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청연
민씨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명주야, 이 집안의 살림은 역시 설아가 맡는 게 좋겠구나."

노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민씨가 후부의 안살림을 이어받았으나, 불과 몇 년 만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적자가 났다.

처음에는 자신의 혼수품을 팔아 몰래 메꿨지만, 나중에는 후부가 밑 빠진 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계속 메꾸다가는 혼수품이 바닥날 판이라 아예 소설아에게 전부 넘겨버렸다.

소설아는 살림을 아주 잘 꾸려나갔다. 적자를 모두 메웠을 뿐만 아니라, 후부 주인들의 체면까지 세워주었다.

소설아가 살림을 맡고는 있었지만, 집안 관리인들 대부분은 민씨의 사람이었기에 민씨는 위신도 세우고 실속도 챙겼다.

그러니 이 집안의 살림권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 엉망진창인 상황을 소명주에게 맡길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것이 민씨가 대국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소설아를 즉시 처리하지 않은 이유였다.

소설아는 아직 이용 가치가 컸다.

소명주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작은 소리로 설득했다.

"어머니, 저에게도 돈을 벌 방법이 있습니다."

그녀는 회귀한 몸이고, 지난 생에 소설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그녀의 화장대에서 향료 비법을 찾아냈었다.

향료 가게라면 소명주도 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다음 달이면 기온이 급격히 치솟아 북쪽에는 가뭄이, 남쪽에는 홍수가 나고 곳곳에 역병까지 돌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지금 미리 얼음과 곡식, 약재를 비축해 두었다가 그때 팔기만 하면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을 터였다.

지난 생의 정보를 알고 있는 그녀라면 장사 면에서 결코 소설아에게 뒤처지지 않을 것이었다.

"어머니, 저를 믿어주십시오."

"만약 제가 잘 못 한다 싶으면 그때 다시 언니에게 넘기면 되잖습니까."

소명주는 민씨의 팔을 붙잡고 아양을 떨었다.

"어머니."

민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에 은자가 부족하다."

장원이 연말에 한 번씩 은자를 보내오는데, 벌써 7월이니 그동안 보내온 은자는 진작에 바닥난 상태였다.

지금의 지출은 전부 소설아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지탱하고 있었다.

소명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언니에게 향료 가게가 열 군데나 있지 않습니까? 향료 장사가 돈이 꽤 된다고 들었는데, 이치대로라면 후부에 돈이 없을 리 없잖습니까. 언니가 아무리 서운한 게 있어도 고의로 어머니를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되죠."

소명주는 소설아의 향료 가게를 탐내고 있었고, 민씨는 그 뜻을 알아차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도 그 향료 가게들을 가로챌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아가 하나하나 일궈낸 것이었고, 노부인이 물려준 혼수 자금을 밑천으로 삼은 것이었기에, 무턱대고 빼앗았다가는 대외적으로 평판이 나빠질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빼앗았다가 운영을 잘못해 손해라도 나면 후부 전체의 생활 수준이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위원후가 그녀를 원망할 게 뻔했다.

차라리 지금처럼 편하게 누리는 게 나았다.

"제게 향료 가게의 비법이 있습니다."

소명주가 주머니 하나를 꺼냈고, 민씨는 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이냐?"

소명주는 주머니에서 비법을 꺼내 보였다.

"노부인께서 남기신 서적들 사이에서 찾아냈습니다."

"이것은 후부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이니, 이치대로라면 그 향료 가게들은 언니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금으로 귀속되어야 합니다."

"원래는 말씀드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언니가 고생해서 일군 가게들이니까요. 하지만 언니가 이번에 정말 너무하셔서, 어머니가 겪으시는 고초를 보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민씨는 향료 비법을 건네받아 몇 번이고 자세히 살폈다.

"이게 정말 노부인께서 남기신 거란 말이냐?!"

소명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법을 쥔 민씨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고,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노망난 노인네가 정말 대단하군. 후부의 비법을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고 굳이 양녀에게 몰래 전해주다니!'

설령 민씨를 무시했더라도 소명준에게는 물려줬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히 명주가 찾아냈다.

"그렇다면 내가 네가 살림권을 갖도록 도와주고 그 향료 가게들도 한꺼번에 내놓게 하마."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이 비법이 있다면, 소설아의 향료 가게를 명분 있게 차지할 수 있었다.

소명주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의란거에서는 소설아가 상방에서 향을 조제하고 있었다.

민씨가 소명주, 소명준을 데리고 찾아왔을 때, 마당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오 어멈과 연서가 보였다.

"오 어멈, 여기서 뭐 하는 게냐?"

오 어멈은 민씨 곁의 관리 부인였고, 연서는 소명준의 측근 하인이었다.

단이가 대답했다.

"부인님, 오 어멈과 연서가 잘못을 저질러 큰 아가씨께서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민씨는 콧방귀를 뀌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인님, 오셨습니까."

소설아는 민씨가 올 것을 이미 예상했기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민씨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설아야, 그동안 집안 살림을 맡느라 수고 많았다. 이제 명주도 돌아왔으니 살림권을 다시 돌려주려거라. 명주가 있는데 이 집안 살림을 계속 네가 맡고 있을 이유는 없지 않느냐."

소설아가 내놓지 않을까 봐 소명준이 거들었다.

"원래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네가 대신 맡았던 건데, 네 손에 들어가더니 도통 내놓을 생각을 안 하더구나…"

분명 민씨가 맡아달라고 애원했던 일인데, 소명준의 입을 거치니 소설아가 권력을 가로챈 꼴이 되었다.

소설아가 덤덤하게 말을 잘랐다.

"내놓겠습니다."

"단이야, 장부와 패를 가져와서 부인님께 드리거라."

단이는 미리 준비해 둔 물건들을 올렸다.

"부인님, 받으신 뒤에 서명해 주십시오. 하인을 시켜 부인님의 사람들과 함께 창고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민씨의 눈짓에 설강이 앞으로 나와 장부와 패를 받아 챙기더니, 잠시 살핀 후 작은 소리로 귀띔했다.

"부인님, 뭔가 빠진 것 같습니다."

민씨가 물었다.

"무엇이 빠졌느냐?"

설강이 큰 소리로 말했다.

"향료 가게 장부와 가게 집문서, 점원들과 점주들의 계약서가 빠졌습니다."

"향료 가게 말씀이십니까?"

소설아가 짚어주었다.

"부인님, 그건 제 것입니다."

소명준이 소리를 질렀다.

"뭐가 네 것이라는 것이냐?! 그건 후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차린 가게인데 어찌하여 네 것이란 말이냐?!"

"분명히 말해두는데, 향료 가게는 우리 위원후부의 재산이다. 사사로이 가로챌 생각 말거라!"

소설아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처음 제가 향료 가게를 운영할 때, 부인님께서 이 가게들은 전부 제 것이니 이익이 나든 손해가 나든 후부와는 상관없다고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민씨가 분명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소설아가 큰 손해를 봐서 후부가 메꿔야 할 상황이 올까 봐 겁이 나서 한 말이었지, 장사가 이렇게 커지고 돈을 많이 벌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명준이 화를 냈다.

"무엄하다, 어머니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내놓으라면 내놓을 것이지, 웬 말이 그리 많은 것이냐!"

단이가 눈을 부릅뜨고 암탉이 병아리를 보호하듯 소설아 앞을 가로막았다.

"향료 가게는 안 됩니다! 향료 가게는 큰 아가씨의 사유 재산이자 혼수입니다!"

그녀는 큰 아가씨와 함께 비바람을 맞으며 가게 한 곳에서 열 곳까지 조금씩 키워나가는 과정을 함께했다.

큰 아가씨가 밤을 새워 향을 조제하고, 가게에서 각 가문의 부인님과 관리인들에게 비위를 맞추며 얼마나 많은 조롱과 냉대를 견뎠는지 똑똑히 보았다.

그 고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단이였다.

처음 가게를 열 때, 위원후는 소설아가 바깥일에 나서는 것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며 온갖 방해를 다 했다.

그러다 소설아가 돈을 벌기 시작하자 살림을 맡겼고, 가게 수익으로 이득을 누리면서도 소설아에게서 돈 냄새가 난다며 멸시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부인이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져가려 하다니.

"부인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저 입을 쳐라!"

소명주가 서슬 퍼렇게 소리쳤다.

"향료 가게의 향은 전부 후부 조상의 비법으로 만든 것인데, 언제부터 언니만의 것이 된 것이냐?!"

단이가 대꾸했다.

"아닙니다, 향료 가게의 향은 전부 큰 아가씨께서 하나하나 조제하신 것이지, 비법 같은 건 본 적도 없습니다…"

덩치 큰 하녀 둘이 단이의 양옆을 붙잡고 팔을 휘둘러 뺨을 때리려 했다.

소설아가 그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그만하십시오. 단이를 때리면 누가 가게 문서를 가져다줍니까?"

소설아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켰다. 소명주가 왜 저렇게 당당한가 했더니, '비법'이라는 걸 찾아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좋은 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비법만으로는 부족하며, 향료사의 솜씨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게다가 소설아의 가게에서 가장 잘 팔리는 향은 그녀가 비법을 단 한 번도 적어둔 적이 없었다.

모든 비법은 오로지 그녀의 머릿속에만 있었고, 온 경성을 통틀어 오직 그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한 향이었다.

향료 사업이 세도가들에 의해 독점되기 쉬운 구조임에도 그녀의 가게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향료는 원가가 매우 높아서 조제한 향이 팔리지 않으면 두 달도 못 가 소명주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소설아는 암암리에 이 가게들을 진정한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만들 수 있었다.

소명준이 버럭 화를 냈다.

"소설아, 좋게 말할 때 듣거라! 원래 우리 후부의 산업이니 독차지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소설아가 미소를 지었다.

"가져가십시오, 제가 드리지요."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조진만
너무 재미 있어요.어렇게 재미 있는 소설은 처음이예요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428화

    위원후부.소명주는 소설아가 준 전장 문서를 찾아냈다. 살펴보니 과연 위조된 것이었다.“소설아가 감히?! 연화 군주 앞에서 나한테 가짜 문서를 내밀어?!”민씨는 눈앞이 뒤집힌 듯 가짜 문서를 단숨에 찢어버렸다.“안 되겠어. 군주 마마를 찾아가서 직접 따져야겠어. 누구 말이 옳은지 공정하게 판단해 달라고 해야지.”민씨가 몸을 돌리려 하자 소명주가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았다.연화 군주에게 뺨을 맞은 자국은 아직도 민씨의 얼굴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어머니, 군주 마마가 더 이상 저희를 도와주지 않을까 봐 걱정돼요.”민씨가 뺨을 어루만졌다. “군주 마마께서 정신이 나가신 모양이구나. 처음에는 분명 우리 편을 들어주셨는데, 어째서 갑자기 소설아 편을 드시는 게야?”민씨와 소명주는 한참을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았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진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연 어멈은? 연 어멈을 불러서 직접 물어보거라.”두 사람은 위원후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연 어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결국 영작을 불러 묻자, 그제야 영작이 입을 열었다.“연 어멈은… 죽었습니다.”민씨의 두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소설아 그 천한 것이, 정말 못하는 짓이 없구나! 감히 연 어멈까지 죽이다니!”민씨는 소명주를 끌어안았다. “명주야, 그 애가... 그 애가 알아채지는 않았겠지?”소명주가 위로했다. “어머니, 그럴 리 없어요. 괜히 겁먹지 마세요.”그러고는 영작을 향해 물었다. “연 어멈은 어쩌다 죽었느냐?”영작이 그제야 말했다. “부인께서 오해하셨습니다. 큰 아가씨가 한 일이 아닙니다. 연 어멈은 연화 군주께서 사람을 시켜 물에 빠뜨려 죽이신 것입니다.”소명주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소설아 그 천한 것이 정말로 연화 군주를 제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민씨는 처음에는 손끝을 떨더니, 이내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명주야, 말해 보거라. 군주 마마가 어째서 그 아이를 돕는 것이냐?”소명주는 민씨를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427화

    안덕수는 안성주를 양아들로 들여 경성으로 데려와 애지중지 보살폈다.안성주는 그의 평생 유일한 혈육이었다.안성주의 부고를 듣고 안덕수는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슬픔에 빠져, 그날 밤 곧장 추영우를 찾아갔다.“구황자 전하, 부디 소인을 좀 도와주십시오! 성주 그 녀석이 조금 막돼먹긴 했어도 나쁜 마음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어서는 안 됩니다!”눈물범벅이 된 안덕수를 보며 추영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안 태감, 그 사건은 형부에서 조사 중이시다. 형부는 셋째 형님의 영역이니, 내가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다. 차라리 셋째 형님께 부탁드리는 게 나을 것이다.”형부 쪽에서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위원후부의 화연에는 애초에 안성주를 초대하지 않았다. 안성주가 평소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다녔던 터라, 형부에서는 그가 밖에서 누군가의 원한을 사서 살해당한 뒤, 범인이 시신을 위원후부에 던져 넣어 누명을 씌운 것으로 판단했다.이 일은 위원후부와 무관하다는 결론이었다.안덕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구황자 전하, 소인은 그저 진상만 알고 싶습니다.”금의위가 사건을 맡는다면 형부보다 훨씬 철저하게 진상을 파헤칠 터였다. 구황자 전하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안덕수였기에,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구황자 전하께서 이번 일을 도와주신다면, 소인이 반드시 그 은혜를 갚겠습니다.”안덕수는 폐하께서 아직 황제위에 오르시기 전부터 곁을 지켜 온 최측근이자,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대태감이었다. 때로는 그의 말 한마디가 태후의 뜻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할 정도였다.안덕수의 도움이라면 태자조차 탐낼 정도였다.추영우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안 태감, 나는 바라는 것이 없다. 그대의 도움을 얻어봐야 크게 쓸모도 없고.”“구황자 전하, 부디 소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주는 소인의 유일한 혈육입니다… 성주가 떠나고 나니, 소인은 이제 이 생에 아무런 여한도 남지 않았습니다…”안덕수가 애원을 거듭하자, 추영우는 마지못해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426화

    소설아는 의란거로 돌아와 뜨거운 차를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셨다.눈을 감자 안성주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안성주가 정란헌에 숨어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방 안에는 최음향이 피워져 있었고, 안성주는 침상에 누워 그녀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문을 연 소설아는 마당의 돌의자에 앉은 채 오랫동안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참다못한 안성주가 먼저 문을 열고 나왔다. 방탕한 청년은 음흉하게 웃으며, 최음향을 너무 많이 들이마신 탓에 흐리멍덩한 눈빛과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말했다.“낭자, 어서 들어오시지요. 마당 문은 이미 잠겼으니 나가지도 못할 겁니다. 얌전히 굴면 이 몸이 아주 다정하게 대해주지요. 말만 잘 들으면 아프지도 않고 기분만 좋을 겁니다. 한 번 맛보면 또 생각날 텐데…”안성주가 소설아를 붙잡으려 하자, 소설아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도련님. 누가 도련님을 사주해서 저를 찾아오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시킨 일인지 말씀해 주시면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안성주는 소설아의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했다. 흐릿하게 풀린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며,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음탕한 말을 늘어놓았다.“안 대인께서 아가씨의 목욕도를 보여주시더군요. 피부가 어찌나 희고 고운지, 밤낮으로 그 모습이 떠올라 애가 탔습니다. 게다가 낭자와 혼인하게 해주겠다고 약조까지 하셨지요. 그러니 어서 이리 오십시오. 더는 참을 수가 없으니! 아아, 낭자… 정말 매혹적입니다.”점점 더 흥분하는 안성주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소설아는 픽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문가에 다다른 소설아는 먼저 손을 뻗어 안성주의 가슴에 얹었다.“도련님의 심장이… 무척 빨리 뛰네요.”안성주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소설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도 덩달아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제 심장은 이보다 더 빨리 뛸 수도 있답니다…”그 순간, 소매 속에 숨겨 두었던 다섯 발의 암기가 일제히 날아들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촉이 그의 가슴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425화

    '요망한 년, 네년이 언제까지 기고만장한지 두고 보자!'관원들이 들이닥치자 위원후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밖으로 불려 나왔다. 월 이낭 역시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소설아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그녀의 자리를 연화 군주 곁으로 마련해 주었다.“이낭께서는 홀몸이 아니시니 군주 마마 곁에 앉으세요. 그래야 안전하지요. 눈먼 것들에게 부딪히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고맙습니다, 큰 아가씨.”월 이낭은 연화 군주 곁에 앉았지만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배를 감싸 안은 채 잔뜩 경계하는 모습이었다.연화 군주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다 여겨 고개를 돌려 몇 번이나 힐끔거렸다.이연주가 연화 군주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그 연 어멈이라는 자 말이야. 원래 안 대인 댁 노비였다며? 그런데 대체 어쩌다 위원후부에서 일하고 있는 거지? 성이 연씨인 걸 보면 안 대인 댁에서 대대로 부리던 노비였을 텐데. 경성으로 돌아와 일자리를 구했다면 마땅히 안 대인 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런데 어째서 위원후부로 기어들어 온 걸까?”연화 군주 역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집으로 돌아가면 한번 알아봐야겠어. 부군 댁에 연 어멈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말이야.”이연주가 조용히 당부했다.“아무도 모르게 알아봐. 안 대인에게는 말하지 말고.”연화 군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언니?”이연주가 대답했다.“노부인의 은혜를 입어 노비 신분에서까지 벗어난 자라면 십중팔구 충성을 인정받은 측근이었을 거야. 네가 안 대인 댁에서 오래도록 충성을 다한 사람을 때려죽인 셈이니, 안 대인의 마음이 어떻겠어? 물론 연 어멈이 스스로 화를 자초했고, 후작 어르신께서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분도 아니시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의 사람을 건드릴 때는 그 주인까지 생각해야 하는 법이잖아. 혹여 누군가 중간에서 이간질이라도 했다가 너와 안 대인의 사이가 틀어질까 봐 하는 말이야.”연화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언니.”이연주는 씩 웃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424화

    민씨는 뺨을 맞고 혼이 나간 듯, 뺨을 감싸 쥔 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이연주가 코웃음을 치며 매섭게 따져 물었다.“마당엔 설아의 흔적조차 없는데, 어찌 이 일을 억지로 설아의 탓으로 돌리려 하십니까?! 부인, 제가 보기엔 부인께서 설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만을 기대하신 것 같습니다만?”고개를 들어 안을 훑어보니 본채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소설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방 안에는 오직 사내의 시신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이런 상황에서조차 소설아를 끌어들이려 하다니, 실로 악독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민씨 역시 시신을 보고 크게 놀란 터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저, 저는 설아가 외간 사내와 단둘이 별채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곳에 그 애밖에 없었으니, 무심결에 그 애가… 그 애가 죽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소명주가 다가가 민씨를 부축해 일으키며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이 부인,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께서 너무 놀라 정신이 없으신 모양입니다.”연화 군주와 이연주는 이미 민씨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소설아를 계속 모함할수록 오히려 민씨를 향한 의심만 커질 터였다. 여기서 더 억지로 소설아를 물고 늘어졌다가는, 도리어 처음부터 꾸며낸 일이라는 의심을 살 게 뻔했다.소명주의 얼굴에 한 줄기 수심이 스쳤다.“설아 언니는요? 혹시 언니도 변을 당한 건 아니겠지요?”소설아의 흉한 꼴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내심 아쉬웠다. 소설아, 그년을 너무 얕본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을 무사히 빠져나간 것이란 말인가. 간도 크지, 감히 사람까지 죽이다니.하지만 사람을 죽였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내가 평범한 자일 리 없었다. 그가 바로 사례감 대태감 안덕수의 수양아들, 안성주였기 때문이다. 안덕수는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심복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조차 그를 마주하면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한발 물러설 정도였다. 그런 안덕수가 이 일의 책임을 묻고 나선다면, 소설아는 결단코 사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423화

    연 어멈은 세 명의 건장한 노파에게 붙들린 채, 물이 가득 담긴 대야에 머리가 푹 처박혔다.그녀는 이연주가 이토록 독하게 곧장 제 목숨을 거두려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격렬하게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체구도 워낙 큰 데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기까지 하니, 세 하녀도 그녀를 제대로 붙잡아 두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하녀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고 말았다.이연주가 매섭게 쏘아붙였다.“포박해서 다시 처박아라. 남을 모함하려 드는 저런 버러지 같은 년은 기필코 죽여야 한다!”막일을 하던 노파가 밧줄을 가지러 마당 쪽으로 몸을 돌렸다.연 어멈은 두 눈에 핏발이 선 채 동공까지 풀려,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군주 마마, 군주 마마! 저를 죽이시면 아니 됩니다! 저는 안 대인, 안씨 가문 사람입니다!”연화 군주가 미간을 찌푸렸다.“거짓말하지 마라. 난 널 본 적도 없다!”연 어멈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군주 마마, 소인은 본래 노부인을 모시던 사람입니다. 군주 마마께서 안씨 가문으로 시집오시기 전, 노부인께서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노비 신분을 면해 주셨습니다. 그 뒤 타지로 시집을 갔다가 최근에야 경성으로 돌아왔습니다. 부디 노부인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저를 살려주십시오!”연화 군주는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노부인의 얼굴에 먹칠을 한 주제에, 감히 그분의 체면을 들먹여? 더더욱 죽어 마땅하구나!”노파가 밧줄을 가져와 연 어멈을 꽁꽁 묶은 뒤, 다시 물대야에 머리를 짓눌러 처박았다.소설아는 연 어멈이 격렬하게 발버둥 치다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는 모습을 싸늘한 눈으로 지켜보았다.연 어멈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고 나서야, 소설아는 그제야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가냘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군주 마마, 연주 언니.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연화 군주는 소설아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험한 일이니 너는 몰라도 된다.”이연주는 하인들에게 연 어멈의 시신을 치우게 한 뒤, 입을 열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1화

    "형부… 서두르지 마십시오…""내가 어찌 서두르지 않겠느냐, 곧 있으면 네 언니가 올 텐데…"바람이 등나무 꽃을 흔들며 고요한 연못에 파문을 일으켰다.소설아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꿈속에서 그녀는 아직 시집가기 전이었다.그녀는 침실 문 앞에 서서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탕한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자세히 분별하지 않아도 안에 있는 남녀가 자신의 정혼자 원태준과 동생 소명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녀의 정혼자와 동생이, 그녀의 침실에서, 그녀의 침대 위에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침실 안의 목소리는 마치 그녀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6화

    민씨는 소명주의 명예를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원태준과의 혼사는 소설아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춘경원에서 나오자, 소명주가 소설아를 불러 세웠다."언니."소명주가 한 걸음 다가서며 탐색하는 눈빛으로 소설아를 바라보았다."언니, 태준 오라버니를 마음에 들어 하더니, 어찌 그리 쉽게 포기하시는 겁니까? 설마 화가 나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그녀는 소설아 역시 회귀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지난 생에서 소설아는 이 혼담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었다. 원태준의 어머니가 소설아를 극도로 싫어함에도 소설아는 기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5화

    소명준은 왕 태의 댁에서 한 시진 넘게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너희 하인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감히 본 세자를 이렇게 홀대하다니!"어린 하녀가 깍듯하게 대꾸했다."세자 저하, 저희 주인님께서는 오늘 시간이 없으셔서 손님을 받지 않으십니다."소명준이 욕설을 내뱉었다."정말 예의라곤 없구나. 본 세자 앞에서 감히 '노비'라 자칭하지도 않고 예의를 밥 말아 먹었느냐!"하녀가 코웃음을 쳤다."공자님이 대체 누구신데요?"소명준은 모욕감을 느꼈다."나는 위원후부 세자 소명준이다!"하녀가

  • 이번 생은 가족부터 다시 선택할 거야   제4화

    대청에서 나온 소설아는 거처를 새로 옮겼다.그 연놈이 더럽힌 곳에는 단 한 발자국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이 후부도 이제는 더는 머물 곳이 못 되었다. 하지만 조정의 법도상 여인은 홀로 호적을 가질 수 없으니, 혼인도 하지 않은 몸으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후부를 떠나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야 했다.소설아가 하녀들을 시켜 이삿짐을 옮기게 하고, 거처를 옮긴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소명주의 시녀가 찾아왔다. "큰 아가씨, 둘째 아가씨께서 노비를 보내 물어보라 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