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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청연
소명준은 왕 태의 댁에서 한 시진 넘게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너희 하인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감히 본 세자를 이렇게 홀대하다니!"

어린 하녀가 깍듯하게 대꾸했다.

"세자 저하, 저희 주인님께서는 오늘 시간이 없으셔서 손님을 받지 않으십니다."

소명준이 욕설을 내뱉었다.

"정말 예의라곤 없구나. 본 세자 앞에서 감히 '노비'라 자칭하지도 않고 예의를 밥 말아 먹었느냐!"

하녀가 코웃음을 쳤다.

"공자님이 대체 누구신데요?"

소명준은 모욕감을 느꼈다.

"나는 위원후부 세자 소명준이다!"

하녀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 공자님, 저희 주인님께서 하신 말씀이, 당신 같은 사람은 모른답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위원후부의 주인이 아파도 왕 태의는 직접 왕진을 가지 않는데, 하물며 기녀의 병을 고치겠다며 세자가 직접 찾아와 태의를 청하다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공자님께는 태의가 아니라 도사를 불러 몸에 붙은 잡귀나 쫓아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소명준은 분노로 가슴이 들썩였다.

"무례하다! 당장 본 세자 앞에 무릎 꿇지 못할까!"

하녀는 그를 힐끗 보고는 말없이 가버렸다.

'진료를 구걸하러 온 몰락한 양반 주제에 감히 태의부에서 기세등등하다니.'

하녀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조롱이 담겨 있었고, 소명준은 분노로 온몸을 떨었다.

'왕 태의, 이 괘씸한 놈. 지난 생에 은혜를 베풀어 목숨을 구해줬건만, 하녀를 시켜 나를 모욕하다니!'

'이번 생에 왕 태의가 위기에 처해도 절대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소명준은 소매를 휘두르며 자리를 떴다.

임현에게 어의를 불러주겠다고 큰소리쳤건만 어의를 부르지 못했으니 기방으로 돌아가기도 민망하여, 연서를 시켜 의원에서 의원을 불러오게 한 뒤 후부로 돌아갔다.

소명준은 회귀했지만 지난 생의 과거 시험 문제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할 듯 싶었다.

지난 생에 그는 이 대유(大儒)의 문하로 들어가 그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었다.

왕 태의 댁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소명준은 당장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일단 후부로 돌아가 준비하기로 했다.

이 대유는 아무나 제자로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생에 그는 명문을 지어 올려 이 대유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덕분에 그의 제자가 되는 데 성공했었다.

소명준은 이번 생에도 돌아가서 그 명문을 다시 써낸 뒤 직접 이 대유에게 갖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한편, 소명준이 임현 낭자를 위해 어의를 부르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소설아는 그저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계산해보니 지난 생의 이맘때쯤, 소명준은 이 대유를 스승으로 모셨어야 했다.

이 대유는 태자의 스승이었으며, 제자를 거의 받지 않는 분이었다.

이 대유는 바둑광이라, 지난 생에 소설아는 거금을 들여 양지옥으로 만든 바둑알을 사고 기보를 수집해 선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유는 소명준을 제자로 받아주기는커녕, 글 세 편만 봐주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소설아가 이 대유의 딸을 구해주고 나서야 소명준은 겨우 이 대유의 마지막 제자가 될 수 있었다.

이 대유의 제자가 된 건 순전히 소설아의 덕분인데, 소명준은 자기가 쓴 <추국부>가 이 대유를 감동시켰다고 떠들고 다녔다.

사실 그가 쓴 글은 개도 안 읽을 수준이었다.

이번 생에 소명준이 이 대유의 제자가 되는 일은 물 건너갔다.

그 직후, 소설아는 원씨 가문의 정표를 돌려보내며 파혼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원태준과의 혼사는 일찌감치 정리하는 편이 좋았다.

원씨 가문은 정표를 받자마자 즉시 사람을 보내 민씨에게 알렸다.

잠시 후, 하녀 하나가 찾아와 말했다.

"아가씨, 부인님께서 오라고 하십니다."

"금방 가마."

소설아는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으며 차가운 말투로 답했다.

춘경원(春景園)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단향 냄새가 풍겨왔다.

춘경원에는 작은 불당이 있어 민씨는 매일 향을 피우고 기도했다.

소설아가 들어갔을 때 민씨는 불경을 베껴 쓰고 있었다.

"부인님, 큰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민씨는 손을 멈추지도,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소설아가 반 시진 가까이 서 있자 그제야 붓을 놓았다.

"설아야, 아직도 이 어미에게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는 게냐?"

"그럴 리가요."

소설아는 고개를 숙였다.

민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미도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네 동생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 홧김에 손이 나갔구나."

"이리 와 보렴, 아직 많이 아프냐?"

민씨가 손을 뻗었고, 소설아는 멍하니 있었다.

지난 생에도 이랬다. 민씨는 매를 때리고는 사탕 하나를 주는 식으로 그녀를 철저히 조종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소설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민씨는 다시 염주를 집어 들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프지 않다니 다행이구나. 그런데 원씨 가문에 정표를 돌려보낸 건 무슨 일이냐? 다음엔 명주의 험담이라도 하고 다닐 셈이냐?"

소설아는 웃음이 났다.

민씨는 그녀의 혼사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파혼 소문이 퍼져 소명주의 명예가 깎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민씨는 지금 소설아를 길들이려 하는 것이었고, 민씨의 편애는 정말 끝이 없었다.

소명주가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 위원후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지난 생에 억울하게 죽은 뒤, 소설아의 혼은 성불하지 못하고 유령이 되어 후부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 그녀는 어떤 중년 미인이 소명주를 찾아와 자신이 친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소명준이 소명주를 부축하며 푸른 비단 가림막 뒤에서 걸어 나왔다.

소명주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는데 울었던 모양이었다.

"소설아, 네가 어떻게 그런 헛소문을 퍼뜨릴 수 있느냐!"

소명준은 사람이라도 잡아먹을 듯 사납게 노려보았다.

"원태준과의 사이가 틀어진 걸 왜 명주 탓으로 돌리는 것이냐?!"

'지난 생에도 소설아는 원태준 일 때문에 사사건건 명주를 괴롭혔었는데, 명주가 너무 불쌍하네.'

"오늘 당장 명주에게 사과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께서 가법을 집행하실 테고, 나도 말리지 않을 것이다!"

민씨가 거들었다.

"설아야, 어미를 원망하지 말거라. 네가 명주에게 누명을 씌운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지 않느냐. 계속 이런 식이면 명주가 어떻게 시집을 가겠느냐. 그 아이는 이미 충분히 고생했는데…"

"네, 사과하겠습니다."

소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순종적인 척했다.

민씨는 그녀의 태도에 흡족해하며 계속해서 깎아내리고 억눌렀다.

"너와 원씨 가문의 혼사는 노부인께서 정하신 거지만, 따지고 보면 원래 명주의 혼사였다. 명주야말로 후부의 적통 아가씨인데, 네가 억지를 부려 뺏은 것이 아니냐. 온 집안이 너를 봐주고 있는데, 명주가 원태준과 말 몇 마디 나눴다고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다니…"

"걱정 마십시오,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않겠습니다."

소설아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그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이 혼사를 원치 않을 뿐입니다."

"언니,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소명주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발을 굴렀다.

"언니, 전 언니와 형부의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혼인도 안 했는데 무슨 형부라는 것이냐."

소설아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다.

"이 혼사는 원래 어른들의 농담에서 시작된 것이니 진지하게 생각할 것 없다. 혼서도 오가지 않았으니, 나와 원씨 가문의 혼사는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말거라."

소명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정말 이 혼인을 안 할 생각이십니까?"

솔직히 그녀는 이런 편애를 받는 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소설아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빼앗는 것은 꽤나 재미있었다.

특히 원태준이 자신에게 푹 빠져 소설아가 애타게 안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소설아가 스스로 파혼해 버리면 삶의 재미가 줄어들 터였다.

소설아는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할 것이다."

이 후부 자체가 이제는 필요 없었다.

민씨가 말했다.

"원씨 가문과의 혼사를 깨면, 어디 가서 원씨 가문보다 더 좋은 가문을 찾겠느냐?"

즉, 원씨 가문에 시집가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복이라는 뜻이었다.

소설아는 담담하게 웃었다.

"기녀도 후부의 세자를 남편으로 맞이하는데, 몸이 깨끗한 제가 왜 짝을 못 찾겠습니까?"

소명준이 폭발했다.

"소설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그가 달려들며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소설아는 태연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세자께서 저를 다치게 하시면, 당씨 가문과의 파혼 문제는 누가 나서서 해결해 줍니까?"

그 말에 눈앞까지 날아온 주먹이 멈췄고, 소명준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거두었다.

"당씨 가문 문제는 네가 알아서 잘 말해 보거라. 절대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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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전하, 저는 결코 무기를 수집하는 취미가 없습니다. 그저 전하께서 매번 무기를 두고 가시는 탓에 그리 보였을 뿐이지요."솔직한 심정으로는, 오늘 밤에는 추영우가 그리 황급히 가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적어도 저 끔찍한 칼만큼은 제 손으로 들고 가 주었으면 했다. 저토록 추잡하고 더러운 칼은 제 처소에 단 한 순간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추영우는 싸늘하게 비웃으며 칼날을 치켜들어 소설아의 머리를 겨누었다."네가 이토록 매번 갖은 수단을 동원해 날 격노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추영우가 한 걸음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133화

    “아가씨는 결코 저를 해치실 분이 아니십니다.”소명준은 답답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현아, 네가 너무 순하고 사람을 곱게만 보는구나.”그는 월 이낭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나직하게 말했다.“좋다. 네 뜻대로 하마. 당분간은 이 일을 밖으로 알리지 않고 조용히 조사해 보겠다. 하지만 내 말은 꼭 명심해 두어라. 이 일은 분명 소설아 그 계집의 짓이다. 명주는 어려서부터 심성이 여렸고, 어머니께서는 불심이 깊으시다. 명지는 아직 세상 물정도 모르는 아이고. 특히 명주는 개미 한 마리도 함부로 밟지 못할 만큼 마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131화

    월 이낭은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몸에는 얇은 가운 한 벌만 걸친 상태였다. 회임한 뒤로 원래 가늘고 가냘프던 몸에 제법 살이 붙어 전체적으로 한층 풍만해졌는데, 마치 잘 익은 복숭아처럼 탐스럽고 매끄러운 자태였다.그녀가 침상 위에서 힘없이 신음 소리를 흘리자, 소명준은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대체 어찌 된 일이냐?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니.”저녁 무렵이 되자 주방에서 다시 음식을 들여왔다. 대추와 좁쌀을 넣고 푹 끓인 죽이었는데, 그 안에는 호박과 마 조각까지 들어 있어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특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128화

    “대체 어찌 된 일이냐?”사당에서 벌어진 소동을 전해 들은 위원후는 조 이낭의 처소에서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한편, 민씨의 처소에는 등불 다섯 개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본래도 무더운 날씨에 후부 안의 얼음마저 부족한 형편이었는데, 등불까지 다섯 개나 켜 두었으니 방 안은 마치 찜통처럼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민씨는 방석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염주를 굴리며 낮고 빠른 목소리로 연신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분명 오 어멈은 저희와 함께 사당으로 가고 있었는데, 언제 사라졌는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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