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준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그래. 알겠어.]토요일 아침.연미혜는 차를 몰아 고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고씨 가문의 가족 대부분은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 저택에는 도우미 몇 명만 있을 뿐, 고창완 혼자 머무르고 있었다.연미혜가 도착하자, 고창완은 직접 현관까지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우리 미혜 왔구나?”“할아버지,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려요!”연미혜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그의 얼굴에 여전히 기운이 있어 보이자 마음이 놓였지만 문득 걱정이 앞섰다.“많이 야위셨어요.”고창완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좀 빠지긴
고창완은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그는 경민준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연미혜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자! 미혜야, 할아버지가 밥 사줄게.”연미혜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네.”그 말이 끝나자마자, 고창완은 경민준에게 다시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연미혜와 함께 자리를 떴다.경민준은 여전히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차를 마셨고, 두 사람을 따라 나가지도, 붙잡지도 않았다.연미혜와 고창완이 함께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임지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떡해...”경민준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괜찮아. 시
그날 오후, 연미혜가 회의 중이던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고 화면에는 ‘경다솜’의 이름이 떴다.연미혜는 화면을 보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바로 끊었다.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경다솜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연미혜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그러자 경다솜도 더는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연미혜는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몇 분 뒤, 이번엔 경민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미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 회의를 마친 그녀는 다시 전화를 켰다. 전원을 켜
연미혜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경민준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아마도 임지유에게서 온 전화였던 모양이었다.경민준은 전화를 받으며 병실 밖으로 걸어 나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아. 너무 걱정하지 마.”그가 전화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마침 경다솜이 잠에서 깼다.경다솜은 아직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침대에 누운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아빠, 엄마...”그 순간 연미혜와 경민준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대답했다.“그래. 다솜아.”경다솜은 어지러운 듯,
도원시 과학기술협회 등 여러 기관이 공동 주최한 ‘과학기술 학술 포럼’은 이틀 전부터 본격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이번 포럼은 한 달간 이어졌다.총 200여 회에 달하는 교류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으며, 과학기술계와 산업계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넥스 그룹 역시 이번 포럼에 초청받은 기업 중 하나였다.오늘 오후는 연미혜와 김태훈 모두 관심을 두고 있는 ‘첨단 소재’ 분야의 핵심 세션이 예정되어 있었다.연미혜는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김태훈, 그리고 넥스 그룹의 기술진 몇 명과 함께 포럼 현장으로 향했다.김태훈은 넥스 그
연미혜와 김태훈 주위엔 여전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그런 가운데 하석진 자문위원과 정지원 교수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몇몇 참석자들이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하석진은 손짓으로 막으며 웃었다.“쉿! 듣고 있자고요.”그들은 말없이 외곽에 서서 김태훈과 연미혜가 질문에 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명문대 출신으로, 실력과 학식 모두 갖춘 이들이 적지 않았다.연미혜와 김태훈은 질문에 침착하게 답하면서도, 가끔은 몇몇 참석자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이들의 말에 완
며칠 사이, 연미혜는 시간을 쪼개 두어 번 더 기술 교류 행사에 참석했다.그중 두 번은 임지유와도 마주쳤지만, 이번엔 경민준이 동행하지 않았다.3월이 되자 비가 잦아졌다.이날도 행사장을 나서려던 참에 밖은 이미 빗물로 젖어 있었다.연미혜는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차에 둔 채로 내려온 터라 잠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릴 생각으로 정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아직 입구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익숙한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바로 임지유였다.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는 연미혜를 본 순간, 말끝을 흐리며 웃음을 거뒀
식당에 도착해 룸에 자리를 잡고 앉자 하승태가 물을 따르며 물었다.“이번 교류 행사에서 성과 있었어요?”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편이에요.”연미혜가 여러 교류 활동에 참여한 건, 얼마 전 유명욱이 자신과 김태훈에게 건넨 자료를 연구하기 위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몇 차례 참석하고 나니 그녀도 나름 새로운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이야기를 나누던 중, 연미혜가 물었다.“수연이는 요즘 어때요?”하승태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작년 하반기부터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요. 올해부터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친구들도 새
캐벳 스미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내 박사 과정 학생, 임지유입니다.”그는 임지유 외에도 네댓 명의 학생들을 데려왔는데, 그중 임지유만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다.임지유가 캐벳 스미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장에선 감탄과 부러움이 쏟아졌다.“세상에, 스미스 교수님 박사 과정 학생이라니 완전 대단한데?”“그런데 저렇게 예쁘기까지 해? 신이 모든 걸 다 줬네. 너무 불공평해!”“더 기가 막힌 건... 저 여자가 경민준의 여자 친구라는 거잖아.”“헐... 진짜 비교할 게 못 되네. 나 같은 인생은 어떡하라고...”순식간
이틀 뒤, 김태훈은 서원시에서 열리는 국제 인공지능 대회에 참석했다.지난해의 기술 박람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행사 역시 업계 관계자들이 AI 관련 최신 동향을 파악하고 기술을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였다.이번에 그와 함께한 일행은 연미혜, 그리고 최근 넥스 그룹에 새로 합류한 구진원을 포함한 몇몇 엔지니어들이었다.구진원을 비롯한 신입 직원들을 함께 데려온 이유는 아직 이들이 회사의 핵심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에 대한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서원시에 도착한 뒤, 행사장에 들어서자 이미 내부
구진원은 결국 연미혜와 함께 래프팅을 타볼 기회를 잡지 못했다.하지만 저녁 무렵, 그는 또 한 번 ‘우연히’ 연미혜와 연씨 가문 사람들을 마주쳤다.그녀의 외삼촌 연창훈과 외숙모 하여진은 반갑게 인사하며,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구씨 가문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연창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근데 어쩐 일이에요? 갑자기 도원시로 내려올 생각을 다 하고...”구진원은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도원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가 순간 머릿속을 스쳤던 그는 짧게 숨을 고르고
‘경민준 씨는 바쁘다며 다솜인 못 챙긴다더니, 정작 임지유랑은 같이 있고?’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연미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그보다 먼저, 경다솜이 해맑게 말했다.“엄마, 조금만 더 일찍 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헬기 타고 있을 때 영상 통화했으면 진짜 멋지게 보여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그 말에 연미혜는 조심스럽게 웃었지만, 경다솜이 이번 여행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져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그럼에도 마음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안에 찜찜함이 또 하나 차곡히 쌓였다.경다솜은
연미혜도 같은 생각이었다.그녀는 짧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그리고 약속 지켜. 다솜이 외할머니댁엔 절대 못 가게 해.]잠시 뒤, 경민준에게서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알겠어.]이후로 그는 더 이상 아무 연락도 해 오지 않았다.어린이날 연휴 다음 주말은 마침 주말이었다.그날 오후, 연미혜는 가족들과 함께 관광지에서 래프팅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때 차예련에게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임지유였다.차예련은 지금 쿠바나에 머무르며 패션쇼 준비로 한창이었다.사진을 본 연미혜는 메시지를 보냈다.[
‘넥스 그룹이랑 세인티가 해지한 건 알고 계신가요? 교수님의 제자인 김태훈 대표가 요즘 하는 짓을 보면 재능을 믿고 우쭐대는 것도 모자라, 사사건건 여자한테 휘둘려서 점점 판단력도 흐려지고 있던데요. 혹시 그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염성민은 막 입을 열려다 말았다.곁눈질로 경민준이 있는 걸 본 순간,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이 쑥 들어가 버렸다.사실 이 얘기는 전부 임지유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임지유의 옆에 경민준이 있었다.염성민의 입장에서 굳이 나서서 이런 말을 할 명분이 없었다.괜히 앞장서서 이런
임지유는 곧바로 해약서에 서명했다.배상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기한 내에 전액 납부하겠다고 약속했다.이 소식을 들은 김태훈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생각보다 행동이 빠릿빠릿해서 좋은걸?”해약 이후의 처리 절차는 변호사가 맡았고, 임지유가 서명한 뒤로는 김태훈과 연미혜 모두 더 이상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이삼일 뒤, 유명욱이 휴가를 맞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한동안 얼굴을 못 본 터라, 사제지간에 오붓하게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었다.연미혜와 김태훈은 회사를 나와 약속 장소인 식당에 도착했는데, 식당 입
임지유는 계약 해지를 결정한 뒤, 곧바로 경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경매 날에 김태훈 어머님이랑 얘기하다가, 내가 말을 좀 잘못했어. 그걸 사모님이 딱 집어냈고... 게다가 김태훈 쪽은 아예 세인티랑 엮일 생각이 없어 보여. 만약 소송으로 가서 이긴다고 해도 나중에 또 딴지를 걸어 협력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그쪽이 처음부터 협력 의지가 없었다면, 괜히 시간 끌기보다 지금 깨고 다른 파트너 찾는 게 낫다고 봐.”경민준은 그녀가 무슨 말을 실수했는지 구체적으로 묻
‘김태훈 어머니가 연미혜를 좋아한다고? 그게 말이 돼? 진짜라면... 어제 김태훈 어머니한테 했던 말들은 대체...’임지유는 갑자기 이미연이 대화 도중 갑자기 통화하러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머릿속에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비운 장면이 스치자, 묘한 불안감이 다시 가슴을 짓눌렀다.그녀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을 본 경민준이 곁에서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그 말에 임지유는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나 괜찮아.”그날 저녁, 임지유는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다.이미연이 연미혜를 마음에 들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