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혁이 서둘러 돌아와 짜증 난 표정으로 한 움큼의 휴지를 건넸다.“자, 휴지. 빨리 해결하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네...”박예찬은 힘을 주는 듯한 표정을 지은 뒤 말했다.“알겠어요.”그러면서 박예찬이 휴지를 받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유성혁은 자기 손에 닿는 이상한 촉감을 느꼈다.그러자 이윽고 박예찬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어이구, 큰아버지, 죄송해요. 실수로 제 똥을 큰아버지 손에 묻혔어요.”유성혁은 심각한 결벽증까진 아니었지만, 평생 이런 더러운 걸 직접 만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는 순간 펄쩍 뛰어올라 손을 막 털면서 손에 묻은 것을 털어내려고 애를 썼다.“으악!”비명이 울려 퍼졌다.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박예찬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고 박윤우는 아예 입을 틀어막았다.“큰아버지, 혹시 저한테 화난 거 아니시죠? 죄송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박예찬은 일부러 불쌍한 모습으로 사과를 건넸다.유성혁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이들 앞이라 억지로 화를 참았다.“하, 다음부터 조심해, 알겠지? 얼른 닦아.”그는 손을 치켜든 채 황급히 차로 돌아갔다. 차 안에 물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하지만 한참을 찾아도 물이 보이지 않자 결국 다시 돌아와 아이들에게 말했다.“예찬아, 윤우야,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큰아버지가 손 씻고 올게.”“네!”두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큰아버지, 빨리 다녀오세요.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야죠.”“그래.”유성혁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급히 자리를 떠났다.그가 사라지자마자 두 형제는 더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형, 이 방법은 진짜 대박이야!”박윤우가 배를 잡고 웃었다.박예찬도 풀밭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이건 그냥 소소하게 골탕을 먹인 것뿐이야. 엄마를 괴롭힌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그냥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어.”박윤우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박예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유성혁은 그대로 도로 옆 배수로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완전히 겁에 질려 얼이 빠졌다.다행히 차는 고급 모델이라 충격을 흡수해주어 박예찬과 박윤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유성혁은 완전히 망가졌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바지 아래로 뭔가 축축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큰아버지, 괜찮으세요?”박예찬은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갔지만, 눈빛 속에는 짓궂은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유성혁은 단순히 겁만 먹은 게 아니었다. 방금 사고의 충격으로 간신히 치료했던 다리가 다시 부러진 것 같았다.큰 소란에 저택 안의 하인들과 경비원들도 소리를 듣고 곧바로 몰려왔다.제일 먼저 도착한 경비원들은 한눈에 유성혁의 처참한 모습을 확인했다.‘유성혁 도련님이 겁을 먹어 오줌을 싸다니, 세상에!’경비원들은 직업정신으로 간신히 웃음을 참고 달려와 물었다.“성혁 도련님, 괜찮으십니까?”한 경비원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유성혁은 느껴지는 고통에 얼굴을 잔뜩 찌푸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그는 달려오는 경호원들을 보고는 소리쳤다.“눈멀었어? 내가 지금 괜찮아 보여?”경비원들은 속으로 유성혁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어 그가 소리를 지르자 기분이 불쾌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모른 척하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얼른 구급차 안 부르고 거기 서서 뭐 해?”유성혁은 한 번 더 소리를 질렀다.“네, 네!”경비원들은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꼴 좋다고 비웃고 있었다.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박윤우와 박예찬은 이 장면을 지켜보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박민정과 유남준도 소식을 듣고 현장에 도착해서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옮겨지는 유성혁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박민정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두 아이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뛰어왔다.“윤우야, 예찬아, 너희 괜찮아?”두 아이는 박민정이 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우리 괜찮아, 엄마.”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가와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
박윤우는 형이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혹시나 유남준이 화를 낼까 봐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아빠, 죄송해요. 우리 앞으로는 절대 나쁜 짓 안 할게요. 그러니까 형한테 화내지 마요.”그러나 유남준은 두 아이를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너희는 나한테 사과할 필요가 없어.”두 아이는 순간 당황했다.“너희가 잘한 거야. 누군가 너희를 해치려 하면 당연히 반격해야지. 다만,”유남준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첫째, 너희는 아직 어려. 다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알려야 해. 둘째, 너희 방식이 너무 허술해. 이렇게 하면 쉽게 들킬 수 있어.”박예찬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아까는 저희가 깊이 생각하지 못했어요.”“앞으로는 조심해.”유남준이 말했다.두 아이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지금 유남준에 대한 신뢰가 한층 더 깊어졌다.유남준은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듯한 두 아이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큰아버지가 너희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어?”박예찬은 고개를 저었다.“사실 정확히 뭘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이겠다고 했어요. 그 말부터가 수상했어요.”“맞아요.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그거 그냥 어린애들 속이려고 한 얘기예요.”박윤우도 덧붙였다.‘아이스크림을 준다고?’유남준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유치한 수를 쓴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아이가 별일 없이 무사해서 다행이었다.“이 일은 엄마한테 말하지 마. 괜히 걱정하실 거야.”“알겠어요.”...한편, 병원에서는 유성혁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최현아가 급히 병실로 들어왔지만,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한테 애들을 처리해 달라고 했더니 당신이 왜 이렇게 돼 있는 거냐고요?”유성혁은 이제야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이를 갈며 분노했다.“다 그 빌어먹
“현아야, 미안해. 다 내가 무능해서 그래.”유성혁은 휠체어에 앉아 병실을 나왔다.최현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유성혁은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최현아는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왜 나왔어요?”그녀는 다가가 물었다.“네가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길래 걱정돼서 나왔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해서.”유성혁은 그렇게 말하며 최현아의 손을 잡았다.“현아야, 그만하자.”“뭐를요?”그만하자는 말을 다시 듣는 순간, 최현아는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우리 이미 충분히 가졌잖아. 굳이 유남준과 싸울 필요 없어. 게다가 호산 그룹 자체가 원래 유남준이 직접 일궈낸 거잖아. 우리에겐 이미 아버지의 유산이 있어. 그걸로도 이미 충분해.”유씨 가문처럼 대대로 내려오는 재벌가의 재산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유명훈이 남긴 돈과 인맥만 해도 어마어마했다.최현아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다.“당신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아?”“그게 아니야. 난 그냥 이제 편하게 살고 싶어. 계속 싸우고 다투고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 제대로 살고 싶어.”유성혁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처음에는 그 두 꼬마 녀석들에게 당한 게 너무 억울해서 복수할 생각뿐이었다.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니 만약 진짜로 두 아이를 다치게 했더라면 자신이 과연 무사할 수 있었을까?더군다나 아이들은 아직 너무 어린데 그들의 목숨을 직접 빼앗을 정도로 자신이 악랄하지는 않았다.그는 단순한 바람둥이일 뿐 아이들을 해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은 아니었다.“당신 때문에 정말 답답해서 미치겠어요!”최현아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한동안 숨을 가다듬더니 다시 그를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병원에서 푹 쉬고 있어요.”최현아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며 답답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유성혁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정말 예상도 못 했어요. 지원 씨가 이렇게까지 될 줄은 말이에요”최현아의 목소리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과거에 이지원이 박민정 앞에서 거만하게 구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지원 씨, 예전에 기자들 앞에서, 그리고 박민정이랑 유남준의 친구들 앞에서 한 말 기억해요? 유남준을 반드시 되찾겠다고 했었잖아요.”이지원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제,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생각도 안 할 거고 그런 말도 안 할 거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간절한 눈빛으로 최현아를 바라봤다.“현아 씨, 제발 도와줘요. 이제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최현아는 완벽히 실망한 듯 등을 돌렸다.“현아 씨!”이지원이 다급히 따라가려 하자 최현아가 돌아서서 매섭게 쏘아붙였다.“저 따라오지 마요. 안 그러면 후회하게 될 거예요.”그 말에 이지원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최현아는 거기를 떠났고 기분이 한층 더 언짢아졌다.만약 이지원이 아직도 싸울 의지가 있었다면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지원은 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과거에는 갖은 악행을 저지르더니 인제 와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니 그런 말이 어떻게 입에서 나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지원은 다시 저택 안으로 돌아왔다.이제는 수도도 끊기고 전기도 끊긴 상태였다.이 저택도 곧 경매에 넘어갈 예정이었다.사실 박민정이 그녀에게 했던 유일한 일은 모든 사업 관계자들에게 이지원과의 계약을 철회하라고 한 것뿐이었다.그 외의 모든 것들은 박민정이 한 것이 아니었다.이지원 스스로 박민정이 언제든지 자신을 해칠 거라며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고 김인우와 유남준 역시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전전긍긍했다.그녀는 지금의 김인우와 유남준은 그녀가 어떻든, 뭘 하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이지원은 소파에 털썩 쓰러져 넋이 나간 눈으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러다 문득, 자신의
그때 유남준은 단칼에 이지원을 거절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남준 오빠, 저한테는 이거 하나뿐이에요.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유남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네가 나와 연애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널 좋아하지도 않고 넌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 아내가 될 수도 없어.”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이지원이 이 말을 듣고 포기할 거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한 번만 당신과 연애하고 당신의 여자친구가 되어보고 싶어요. 딱 1년만요.”“그러니까 네 말은 그저 연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거야?”유남준이 물었다.이지원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그녀의 태도를 보고 유남준은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유남준의 연인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알린 사람은 박민정이었다.그녀는 박민정이 유남준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민정 씨, 그거 알아요? 남준 오빠가 저한테 고백했어요. 이제부터 저는 남준 오빠의 여자친구예요. 너무 기뻐요. 민정 씨도 축하해줄 거죠?”그 순간 박민정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이지원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날, 그녀는 박민정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박민정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손에 넣었다는 우월감이었다.박민정은 도덕성이 강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이지원과 유남준이 사귀게 되자, 그때부터 단 한 번도 유남준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았고 유남준을 향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1년은 빠르게 지나갔고 이지원과 유남준은 헤어졌다.그날, 이지원은 오만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말했다.“솔직히 말해서 남준 오빠도 그냥 평범한 남자더라고요. 별다른 특별함이 없어요. 우리 서로 맞지 않았던 거예요.”그녀는 자신이 아주 교묘하게 승리한 줄 알았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씨 가문에서 박형식을 찾아와 유남준과 박민정의 결혼을
김씨 가문.김훈은 박예찬이 박민정의 외할머니댁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다양한 물건들을 준비해 두었다.“예찬아, 너 거기 가서 증조할아버지한테 영상통화 하는 거 잊으면 안 된다. 안 그러면 증조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을 거야.”박예찬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증조할아버지.”김훈은 그를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다음 날, 김훈은 직접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공항에서 정수미와 박민정, 그리고 박윤우까지 모두 도착해 있었다.김훈은 떠나기 전, 정수미와 몇 마디를 나눈 후에야 아쉬운 듯 발걸음을 돌렸다.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정수미는 문득 감탄했다.“김 회장님께서 정말 우리 예찬이를 많이 아끼는구나.”“맞아요.”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훈은 정말 박예찬을 친 증손주처럼 아꼈다. 이미 예찬이는 김씨 가문의 적지 않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회장님께서 이 나이가 되니 진짜 친 증손주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겠지.”정수미가 한마디 덧붙였다.그녀도 예전에는 박민정을 찾기 전, 주변 또래들이 이미 손주, 외손주를 보며 사는 모습을 보며 부러웠다.때때로 꿈에서도 손주들이 옆에서 재잘대는 모습을 보곤 했다.나이가 들고 인생의 끝이 점점 가까워진다고 느낄수록 피붙이라는 것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졌다.그때, 비서가 다가와 말했다.“이제 비행기에 탑승하실 수 있습니다.”“그래.”박민정은 정수미를 부축하며 비행기에 올랐다.비행기 안에서 두 아이는 신이 나서 이야기꽃을 피웠지만, 박민정은 점점 긴장되기 시작했다.몇십 년 동안 보지 못한 친척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들은 어떤 모습일지도 몰랐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그녀는 비행 내내 긴장감을 떨치지 못했다.이를 눈치챈 정수미가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민정아, 걱정하지 마.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이모들, 다 좋은 분들이야.”박민정은 처음에는 정수미와 같이 있는 것도 어색했지만 이제는 그 손길이 아주 익숙해졌다.그녀는 고
“이 아이들이 예찬이랑 윤우구나?”외할머니는 정교한 이목구비를 가진 똑같이 생긴 두 아이를 바라보며 눈빛이 반짝였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했다.박예찬과 박윤우는 얌전하게 인사했다.“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그래, 그래. 어서 와서 우리 곁으로 오너라. 같이 들어가자.”아이들이 자신을 증조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듣자 외할머니는 더욱 기뻐했다.외할아버지 역시 감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원래 정씨 가문이 대를 이을 후손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안으로 들어가면서 외할아버지는 문득 물었다.“증손주가 더 있다고 했지?”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두 아이가 더 있어요. 그런데 아직 너무 어려서 갑자기 낯선 곳에 오면 적응하기 힘들까 봐 이번에는 데려오지 않았어요. 나중에 데려올게요.”그러자 외할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괜찮아, 우리가 진주로 직접 보러 가면 되지.”“네?”정수미는 순간 당황했다.원래라면 연세도 많으시니, 장거리 이동을 권하지 말아야 했지만, 정보주가 그녀의 팔을 살짝 잡았다. 정보주는 그녀에게 눈짓하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외삼촌과 외숙모께서 정말 기뻐하고 계셔. 괜히 기분 상하게 하지 마.”정수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사실 어르신들이 말만 그렇게 하시는 거지 실제로 움직일 일은 없을 테니 굳이 안 좋은 말을 해서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었다.“알겠어.”그렇게 온 가족이 기쁜 마음으로 거실로 향했다.넓은 거실 한가운데 커다란 식탁 위에는 각종 서주의 특별 요리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민정아, 너희 방금 비행기에서 내려서 배고프지? 일단 여기 있는 것 중에서 먹고 싶은 걸 골라봐. 가볍게 먹은 다음에 점심을 따로 차려줄게.”외할머니가 말했다.그녀는 요즘 젊은이들이 식사보다는 간식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어렵게 온 박민정이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맛있게 먹기를 바랐다.“네.”가족들은 함께 간식을 먹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