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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당신이 오기로 했던 날(1)

작가: 노에빌
last update 게시일: 2026-10-29 23:33:23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밤.

해원은 도겸이 서재에 들어간 뒤 자신의 방 한쪽에 작은 작업 공간을 만들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스케치 도구를 꺼내고, 오늘 수업에서 가져온 패턴지를 펼쳤다.

연필을 쥔 손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어깨선. 허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실루엣. 과하게 꾸미지 않아도 입는 사람의 분위기를 살려 줄 수 있는 옷. 해원은 한참 동안 스케치에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마지막 선을 그은 뒤에야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시계는 밤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도겸이 언제 서재에서 나올지 신경 쓰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녀는 완성된 스케치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이거... 꽤 괜찮은데?’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다. 해원은 스케치북을 덮지 않았다. 내일도 이어서 그리고 싶었으니까.

서재에서 나온 도겸은 복도를 걷다 걸음을 멈췄다.

방문 아래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문을 바라보았다. 아직 자지 않는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해원이 먼저 그의 서재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차를 가져다주거나, 피곤하지 않냐고 묻거나, 먼저 자겠다는 인사를 건넸을 테니까.

그런데 오늘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도겸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밤 열두 시가 넘은 시간. 그는 방문을 두드릴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해원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수 있었다. 그뿐이었다.

도겸은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해원은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익숙한 일상이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고, 다른 한 사람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의 시간을 되찾고 있었다.

***

토요일 오전.

한해원은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써서 고른 옷이었다. 크림색 블라우스에 차분한 베이지색 스커트.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단정하고 우아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잠시 바라보다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날이었다. 결혼 전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와 몇몇 디자이너들이 함께 준비한 작은 전시.

규모가 크거나 유명한 전시는 아니었다. 신진 디자이너와 독립 작가들이 각자의 작업을 선보이는 자리였고, 해원 역시 결혼 전 만들어 두었던 작품 한 점을 출품하기로 했었다.

오랫동안 옷장에서 잠들어 있던 작품을 다시 꺼내 전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오늘은 도겸과 함께 가고 싶었다.

결혼기념일 다음 날 아침. 해원은 그에게 주말에 시간을 낼 수 있느냐고 물었었다. 도겸은 주말에 보자고 했다. 정확히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원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침실로 향했다. 도겸은 이미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짙은 남색 셔츠에 검은 슬랙스. 주말인데도 그의 차림에는 빈틈이 없었다.

“도겸 씨.”

“네.”

“오늘 오후에 시간 괜찮으세요?”

도겸이 손목시계를 채우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해원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전에 말씀드렸던 전시요. 오늘 열리거든요.”

“전시요?”

“네. 제가 예전에 만들었던 옷도 한 점 전시돼요.”

도겸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런 이야기를 했었습니까?”

해원의 미소가 아주 조금 흐려졌다.

“결혼기념일 다음 날에 주말 시간 괜찮으시냐고 여쭤봤었어요.”

“아.”

그제야 도겸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납니다.”

해원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실래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도겸은 잠시 생각했다.

“오후 몇 시입니까?”

“두 시부터예요.”

“오늘 오후에는 일정이 있습니다.”

해원의 손끝이 멈췄다.

“아... 그러세요?”

“네. 다음 시즌 캠페인 관련해서 확인할 일이 생겼습니다.”

“주말에도요?”

“일정이 그렇게 잡혔습니다.”

도겸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일부러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중요한 전시입니까?”

그 질문에 해원은 잠깐 말을 잃었다. 중요한 전시인가.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참여하는 행사도 아니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자리도 아니었다. 태성어패럴의 대표인 그가 시간을 내어 참석할 만큼 대단한 행사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나오는 날이었으니까.

“...저한테는 조금요.”

도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다녀오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해원은 입술을 가볍게 다물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허락도, 도움이 필요하냐는 질문도 아니었다. 그저 함께 가 주는 것이었다.

“네. 잘 다녀올게요.”

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는 들어오겠습니다.”

그 말이 대화의 끝이었다.

***

해원은 작은 갤러리 앞에 도착했다. 유리문 너머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해원아!”

안쪽에서 누군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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