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태성 펜트하우스의 넓은 거실.
평소라면 최고급 미술품이나 서류들이 놓여 있어야 할 거대한 대리석 테이블 위에, 오늘은 형형색색의 기묘한 물건들이 한가득 올려져 있었다."회장님, 대표님. 전통적인 돌잡이 상에 올라가는 기본 품목들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김 비서가 테이블 한쪽을 가리키며 깍듯하게 보고했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명주실, 학자를 상징하는 붓과 벼루, 재물을 뜻하는 엽전, 그리고 용맹함을 의미하는 활과 화살입니다."
하지만 그 소박하고 정겨운 물건들을 내려다보는 두 지배자의 시선은, 마치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보는 것마냥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치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차태경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명주실 타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명령했다."내 아들의 무병장수는 저딴 싸구려 실오라기가 아니라,
"당신은 정말이지……."태경이 연우의 이마에 맞대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수십 년을 매일같이 사랑한다고 말해도, 늘 내 심장을 처음처럼 뜯어놓고 미치게 만드는 유일한 신이군.""나를 신으로 만든 건 당신의 맹목적인 믿음이었죠."연우가 까치발을 들어 태경의 단단한 목에 두 팔을 감아올렸다."그리고 이 신은, 당신의 그 맹목적인 신앙에 영원히 보답할 준비가 되어 있고요."연우의 그 달콤하고도 도발적인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경의 칠흑 같은 동공이 걷잡을 수 없는 열기로 타올랐다.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연우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은 채, 그녀의 붉은 입술을 맹렬하게 집어삼켰다."아아! 아빠! 우리 아직 다 보고 있다고! 키스는 나중에 텐트 들어가서 해!"은우가 장난스럽게 소리치며 여자친구의 눈을 가려주는 시늉을 했고, 지안은 얼굴을 붉히며 도윤의 품에 안겨 킥킥거렸다.하지만 아이들의 그 유쾌한 야유조차, 두 사람의 짙고 깊은 입맞춤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달빛이 부서지는 바닷가.잔잔한 파도 소리와 은은한 현악기의 선율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호흡을 깊게 탐하며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도 지독한 서약을 다시 한번 심장 깊숙이 각인시키고 있었다.상처 입고 벼랑 끝에 섰던 두 마리의 짐승이 만나, 세상을 완벽하게 발밑에 꿇리기까지 걸린 25년의 시간.그 길고 치열했던 전쟁의 흔적은 이제 단 한 톨의 흉터도 남지 않은 채, 서로를 향한 가장 절대적이고 눈부신 사랑의 결정체로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지중해의 별빛은,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의 부부가 써 내려간 이 빛바래지 않는 서약을 영원토록 축복하듯 눈이 시리도록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달빛이 쏟아지는 지중해의 해변, 은은한
잔잔하게 밀려드는 지중해의 파도 소리와, 밤공기를 부드럽게 가르는 현악 4중주의 선율.수만 개의 별빛이 쏟아지는 프라이빗 아일랜드의 해변에서, 차태경과 서연우는 서로의 두 손을 굳게 맞잡은 채 서 있었다.태경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연우의 손을 놓고, 턱시도 안주머니로 향했다.그가 꺼낸 것은 낡고 해진 검은색 벨벳 상자였다.그것은 25년 전,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 속에서도 두 사람이 계약으로 시작한 관계를 진실한 부부의 결속으로 완성하던 날, 태경이 연우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던 바로 그 웨딩 링의 케이스였다.딸깍.태경이 상자를 열자, 밤하늘의 별빛을 머금은 두 개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영롱한 빛을 발했다."……."반지를 집어 드는 태경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수조 원의 딜을 성사시키는 계약서에 서명할 때도, 자신을 죽이려던 적들의 목에 칼을 겨눌 때도 단 한 번의 흔들림조차 없었던 그 무자비한 짐승의 손이.오직 눈앞의 여자를 마주하고 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시나무처럼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이다."차태경 씨."연우가 그 떨리는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며, 아주 나른하고도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천하의 태성그룹 회장님이 반지를 끼워주기도 전에 이렇게 긴장해서야 쓰겠어요?""……어쩔 수가 없습니다."태경이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로 연우를 깊게 응시했다."25년 전 그날, 수많은 하이에나 떼들 앞에서 당신에게 이 반지를 끼워주던 순간부터. 내 심장은 단 하루도 긴장을 늦춰본 적이 없으니까."태경의 칠흑 같은 동공이 일순간 아스라한 과거의 기억 속으로 젖어 들었다.강씨 가문의 그 지독한 멸시와 배신 속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자신들이 피와 땀으로 일구어낸 완벽한 성벽 안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만이 하객으로 참석한 이 고요한 바닷가.어떤 권력의 암투나 비즈니스의 계산도 섞이지 않은, 오직 서로를 향한 투명하고 온전한 사랑만이 존재하는 두 번째 서약식이었다."준비 다 끝났습니다! 연주 시작할게요!"모래사장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현악 4중주 연주자들을 향해 은우가 신호를 보냈다.스르륵.잔잔한 파도 소리 위로,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우아한 첼로와 바이올린의 선율이 겹쳐지며 흐르기 시작했다.태경의 호흡이 일순간 턱, 하고 멎어버렸다.버진로드의 반대편 끝, 야자수 그림자가 걷힌 달빛 아래로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연우야."태경의 입술 사이로 앓는 듯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순백의 실크 원피스를 입은 서연우.과거의 그 무겁고 화려했던 티아라나 갑옷 같은 웨딩드레스가 아니었다.몸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가볍고 우아한 하얀 드레스는, 바닷바람에 기분 좋게 흩날리며 그녀의 고결한 자태를 더욱 눈부시게 만들고 있었다.머리에는 시아가 직접 엮어준 작은 은방울꽃 화관이 얹혀 있었고,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에는 그 어떤 긴장이나 슬픔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어머님, 정말 아름다우세요.""우리 엄마 미모는 25년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레전드라니까."지안과 시아가 두 손을 모은 채 감탄을 금치 못했고, 도윤과 은우 역시 벅찬 표정으로 어머니의 걸음을 눈에 담았다.사박, 사박.연우가 굽 높은 구두 대신 맨발로 하얀 모래를 밟으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태경은 심장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듯한 지독한 전
“그때는 은우가 아직 없었군요.”지안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은우가 과장되게 가슴을 움켜쥐었다.“역시 나만 또 빠졌어.”연우가 웃으며 막내아들을 바라보았다.“그때는 아직 네가 우리에게 올 줄 몰랐으니까.”그녀가 은우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이 편지에 네 이름까지 가장 먼저 적고 싶네.”은우의 장난기 어린 얼굴이 순간 조용해졌다.그는 괜히 시선을 돌리며 코끝을 훔쳤다.“뭐야. 갑자기 사람 울리기야?”연우는 미소를 지은 채 봉투의 실링을 천천히 뜯었다.15년 전의 자신이 남긴 문장들이 낡은 종이 위에서 다시 살아났다.그 편지는 세상을 지배하라는 명령도, 제국을 더 크게 만들라는 유언도 아니었다.차태경에게는 여전히 자신의 가장 지독하고 충직한 공범으로 남아달라는 말.도윤에게는 힘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법을 먼저 기억하라는 말.시아에게는 누구의 왕관도 아닌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빛나라는 말.그리고 마지막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15년 뒤에도, 우리는 서로의 가장 완벽한 가족이기를.’한동안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도윤은 말없이 지안의 손을 잡았다.시아는 네 살의 자신이 그린 가족 그림을 더 단단히 품었다.은우는 눈시울을 붉힌 채 연우의 어깨에 장난스럽게 머리를 기대었다.태경은 아무 말 없이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당신의 편지는 틀렸군요.”“뭐가요?”“15년 뒤에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조심해, 차은우! 흙먼지 다 날리잖아!"시아가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며 뒤로 물러섰다.야자수 군락이 자리한 언덕배기, 소매를 걷어붙인 은우가 콧노래를 부르며 맹렬하게 모래를 파내고 있었다."야! 차은우! 네 엄마 얼굴에 모래 튀면 그 삽으로 네놈을 파묻어 버릴 줄 알아라!"태경이 연우의 앞을 넓은 어깨로 가로막으며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아, 진짜 아빠는 유난이야! 다 팠어, 다 팠다고!"투덜거리던 은우의 삽 끝에 무언가 둔탁한 것이 틱, 하고 부딪혔다.은우가 삽을 던져두고 모래를 맨손으로 파헤치자, 은빛으로 빛나는 육중한 티타늄 원통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찾았다! 우리의 15년 전 타임캡슐!"은우가 낑낑거리며 원통을 모래 구덩이 밖으로 끌어 올렸다.차태경답게, 가족의 타임캡슐 하나를 묻으면서도 항공기 소재인 특수 티타늄으로 주문 제작했던 어마어마한 물건이었다."어머, 정말 하나도 녹슬지 않았네."연우가 흥미로운 듯 눈을 반짝이며 다가갔다.지안과 금발의 귀족 청년, 그리고 은우의 여자친구까지 모두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캡슐 주위로 둥글게 모여들었다."자, 그럼 개봉해 볼까?"은우가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캡슐의 뚜껑을 열었다.압축되어 있던 공기가 치익,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고, 1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스란히 봉인되어 있던 가족들의 낡은 추억들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이게 내 거군.”도윤이 가장 먼저 캡슐 안에서 작은 검은 USB 하나를 집어 들었다.15년 전, 열 살의 자신이 처음으로 혼자 코딩한 다크웹 추적 알고리즘의 원본 소스와 네 식구가 처음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담아두었던 바로 그 USB였다.“아직도
"우리 엄마 아빠가 둘이서만 청승맞게 와인이나 홀짝이게 둘 수는 없잖아?"시아가 화려하게 손뼉을 짝, 짝 치자.거대한 요트에서 대기하고 있던 미슐랭 3스타 셰프들과 현악 4중주 연주자들이 일제히 모래사장으로 내려와 일사불란하게 파티 세팅을 시작했다.순식간에 텅 비어있던 해변이 수백 개의 은은한 꼬마전구 불빛으로 물들고, 달콤한 재즈 선율과 최고급 바비큐의 냄새가 지중해의 밤공기를 꽉 채웠다."이런 무식한 스케일의 난입이라니. 과연 내 핏줄들이 맞긴 하군."태경이 기가 막힌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입에서는 불평이 쏟아졌지만, 짐승처럼 흉흉했던 눈빛은 어느새 자식들을 향한 대견함과 벅찬 온기로 부드럽게 녹아내려 있었다."어머니. 늦었지만, 결혼 25주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도윤의 곁에 선 지안이, 예쁘게 포장된 작은 꽃다발을 연우의 품에 안겨주며 화사하게 웃었다."고마워요, 지안 씨. 우리 도윤이가 회사 일 핑계로 지안 씨 안 챙겨주면 나한테 언제든 말해요. 내가 아주 혼을 내줄 테니까."연우가 다정하게 지안의 손을 감싸 쥐며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지안이 뺨을 붉히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자, 도윤의 입가에도 평소의 그 차가운 포스를 벗어던진 아주 다정하고도 깊은 미소가 번졌다."자, 다들 모이시죠! 은혼식 기념 건배를 해야 하니까요!"은우의 요란한 주도하에, 넓은 해변의 파티 테이블로 가족들이 둥글게 모여앉았다.수만 명의 하객이 운집하는 스텔라 시티의 화려한 연회장도 아니었고, 전 세계 언론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공식 석상도 아니었다.오직 파도 소리와 낭만적인 재즈 선율만이 흐르는 바닷가.하지만 이 작고 따뜻한 원탁 안에는, 태성그룹의 무자비한 지배자인 차도윤, 유럽 사교계의 정점에 선 차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