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혜의 두 동료는 임지유를 흘깃거리며 보다가, 자연스럽게 몇 걸음 물러나 벽에 바짝 붙었다.
임지유 역시 연미혜를 보았지만, 곧바로 무심한 듯 시선을 돌렸다. 애초에 그녀를 신경 쓸 가치조차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다.
이어서 몇몇 임원들의 비위를 맞추는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임지유는 그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연미혜의 동료들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속삭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그 사람이 대표님 여자 친구죠? 와, 진짜 예쁘네요! 게다가 입고 있는 거 전부 명품이더라고요. 얼마나 비쌀까요?”
“그러게요! 진짜 재벌가 출신 느낌이 물씬 나잖아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랑은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이던데...”
수다가 점점 깊어지던 찰나, 한 동료가 연미혜를 힐끔 보며 물었다.
“미혜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연미혜는 눈을 내리깔며 담담히 답했다.
“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임지유는 사실 그녀의 아버지가 혼외 관계에서 낳은 아이였다. ‘사생아’라는 말은 이 상황에 꼭 맞는 표현이 아니었다.
여덟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더 이상 두 가정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며 일방적으로 이혼을 결정했고, 연미혜의 어머니와 결혼 생활을 정리한 후 임지유의 어머니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후, 연미혜는 이혼의 충격으로 정신이 무너진 어머니를 데리고 외삼촌 노현숙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외삼촌의 사업은 점점 기울었고, 반대로 임씨 가문의 재산은 날로 불어났다.
그때 들려온 소식은 하나였다.
그녀의 친부가 어린 시절 힘들게 자란 임지유에게 모든 걸 쏟아부어 최고의 환경, 최고의 교육, 그리고 최고의 지원을 해 준다는 소식이었다.
지금의 임지유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자연스럽게 임씨 가문의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니 임지유는 더 이상 ‘사생아’가 아니었다.
십여 년 동안 명문가의 딸로 살아온 그녀는, 어느새 몸에 밴 기품과 여유로 과거 연미혜가 ‘진짜’ 재벌가의 딸이었을 때보다도 더욱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연미혜는 어른이 되면 더 이상 그녀와 얽힐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임지유는 또다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연미혜와 경민준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녀는 오랜 시간 그를 좋아하며 애정을 쏟았지만, 경민준은 끝끝내 그녀를 바라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로 임지유를 처음 본 순간 그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미혜 씨, 괜찮아요?”
연미혜의 창백한 얼굴을 본 동료가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괜찮아요.”
‘곧 경민준과 남남이 될 거야. 민경준이 누구를 사랑하든, 이제 더 이상 나랑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지!’
그날, 연미혜는 더 이상 경민준과 임지유의 일에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밤 9시가 가까워질 때까지 일을 하던 그녀는 마무리하던 중 휴대폰 벨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발신자는 절친한 친구, 차예련이었다.
전화를 받자 들려온 건 예상 밖의 이야기, 차예련이 술에 취해 있으니 데리러 와 달라는 것이었다.
연미혜는 급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정리하고 차 키를 챙겨 회사를 나섰다.
20분 후, 목적지에 도착한 그녀는 차에서 내려 입구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반대편 주차장에서 한 아이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또렷한 옆모습을 보는 순간 연미혜의 발걸음이 멈췄다.
‘다솜이잖아? 아이리스에서 학교에 갔어야 할 다솜이가 어떻게... 혹시 민준씨와 함께 귀국한 건가?’
그녀의 직책상 회사의 기밀문서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경민준이 아이리스에서 진행 중인 사업을 아직 완전히 마무리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귀국도 단순히 업무 처리를 위한 일시적인 일정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솜이도 함께 돌아온 거였어?’
정확히 언제 귀국한 건지는 몰랐지만, 오늘 아침 이미 경민준을 마주쳤다는 걸 생각하면 하루 정도는 지난 셈이었다.
그런데도 경다솜은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귀국했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순간 연미혜는 손에 쥔 가방을 무의식적으로 더 꼭 쥐었다.
앞에서 신나게 뛰어가는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대리석 바닥에 가볍게 울리는 힐 소리를 죽이며 다솜을 따라가던 그녀는 호텔 로비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복도 끝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보게 되었다.
임지유와 경민준의 몇몇 친구들인 것을 확인한 연미혜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피했다.
그때 경다솜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지유 이모!”
그러고는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가 임지유의 품에 안겼다.
연미혜는 그들을 등진 채 소파에 앉아 의자 등받이 뒤로 몸을 숨긴 채 시선을 피했다.
“다솜이도 귀국했네?”
“지유 이모가 귀국한다길래 이모가 보고 싶을 것 같다고 제가 아빠한테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아빠는 예상보다 일을 빨리 끝냈어요! 그리고 특별히 이모 생일 전날에 맞춰서 귀국했어요. 그래야 이모 생일을 놓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이건 나랑 아빠가 직접 만든 목걸이예요. 지유 이모, 생일 축하해요!”
“와, 솜이랑 아빠가 직접 만든 거야? 이거 만들기 힘들었을 텐데... 솜이 진짜 대단하다! 아주 마음에 드는걸? 고마워!”
“지유 이모, 마음에 들어서 너무 다행이에요!”
경다솜은 임지유를 꼭 끌어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일주일이나 못 봤잖아요. 지유 이모, 너무 보고 싶었어요. 매일 전화라도 안 했으면 아이리스에서 하루도 못 버텼을 거예요.”
“이모도 솜이 보고 싶었어.”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연미혜의 몸이 순간 굳었다.
바로 경민준이었다.
연미혜는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발소리만 들어도 경민준인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혼 후 7년 동안, 그녀는 거의 매일 이 발소리를 기다려 왔으니까...
그의 걸음걸이에는 성격이 묻어 있었다. 느긋하면서도 침착하고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경씨 가문의 어르신들에게도 무심한 듯 한결같았으니... 설령 하늘이 무너져도 그는 태연할 것 같았다.
연미혜는 이 세상에 그를 동요시킬 사람과 일이 없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임지유가 나타난 순간, 그 믿음에 예외가 생겼다.
연미혜가 아직 생각을 곱씹고 있던 그 찰나에 경다솜이 반갑게 외쳤다.
“아빠!”
경민준의 친구들도 인사를 건넸고, 그는 짧게 대답한 후 임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임지유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
“아빠! 지유 이모한테 주려고 준비한 생일 선물은요? 빨리 드리세요!”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때 경민준의 한 친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여 경다솜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건 너희 아빠가 몰래 준비한 거라서 아마 아무도 없을 때 따로 줄걸? 우리까지 낄 순 없지. 하하...”
다른 친구들도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경민준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줬어.”
“네? 언제요?”
경다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더니 다시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빠 또 나 몰래 지유 이모 만나러 갔었나보네요! 쳇!”
경민준의 친구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그 순간 연미혜는 오늘 아침 경문 그룹에서 임지유를 봤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 건넨 거겠지...’
임지유는 살짝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 여기에서 이러지 말고 얼른 올라가자.”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연미혜는 머릿속이 텅 빈 듯했고 가슴 한쪽이 촘촘하게 아파져 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 친구를 부축하러 위층으로 향했다.
한편, 차예련과 임지유가 예약한 룸은 마침 같은 층에 있었다.
연미혜가 차예련을 부축하며 엘리베이터로 들어서려던 순간, 지나가던 정범규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