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행이에요. 도움이 될 수 있어서.”윤하준이 살짝 웃으며 말하자 소예지도 따라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간단한 간식 좀 가져올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윤하준은 커피잔을 손에 든 채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문득, 테이블 위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소예지의 휴대폰이었다.집요하게 울려대는 벨 소리에 화면을 들여다보자 ‘고이한'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윤하준의 눈빛이 일순 미묘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고 대표.”반대편에선 짧은 침묵이 흘렀고 곧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돌아왔다.“소예지는 어디 있어?”윤하준은 여유롭게 몸을 뒤로 기대며 대답했다.“간식 가지러 갔어. 휴대폰은 테이블에 두고 갔더라고.”그의 말투엔 아무렇지 않은 척한 담담함과 어딘지 모르게 의도된 느긋함이 섞여 있었다.“급한 일이야? 제가 전해줄까?”“아니. 됐어.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그래.”하지만 그가 마지막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통화는 끊겨 있었고 마침 그때, 소예지가 간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자신의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는 윤하준을 보곤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전화 왔어요?”윤하준은 휴대폰을 건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고 대표예요. 전화가 좀 오래 울리길래 급한 일인가 싶어서 대신 받았어요.”소예지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그 사람, 뭐라고 했어요?”“별말 없었어요.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다고만.”그의 대답은 간단했지만 시선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잠시 후, 윤하준이 조용히 물었다.“혹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요?”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별일 아니에요.”그리고는 접시를 건네며 웃었다.“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우리 레스토랑에서 제일 잘 나가는 메뉴예요.”윤하준은 그런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감정의 잔상이 어쩐지
심유빈의 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파장을 일으켰고 급기야 한 톱스타의 이혼 소식마저 밀어내고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해 버렸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던진 수는 치밀했고 동시에 대담했다.‘공익 활동 조작’,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이보다 더 민감할 수 없는 주제를 정면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이번 논란의 발단은 그녀가 지난해 참여했던 한 아동 교육 지원 프로젝트였다.당시 총 1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이 모였지만 실제 현장에 전달된 금액은 고작 천만 원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폭로가 나오며 그녀의 이름은 하루아침에 조롱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이건 분명히 걔네 소속사에서 짠 자작극이야.”전화기 너머로 박시온이 이를 갈며 말했다.“그들이 일부러 이렇게 자극적인 흑막을 흘린 이유가 뭐겠어? 결국 너한테 진흙탕을 뒤집어씌우고 고이한이 널 더 멀리하게 만들려는 거잖아.”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식으로 동정심을 자극하며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모습은 분명 고이한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작이었다.그리고 동시에, 이 사건을 빌미 삼아 다시 한번 대중 앞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그날 저녁 8시 반.윤하준이 이안을 데리러 왔다.소예지의 얼굴엔 뭔가 깊은 고민이 드리운 듯한 그림자가 어렸다.그 모습을 알아챈 윤하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소예지는 고개를 저었다.“아뇨. 별일 아니에요.”그는 눈앞의 여인이 겉보기와 달리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그래서였을까. 그런 그녀가 유난히 힘들어 보이는 날이면 괜히 마음이 저려왔다.“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의 손을 잡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리고 다음 날.심유빈 측은 온라인에 기부금 내역 자료를 전격 공개했고 여러 공익 기관을 태그해 감시와 검토를 직접 요청했다.곧이어 각 기관의 공식 자료들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녀의 기부금 사용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결과가 발표
윤하준과 이안이 외국에서 돌아온 것이었다.“예지 이모!”멀리서 달려오던 이안이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반겼고 소예지는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엄마, 오늘 이안이 우리 집에 초대해도 돼요? 나 진짜 이안이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고하슬이 그녀의 손을 꼭 쥐고 눈망울을 반짝이며 애원하듯 물었다.소예지는 아이의 간절한 표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우리 집에 초대하자.”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윤하준에게 향하자 윤하준도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야 아이가 기쁘다면 더 바랄 게 없죠.”아이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난 얼굴로 먼저 마당으로 뛰어나갔다.그 모습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던 소예지가 현관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윤하준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요즘 잘 지냈어요?”소예지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요.”윤하준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혹시 힘든 일이 있거나 내가 나서야 할 일이 생기면 꼭 말해주세요.”그의 진심 어린 말에 소예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짧은 인사 후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윤하준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하종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너 소예지 만났어? 거긴 상황이 어때?”다급한 목소리로 묻는 하종호의 말에 윤하준은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리가 이런 일에 깊이 관여하는 건 좋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너무 휘둘리지 마. 이건 어디까지나 소예지 씨와 심유빈 씨, 두 사람 사이의 일이야.”“알아. 근데 유빈 씨 어젯밤 내내 울더라. 그 공익 홍보는 정말 어렵게 따낸 자리였거든.”하종호의 목소리엔 한숨이 섞여 있었다.윤하준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유빈 씨가 뭔가 잘못했겠지.”그 말에 하종호는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보니까, 넌 앞으로도 쭉 소예지 편 들겠구나?”“응. 솔직히 말할게. 나 진심으로 소예지 씨 좋아해.”하종호는 잠시
“아하, 그러니까 저 여자가 바로 고 대표의 미래 장모라는 거네?”주변에 모여 있던 직원들 사이로 은근한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감히 소예지를 상대로 이런 소란을 피울 수 있었던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갔다.고이한의 이름이 언급되자, 소예지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잘됐네요. 그렇다면 고이한한테 직접 오라고 하세요.”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을 뱉었다.그 말에 심미정은 이성을 잃고 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번쩍 들어 그녀의 뺨을 후려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재빨리 달려와 심미정의 손목을 단단히 막아섰다.“그만두시죠.”낮고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침 회의 참석차 연구소에 복귀하던 강준석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이끌려 급히 달려온 것이다.소예지는 조용히 한 걸음 물러났고 그때 헐레벌떡 뛰어온 안채린이 심미정을 급히 부축했다.“이모,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채린아! 바로 저 여자야. 저 소예지라는 여자가 우리 유빈이 맡았던 홍보대사 자리를 망쳐놨어! 이게 말이 돼?”분노에 떨며 울분을 토하는 심미정에게 강준석은 싸늘한 목소리로 받아쳤다.“여긴 실험실입니다. 개인적인 일은 사무실에 가서 하시죠.”“너는 또 뭐야? 설마 얘 애인이라도 돼?”심미정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고 순간, 안채린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녀는 이모의 팔을 끌어당기며 애써 진정시키려 했다.“이모, 여기 사람 많잖아요. 밖에서 이야기해요.”심미정은 억지로 몇 걸음 끌려가면서도 끝내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돌아서 소예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소예지, 잘 들어! 우리 모녀가 널 무서워할 줄 알아? 내 사위는 고이한이야. 두고 보라고!”그녀의 고함에 연구원들 사이로 다시 한 차례 술렁임이 일었다.그러자 강준석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그만 자리로 돌아가세요.”그제야 직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복도는 서서히 조용해졌다.강준석이 조심스레 소예지를 향해 물었다.“괜찮
새벽녘, 심유빈의 소속사에서 한 통의 공식 성명이 발표되었다.건강상의 이유로 여성의 날 홍보 촬영에 불참하게 되었고 따라서 올해의 공익 캠페인 활동에서 자진 하차한다는 내용이었다.마침 잠에서 깨어 있었던 소예지는 그 성명을 확인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심유빈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소예지와 맞서기엔 감히 그럴 용기를 낼 수 없었다.무엇보다 그녀와 고이한 사이에 있었던 일은 명백한 사실이었다.심지어 고이한조차 그녀에게 전화 한 통 걸어오지 않았다. 딸은 소예지에게 있어 절대 건드려선 안 될 '금기'라는걸 그도 알고 있었고 누구든 그 선을 넘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뻔했다.다음 날 아침, 고하슬을 등교시키던 소예지는 담임 선생님을 따로 불러 조용히 당부했다.“앞으로 수업 중이나 원내에서 하슬이가 심유빈과 마주치지 않게 조금만 신경 써 주세요.”선생님은 고개를 숙이며 연신 사과했다.“죄송합니다, 하슬이 어머님. 새 학기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 부분까지는 미처 신경을 못 썼네요.”소예지는 선생님을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그저 또다시 그 아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다시 한번 심유빈의 성명을 확인했을 땐, 여성 연합회 공식 계정에서도 ‘유감’이라는 표명과 함께 그녀의 하차를 공식화한 입장이 나와 있었다.이로써, 심유빈이 이번 캠페인에서 완전히 물러났음이 분명해졌다.어디서 소식을 들은 건지 박시온도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왔다.소예지가 실험실로 향하던 길목이었다.“진짜 속이 다 시원하다니까. 어떻게 딱 그 촬영 시점에만 맞춰서 아프다니?”“아픈 게 아니라 내가 협박한 거야.”소예지는 덤덤하게 진실을 털어놓았다.그 말을 들은 박시온은 펄쩍 뛰었다.“와, 심유빈 미친 거 아니야? 악질도 그런 악질이 없어! 여섯 살짜리 애한테 그런 말을 해? 나중에 하슬이가 커서 그거 기억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모르잖아!”“그래서 더는 봐줄 생각 없어. 만약 다시 접근해 오면 그땐 더 강하게 나갈 거야.”소예지의 목소
“네!”고하슬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대답했다.“유빈 이모가 다음에 놀이공원 데려가 준대요!”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소예지는 차를 멈추고 천천히 딸을 바라봤다.“하슬아, 앞으로 누가 선물을 주면 꼭 엄마한테 먼저 물어보고 받아야 해. 알겠지?”“그런데 유빈 이모는 남이 아니잖아요?”아이의 눈망울은 맑고 순수했다.“유빈 이모가 그러는데 자기는 아빠의 제일 친한 친구래요. 아빠한테 아주, 아주 중요한 사람이래요.”그 말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녀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소예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감정을 눌러 담으며 겨우 목소리를 냈다.“정말 그렇게 말했어?”고하슬은 사탕 포장을 까면서 고개를 귀엽게 끄덕였다.소예지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 몰랐다.‘이건 분명 고이한이 시킨 짓이야. 내 딸에게까지 접근하라고?’“엄마, 화났어요?”아이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아니야.”소예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엄마는 그냥 생각 좀 하느라 그래. 하지만 하슬아, 앞으로 유빈 이모가 너 혼자 부르면 꼭 엄마한테 먼저 말해야 해. 알겠지?”“네...”아이의 표정엔 이해하지 못한 듯한 순진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집으로 돌아오자, 소예지는 딸의 작은 가방을 정리하다가 낯선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부드러운 벨벳 재질에 금박으로 로고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상자.뚜껑을 열자, 안에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백조 모양의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엄마, 예뻐요?”고하슬이 상자를 들여다보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유빈 이모가 이건 나만을 위해 만든 거라 했어요. 전 세계에 딱 하나밖에 없대요!”소예지는 말없이 상자를 닫았다.그리고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하슬아, 이건 너무 비싸서 지금은 엄마가 대신 보관할게. 하슬이가 좀 더 크면 그때 걸자. 응?”“네...”고하슬은 아쉬운 듯 입술을 내밀었지만 곧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2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