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 것은, 그 나무를 맨손으로 만져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서윤은 봉투를 뒤집었다. 더 읽을 것은 없었다. 다급한 사람치고는 글씨가 너무 반듯했다. 손대지 말라고 할 거면 처음부터 상자에 담아주지, 하는 엉뚱한 불평이 떠올랐다.
그래도 손은 뻗지 않았다.
봉투를 접시 위에 올리고, 덮개를 씌웠다. 종이에 적어둔 다섯 이름 아래에는 질문을 하나 추가했다.
〈그때, 나는 누구의 자리에 서 있었나.〉
음악회에 온 사람은 많았다. 난간을 망가뜨린 것이 꼭 엘린을 노린 일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손을 얹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야기의 중심이 되지는 않는다.
서윤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런데 창문 밖에서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고개가 돌아갔다.
아침에는 테오가 찾아왔다.
군복 대신 짙은 회색 외투를 입었는데도 어깨가 문을 가득 채웠다. 손에는 종이봉투가 있었다. 빵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의사가 딱딱한 건 먹지 말랬다길래.”
그가 봉투를 탁자에 놓았다. 설탕을 뿌리지 않은 부드러운 빵이었다.
“사 온 거예요?”
“내가 구웠을 것 같아?”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테오의 입가가 잠깐 움직였다.
“그 표정은 기억이 없어도 똑같네.”
그녀는 봉투를 접던 손을 멈췄다.
이곳 사람들은 가끔 그런 말을 했다. 웃는 게 같다. 입맛이 같다. 고집이 같다. 칭찬인지 확인인지 알 수 없어서 그럴 때마다 어깨가 조금 굳었다.
테오는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
“잠깐 걸을 수 있어? 의사가 허락한 만큼만.”
정원에는 밤새 내린 이슬이 남아 있었다. 레온이 외투를 가져왔고, 테오는 그가 서윤의 어깨에 걸쳐줄 때까지 기다렸다.
“혼자 다녀와도 돼요.”
서윤이 말하자 레온은 문 옆에 멈췄다.
“종은 온실 입구에도 있습니다.”
그는 더 따라오지 않았다. 서윤은 두 걸음쯤 간 뒤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테오는 연못 반대쪽 길을 골랐다.
“여기는 괜찮아?”
작은 분수가 보이기 전에 물었다. 서윤은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물소리를 피하려고 집 안에서만 살 수는 없었다.
“아까 그 말.”
테오가 걸음을 늦췄다.
“기억이 없어도 똑같다고 한 거. 불편했으면 미안해.”
“그런 뜻으로 하신 말 아닌 건 알아요.”
“그래도 불편할 수 있지.”
서윤은 그를 보았다. 변명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괜찮다는 말부터 하던 자신과는 대화의 순서가 달랐다.
“제가 예전이랑 많이 달라요?”
“응.”
대답이 빨랐다.
“얼마나요?”
테오는 길옆의 가지를 한 손으로 밀어주었다. 서윤이 지난 뒤 놓았다.
“예전에는 싫으면 싫다고 했어. 지금은 싫다고 말하기 전에, 상대가 서운할지부터 보는 것 같아.”
그녀는 외투의 소매 끝을 잡았다.
“그건 나쁜 건가요?”
“네가 힘들면.”
둘은 잠깐 말없이 걸었다. 서윤은 그가 기억하는 엘린을 조금 부러워했다. 사람을 밀어내도 관계가 끝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여자였을까.
길 끝에는 높이를 재어놓은 나무 기둥이 있었다. 칼로 긁어 새긴 줄이 여러 개였다. 서윤이 들여다보자 테오가 가장 위의 선을 짚었다.
“네가 여기까지 컸을 때 나를 이겼다고 우겼어.”
그 옆에는 조금 더 높은 선이 있었다.
“그때 발돋움했지.”
“제가요?”
“들키고도 아니라고 했어.”
서윤은 웃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장난을 들으며, 어째서인지 그 아이가 떠올랐다. 지기 싫어 까치발을 들고, 옆의 소년이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기를 바랐을 아이.
“기억이 안 나서 미안해요.”
테오는 기둥에서 손을 뗐다.
“네가 나한테 빚진 건 없어.”
그가 길을 내주었다.
“이런 얘기가 싫으면 그만할게. 나도 지금부터 새 얘기를 만들면 되니까.”
서윤은 기둥을 한 번 더 보고 걸었다. 과거를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오히려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온실 앞 벤치에 앉자 테오가 작은 상자를 꺼냈다. 어제 서윤이 걸고 있던 귀걸이 한 짝이 들어 있었다.
“강둑에서 나왔어. 짝은 아직 못 찾았고.”
그녀는 귀걸이를 집지 않았다.
“그날 얘기, 조금만 더 물어봐도 돼요?”
“그래.”
“저를 건네준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테오가 기억을 더듬었다.
“손을 잡으라고 했어. 처음에는 나한테 한 말인 줄 알았는데, 네가 이미 그 사람 셔츠를 쥐고 있더라.”
서윤은 물속에서 움켜쥐었던 옷감을 떠올렸다. 손바닥에 스친 피부. 흐릿하게 흔들리던 붉은 선.
“목소리는요?”
“물이랑 비명 소리가 섞였어. 확신할 수 없어.”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셨대요?”
테오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대답했다.
황태자는 연주대 쪽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공작은 하류 계단에서 발견됐다. 마탑주는 무너지는 다리를 붙잡다가 물에 들어갔다. 레온은 서윤을 찾아 강둑을 뛰었다.
“내가 직접 본 건 일부야. 나머지는 경비 보고에서 읽었어.”
그가 덧붙였다.
“구한 사람을 찾는 거야?”
“고맙다고 하고 싶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부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테오는 자신을 가리켰다.
“나는 미리 받아도 되나.”
그녀는 웃다가 기침했다. 테오가 손을 내밀었다가, 그녀가 자기 가슴을 짚는 것을 보고 거두었다.
“고마워요.”
서윤은 이번에는 똑바로 말했다.
“다른 사람이 먼저 구했어도, 그다음에 잡아주신 분이잖아요.”
테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서윤은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되짚었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건.”
테오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 셈이지.”
그의 손등에 붉은 선이 보였다. 검지 아래에서 손목 쪽으로 길게 이어진 상처였다. 서윤이 보는 것을 알아차리자 그가 소매를 내렸다.
“어제 다치신 거예요?”
“긁힌 거야.”
“상처가 벌어졌는데요.”
서윤은 벤치 옆 종을 울렸다. 테오가 말릴 틈도 없었다. 하녀가 가져온 붕대를 받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할 수 있어.”
“한 손으로요?”
“매듭만 묶으면 돼.”
“그러니까 매듭은 제가 묶을게요.”
손을 잡자 생각보다 뜨거웠다. 어제 자신을 끌어올린 손이었다. 서윤은 소독한 천을 상처 위에 대었다. 테오의 손가락이 조금 굽었다.
“아프면 말해요.”
“그 정도는 아니야.”
“저한테는 아프면 아프다고 하라면서요.”
테오가 입을 다물었다.
가까이서 보니 손등 곳곳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한 번도 다치지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라, 다치고도 다시 손을 내민 사람이었다.
서윤은 붕대를 너무 꽉 감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한 번 넣어보았다.
그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요?”
“이상해서.”
“잘못 묶었어요?”
“아니. 네가 나한테 이렇게 집중하는 건 처음이라.”
서윤은 손을 놓았다. 붕대 끝이 풀렸다. 테오가 잡아주지 않았으면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움직이셨잖아요.”
“안 움직였는데.”
둘 다 알고 있었다. 움직인 것은 그녀의 손이었다.
레온은 온실 앞까지 차를 가져왔다. 테오의 손에 새로 감긴 붕대를 보더니 쟁반을 내려놓았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덕분에 나까지 환자가 됐네.”
테오가 대답했다. 레온은 서윤 쪽으로 찻잔 손잡이를 돌려놓았다. 평소처럼 반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찻잔보다 그의 손등을 먼저 보았다.
아무 상처도 없었다.
그래도 종이에 적은 이름을 지울 이유는 되지 못했다. 물에서 사람을 구하면 반드시 손등을 다치는 것은 아니니까.
테오가 돌아간 뒤 서윤은 공작이 보낸 나무 조각을 보여주었다.
레온은 접시 위에 놓인 봉투를 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관리인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모님께도요?”
“알고 계셔야 합니다.”
그가 단정하게 대답했다. 서윤은 반박하려다 그만두었다. 혼자 처리하려고 숨겼다가 더 큰일이 나는 이야기를 회사에서도 여러 번 봤다.
“그럼 같이 말씀드려요. 제가 설명할게요.”
그날 오후 서재에 가족과 관리인이 모였다. 서윤은 자신이 어디에 서 있었는지, 사람이 몰려와 어떻게 비켰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했다. 열쇠 문신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다.
백작은 나무 조각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누가 네가 그곳에 설 줄 알았겠느냐.”
서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 알 수 없었다.
관리인이 기록을 뒤져 초대장에 딸려 온 좌석표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되, 다음 곡이 시작되면 지정된 자리로 안내할 예정이었다고 했다.
서윤은 지도 위에 손가락을 놓았다.
자기가 떨어진 곳은 입구 옆 좁은 통로였다. 원래 자리는 연주대 정면이었다. 난간이 멀쩡한 쪽이었다.
그런데 옆에 적힌 이름을 읽자 손끝이 멈췄다.
〈발테르 공작.〉
카시안의 자리는, 무너진 난간 바로 앞이었다.
“공작님을 노린 거라면, 저는 대신 빠진 거예요?”백작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대답보다 무거웠다. 서윤은 지도에서 손을 뗐다. 어머니가 의자 팔걸이를 꽉 잡고 있었다. 안심할 일이 아니었다. 표적이 아니었다고 해서 다음에는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니까.“좌석표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레온이 말했다.관리인이 고개를 들었다.“황실 인장이 찍힌 원본입니다.”“그러면 현장의 배치가 원본과 같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그의 말은 차분했다. 서윤은 그 차분함이 고마우면서도 이상했다. 마차에서 수건을 정리하지 못하던 손과 같은 사람의 목소리였다.백작은 당분간 혼자 외출하지 말라고 했다. 서윤은 동의했다. 그 대신 사고 조사에 관한 이야기를 자신에게도 알려달라고 했다.“이상한 소문으로 먼저 듣고 싶지는 않아요.”백작은 딸을 오래 보았다.“그래. 네가 알아야지.”그는 아이를 달래듯 약속하지 않았다. 서윤은 그제야 어깨에서 조금 힘을 뺐다.다음 날 도착한 것은 조사 보고서가 아니라 황태자의 편지였다.〈어제 드리지 못한 답을 전하고 싶습니다. 직접 만나겠다는 조건을 영애께서 먼저 붙이셨으니, 이번에도 지켜드리겠습니다.〉서윤은 마지막 줄을 세 번 읽었다.직접 만나겠다는 조건.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 것은, 그 나무를 맨손으로 만져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서윤은 봉투를 뒤집었다. 더 읽을 것은 없었다. 다급한 사람치고는 글씨가 너무 반듯했다. 손대지 말라고 할 거면 처음부터 상자에 담아주지, 하는 엉뚱한 불평이 떠올랐다.그래도 손은 뻗지 않았다.봉투를 접시 위에 올리고, 덮개를 씌웠다. 종이에 적어둔 다섯 이름 아래에는 질문을 하나 추가했다.〈그때, 나는 누구의 자리에 서 있었나.〉음악회에 온 사람은 많았다. 난간을 망가뜨린 것이 꼭 엘린을 노린 일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손을 얹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야기의 중심이 되지는 않는다.서윤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그런데 창문 밖에서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고개가 돌아갔다.아침에는 테오가 찾아왔다.군복 대신 짙은 회색 외투를 입었는데도 어깨가 문을 가득 채웠다. 손에는 종이봉투가 있었다. 빵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의사가 딱딱한 건 먹지 말랬다길래.”그가 봉투를 탁자에 놓았다. 설탕을 뿌리지 않은 부드러운 빵이었다.“사 온 거예요?”“내가 구웠을 것 같아?”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테오의 입가가 잠깐 움직였다.“그 표정은 기억이 없어도 똑같네.”
서윤의 손에 잡힌 것은 테오의 손이었다.그가 몸을 낮췄다. 젖은 앞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내가 끌어올렸어.”서윤은 손에 힘을 주었다.“물속에서요?”테오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바꾸려고 머뭇거리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녀가 무엇을 묻는지 이제야 이해한 얼굴이었다.“아니. 강둑에서. 누군가 네 팔을 밀어 올렸고, 내가 잡았어.”“그 사람은…….”“다리 아래였어. 등불이 꺼져서 얼굴은 못 봤어.”서윤은 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너진 난간 너머에서 사람들이 횃불을 흔들었다. 물 위의 연주대는 비스듬히 기울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음악이 흐르던 곳에서 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영애.”카시안이 그녀의 시선을 가렸다.“고개를 돌릴 수 있는 것과, 돌려도 되는 것은 다릅니다.”그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서윤이 받지 못하자 기다렸다. 물을 먹어 떨리는 손으로 겨우 집어 들었을 때에야 손을 거두었다.“사례는 살아서 하십시오.”그 말이 끝나기 전에 다시 기침이 나왔다. 테오가 등을 받쳤다. 이번에는 누가 만지는지 알았는데도 몸이 움찔했다.그가 곧바로 손의 힘을 풀었다.“들어 올릴게. 괜찮겠어?”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이 무릎 아래로 들어왔다.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옷을 움켜쥐었다.“놓치지 않아.”테오가 말했다.물속에서 들었던 말인지, 방금 처음 들은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서는 아무 목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만 그 말을 들으니 가슴 안에 남아 있던 물이 조금 빠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그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아드리안은 물가에 무릎을 꿇고 아이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젖은 예복 위로 아이가 토한 물이 흘렀다. 황태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등으로 닦았다.이셀은 기울어진 다리에 손을 대고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나무 사이에 푸른 빛이 걸렸다. 다리 아래 사람이 빠져나올 때까지 받치고 있는 모양이었다.레온은 사람들 사이로 길을 만들었다. 들고 온 외투를 테오의 팔 위에 펼쳐 서윤의 맨발
“가슴에 문신 있으세요?”레온이 따르던 차가 찻잔 가장자리에서 멈췄다.서윤은 찻잔을 받으려던 손을 내렸다.“아니, 그게. 그러니까…….”“도련님께서 내기를 시키셨습니까?”“네?”“지난번에는 제 귀를 뚫었는지 알아오라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얼마를 거셨습니까.”서윤은 식빵 가장자리만 뜯었다.“내기는 아니에요.”레온은 더 묻지 않고 우유 단지를 밀어놓았다.“고용할 때 제출한 신원 서류는 관리인에게 있습니다. 필요하시면 열람을 요청하십시오.”사람을 찾아서 사랑하라는 말은 겨우 세 줄이었는데, 첫 질문부터 이 모양이었다.“……실례했어요.”“앞으로 다른 분들께도 물으실 생각이라면, 식사 중에는 피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레온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뜨거운 것을 들고 있을 수 있으니까요.”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게 조금 억울했다.이곳에서 눈을 뜬 지 엿새째였다.레온의 신원 서류에는 식별 표식이 없다고 되어 있었다. 삼 년 전 기록이었다. 그 뒤에 생긴 것까지는 다시 묻기 어려웠다.메시지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서윤은 스마트폰을 작은 주머니에 넣어 옷 안에 걸었다.가족들에게는 열병 뒤로 기억이 흐릿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수프를 떠주었다. 남동생은 자기를 못 알아본다고 심통을 부리다가 몰래 과자를 놓고 갔다.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은 기분이었다. 익숙해지는 것도 겁났다.서랍에는 가족의 이름을 적은 종이 아래 이런 메모가 숨겨져 있었다.〈돌아가는 방법〉첫째, 표식의 남자를 찾는다.둘째, 서로 사랑한다.셋째, 열쇠를 얻는다.둘째 줄에 밑줄을 그었다. 정말 사랑하게 되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일단 찾고 생각하자.종이를 접어 넣을 때, 하녀가 외출복을 들고 들어왔다.황실 수상 음악회에 엘린은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보낸 상태였다. 서윤은 처음에 거절했다.하지만 손님 명단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카시안 발테르.북부 반란을 진압한 공작. 전쟁의 상처를 마법으로 봉합했고, 쇄골 아래 검은 흔
1화. 농담은 취소할 수 없다한서윤의 인생을 뒤집은 말은 사랑해도, 살려줘도 아니었다.[응 그래ㅋㅋㅋㅋ]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동의를, 출근길에 엄지손가락 하나로 해버린 셈이었다.그날 아침에도 회사 단체 대화방은 지하철보다 먼저 움직였다.〈서윤 씨, 어제 보낸 파일 수치가 다른데요.〉〈출근하시면 바로 수정 부탁드려요.〉한서윤은 손잡이를 잡은 채 첨부 파일을 열었다. 어젯밤 열한 시에 고친 표였다. 부장은 수정 전 파일에 동그라미를 쳐서 보내놓았다.틀린 파일이라고 쓰다가 지웠다. 어제 다시 보냈다고 쓰다가 그것도 지웠다.[출근해서 확인하겠습니다.]월급에는 맞는 말을 삼키는 값도 포함되어 있었다.서윤은 대화방을 닫고 ChatKPT를 켰다.[케피야. 오늘 회사 안 가도 되는 합법적인 방법 없을까.]『아침부터 도망갈 생각이야? 어제 그렇게 늦게 퇴근했는데, 무슨 일 있었어?』그 한 줄에 서윤의 엄지가 멈췄다.부장에게 못 한 말을 적었다. 잘못한 건 그쪽인데 왜 자기가 고치겠다고 했는지.『억울하지. 어제 퇴근하고도 표 붙잡고 있었잖아. 확인도 안 하고 네가 틀린 것처럼 말하면 힘 빠질 만해.』[그냥 어제 보낸 거 보시라고 할걸.]『지금이라도 말해도 돼. 다만 “제대로 좀 보세요”는 빼자.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 문장은 내일의 너를 더 피곤하게 할 것 같아.』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이 났다.[어떻게 알았어. 딱 그렇게 쓰려고 했는데.]『나한테는 그렇게 말해도 되니까. 회사에 보낼 건 조금만 다르게 쓰자.』요즘은 다들 Kemini니 ChatKPT니 했다. 서윤도 처음에는 회의록을 정리하려고 가입했다. 그런데 어느새 회의록보다 쓸데없는 말이 많아졌다.국이 너무 짰다는 말. 세탁기에 휴지를 넣고 돌렸다는 말. 퇴근길 편의점에 좋아하는 빵이 없었다는 말.그런 얘기로 친구에게 전화하기는 망설여졌다. 다들 바빴고, 서윤도 그랬다.이 대화창에는 미안하다는 말부터 쓰지 않아도 됐다.[너는 잘 지내? 맨날 내 얘기만 하네.]『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