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서진우는 마치 집을 잃어버린 개 같았다. 쓸모도 없고, 위협도 되지 않았다.그러니 안다혜는 그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저 성가실 뿐이었다.이모건은 담담하게 말했다.“어차피 오후에 고객 만나러 같이 가야 하잖아. 그 전에 너랑 밥이나 먹을까 해서 왔지. 근데 너 지금... 상황이 좀 꼬인 것 같네?”안다혜는 그의 시선을 따라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인 서진우의 표정을 보게 되었다.서진우 자신도 예상치 못했다. 어째서 안다혜 곁에는 이렇게 뛰어난 남자들이 계속 나타나는 걸까.그는 이모건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옷차림도, 외모도 자신보다 낫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무엇보다 이모건이 안다혜를 바라보는 눈빛의 의미를 같은 남자로서 서진우는 단번에 알아봤다.그건 분명 남자의 애정이 어린 시선이었고 더 나아가 소유욕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자신도 예전에 안다혜를 이렇게 대했었다.서진우는 손가락으로 이모건을 가리키며 말했다.“안다혜, 이 남자 누구야?”그 뻔뻔한 말투에 안다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넌 그렇게 물어볼 자격이 없어. 네가 뭔데?”황당한 서진우의 물음에 안다혜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도대체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이모건은 어처구니없어하는 안다혜의 표정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아마 이런 표정을 짓는 안다혜를 처음 볼 것이다.서진우는 한층 더 기세등등하게 말했다.“잊지 마. 우린 3년 동안을 함께 했던 사이야. 네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군지, 나한테 그 정도 알 권리는 있어.”안다혜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모건아, 우리 그냥 식당 가자. 이런 사람이랑은 말을 하면 할수록 더 답답해질 거야. 말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야.”“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실 네 회사 근처에 이미 예약해뒀어. 바로 가자.”이모건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함께 자리를 떠나려 했다.서진우는 누구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 묘한
말을 마친 안다혜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지금은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하고 오후에는 이모건과 함께 고객을 만나야 했기에 서진우와 말씨름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서진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너 나랑 좀 진지하게 얘기할 수는 없어? 나 요즘 진짜 힘들어. 그냥 너랑 제대로 대화 좀 하고 싶어.”“꺼져!”안다혜는 차갑게 딱 잘라 말했다.“너 참 웃긴다. 나는 네가 어떻게 사는지 1도 궁금하지 않거든?”그녀의 불편함과 짜증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그러나 서진우는 여러 번의 실패와 좌절을 맛본 뒤였고 거기에다 안다혜는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서동욱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지금 안다혜를 보는 서진우의 눈빛 속에는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동경까지 섞여 있었다.그 역시 안다혜처럼 되고 싶었다.“난 진짜 그냥 너랑 대화하고 싶어서 그래.”서진우의 목소리에는 애원하는 기색도 섞여 있었지만, 안다혜의 눈에는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도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혹시 아직도 자신에게서 위로라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정말이지 서진우를 감옥에 보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안다혜는 차가운 표정으로 매몰차게 말했다.“난 싫어. 서진우, 우리 다 어른이잖아. 제발 좀 유치하게 굴지 마. 엄마 찾는 어린애처럼 들러붙지 좀 마.”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비아냥거렸다.“집에 가. 밖에서 떠돌지 말고 집에나 가. 너의 그 멍청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워”서진우는 분해서 말이 막혔다.이제는 안다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가시처럼 가슴에 꽂히는 것 같았다.그는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다혜야, 우리 왜 이렇게 돼버린 거야? 분명 예전엔 이렇지 않았잖아... 게다가 먼저 날 좋아한 건 너였잖아. 네가 먼저 나 쫓아다녔잖아.”안다혜는 지금처럼 초라해진 서진우를 보며 지난날의 선택을 후회했다.“그래, 그땐 내가 눈이 멀었지. 근데 이제는 아니야.
정신을 차린 서진우는 안다혜의 그 의미심장한 눈빛과 마주했다.“왜, 또 감방에 가고 싶어?”순간 서진우는 머릿속이 새하얘졌고 말문이 막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안다혜는 그의 지저분한 몰골을 보고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아니, 이게 얼마 만이라고 사람 꼴이 난민처럼 돼버렸네.’역시 감옥은 사람을 단련시키는 곳인가 보다.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서진우는 며칠 있지도 않고 금방 나온 걸로 알고 있다.그래도 서림 그룹의 도련님인데 서동욱이 아들을 그 정도로 오래 고생시킬 리는 없을 것이다.안다혜의 농담에 서진우의 얼굴은 온통 붉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이 꼬여 버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나... 나 괜찮아...”서진우는 처음으로 안다혜 앞에서 열등감을 느꼈다.그전까지 그는 항상 당당했고 심지어 밖에서는 누구든 그를 보면 먼저 인사를 건네야 받아주는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왜 안다혜 앞에서만 이토록 위축되는 것인지 그 자신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도 몰랐다.안다혜는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볼일 없으면 비켜. 길 막지 말고.”이제 그녀는 서진우에게 조금도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괜히 마주치면 재수 없다고 생각할 불길한 사람일 뿐이었다.서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안다혜, 너 말이 좀 심한 거 아냐?”“내가 뭐가 말이 심하다고 그래?”안다혜는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며 비웃었다.“네가 내 회사 앞에 나타나서 기분 나쁘게 해놓고는 내가 차까지 준비해서 정성스럽게 대접해줄 거로 생각한 거야? 제발 좀 현실을 살아. 쓸데없는 망상에 빠져있지 말고.”안다혜는 그렇게 말하며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그 행동에 서진우는 굴욕감을 느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머리 나쁜 사람 취급하는 게 뻔히 보였다.잠깐, 그런데... 그는 흠칫 놀랐다. 왜 이렇게 쉽게 그녀의 의중을 이해한 것인지 의아했다.더군다나, 자신은 왜 굳이 그녀를 막아섰던 걸까? 그렇게 해서 자신이 뭘 얻는다고.아무
“그리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도 생겼어요.”이 말을 하는 서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심서아의 달콤한 모습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서동욱은 서진우가 말한 사람이 안다혜라고 생각해 대뜸 얼굴을 붉혔다.“아직도 안다혜를 못 잊은 거야?”서동욱의 언성이 높아졌다.“내가 말했지. 너희는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둘은 어울리지 않아.”“아버지. 그런 거 아니에요...”서진우가 설명하려 했지만 서동욱은 설명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풍산 그룹 프로젝트를 따낸 것도 모자라 해외 프로젝트까지 추진하고 있잖아. 안씨 가문 작은 아가씨라는 신분은 안다혜에게 제일 보잘것없는 수식어야.”이 말에 서진우는 두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 차이를 실감하지 못했는데 서동욱이 짚어주자 바로 깨달은 것이다. 이제는 어쩌면 따라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버지. 안다혜가 정말 그렇게 대단해요?”분명 서진우가 기억하는 안다혜는 그를 위해 기꺼이 가정주부로 남으려던 좋은 여자였는데 지금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높아진 것이다.서동욱은 큰 타격을 받은 서진우가 안쓰럽긴 했지만 이제 그만 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에 말을 이어갔다.“그래. 안다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란다. 어쩌면 점점 더 대단해질지도 모르지. 너는 따라갈 수도 없을 만큼.”“그러니까 이상한 망상에 잠겨 있을 시간에 회사 일이나 착실히 배워.”서진우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금방 잠에서 깬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서동욱은 그런 아들이 마음 아팠지만 정신 차리게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그래요. 알겠어요.”서동욱의 서재에서 나온 서진우는 수염이 가득 자란게 예전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서동욱은 그런 서진우의 뒷모습을 보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설마 이번에도 고추장 맛보기 정도의 열정인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제발 오래 버텨주라. 나도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서동욱은 힘이 닿는 데까지 서진우를 위해 이 자리를 지켜볼 생
이제 더는 흐지부지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서진우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서동욱을 찾아갔다.“아버지. 이제 더는 신분을 숨기고 싶지 않아요.”이 말에 서동욱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너 이 자식.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뭐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그게 회사야? 회사를 그따위로 운영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된통 욕을 먹은 서진우가 이렇게 말했다.“나도 알아요.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아버지도 이제 그만 욕해요.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요. 더는 함부로 설치지 않을게요.”서진우가 손을 들고 진지하게 맹세했다.“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맹세할게요.”서동욱은 그런 서진우를 보고 숨이 올라오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기 자신을 다독였다.‘내 아들이야. 소중한 내 아들. 때릴 수는 없지.’서씨 가문의 대를 이을 유일한 자식인데 소중히 다뤄야 했다.“신분을 밝히면? 그 뒤는?”서동욱은 사실 서진우의 빠른 두뇌 회전에 놀랐다.‘설마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사실을 안 건가?’서진우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사실 그 뒤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그저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권력을 쥐어도 되겠다고 생각해서요.”서진우는 지금처럼 허송세월하고 싶지 않았다. 말단 사원부터 시작하면 서동욱이 그 노력을 가상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심서아를 보고 나니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든 것이다. 여자인 심서아도 방향을 찾았는데 남자가 돼서 더 헤매는 건 아닌 것 같았다.서동욱은 그런 서진우가 한심했다. 목소리는 크지만 성과는 턱없이 작아 바로 회사를 물려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서동욱은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더 오래 견지하려고 했다. 그가 있는 한 이 회사는 어떻게든 지켜낼 생각이었다. 평생 뼈를 갈아 바쳤는데 이대로 무너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이렇게 생각한 서동욱은 한심한 서진우를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서동욱이 한마디 덧붙였다
정말 우습기 짝이 없었다.심서아의 눈빛이 점점 굳건해졌다.“서진우.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건 우리 두 사람이 아니야. 너희 부모님이지. 이게 우리 둘의 차이야.”“내가 왜 이렇게 일에 목을 매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다 우리를 위해서잖아.”서진우가 멍한 표정으로 심서아를 바라봤다.“우리를 위해서라니?”심서아가 입을 열었다.“알아서 해. 나는 고객들 상대하러 나가볼게.”“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건 우리가 아니야.”심서아는 곧 도착할 고객 때문에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쓸데없는 곳에 쓸 정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곳에 정성을 쏟아도 모자라는데 같이 하는 건 무리였다.서진우는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모든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혼자만 제자리걸음인 느낌이었다.심서아의 목소리가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있다고 해도 간단한 문제일 텐데 왜 자꾸만 복잡하게 만드는 거야...”서진우는 심서아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입술을 꽉 앙다물고 사무실에서 나오는데 고객과 얘기를 나누는 심서아가 보였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심서아는 얼핏 봐도 돈이 많아 보이는 사모님을 여유있게 상대했다. 신분에 차이가 있었지만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심서아를 서진우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봤다.‘내가 서아를 너무 얕잡아봤구나. 잠재력이 많은 여자였는데.’‘발견하지 못한 내가 바보지.’‘정말 우리 사이는 부모님이 문제인 건가?’이렇게 생각한 서진우는 속으로 뭔가를 다짐했다.손님들을 상대하는 심서아는 반짝반짝 빛났다.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우아하기 그지없었다.‘그래. 나도 더 노력해야겠어.’서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이렇게 다짐했다.심서아가 손님을 보내고 돌아와 보니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돌아갔나 보지?’심서아는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서진우가 여기 있으니 뭘 해도 신경이 쓰였고 고객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