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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오늘은 가지 마

last update 게시일: 2026-10-09 19:17:14

세린의 눈물이 겨우 멎었다. 하지만 마음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수선해진 상태에서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태준은 여전히 세린의 손을 잡고 있었다. 마치 손을 놓으면 그녀가 연기처럼 다시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인지, 도무지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간도 제법 지난 것 같아 세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태준아.”

“응.”

“나 이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그 말이 끝나자 태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더니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왜?”

너무도 즉각적인 질문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물음에 세린은 잠깐 말을 멈췄다.

“늦었어.”

태준은 병실 창밖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해가 중간쯤 떨어져 바깥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떼쓰는 아이처럼 볼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늦었는데.”

도저히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태준의 모습에 세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밖에 지금 해 떨어져 가. 그리고 이모도 이제 오실 거고.”

그 말을 듣자 태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엄마?”

“응.”

태준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망설임 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늘은 집에 들어가 봐. 병실에는 세린이가 있을 거니까 괜찮아. 세린이가 걱정돼서 도저히 집에 못 가겠대. 그러니까.”

자신을 눈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뻔뻔함에 질려 세린은 눈을 깜빡였다.

“뭐?”

태준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 올리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갑자기 연기라도 하듯 아픈 표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이렇게 다친 날 두고 그냥 가 버릴 생각은 아니지? 강세린, 너 아픈 날 두고 그냥 갈 만큼 매정한 여자는 아니잖아.”

대학교 시절에는 앳된 모습에 귀여운 풋풋함이라도 있었지, 지금 이 모습은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 그 자체였다.

세린의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두근, 두근.

자신의 거절에도 태준은 계속 밀어붙였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넘어오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태준의 행동에 세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태준은 여전히 세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물었다.

“있잖아. 너 출장 가기 전에 우리 혹시 싸웠어?”

세린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갑자기 왜 물어?”

태준은 잠깐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말했다.

“느낌인가? 꼭 몇 년 만에 만난 연인처럼 굴길래. 내가 손잡는 것도 불편해하고. 아무튼 뭔가 많이 이상해.”

세린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예전부터 묘한 부분에서 예리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태준이 갑자기 세린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리고 짓궂은 장난을 친 아이처럼 웃으며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삐진 거 맞네. 스킨십도 안 해 주고. 왜 삐진 거야?”

세린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한태준, 너 이 자식! 이게 무슨 짓이야!”

태준이 그녀의 손을 살짝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세린의 몸이 침대 쪽으로 조금 가까워졌다.

“나 아직 환자야. 설마 때리려고?”

태준이 또다시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왜 싸웠는지 기억이 없어져서 모르겠지만, 기분 풀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 좀 기분 풀어 주면 안 돼?”

세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하며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태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린아.”

“응.”

“나 눈 떴을 때.”

그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조금 낮아졌다.

“진짜 무서웠어.”

세린의 가슴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태준은 시선을 억지로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억이 좀 비어 있더라고.”

그러고는 잠깐 웃었다.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세린이 조용히 되물었다.

“뭔데?”

태준이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내 기억은 십 년 전으로 멈춰 있는데, 이상하게 너 생각은 계속 나더라.”

세린의 숨이 멎는 듯했다.

도저히 이 상황에서 태준을 밀쳐 낼 수가 없었다.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만 입가에 맴돌 뿐이었다.

“이상하지? 엄마 말로는 대학교 시절 이후의 기억이 전부 날아갔다는데, 너는 그대로잖아.”

그는 손가락으로 세린의 손등을 살짝 눌렀다.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세린의 눈가가 다시 뜨거워졌다.

태준이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웃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너 진짜 이상해. 평소 같으면 ‘한태준!’ 하면서 괜한 걱정하지 말라고 안아 줬을 텐데. 너무 차가워.”

세린의 얼굴이 순간 굳자 태준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맨날 먼저 안기던 사람이.”

그 말에 세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태준은 기억 속의 세린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세린아.”

“응.”

“여기 와 봐.”

태준이 손을 살짝 당겼다.

그 반동으로 세린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자 태준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조금만.”

“응?”

“가까이.”

세린은 결국 침대 옆에 앉았다.

그러자 태준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이게 낫다.”

태준이 툴툴거리며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멀리 서 있어서 이상했어.”

세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침대 한편에 앉아 있자 태준은 그녀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세린아.”

“응.”

“너 왔으니까.”

잠깐 숨을 골랐다.

“이제 괜찮아.”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세린과 연락이 닿지 않았을 때는 모든 것이 불안정했고, 숨이 막힐 듯 답답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세린이 병실에 들어오자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세린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그때였다.

태준이 갑자기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세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 진짜 많이 예뻐졌다.”

세린이 당황하자 태준이 웃었다.

“뭐라는 거야.”

“진짜.”

태준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원래도 예뻤는데.”

잠깐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지금은 더 예뻐졌어. 십 년 뒤 모습이라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세린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자 태준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나 기억 잃어서 그런가. 다시 반한 것 같다.”

세린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의 짓궂은 발언에 동요할 것 같아 억지로 태준의 시선을 피했지만, 태준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가지 마.”

그리고 다시 한번 말했다.

“오늘만 내 옆에 있어.”

그 말이 너무 간절하고 따뜻해서 세린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을 잡힌 채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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