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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사랑은 되돌아보지 않는다

지나간 사랑은 되돌아보지 않는다

By:  망우초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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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전날, 남편이 아들을 데리고 다른 여자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 서예진은 이혼을 결심했다. 결혼한 지 5년이 된 그녀에게 사람들은 남편이 아껴주는 데다가 똑똑하고 귀여운 아들을 두어서 좋겠다며 그녀를 부러워했다. 오직 서예진만이 남편이 첫사랑을 잊지 못했다는 걸, 심지어 목숨 걸고 낳은 아들이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를 엄마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서예진은 기꺼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매정한 남편과 아들은 그녀도 더는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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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윙윙.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서예진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이혼합의서를 매만지던 그녀는 펜을 들어 천천히 그 위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오늘은 설 전날이었지만 남편도, 아들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남편 윤정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지금 거래처 직원이랑 같이 있어. 민재는 잠깐 비서한테 맡겼어. 밥 다 먹고 민재 데리고 드론 쇼 보러 갈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서예진은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윤정호와 같이 있는 거래처 직원이 누구인지, 윤정호가 민재를 데리고 누구와 함께 드론 쇼를 보러 갈 생각인지 서예진은 굳이 묻거나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정호와 윤민재는 틀림없이 최민영과 함께 있을 것이다.

서예진은 거실 벽에 걸린 커다란 가족사진을 조용히 응시했다.

윤정호는 윤민재를 품에 안고 서예진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윤민재는 서예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사진 속 서예진은 무척 행복해 보였고 윤민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심지어 늘 무뚝뚝하던 윤정호조차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봐도 행복한 가족 같아 보였다.

그러나 최민영이 돌아온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밖에서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서예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영상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영상 속 최민영은 카메라를 들고 윤정호와 윤민재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고 있었고, 그녀가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즐거운 목소리로 함께 외쳤다.

“새해 복 많이 받아!”

고개를 돌린 윤정호는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최민영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도 늘 함께하자.”

서예진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틋한 모습이었다.

부부 사이가 가장 좋았던 2년 동안, 윤정호는 기념일이든 명절이든 늘 무심하게 서예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덤덤히 고맙다고 했었다.

그래서 서예진은 지금까지 윤정호를 다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다 최민영을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야 윤정호의 다정이 자신이 아닌 최민영에게만 향한다는 걸 깨달았다.

서예진은 영상을 껐다. 밖이 잠잠해질 때쯤 그녀는 윤정호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일찍 들어와. 내일 어머님, 아버님 뵈러 가야지.]

윤정호의 부모님을 챙기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한 달 뒤 두 사람은 남남이 된다.

오직 그녀만 기대했던 이 우스운 결혼 생활도 이제는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현관문이 열렸다.

윤정호는 서예진이 아직도 거실에 있을 줄은 몰랐는지 잠시 당황했다. 그는 식탁 위 한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명절에도 짜증 나게 하네.”

윤민재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대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일부러 신발을 아무 데나 벗어던지고는 쿵쿵 소리를 내며 걸었다.

서예진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늦었으니까 조용히 다녀.”

윤민재는 그 말에 화가 난 건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 상관이야? 진짜 어이없어!”

윤민재는 서예진의 오른손을 힐끗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손가락도 세 개밖에 없는 주제에!”

그 말에 서예진은 자기도 모르게 오른손을 숨기려고 했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없는 그녀의 오른손이 파르르 떨렸다.

두 사람을 떠나기로 결심했음에도 서예진은 아이의 악의가 가득 느껴지는 말에 상처받아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윤정호는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았음에도 윤민재를 꾸짖지 않았다.

그는 서예진이 열 달 동안 품고 있다가 목숨을 걸고 낳은 윤민재가 엄마인 서예진을 모욕하고 공격하는 걸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쾅!

윤민재가 문을 힘껏 닫았다.

윤정호는 그제야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며 서예진을 나무랐다.

“오늘 명절이라서 시끌벅적한데 누가 저 정도 소음을 신경 쓰겠어?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그러니까 민재가 너를 싫어하는 거야.”

서예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아래층에 나처럼 설 전날에 혼자 외롭게 집에 있으면서 일찍 쉬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서예진의 말에 윤정호는 흠칫했다.

식탁 위 음식들을 떠올린 그의 얼굴에 약간의 미안함이 스쳤다.

서예진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민재는... 누가 자꾸 걔 앞에서 내 험담을 하는 탓에 그 영향을 받아 나를 싫어하는 거 아니겠어?”

윤정호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의 얼굴에서 미안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날 선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너 지금 민영이 얘기하는 거야? 나는 너 혼자 집에 있는 게 불쌍해서 일부러 일찍 집에 들어온 건데 나한테 이런 식으로 굴어?”

서예진은 화를 내는 윤정호의 모습이 우스웠다.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사인이 된 이혼합의서를 챙겨 드레스룸 겸 침실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윤민재는 서예진이 안방에서 지내는 걸 원치 않았고 윤정호는 그런 윤민재를 그냥 내버려뒀다.

그래서 서예진은 어쩔 수 없이 드레스룸에서 잠을 자야 했고 그렇게 그 드레스룸은 그녀의 마지막 피난처가 되었다.

문을 닫는 순간, 밖에서 그릇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서예진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잠갔다.

그녀는 앞으로 윤정호와 윤민재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을 것이다.

남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굳이 이해해 주고 포용해 줄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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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윙윙.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서예진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이혼합의서를 매만지던 그녀는 펜을 들어 천천히 그 위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오늘은 설 전날이었지만 남편도, 아들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이때 남편 윤정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나 지금 거래처 직원이랑 같이 있어. 민재는 잠깐 비서한테 맡겼어. 밥 다 먹고 민재 데리고 드론 쇼 보러 갈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서예진은 우습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윤정호와 같이 있는 거래처 직원이 누구인지, 윤정호가 민재를 데리고 누구와 함께 드론 쇼를 보러 갈 생각인지 서예진은 굳이 묻거나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윤정호와 윤민재는 틀림없이 최민영과 함께 있을 것이다.서예진은 거실 벽에 걸린 커다란 가족사진을 조용히 응시했다.윤정호는 윤민재를 품에 안고 서예진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윤민재는 서예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사진 속 서예진은 무척 행복해 보였고 윤민재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심지어 늘 무뚝뚝하던 윤정호조차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누가 봐도 행복한 가족 같아 보였다.그러나 최민영이 돌아온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밖에서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서예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영상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영상 속 최민영은 카메라를 들고 윤정호와 윤민재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고 있었고, 그녀가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세 사람은 즐거운 목소리로 함께 외쳤다.“새해 복 많이 받아!”고개를 돌린 윤정호는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최민영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도 늘 함께하자.”서예진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틋한 모습이었다.부부 사이가 가장 좋았던 2년 동안, 윤정호는 기념일이든 명절이든 늘 무심하게 서예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덤덤히 고맙다고 했었다.그래서 서예진은 지금까지 윤정호를 다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었다.그러다 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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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다음 날 아침, 서예진은 일찍 일어나 씻고 검은 정장을 입었다.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초췌한 몰골을 바라보니 성묘하러 가기에 딱 좋아 보였다.서예진이 거실로 나가자마자 윤민재가 크게 혀를 차더니 국이 담겨 있는 그릇을 들고 일어나 일부러 그녀와 부딪쳤다.국물이 쏟아지며 서예진의 옷이 젖자 윤민재가 비아냥댔다.“더러워.”서예진은 한때 착했던 아이가 버릇없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예전에 서예진은 윤민재가 훌륭한 선생님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를 바라 폭우를 뚫고 직접 선생님을 뵈러 갔다가 사흘 밤낮을 앓았었다.그때까지만 해도 서예진은 윤민재가 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러나 그녀가 쏟은 정성은 최민영의 이간질 때문에 전부 헛수고가 되었다.서예진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돌아서려는 윤민재의 팔을 붙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사과해.”윤민재는 그런 표정의 그녀를 처음 보는지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화를 냈다.“싫어!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옛날 같았으면 당신은 마녀로 잡혀가서 불타 죽었을 거야!”짝!따귀 소리가 울려 퍼졌다.윤민재는 뺨이 빨갛게 부은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예진을 노려봤다.“감히 나를 때려?”옆에 있던 윤정호가 서둘러 윤민재를 감싸며 화가 난 얼굴로 서예진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왜 애를 때리고 그래?”서예진은 손을 거두어들인 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을 툭툭 털었다.“애 엄마로서 애를 훈육하는 건 당연한 거지.”윤정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바로 반박했다.“당신이 훈육할 필요는 없어!”‘하.’서예진은 속으로 코웃음을 친 뒤 무심하게 대꾸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는 그럴 기회가 없을 테니까.”서예진은 차가운 얼굴로 덤덤히 말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윤정호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서예진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했다.“출발하자.”서예진은 마치 택시를 탄 승객처럼 말없이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윤정호는 몇 번이나 거울을 통해 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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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윤정호는 서예진의 날 선 말에 찔렸는지 그녀에게 경고했다.“당신한테도 친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분들이잖아. 나 대신 성묘하러 가는 게 그렇게 싫어? 그리고 그 나이 먹었으면서 택시도 못 타?”윤정호는 평소에 무심하긴 해도 이렇게까지 말을 심하게 하지는 않았고, 아무리 언짢아도 최소한 서예진의 안전만큼은 신경 썼다.서예진은 의미 없는 말다툼을 이어가는 대신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뒤 분노를 담아 문을 쾅 닫았다.그리고 윤정호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차 머리를 돌렸고 이내 배기가스가 서예진의 얼굴을 덮쳤다.그와 동시에 서예진의 휴대폰이 울렸다.의기양양해진 최민영이 보낸 문자였다.[당신은 애초에 나랑 게임이 안 돼요.]서예진은 문자를 보자 역겨움을 느꼈다.문자 기록을 뒤져보니 그동안 최민영이 끈질기게 애정을 과시하며 서예진을 괴롭힌 증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서예진은 단 한 번도 최민영에게 답장을 보낸 적이 없었다.예전에는 죽을 만큼 괴로워서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워 답장할 여력조차 없었으나 지금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서예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보냈다.[미리 결혼 축하해요.]한 달 뒤면 이혼합의서가 효력을 발휘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윤정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죽고 못 사는 최민영과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서예진은 진심으로 두 사람을 축하해 주었다.그리고 동시에 결혼 후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에 치닫기를 바랐다.최민영은 갑자기 발작 버튼이 눌린 건지 서예진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정말 뻔뻔하네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나는 일찌감치 정호 씨랑 결혼했을 거예요.][설마 정호 씨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당신은 정호 씨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그거 모르죠? 민재는 매일 나한테 당신은 마녀라고, 불에 타서 죽어야 한다고 해요. 그리고 내가 자기 엄마가 됐으면 좋겠대요.]마지막 문자는 서예진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서예진은 그 문자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어린아이가 그렇게 모진 말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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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밤 열 시, 서예진은 침대 위에 누워 이불로 몸을 빈틈없이 감쌌으나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머리는 어지럽고 몸은 추웠다가 더워지기를 반복했다.게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언제 깼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흐릿했다.서예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갔다. 그런데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뜨거운 물이 담긴 컵이 바닥에 떨어지며 그 안에 담긴 물이 그녀의 발과 허벅지에 튀었다.피부가 화끈거리자 잠깐 정신을 차린 서예진은 본능적으로 욕실로 가서 찬물로 씻으려고 했는데 수도꼭지를 틀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대로 욕조 안에 쓰러지게 되었다.정신을 잃기 직전, 서예진은 이대로 죽는 건 아닐지 걱정했다.그래도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묘한 해방감이 동시에 밀려왔다.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었다.서예진은 화가 잔뜩 난 것처럼 어두운 얼굴로 문 앞에 서 있는 윤정호를 보았다.윤정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짜고짜 멱살을 잡으며 매섭게 따져 물었다.“미쳤어? 불쌍한 척해도 소용없으니까 이제는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내 관심을 끌려는 거야?”콜록콜록.서예진은 방금 의식이 돌아온 데다가 몸 상태도 좋지 않았기에 윤정호가 거칠게 멱살을 잡자 격렬하게 기침했다.이내 서예진은 입술이 하얘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러나 윤정호는 서예진이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욕설을 내뱉었다.“쓸데없는 짓거리 좀 그만해! 우리 부모님은 속일 수 있었겠지만 내 눈은 못 속이니까!”겨우 기침이 멈추자 서예진은 윤정호의 손을 힘주어 쳐내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불쌍한 척이라고? 나는 어제 비를 무릅쓰고 묘지에서 집까지 네 시간을 걸었어. 그 탓에 몸살이 났고 열이 올라서 쓰러진 거야. 그리고 나는 가능하다면 당신이 나한테 눈곱만치라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그러니까 착각하지 마.”서예진은 그동안 윤정호 때문에 충분히 고통받았다.윤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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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서예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정말 분위기 깨는 남자네.’곧이어 발소리가 들려왔다. 윤정호는 빠르게 드레스룸 쪽으로 걸어오더니 텅 빈 드레스룸을 보고는 말문이 막혀서 따져 묻지도 못했다.그는 이내 차갑게 웃으며 비아냥댔다.“이번에는 새로운 수법을 쓰려고? 오늘 퇴원하는 날이면서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내가 미안해하길 바란 거야? 짐까지 싸는 걸 보니까 가출이라도 하게? 네가 세 살짜리 애야? 뭐든 적당히 해야지. 자꾸 이런 유치한 짓을 할래?”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일방적으로 비난을 받은 서예진은 말없이 윤정호를 바라보다가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얘기 끝났어?”그 말에 윤정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예진을 쳐다봤다. 갑자기 그녀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병원에서 최민영을 보았을 때도 서예진은 별말 하지 않았고 심지어 묻지도 않았다.예전에 서예진은 윤정호가 다른 여자와 조금이라도 접촉하면 꼭 한 번은 물어봤었는데 말이다.게다가 그녀는 최민영 때문에 윤정호와 크게 다툰 적도 있었다.‘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태연한 거야? 그래. 이건 새로운 수법이 분명해!’윤정호는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서예진을 바라보며 헛소리를 지껄였다.“서예진, 너 정말 변했어. 예전에는 조금 귀찮긴 해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귀여운 구석조차 없어.”서예진은 평온한 얼굴로 윤정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되물었다.“귀여운 구석? 내가 당신이 저지른 짓들을 전부 참고 넘겼던 거 말이야?”“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어. 뒤끝이 왜 이렇게 길어?”윤정호는 대단한 증거라도 발견한 듯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서예진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스케치를 정리했다.윤정호는 그걸 보고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고 착각했다. 그는 서예진은 자신을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화 풀리면 그때 다시 얘기해. 나 당분간은 집에 안 돌아올 거야.”윤정호는 정말 일주일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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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서예진은 물건들을 챙겨서 떠났다.윤정호는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고, 서예진도 애초에 그가 따라올 거라고 기대한 적이 없었다.최민영이 곁에 있는데 윤정호가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서예진이 물건을 다 팔고 나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오늘은 정월 대보름이라 굉장히 북적북적했다.서예진은 처량하게 홀로 집에 있을 생각은 없었기에 늘 가고 싶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바로 향했다.그 바는 꽤 분위기가 좋았다. 예전에 서예진은 윤정호에게 같이 그 바에 가보자고 했었는데 윤정호는 그런 바는 이상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면서 싫다고 했었다.바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다른 곳처럼 시끌벅적하지 않고, 잔잔한 음악 소리 때문에 은근히 분위기 있었다.서예진은 구석 쪽 자리에 앉았는데 그녀가 앉자마자 사회자가 무대 위로 올라가 조용히 하라는 듯이 마이크를 툭툭 쳤다.“오늘은 특별한 날인 만큼 특별한 손님을 모셨습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열렬한 박수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서예진에게는 매우 낯익은 얼굴이었다.최민영은 온화한 미소를 띤 채 무대 아래를 쭉 둘러보다가 서예진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최민영입니다. 1년 전, 저는 이곳에서 노래를 하던 가수였고 바로 여기서 제 운명의 상대를 만났어요.”그녀의 시선이 윤정호에게로 향했고, 조명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이동했다.두 사람은 마치 운명으로 맺어진 연인처럼 애정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사람들은 모두 환호했고 사회자는 윤정호에게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했다.그리고 윤민재는 박수를 치면서 윤정호를 떠밀었다.늘 무표정하던 윤정호는 보기 드물게 얼굴이 빨개지며 수줍어했다.서예진은 구석 자리에 앉아 팔짱을 두른 채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다.그녀는 윤정호와 혼인신고까지 한 그의 아내이지만, 지금은 마치 그의 행복을 지켜보는 행인 같았다.“정호 씨, 그때 도와줘서 고마워. 내 마음은 단 한 번도 변한 적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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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윤정호는 또 한 번 서예진에게 자신의 밑바닥을 보여줬다.“이제 너를 도와줄 사람은 없어.”남자는 의기양양했다.서예진은 주머니 안에서 키를 꺼내 남자의 눈을 찔렀고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서예진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뒤엉켜 싸우게 되었다. 서예진은 몇 번이나 주먹에 맞았으나 기회를 틈타 남자의 하반신을 공격해 그가 아파서 바닥을 뒹구는 사이 그의 휴대폰을 빼앗아서 경찰에 신고했다.뒤늦게 도착한 경찰이 상황을 살폈다.서예진은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경찰에게 물었다.“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신고를 한 적이 있나요?”경찰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아니요.”윤정호는 신고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서예진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병원에 가서 간단히 상처를 치료했다.의사들은 심하게 맞았는데 어떻게 견뎠냐며 안타까워했고, 서예진은 그저 말없이 웃었다.그보다 더한 정신적인 타격도 버텨왔으니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모든 걸 다 처리하고 나니 새벽 세 시였다.서예진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은 고요했고 인기척 하나 없었다.그녀는 기진맥진하여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누웠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탁.전등이 켜지자 서예진은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떴다.손을 들어 빛을 가린 서예진은 윤정호와 윤민재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았다.“흥! 불쌍한 척해서 아빠 동정심을 사려고 그러는 걸 누가 모를 줄 알아?”윤민재는 들어오자마자 욕을 했다.서예진은 훈육할 기운도 없었기에 그저 눈을 감았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덤덤히 말했다.“챙길 거 있으면 얼른 챙기고 나가. 혼자 조용히 쉬고 싶으니까.”윤정호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얼굴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손톱까지 여러 개 부러졌으나 힘들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는 서예진을 바라봤다. 서예진은 마치 이제 남은 거라고는 피로뿐이라는 듯이, 그에게 하소연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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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서예진이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의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상황을 설명했다.“지난번에 입은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 또 칼에 두 번 찔렸네요. 지나가던 사람이 제때 병원에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환자분은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다음에는 몸이 안 좋으면 가족한테 돌봐달라고 하세요. 혼자서 무리하지 말고요.”지나가던 사람이 병원에 데려다주었다니. 그렇다면 그때 맞은편에 있던 윤정호는 뭘 했던 걸까?서예진의 머릿속에 그날 밤 바에서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의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저에게는 가족이 없어요.”“서예진 씨,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아직도 윤정호 씨 곁에 남아 있는 거예요?”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걸까? 최민영은 문가에 기대선 채 팔짱을 두르고 의기양양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멀쩡한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어제 잠깐 머리가 어지러운 척했더니 정호 씨가 예진 씨는 신경 쓰지도 않고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주더라고요. 나였으면 일찌감치 정호 씨랑 이혼했을 거예요. 예진 씨는 낯짝이 두꺼워서 정호 씨 곁에 오래 남아 있었던 건가 봐요. 내가 예진 씨를 너무 얕잡아본 것 같네요. 보기보다 목숨도 꽤 질기고 말이에요.”최민영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조롱과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그녀는 서예진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서예진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최민영의 도발에 그녀는 그저 덤덤히 한마디를 던졌다.“머리가 어지러우면 좀 쉬어야죠. 그리고 연기를 하려면 제대로 해요. 그러다가 언젠가 들통나면 정호 씨한테 버림받을 수도 있으니까요.”“당신...”최민영이 막 말을 꺼내려는 순간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재빨리 침대 곁으로 다가가더니 일부러 바닥에 넘어졌다.“예진 씨, 나는 그냥 예진 씨가 걱정돼서 와본 건데... 나를 밀칠 필요는 없지 않아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윤정호와 윤민재는 문 앞에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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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윤정호는 그동안 줄곧 서예진의 사과를 기다렸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그는 서예진에게 기회를 한번 주고 싶어서 건강검진을 핑계로 병원을 찾았는데 병실에 도착해 보니 서예진이 보이지 않았다.윤정호는 서둘러 안내데스크로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고, 그제야 서예진이 이틀 전 퇴원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윤정호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통화 기록을 뒤졌지만 한참을 내려도 서예진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결국 윤정호는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했고, 자신이 그녀의 전화번호조차 저장하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발견했다.평소에는 늘 서예진이 먼저 연락해서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써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윤정호는 병원 복도의 의자에 앉아 한 시간이나 뒤진 끝에 겨우 확신이 드는 번호를 찾아냈다.전화를 걸자 차가운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전화번호입니다...”윤정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이럴 리가 없는데?’윤정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 먼지 냄새가 확 끼쳤다. 그 순간 오랫동안 집이 비어 있었다는 게 느껴졌다.윤정호는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고 손도 미세하게 떨렸다.주위를 둘러보니 테이블 위에 서류가 놓여 있고 서류 위로 먼지가 얇게 한 층 쌓여있는 게 보였다.이혼합의서라는 다섯 글자가 윤정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그것은 윤정호가 직접 서예진에게 건넨 것이었는데 그것이 부메랑처럼 돌아오게 될 줄은 윤정호도 예상치 못했다.서예진의 수려한 글씨체에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한 달 전에 이미 사인을 마쳤다.그가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고 최민영과 함께 있었던, 그들의 기념일이자 설날 연휴인 그날에 말이다.서예진은 윤정호 모르게 이미 한 달 전부터 조용히 이혼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윤정호는 잠시 멍해졌다. 그는 서예진이 자신을 떠날 리가 없다고 믿었다.그의 곁에서 5년 동안이나 지낸 서예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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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최민영은 깜짝 놀라 미리 준비해 둔 말을 내뱉지 못했다. 순간 이유 모를 긴장감이 밀려왔다.‘이게 어떻게 된 거지? 고작 반나절 사이에 갑자기 이렇게 사람이 달라진다고?’최민영은 눈을 굴리더니 양보하는 척 말했다.“정호 씨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욕심을 냈네. 예진 씨처럼 완벽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나보다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거야.”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윤민재가 크게 외쳤다.“저는 늙은 마녀는 싫어요! 싫다고요! 저는 민영 이모가 제 엄마가 되어줬으면 좋겠어요!”윤정호는 떼를 쓰는 윤민재의 목소리가 난생처음 귀에 거슬렸다. 그가 아이를 혼내려는데 최민영이 훌쩍대며 말했다.“나는 처음부터 돌아와서는 안 됐어. 미안해. 나 때문에 정호 씨랑 예진 씨 사이가 틀어졌잖아. 내가 떠나는 게 맞는 것 같아. 이틀 뒤에 짐 챙겨서 떠나도록 할게.”최민영의 예상대로 그 말을 들은 윤정호는 마음이 약해져서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별로라는 말이 아니야. 괜한 생각 하지 마. 금방 갈게.”최민영을 만나러 가는 길에 윤정호는 여러 사설탐정에게 연락해 서예진의 최근 행적을 알아보게 했다.최민영의 아파트에 도착해 보니 최민영과 윤민재는 옷까지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윤정호를 발견한 두 사람은 윤정호에게 다가갔고, 최민영은 평소처럼 윤정호를 껴안으려고 했으나 윤정호가 그녀의 손을 슬며시 떼어내고 윤민재만 안아 올렸다.“가자.”최민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표정을 살피며 윤민재와 시선을 주고받았다.그녀의 눈빛을 본 윤민재는 곧바로 그 눈빛의 의미를 파악하고 윤정호의 목을 끌어안은 채 물었다.“아빠, 그 마녀랑은 언제 이혼할 거예요?”윤정호는 우뚝 멈추어 서더니 윤민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마녀라니. 예진이는 네 엄마야. 엄마라고 불러야지.”윤민재는 떼를 쓰며 소리쳤다.“싫어요!”그러나 윤정호는 윤민재를 달래주지 않았다.최민영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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