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민혁은 밥이 도통 넘어가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밥알만 괜히 찔러댔다.그 모습을 본 인성이,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대표님, 그 밥이 대표님한테 뭐 잘못했습니까? 안 드실 거면 주세요. 제가 먹을게요.”인성의 말에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민혁을 바라봤다. 그중에는 예진도 있었다.예진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민혁은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아...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민혁은 인성을 노려보다가 결국 밥그릇을 그의 앞으로 밀어버렸다.“먹어요, 먹어요. 임 변 다 먹어도 돼요.”인성은 민망한 듯 웃더니 얼른 밥그릇을 받아 폭풍같이 먹기 시작했다.그때, 예진이 식사를 마친 예진이 핸드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쟁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민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핸드폰 화면을 힐끔 훔쳐봤다.대화창의 상대가 은주의 프로필 사진인 걸 확인한 순간, 가슴속에 걸려 있던 돌덩이가 스르르 내려앉는 듯했다.‘휴... 다행이다.’순간적으로 속이 시원해지자, 아까는 안 넘어가던 밥이 갑자기 당겼다. 민혁은 인성이 먹던 밥그릇을 빼앗아 오며 말했다.“임 변, 좀 작작 먹어요. 살찌면 한 변도 싫어할 거예요.”인성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름은 눈치가 빨랐다. 민혁의 감정이 전부 예진에게 맞춰져 있다는 걸 진작에 알아챘던 터였다.잠시 후, 쟁반을 두고 돌아온 예진이 자리에 앉자, 민혁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요즘 이슈 유지는 잘 되고 있어요. 내일이 바로 2심인데, 한 변, 준비는 어때요?”아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준비 다 끝났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하늘 씨의 억울함을 풀어드릴 겁니다.”인성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동의했다.예진이 덧붙였다.“근데... 내일은 제가 시험이라 법정에 못 가요. 대신에 한 변호사님, 꼭 힘내세요.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아름은 예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들뜬 은주는 영호 옆으로 더 바짝 다가갔다.영호 역시 뒤에서 들려오는 관중들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은주의 손을 꼭 잡아 손가락을 맞물렸다.곧 사회자가 무대에 올랐다.먼저 우승 커플에게 상품이 전달되었다. 상품은 최신형 TV 한 대였다.그리고 이어서, 대망의 베스트 커플 호흡상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객석에서는 기대와 긴장이 뒤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은주는 다른 팀이 얼마나 잘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우리도 꽤 괜찮게 했잖아.’스스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마침내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축하드립니다! 베스트 커플 호흡상은... 6번 커플!”은주와 영호는 마치 복권 1등에 당첨이라도 된 듯 서로를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관중들의 함성 속에서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은주가 무대로 걸어가려는 순간, 영호가 불쑥 그녀를 안아 들어 올렸다.“꺅!”당황한 은주의 얼굴이 붉어지자, 관중석에서는 더욱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은주는 황급히 영호의 가슴을 두드리며 속삭였다.“뭐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 보고 있잖아요. 얼른 내려놔요.”그러나 영호는 입꼬리를 올리며 태연하게 대답했다.“내 여자친구 안아 올린 건데 뭐 어때요? 보여줘도 상관없잖아요.”그렇게 은주는 영호의 품에 안긴 채 무대 위로 올랐다.수여된 상품은 커플룩 한 세트. 값비싼 건 아니었지만, 은주의 눈이 금세 반짝였다.행사가 모두 끝난 뒤, 두 사람은 곧장 밖으로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은주가 먼저 커플티를 입자, 영호도 바로 옆에서 따라 입었다.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맞춰 입은 커플룩 차림이 완성되었다.서로를 바라보며 웃은 뒤, 둘은 그 모습 그대로 나란히 저녁을 먹으러 향했다.점심 시간이 되자 예진에게서 은주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데이트는 어때? 영호 씨가 준비한 서프라이즈, 우리 공주 마음에 쏙 들었어?]영호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은주는 식탁 위에 놓인 음식 사진을 잽싸게 찍어 예진에게 보냈다.[밥 먹는 중이야. 데이트 완벽해
칭찬을 받은 은주는 자신감이 한껏 부풀면서,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으쓱거렸다.바로 그때, 방송이 울려 퍼졌다.남은 커플은 단 두 팀.즉, 영호와 은주 그리고 마지막 한 쌍의 대결만이 남은 것이었다.순간 공기가 팽팽하게 얼어붙었다.은주는 원래 승부욕이 강한 성격.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끝까지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지금은 어느 순간보다도 뒤가 불안할 때야... 하지만...’은주는 등을 맞대고 서 있는 영호의 체온을 느끼며 오히려 든든해졌다.둘은 천천히 경기장의 중앙으로 향했다.그러나 은주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상대 커플이 나무 뒤에서 튀어나와 총구를 곧장 은주에게 겨눴다.‘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몸이 굳어버렸다.영호가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늦었다.상대는 방아쇠를 당기려 하고 있었고, 은주가 총을 들 겨를이 전혀 없었다.영호는 반사적으로 은주를 끌어안으며 귀를 감쌌다.은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곧 품 속에서 영호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잠시 후, 조심스레 눈을 떴을 때, 영호의 조끼에서 노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승자는 상대 커플.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은주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 있었다.사실 특별한 상품 따위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다만 자신의 방심 때문에 패배했다는 사실, 그리고 영호가 자신을 대신해 맞았다는 게 마음을 짓눌렀다.‘혹시 나도 다른 커플들처럼 원망을 받는 걸까?’불안이 밀려오자, 은주는 고개를 숙이고 낮게 중얼거렸다.“미안해요, 나 때문에...”하지만 영호는 헬멧을 벗으며 해맑게 웃었다.“바보, 이건 그냥 게임일 뿐인데 뭐가 미안해요? 오히려 미안한 건 나죠. 끝까지 은주 씨를 지켜주지 못했으니까.”그 목소리에 은주의 마음이 따뜻해졌다.그리고 그제야 확실히 알았다.‘영호는 단순히 나에게 안전감을 주는 사람이 아니야.’‘책임감 있고, 믿음직스러운... 진짜 남자야.’...경기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하나둘
드라마 속 대사라면 은주는 아마 속으로 ‘좀 느끼하다’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런 상황 속에서 영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이상하게도 은주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은주는 단숨에 총을 다시 움켜쥐고는 얼굴을 굳혔다.“나한테 맡겨요! 반드시 임무 완수할게요, 경찰관님!”영호는 피식 웃었다.그때 방금 아웃된 커플이 둘의 애정 어린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여자는 괜히 속이 쓰였는지 남자친구를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홱 돌아서 버렸다. 남자가 황급히 따라가면서 여자를 달랬다.은주는 그런 광경을 힐끗 보다가, 다시 영호의 등을 바라보았다.‘왠지 더 든든해 보여...’은주는 영호를 따라 어설프게 총을 겨누는 자세를 취했다.곧 현장 방송이 흘러나왔다.새롭게 세 커플이 탈락했다는 소식이었다.남은 건 이제 6팀.분위기는 점점 더 팽팽해졌다.숲속을 조금 더 파고들자, 앞에 큰 웅덩이가 나타났다.영호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한 번 토끼 사냥처럼 해볼래요?”은주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곧장 웅덩이로 뛰어내려간 영호는 낙엽과 마른 풀을 긁어모아서 위에 덮었다.그 다음 은주를 부축해 웅덩이 안으로 내려오게 한 뒤, 편한 자세로 엎드려서 머리만 살짝 내밀 수 있게 자리를 잡았다.이후 두 사람의 몸 위로 낙엽과 마른 풀을 덮어 가렸다.급하게 숨은 탓에 완벽한 위장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참가자들은 다 아마추어. 그 정도면 충분히 눈을 속일 수 있었다.영호는 은주의 위에 몸을 붙이고, 같은 총구를 함께 바라보았다.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은주의 귓가에 닿을 때마다, 은주의 가슴은 점점 벅차올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왼쪽 앞에서 또 다른 커플 한 쌍이 등을 맞대고 긴장한 채 걸어왔다.‘심장이 터질 것 같아...’은주의 맥박은 더욱 빨라졌다.영호는 마치 그 소리를 들은 듯, 은주의 귀에 바싹 입을 대고 속삭였다.“긴장 풀어요. 우리 예쁜 은주 씨. 심장 소리 때문에 위치가 들킬 수도 있어요.”
은주는 마음속으로는 영 내키지 않았지만, 영호가 신이 난 얼굴을 보자 어쩔 수 없었다.결국 은주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재밌겠네요. 이런 거 한 번도 안 해봤어요.”영호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듯 금세 기뻐하며 은주의 손을 이끌었다.오늘 열리는 커플 서바이벌 총기 체험 이벤트에는 심지어 관객석까지 마련돼 있었다.현장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화면을 송출했고, 관객들은 실내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았다.참가자는 모두 커플 10팀. 누구 하나 빠짐없이 다정해 보였다.경기 시작 전, 참가자들은 일제히 조끼를 착용하고 권총 한 자루씩을 지급받았다.총기는 실제와 흡사했지만, 주최 측이 여성 참가자들을 배려해 조금 더 가볍게 제작해 두었기에 은주도 들기 어렵지 않았다.모든 준비가 끝나자, 사장이 직접 규칙을 설명했다.한 커플이 한 팀이 되어 다른 팀을 공격한다. 잠복도, 원거리 사격도 가능하다. 끝까지 살아남는 단 한팀에게는 특별한 경품이 주어진다.‘의외로 재밌을지도 모르겠어.’은주는 조금씩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잠시 후, 드디어 게임이 시작되었다.열 쌍의 커플은 순서대로 숲속으로 투입되었다.영호는 곧바로 몰입한 듯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총을 겨누면서, 은주를 등 뒤로 감쌌다.분위기에 휩쓸려서인지, 은주의 심장도 덩달아 빨라졌다. 두 사람은 숲 속을 더듬듯 걸어 들어갔다. 길잡이도, 장치도 없이 오로지 감만이 전부였다.은주는 영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우리 그냥 숨어버릴까요? 끝까지 안 들키고 버티면 다른 팀들끼리 알아서 싸우다 죽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우린 그대로 우승이죠. 괜히 돌아다니는 게 더 위험해요.”영호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아이고, 다들 그렇게 숨어버리면 게임이 어떻게 진행돼요? 숨은 채로 15분 넘게 안 움직이면 자동으로 탈락 처리된다고요.”‘생각보다 엄격하네.’은주는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영호를 따라 다시 숲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바로 그때, 앞쪽 숲속에
“영호 씨가 뭐 잘못한 게 있니? 너희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됐잖아. 만약 그 사람이 억지로 오늘 밤에 자고 가겠다고 했다면, 너 또 속으로는 ‘역시 별로야, 얘도 그냥 그런 남자구나’ 하면서 실망했을 거야.”“게다가, 그때 갚기로 한 가구 값을 그냥 넘기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원칙대로 갚고 있다는 건 기본이 잘 잡혀 있다는 뜻이잖아. 이런 건 오히려 장점이지, 어떻게 그걸 두고 돌덩이 머리라고 하냐?”예진의 말에 은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듣고 보니 딱히 틀린 말이 아니었다.‘나도 왜 이렇게 괜히 심술이 났는지 모르겠어...’[맞아, 네 말이 맞아. 만약 오늘 그 사람이 먼저 자고 가겠다고 했으면, 나도 분명 기분 나빴을 거야.]예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이게 바로 ‘연애병’이야. 연애 초반에 다들 괜히 쓸데없이 꼬아서 생각하거든. 영호 씨는 괜찮은 사람이야. 은주야, 난 네가 진짜 행복했으면 좋겠다.”베프라는 존재는 정말 신기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는데, 예진의 말 몇 마디에 은주도 금세 마음이 풀렸다.[근데 말이야, 예진아. 드디어 내일 우리 데이트하러 가! 사귀고 나서 첫 정식 데이트야.]은주의 들뜬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도 전해졌다.예진은 웃으며 물었다.“좋겠네, 어디 간대?”[그건 안 알려줬어.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나 봐. 나도 괜히 설레.]예진은 또 감탄을 터뜨렸다.“와, 서프라이즈까지 준비하는 남자야? 이런 게 포인트야. 게다가 영호 씨는 경찰이잖아. 나라에서 뽑은 인재라면, 집안부터 인생까지 깨끗하단 뜻이지. 그런 사람 믿을 만하지.”예진의 말에 은주의 마음은 한층 더 가벼워졌다.내일의 약속이 더 기다려졌다.다음 날 아침, 은주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꼼꼼히 화장하고, 예쁜 원피스에 하이힐까지 챙겨 신었다.오늘만큼은 영호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고 싶었다.하지만 은주를 보러 온 영호는 현관에서 여자의 차림새를 보자마자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렸다.“이 옷차림은 좀...”은주는 순간 움찔하며 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