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선배,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얼굴 보기 정말 힘들다.”
선배는 해원의 손을 붙잡고 웃었다.
“네 작품, 안쪽에 걸어 놨어. 한번 봐.”
해원은 그녀를 따라 전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벽면에는 여러 디자이너의 작업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옷과 드로잉, 원단 샘플, 작업 과정이 담긴 사진들.
그리고 전시장 가장 안쪽. 해원의 작품이 있었다.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 과장된 장식 없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실루엣이 특징인 옷이었다.
몇 년 전,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시절에 만들었던 디자인을 다시 손본 것이었다.
작품 아래에는 작은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HAN HAEWON]
해원은 그 앞에 멈춰 섰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누군가의 아내도, 태성그룹 며느리도 아닌. 그저 한해원.
“어때?”
선배가 물었다. 해원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좋아요.”
그녀는 진심을 담아 웃었다.
“정말 좋네요.”
***
태성어패럴 본사.
서도겸은 회의실에서 자료를 넘기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백유라와 캠페인 담당자들이 앉아 있었다.
“이번 시즌은 기존 이미지와 차별화가 필요합니다.”
마케팅 팀장이 화면을 넘겼다.
“백유라 씨의 대중적 인지도는 충분합니다. 다만 브랜드 자체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좀 더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촬영 콘셉트도 조금 달라져야겠네요.”
“그렇습니다.”
도겸은 화면을 바라보다 말했다.
“지금 안으로는 차별점이 부족합니다. 수정해서 다시 보고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회의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세 시가 넘어서야 참석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라는 의자에 앉은 채 도겸을 바라보았다.
“도겸 씨.”
“네.”
“오늘 주말인데도 나오셨네요.”
“확인할 일이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괜찮으세요?”
도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편이 주말에도 이렇게 일하니까요.”
유라는 가볍게 웃었다.
“저라면 조금 서운할 것 같아서요.”
도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해해 줄 겁니다.”
유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늘요?”
“네.”
그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유라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도겸이 자신의 아내를 얼마나 당연하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
같은 시각. 해원은 전시장 한쪽에서 방문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드레스는 직접 디자인하신 건가요?”
한 여성이 작품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제가 디자인하고 제작했어요.”
“라인이 정말 예뻐요. 특히 허리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부분이요.”
해원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혹시 지금도 작업하세요?”
그 질문에 해원은 잠시 망설였다.
“아직은 아니에요. 그런데 다시 시작해 보려고요.”
“꼭 하셨으면 좋겠어요. 다른 작품도 보고 싶네요.”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해원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따뜻해졌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하고, 다음 작품을 기대해 주는 것. 그 작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오민지였다.
— 나 거의 다 왔어. 어디야?
해원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안쪽 전시장에 있어.”
— 네 작품부터 볼 거야. 기다려!
전화를 끊은 뒤, 해원은 다시 작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심코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정말 혹시라도. 도겸이 잠깐 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해원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바쁜 사람이었다. 오늘도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꾸만 입구를 확인하게 되었다.
***
전시는 어느덧 마무리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민지는 해원의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야, 진짜 너무 예쁘다.”
“그만 찍어. 벌써 몇 장째야.”
“아니, 이건 기록으로 남겨야지.”
민지는 휴대전화를 내리며 해원을 바라보았다.
“도겸 씨는 안 왔어?”
해원은 잠시 멈칫했다.
“응. 일이 있대.”
“오늘 토요일인데?”
“응.”
민지는 입술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해원은 먼저 웃었다.
“괜찮아. 어차피 바쁜 사람인 거 알잖아.”
민지는 친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해원아.”
“응?”
“너 오늘 정말 예뻐.”
해원이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응. 아까부터 계속 웃고 있거든.”
민지가 해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니까 오늘은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네가 얼마나 잘했는지만 생각해.”
해원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는 다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았다.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었다. 누가 오지 않았는지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냈는지를 기억하고 싶었다.
***
밤 여덟 시.
서도겸은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해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재킷을 벗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주방 쪽에서 해원이 나왔다.
“오셨어요?”
“네.”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입니다.”
“그럼 간단하게 준비할게요.”
해원은 평소처럼 웃었다. 도겸은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
“전시는 잘 다녀왔습니까?”
해원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네.”
“어땠습니까?”
“좋았어요.”
짧은 대답이었다. 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 어떤 작품이 전시되었는지. 자신의 옷을 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작품 앞에 섰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도겸은 이미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있었다.
해원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 준비할게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주방으로 향했다.
식사를 마친 뒤. 도겸은 서재로 들어갔다. 해원은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열었다. 민지가 보내 준 사진들이 도착해 있었다.
전시장 한쪽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 아이보리색 드레스. 작품 아래 붙어 있는 작은 이름표.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
해원은 사진을 한 장씩 넘기다가, 마지막 사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자신의 작품 옆에 선 채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사진을 확대했다. 작은 이름표에 적힌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HAN HAEWON]
해원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도겸이 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오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이 의미 없는 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조용히 생각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잘 만들어 보고 싶다.’
이번에는 오래전의 작품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이 만든 옷으로.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날 밤, 해원은 처음으로 도겸에게 보여 주지 못한 하루를 아쉬워하는 대신 자신이 만들어 갈 다음 날을 기대하며 잠들었다.
서도겸은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백유라가 창가에 서 있었다. 단정한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슬랙스. 긴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묶여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든 서류를 읽고 있었다.“안녕하세요, 대표님.”도겸을 발견한 유라가 먼저 인사했다.“일찍 오셨군요.”“네. 자료를 조금 더 확인하려고요.”유라는 가볍게 웃었다.“이번에는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요.”도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 앉았다.“지난번 협상은 잘 마무리됐다고 들었습니다.”“네. 다행히 저희가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였어요.”“고생 많으셨습니다.”유라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조금 장난스럽게 웃었다.“대표님한테 그런 말씀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도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성과가 있었으니 당연히 감사드려야죠.”“그렇긴 하죠.”유라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그런데 대표님.”“네.”“저 이번 프로젝트, 정말 잘하고 싶어요.”도겸이 시선을 들었다.“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아니요. 그냥 모델로서가 아니라요.”유라는 잠시 말을 멈췄다.“제 이름을 걸고 참여한 일이니까,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의외였다. 그동안 유라는 뛰어난 모델이었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방법을 알았고, 카메라 앞에서는 누구보다 능숙했다. 하지만 사업적인 부분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관여한 적은 드물었다.“좋은 자세입니다.”도겸이 말했다.“그런 마음이라면 앞으로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유라는 미소 지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힘이 나네요.”그녀는 서류를 펼쳤다.“그럼 오늘도 열심히 해 볼까요, 대표님?”회의는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유라는 예상보다 훨씬 꼼꼼했다. 해외 캠페인의 광고 문구부터 촬영 콘셉트, 모델의 이미지 활용 방식까지. 실무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 냈고, 몇 가지 대안을 직접 제안하기도 했다. 도겸은 그녀의 의견을 들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그 방향이 더 낫겠습니다.”“
도겸은 대표실에서 마지막 보고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최현석이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입니다.”“수고하셨습니다.”“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도겸은 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 십 분. 평소라면 아직 퇴근을 생각할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문득 해원이 떠올랐다. 며칠 전 함께 식사했던 날. 레스토랑에서 웃던 아내의 얼굴. 자신이 코트를 걸쳐 주자 조금 놀란 듯 바라보던 눈빛. 도겸은 잠시 생각하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겠습니다.]잠시 후 답장이 왔다.[네. 기다릴게요.]도겸은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기다릴게요. 익숙한 말이었다. 해원은 언제나 자신을 기다렸다. 그런데 요즘은 그 말이 예전과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도겸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오늘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최현석이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네, 대표님.”***저녁 일곱 시. 해원은 식탁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오셨어요?”“네.”도겸은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오늘은 일찍 끝났습니다.”“잘됐네요.”해원은 웃었다.“마침 저녁도 다 됐어요.”도겸은 식탁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국과 반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오늘은 뭐 하셨습니까?”해원이 잠시 멈췄다.“저요?”“네.”“작업실에 다녀왔어요.”“그렇습니까.”“오늘 드디어 옷 하나를 완성했어요.”해원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직접 만든 겁니까?”“네.”“어떤 옷입니까?”해원은 잠시 망설였다. 예전 같았으면 사진부터 보여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아직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블라우스예요.”“그렇습니까.”“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요.”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완성했다니 축하합니다.”해원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고마워요.”별것 아닌 말이었다. 하지만 해원은 그 말이 기뻤다. 남편이
태성어패럴 본사 회의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형 스크린에는 해외 캠페인 계약서의 수정 조항이 띄워져 있었다. 백유라는 차분하게 서류를 넘겼다.“문제는 이 부분이에요.”그녀가 화면을 가리켰다.“현지 에이전시에서 제 초상권 사용 범위를 변경했어요. 기존에는 아시아 지역 광고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번 수정안에는 유럽 온라인 플랫폼까지 포함되어 있거든요.”홍보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계약 조건을 확대하려는 것 같습니다.”“단순한 확대가 아니에요.”유라는 서류를 한 장 넘겼다.“이대로 계약하면 제 이미지가 다른 브랜드의 프로모션에도 간접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어요.”회의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겸이 물었다.“대안이 있습니까?”유라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네.”그녀는 준비해 온 자료를 스크린에 띄웠다.“초상권 사용 범위를 지역이 아니라 매체별로 제한하는 거예요. 그러면 태성은 글로벌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고, 저도 이미지 사용을 관리할 수 있어요.”도겸은 자료를 살폈다.“현지 에이전시가 받아들이겠습니까?”“받아들이게 만들어야죠.”유라는 미소 지었다.“제가 직접 협의할게요.”홍보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하지만 상대 측에서 추가 비용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그 부분도 생각했어요.”유라는 또 다른 자료를 내밀었다.“제가 유럽 일정 중에 진행하기로 했던 개인 화보가 있거든요. 그 촬영을 태성 캠페인과 연계하면 추가 제작비를 줄일 수 있어요.”도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개인 일정을 조정하겠다는 겁니까?”“네.”“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유라는 고개를 저었다.“필요해요. 이번 캠페인은 저한테도 중요하니까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차분하게 덧붙였다.“저도 태성의 얼굴로 계약한 사람이잖아요. 제 역할은 제대로 해야죠.”도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유라는 오늘 한 번도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지도 않았고, 불필요하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저녁 일곱 시. 도겸이 예약한 곳은 조용한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해원은 안내받은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조명과 정갈하게 놓인 식기. 창가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여기 예쁘네요.”“마음에 듭니까?”“네.”도겸은 메뉴판을 펼쳤다.“먹고 싶은 걸로 고르세요.”해원은 그를 바라보았다.“도겸 씨는요?”“저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그럼 제가 골라도 돼요?”“물론입니다.”해원은 메뉴판을 살폈다. 오랜만에 둘이서 외식하는 자리였다. 그녀는 조금 설렜다. 도겸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두 사람 사이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식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겸이 물었다.“디자인 공부는 잘되고 있습니까?”해원이 고개를 들었다.“네. 재미있어요.”“그렇습니까.”“요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생각도 나고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 좋아했습니까?”해원은 조금 놀란 듯 웃었다.“네. 정말 좋아했어요.”도겸은 잠시 생각했다. 결혼 전 해원이 디자인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계속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해원의 눈빛이 밝아졌다.“정말요?”“본인이 좋아하는 일 아닙니까.”“…네.”해원은 작게 웃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좋네요.”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원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섰을 때였다. 도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최현석이었다.“네, 최 실장님.”—대표님, 죄송합니다. 급하게 확인하실 일이 생겼습니다.“무슨 일입니까?”—백유라 씨가 참여하는 해외 캠페인 계약 건입니다. 현지 에이전시에서 조건을 변경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도겸의 표정이 굳었다.“계약서 보내 주세요.”—네. 그런데 백유라 씨 측
백유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서도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앞으로 제 아내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마세요.’‘제 아내와 관련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유라는 천천히 와인잔을 내려놓았다.“도겸 씨.”—네.“혹시 화나셨어요?”—화가 난 건 아닙니다. 다만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저는 사모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을 뿐인데요.”—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원 씨가 원하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만나실 필요는 없겠죠.유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사모님이 뭐라고 하셨어요?”—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유라 씨와 저는 업무로 만나는 사이입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업무로 만나는 사이. 유라는 그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함께 해외 행사에 참석한 적도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뒤 둘이서 축하한 적도 있었다. 도겸은 언제나 선을 지켰다. 그런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유라는 자신만큼은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고작 한해원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유라는 손가락으로 와인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알겠어요.”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제가 생각이 짧았네요.”—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앞으로 조심할게요. 사모님께도 불편하게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알겠습니다.“그리고 도겸 씨.”—말씀하세요.유라는 잠시 숨을 골랐다.“저희 사이도 괜히 오해받지 않게 조심해야겠네요.”도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라는 작게 웃었다.“그럼 다음 회의 때 뵐게요, 대표님.”통화가 끝났다. 유라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대표님. 일부러 그렇게 불렀다. 그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업무적인 관계로 돌아가 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유라는 천천히 소파에 등을 기댔다.“좋아요, 서도겸 씨.”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선을 지키고 싶다면...”잠
오후 세 시. 청담동의 한 호텔 라운지.백유라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원이 들어서자 그녀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사모님, 여기예요.”“안녕하세요.”“갑자기 연락드렸는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아니에요.”해원은 맞은편에 앉았다. 유라는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연한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커트. 화려한 장신구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에 거슬릴 만큼 단정했다.“지난번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세요.”“그런가요?”“네. 요즘 디자인 공부하시느라 바쁘시죠?”해원은 조금 놀랐다.“기억하고 계셨네요.”“그럼요. 사모님이 직접 옷을 만드신다고 하셔서 인상 깊었거든요.”유라는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도겸 씨도 알고 계세요?”“네.”“아, 말씀하셨구나.”해원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정확히는 자신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도겸은 유라에게서 그 사실을 들었다. 유라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사실 도겸 씨가 사모님 이야기 잘 안 하시거든요.”해원의 손이 멈췄다.“그러세요?”“네. 워낙 사적인 이야기 안 하는 분이잖아요.”유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저랑은 오래 알고 지내서 그런지 가끔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시지만요.”해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마치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아, 맞다. 어제 사진 보셨어요?”“...네.”“아휴, 댓글 때문에 정말 놀랐어요.”유라는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사람들이 도겸 씨랑 저를 자꾸 엮더라고요.”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 사모님, 저 때문에 불편하셨어요?”그 질문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래서 오히려 대답하기 어려웠다. 해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업무 때문에 함께하신 거잖아요.”“그렇죠.”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제가 괜히 신경 쓰여서요. 도겸 씨가 워낙 표현이 없는 분이라 사모님이 오해하실까 봐.”해원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제가 오해할 일이 있나요?”유라의 미소가 잠깐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