복사와 하녀들을 물린 뒤, 봉인된 검은 서신을 내밀었다. 이사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은근슬쩍 곁으로 다가와 서신의 내용을 엿보려 했다.엘라엔은 서신을 받아들었지만 바로 열지 않았다.“어머니, 이건 전하와 저만의 비밀스러운 대화가 될 것 같아요.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겠어요?”이사벨라의 미간이 좁혀졌다.감히 자신을 물러나게 하다니.하지만 그녀는 금세 우아한 미소를 회복했다.“물론. 황자 전하와의 애틋한 대화를 방해할 생각은 없단다. 하지만, 엘라엔. 비밀이 많아지면 그만큼 짊어져야 할 무게도 늘어난다는 걸 잊지 말거라.”이사벨라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고 엘라엔은 긴장을 풀며 서신을 뜯었다. 그 안에는 짧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북부의 베른 성에 반란의 기운이 감지되었습니다.영애, 당신의 판단이 궁금하군.]엘라엔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촛불 위로 르세인의 서신을 가져다 댔다. 검은 종이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며 재가 되어 흩어졌다.그 광경을 지켜보는 엘라엔의 눈동자는 불꽃보다 더 뜨겁게 가라앉았다.르세인은 엘라엔이 베르제 대공의 정보망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제국의 반란 진압이라는 공적인 무대 위로 끌어올릴 셈이었다.‘나를 시험하겠다….’베른 성의 정보를 제공하고 반란군을 숙청하는데 기여한다면 자신은 명실상부한 르세인의 사람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정보가 틀리거나 혹은 주저한다면 르세인은 가차 없이 자신을 불량품으로 판명하고 폐기하겠지.방을 나가기 전, 엘라엔은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이사벨라였다. 그녀는 가버린 척하며 문밖에서 엘라엔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엘라엔은 보란 듯이 거울 앞에 다시 앉아 우아한 영애의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마리, 전하께서 백금사가 어떻겠냐고 물으시네. 역시 어머니의 안목은 탁월하셔. 내일 아침 조찬 때 어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어.”문밖의 기척이 그제야 멀어졌다. 이사벨라는 엘라엔이

  • 위협적인 소유의 설계자   61. 차갑고 날 선 반항심

    이사벨라의 손가락 끝이 카시안이 고약을 발라주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엘라엔은 끔찍했지만 티 내지 않았다.“들어가서 쉬렴. 전하께서 보낸 새로운 황실 전속 의상사들이 아침 일찍 도착할 예정이니. 너는 그저 그들이 입혀주는 대로, 씌워주는 대로 가장 아름답게 서 있기만 하면 된단다.”이사벨라는 엘라엔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먼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엘라엔은 정적 속에 홀로 남아 자신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마레즈나의 모든 불빛이 자신을 감시하는 눈처럼 느껴졌다.카시안에게서 느꼈던 그 짧은 해방감은 이제 아스라한 꿈처럼 멀어지고 다시 완벽한 인형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마레즈나의 접견실은 이른 시간부터 분주했다. 황실에서 보낸 예복사들과 이사벨라가 직접 선별한 하녀들은 엘라엔의 주변을 에워쌌다.“영애님. 어깨를 조금 더 펴세요. 황자 전하께서는 당당한 기품을 선호하십니다.”예복사는 엘라엔의 몸 위에 차가운 비단을 덧대며 치수를 쟀고, 이사벨라는 소파에 앉아 찻잔을 든 채 그 과정을 하나하나 감독했다.“예복의 허리선을 더 조이세요. 엘라엔의 가느다란 허리를 황자 전하께 제대로 보여드릴 수 있도록.”“예, 공작 부인.”이사벨라의 명령에 예복사는 코르셋의 끈을 힘껏 당겨 조였다.“윽…….”엘라엔의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한 압박이었다. 르세인이 주입한 질서와 이사벨라가 강요하는 완벽함은 양쪽에서 엘라엔을 압착했다.“어머니…. 조금 과한 것 같아요. 숨을… 쉬기가 힘들어요.”엘라엔이 숨을 몰아쉬며 말하자 이사벨라는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았다.“엘라엔. 미래 황후의 자리는 숨을 편히 쉬는 자리가 아니야. 그 왕관의 무게를 견디려면 지금 이 코르셋의 무게부터 익숙해져야지. 네가 무너지면 우리는 어쩌니?”이사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라엔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엘라엔의 코르셋 매듭을 아주 정교하게 다시 묶어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넌 지금 이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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