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곰도랑 이도훈이 아마 왔었지....”대리석으로 차갑게 이어진 복도를 걷던 지훈은 '302호'라고 적힌 문 앞에 멈춰 섰다.무거운 정적만이 감도는 문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도어록 위에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올렸다.손바닥이 매끄러운 기계 표면에 닿는 순간 지훈의 신경계가 곤두섰다.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이코메트리. 사물에 깃든 기억의 잔상을 읽어내는 그의 능력이 회색빛 노이즈를 뚫고 과거의 목소리들을 길어 올리기 시작했다.[ 헤헤 삐삐~ 나 아까 활약 봤어? 대박이지? ][ 아 네네- 알겠습니다! 아주 대박이었어요 ][ 오, 비밀번호 0428! 나는 봤다! ][ 저기요- 도깨비 씨? 지금 사생활 침해하신 거 아세요? ][ 뭐야~ 우리 사이에 사생활 침해라니~ ]현빈의 철없는 웃음소리와 소하의 짜증 섞인 대꾸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더 깊은 기억의 층위를 파고들었다. 뒤이어 도훈의 낮은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야 곰도 너 병신이냐? 전에 강소하 사주 풀 때 생일이 5월 30일이라고 했잖아. 옆에 있었으면서 그새 까먹었냐? ][ 그럴 수도 있지! 병신은 뭐냐, 이 무당 새끼야! ][ 능력도 없는 곰도 주제에 뭐? ][ 야- 너 잘못하면 내 방망이에 세상 하직할 수 있거든? ][ 하직? 너 비구름에 쓸려서 태평양에서 생 마감하고 싶냐? ]웅웅거리는 소음 사이로 소하의 지친 외침이 쐐기를 박듯 들려왔다.[ 아오! 좀 그만해요, 그만해! 0428... 부모님 기일이에요! 기일! ]“기일........”지훈은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0428. 5월 28일. 소하의 부모님이 동시에 돌아가신 날.“강소하 부모님이 그녀가 17살 때 돌아가셨다고 했나........ 4월 28일.......”심장 언저리가 기분 나쁘게 요동쳤다. 아닐 것이다.설마 무슨 관련이 있겠느냐며 고개를 휘휘 저었지만 축축하게 배어 나오는 식은땀은 멈추지 않았다.지훈
검찰청 취조실의 공기는 질식할 듯 무거웠다.5평 남짓한 좁은 사각형의 공간, 재민은 팔목을 조여오는 은색 수갑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댔다.정면의 특수 거울 속에는 며칠 사이 유령처럼 수척해진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이번에도 네가 하는 건 그저 묵비권 행사인가?”어지럽게 머릿속을 휘젓던 목하와의 기억에 재민의 눈가가 잠시 젖어 드는가 싶더니, 이내 담당 검사 태준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내렸다.재민은 두 뺨 위로 흐르려던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타들어 가는 목구멍 안으로 슬픔을 꾹꾹 눌러내었다.“....죽이지 않았어요...”“하...... 이번에는 부인인가?”태준이 서류 뭉치를 거칠게 넘기며 비웃었다.“여길 봐... 처음 신고한 건 자네의 새어머니 이혜영이야. 그녀의 진술에 의하면 비서 엄준민과 함께 안회장의 방에 들어갔을 때이미 안회장은 숨이 끊어진 뒤였고 너는 피 묻은 손으로 그 방안에 서 있었다더군. 정황이 이렇게 확실한데 언제까지 오리발을 내밀 셈이지?”태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재민의 가슴을 후볐다. 재민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태준을 똑바로 응시했다.“새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세요.”“뭐?”“형... 아니... 검사님.... 새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신다면, 5년 전 목하가 죽던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취조실 안에는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타탁, 타탁’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재민은 불안함이 역력한 표정으로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연신 매만졌다. 창밖은 이미 매서운 한겨울이건만 재민의 손바닥에서는 축축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그때 무거운 철문이 ‘달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남편을 잃은 미망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굉장히 온화하고 단아한 표정의 계모 이혜영이 들어와 재민의 맞은편에 앉았다.“도대체 우리 아버지께 무슨 짓을 한 거야?”재민의 분노가 섞인 목소리에도 그녀는 눈 하나
재민과 목하가 처음으로 만났던 교정 그 옥상이었다.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오후 늦게까지 이어져 옥상 바닥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둘은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어느 때보다 크고 둥글게 떠오른 만월을 바라보았다.차가운 달빛이 내린 눈에 반사되어 옥상은 마치 낮처럼 환했다.“이제 30분 남았네.”재민이 손목시계를 들어 목하 앞에 흔들어 보였다. 목하는 재민을 바라보며 방긋 웃더니 다시 보름달이 걸린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길게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겨울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긴장돼?”“조금? 나 사실.. 저번에 공사장에서 구미호를 만나기 전까지는 간과하고 있었나 봐. 나를 노리는 자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걸 말이야”목하의 말에 재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목에 걸린 붉은 염주를 내려다보았다.잠시 두려움이 서려 있던 목하의 눈동자가 다시 생기를 되찾더니 그녀는 돌발적으로 옥상 난간 턱 위로 올라섰다.&ldqu
시간은 느린 듯하면서도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재민의 열여덟 여름부터 시작된 인연은 계절의 마디를 부지런히 넘어 어느덧 열아홉의 목하와 스무 살의 재민을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길목에 데려다 놓았다.저승사자가 탐냈던 재민의 재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남들이 평생을 바쳐도 도달하기 힘든 퇴마의 경지를 재민은 무서운 속도로 흡수해 나갔다.이제 그는 목하의 뒤를 쫓는 조력자를 넘어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영력을 갖춘 퇴마사로 거듭나 있었다.그리고 그해 가을 비극의 전조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원래 병원 터였다가 폐허로 변해버린 공사장. 그곳은 땅 밑바닥부터 썩어 문드러진 음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재민과 목하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악령들에게 둘러싸여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재민아! 왼쪽!”목하의 다급한 외침에 재민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손 안에서 발악하는 귀신의 이마에 부적을 박아 넣은 그가 가볍게 몸을 회전하며 달려드는 처녀귀신의 기세를 꺾었다.
재민에게 소녀 목하는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위로였다.영가들을 본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갇혀야 했던 소년에게 목하는 네가 미친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는 우리처럼 신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아주 많다고 온몸으로 말해주었다.목하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했다.사람의 마음부터 상처 입은 영혼, 심지어 시들어가는 식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 만물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고귀한 힘.부모의 얼굴조차 모른다는 목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산속의 한 노스님에게 거두어져 자랐고 스님으로부터 그 치유의 힘을 이용해 이승을 떠도는 가여운 영혼들을 달래 승천시키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내가 정말 그곳에 가도 되는 거야?”목하가 열일곱, 재민이 열여덟이 되던 해의 어느 여름날이었다.목하는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자신이 자라온 은밀한 거처인 절로 재민을 초대했다.“가도 된다니까? 내가 우리 대장 스님한테 너 얘기 정말 많이 했어-”“내 얘기를... 했다고?”“응! 내 눈보다 훨씬 더 깊고 뛰어난 눈을 가진 친구가 있다고 자랑했지”목하의 해맑은 눈웃음에 재민은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이제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단짝이었지만 재민에게 목하는 이미 우정을 넘어선 사랑이었다.하지만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었다가 그 소중한 관계마저 깨어질까 봐 그래서 더는 그녀의 곁에 머물 수 없게 될까 봐 그는 늘 입술을 깨물며 말을 삼켰다.그렇게 열여덟 재민의 첫사랑은 우정이라는 얄팍한 가면을 쓴 채 하루하루 깊어만 갔다.한참을 산길을 올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무렵이었다.어디선가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재민의 젖은 이마와 흐트러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갔다.재민이 고개를 들자 바람 소리와 함께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가 고요한 숲속에 울려 퍼졌다.청명한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양옆으로 곧게 뻗은 푸른 나무숲의 끝에 위엄 넘치는 절의 입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귓가로 넘실거리며 흘러드는 풍경 소리와 뺨에 닿는 시
5평 남짓한 좁은 검찰청 취조실 안.사방이 막힌 벽은 빛을 흡수하듯 어두웠고 매캐한 소독약 냄새와 낡은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는 질식할 듯 무거웠다.그 한가운데 팔목에 은색 수갑이 단단히 채워진 재민이 앉아 있었다.그는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댄 채 자신을 비추고 있는 매끄러운 취조실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거울 속의 자신은 유령처럼 창백했고, 수갑의 금속성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일렁였다.거울 너머 특수 유리로 차단된 관찰실에서는 부장검사가 옆에 선 한 사내를 지켜보고 있었다.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재민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사내.그의 가슴에는 ‘연태준’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출입증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태준의 눈동자는 증오와 고통이 뒤섞인 채 타오르고 있었다.“이번에는 반드시 저 자식......제 손으로 쳐 넣을 겁니다. 아니, 제 인생을 걸고라도 절대로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태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부장검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쉽지 않을 거야. 알잖나, 이번에도 확실한 물증은 없어. 정황뿐이지.그리고 저놈...5년 전에도 정신병 경력을 앞세워 안성민회장이 빼내지 않았나.이번에도 비슷한 맥락으로 빠져나갈 구실을 찾고 있을 걸세....”“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엔 그 누구도 저 자식을 지켜주지 못하게 할 겁니다.”태준의 주먹에 힘이 꾹 들어갔다. 하얗게 질린 마디가 그의 억눌린 분노를 대변했다.검사장은 그런 태준의 손을 한 번 보더니 위로하듯 어깨를 무겁게 토닥이며 먼저 관찰실을 나섰다.홀로 남은 태준은 거울 너머의 재민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쏘아보았다.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옛 기억들 하얀 눈이 흩날리던 날의 참혹한 잔상들이 떠올라 잠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살짝 풀려 있던 넥타이를 단단히 고쳐 맸다. 금세 차가운 검사의 눈빛으로 돌아온 그는 뚜벅뚜벅 소리를 내며 재민이 앉아 있는 취조실 문으로 향했다.여전히 수갑을 찬 채 거울만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