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주승엽의 집은 해성에 있었다.윤하경이 처음 주승엽을 알게 되었을 때, 그저 집안 형편이 꽤 넉넉한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었다.그런데 막상 해성에 도착해 보니, 눈앞에 펼쳐진 호화로운 저택이 윤하경을 제대로 놀라게 했다.“주승엽 씨 집은...”윤하경이 옆얼굴을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이렇게 크다고는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는데요?”해성 역시 경성과 마찬가지로, 땅값이 하늘을 찌르는 도시였다.주승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집이 크면 뭐해요. 저랑은 별 상관도 없는데요. 저는 그냥 저 혼자일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위독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저는 이번에도 안 왔을 거예요.”주승엽이 말을 이을 때 눈빛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윤하경은 그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큰 가문에서 사람들 사이 관계는 한 번 꼬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복잡해지는 법이었다.듣다 보면 사람 마음만 괜히 더 피곤해질 뿐이었다.윤하경은 오늘 그저 하루 동안, 주승엽의 약혼자 역할을 대신해 주러 온 것뿐이었다.굳이 그 이상의 일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주민성 회장이 머무는 본채는 저택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었다.윤하경과 주승엽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몸에 꼭 맞는 치파오를 입고 서 있는 젊은 여자였다.우아하게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자태로 서 있는 그 사람은, 바로 주승엽의 새어머니였다.윤하경은 예전에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첫 만남 때의 인상이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늘 인사도 그저 담담하게 고개만 살짝 숙였다.“아주머니.”그런데 그 한마디가, 마치 이지아의 신경을 건드리는 방아쇠라도 된 것 같았다.이지아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지금 내가 나이 많다고 비꼬는 거니?”윤하경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매번 느끼지만 이지아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 같았다.“주승엽 씨 어머니시잖아요. 제가 아주머니라
잠시 침묵하던 윤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언제 가면 돼요? 하민이부터 먼저 잘 맡겨 놔야 해서요.”윤하경의 말이 끝나자 주승엽은 바로 표정이 누그러지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하민이도 괜찮으면 같이 데리고 와요. 저는 상관없어요.”“아니에요.”윤하경은 굳이 윤하민을 데리고 장거리 이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하루만 다녀오는 걸로 해요. 오전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계산해 보니 그렇게만 맞추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럼 좋죠.”주승엽이 웃으며 말했다.“내일 아침 일찍 제가 데리러 올게요.”마침 그 말을 끝낼 즈음, 차는 윤하경이 사는 저택 앞에 멈춰 섰다.주승엽이 내려서 돌아가려 하자, 윤하경이 뒤돌아보며 말했다.“차는 두고 가세요.”주승엽이 순간 멈칫하자, 윤하경이 웃으며 덧붙였다.“내일 아침에 저 데리러 오셔야 하잖아요.”이곳은 시내 중심에서도 좀 벗어난 곳이라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잡기도 불편했다.그 말을 듣고서야 주승엽이 미소를 보였다.“그렇네요. 알겠습니다.”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윤하민이 곤히 잠든 뒤였다.윤하경은 침대 곁에 앉아 한동안 윤하민만 바라보았다.작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 자는 모습이 어찌나 평온한지 괜스레 마음이 짠해졌다.낮에는 동그랗게 빛나던 눈동자가 고요히 감겨 있으니, 훨씬 얌전하고 차분해 보였다.윤하경은 내일 또 윤하민을 집에 혼자 남겨 두고 하루를 비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윤하경은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온 뒤, 잠든 윤하민을 꼭 끌어안고 그대로 잠에 들었다.다행히도 윤하민은 밤새도록 깊이 잠들어 있었고, 윤하경도 윤하민을 품에 안은 채로 다음 날 아침, 방숙희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았다.“아가씨, 주승엽 씨가 오셨어요. 친구분이라고 하시네요.”“네, 지금 일어날게요.”윤하경이 느릿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옆에 있던 윤하민도 함께 깨어나더니 윤하경에게 달라붙어 칭얼거렸다.“엄마, 조금만 더 자면 안
“그 말을 들으니, 주승엽 씨가 아직 저를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강현우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저는 갖고 싶은 게 생기면, 그게 뭐든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강현우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제가 신경 쓰는 건, 그게 제 것인지 아닌지, 딱 그거 하나뿐입니다.”그러자 주승엽은 스테이크를 자르던 동작을 멈추었다.누가 들어도 속뜻이 분명한 말이었다.식탁 분위기가 단번에 팽팽해졌다.윤하경은 옆에서 미간을 찌푸리더니 조용히 식기를 내려놓았다.“저는 다 먹었어요.”윤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승엽을 보며 말했다.“다음에 다시 봬요.”말을 끝내자마자, 윤하경은 두 남자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식당 밖으로 걸어 나갔다.강현우가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아들었을 것이다.주승엽을 향해 자신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언뜻 보면 일종의 선전포고 같았다.하지만 정작 윤하경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내가 물건이야?’윤하경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강현우는 결국 나를 하나의 물건쯤으로 여긴다는 뜻일까? 갖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어야 하는 대상이었다가, 더는 필요 없으면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가, 다시 생각나면 꺼내 쓰면 되는 그런 존재야? 결국 나는 감정도, 의지도 없는 소품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야?’윤하경은 속이 울컥 끓어올랐다.윤하경이 하이힐 굽을 단단히 울리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실루엣이 은은히 흔들렸다.어두운 조명 아래의 레스토랑에서 윤하경의 뒷모습은 몇몇 손님의 시선을 저절로 끌어당겼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강현우는 눈길만 옆으로 돌려 윤하경이 떠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쫓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망설이고 있을 때, 주승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강 대표님은 천천히 식사하시죠. 저는 제 약혼자를 먼저 집에 데려다주어야 할 것 같네요.”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승엽은 예상대로 강현우의 안색이
“오늘 밤이요?”윤하경은 무의식적으로 윤하민이 있는 방 쪽을 힐끗 돌아봤다.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윤하경이 대답했다.“좋아요. 주소 알려 주세요.”“알겠어요.”주승엽이 전화기 너머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는 소리가 살짝 들렸다.“주소는 문자로 보낼게요. 저녁 여덟 시에 봐요.”전화를 끊은 뒤, 윤하경은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오후 다섯 시를 훌쩍 넘긴 참이었지만, 여덟 시라면 충분히 시간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며칠 동안 병원에만 붙어 있다 보니, 사람도 같이 축 늘어진 기분이었다.윤하경은 먼저 샤워하고 정신을 조금 가다듬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서야 집을 나섰다.마침 나갈 때는 방숙희가 윤하민을 재우려고 토닥이고 있었다.윤하경이 외출한다는 말을 듣자, 윤하민은 얌전히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그러고는 윤하경이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윤하민은 슬쩍 휴대폰을 집어 들고 강현우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나쁜 아저씨, 엄마 나갔어요. 내가 도와준 거 모른 척하지 마요.”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윤하경은 차를 몰아, 주승엽이 보내 준 식당 주소로 향했다.도착했을 때는 저녁 7시 50분, 약속 시간보다 10분 먼저였다.그런데 이미 주승엽은 레스토랑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프렌치 레스토랑.윤하경은 주승엽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짓고 나올 때 걸쳤던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벗어 들었다.주승엽이 재빨리 앞으로 다가와 코트를 받았다.“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요. 그래서 여기로 예약했어요.”“다 괜찮아요.”윤하경이 잔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주승엽이 의자를 빼 주는 타이밍에 맞춰 자리에 앉았다.“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거예요?”주승엽이 그 말을 듣고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멈췄다.표정만 봐도 뭔가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마침 그때, 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주승엽은 일단 화제를 접고 말했다.“먼저 식사부터 하죠. 이따가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윤하경은 살짝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끄덕
윤하경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앞에는 강현우의 잘생긴 얼굴이 들어왔다.마침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이 강현우의 원래 또렷한 이목구비를 더욱 선명하게 살려 주고 있었다.윤하경은 입술을 꼭 깨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며칠 동안 하민이 봐 주느라 고생 많으셨죠.”강현우가 입꼬리를 비웃음처럼 살짝 올렸다.“하민이도 내 딸이야. 굳이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말만 들으면 꽤 까칠한 대답이었다.윤하경은 또 어디서 강현우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그날 강현우가 윤하민을 데리고 병원에 와서 소지연에게 도시락을 전해 준 뒤로는 병원에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지금 이렇게 다시 마주 앉아 나누는 첫마디가 또 이런 날 선 말투였다.윤하경은 그 말에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도 굳이 더 말싸움할 생각이 없어서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였다.“그럼 저는 하민이 데리고 먼저 돌아가 볼게요.”그 말을 듣자 강현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윤하경이 딱히 잘못한 말도 없는데 강현우의 얼굴과 분위기는 마치 윤하경이 큰 죄라도 지은 사람인 것처럼 어두워졌다.주변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지는 느낌이었다.윤하경은 모르는 척 윤하민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고 강현우의 주위를 감도는 차가운 기운 따위는 못 본 척, 윤하민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윤하민은 몇 걸음 가다가도 자꾸 뒤를 돌아보며 강현우에게 손을 흔들었다.“나쁜 아저씨, 안녕!”윤하민이 아직도 호칭을 바꾸지 않은 것을 보고 윤하경은 조금 놀랐다.이렇게 오래 강현우와 같이 지냈으니 이제쯤이면 아저씨 말고 다른 호칭을 쓰지 않을까 싶었는데, 윤하민은 여전히 강현우를 나쁜 아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그래도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 호칭을 억지로 바꾸게 할 생각은 없었다.윤하경은 굳이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윤하민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자, 그동안 계속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윤하경의 신경이 비로소 조금 풀리는 듯했다.“엄마, 지연 이모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하민이 묻자 윤하경이 고개를
위층에서 내려온 유호천은 바로 이런 장면을 보았다.그러나 유호천은 그저 장미자를 무심하게 한 번 쳐다볼 뿐, 곧바로 자리를 뜨려 했다.장미자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유호천을 불러 세웠다.“어디 가는 거야?”유호천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장미자를 한 번 바라봤다.입은 열지 않았지만,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장미자는 그 눈빛에 잠시 얼어붙었고, 가슴 한편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죽고 싶어요.”유호천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하지만 지연이가 당한 상처랑,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저는 죽을 용기도 없어요. 저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으니 만족해요?”유호천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장미자가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고통은 아까 유한수에게 호통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깊게 파고들었다.장미자는 갑자기 앞으로 달려가 유호천을 껴안았다.“호천아, 엄마 놀라게 하지 마. 엄마가 이제는 간섭 안 할게, 응?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허허...”차가운 웃음소리가 장미자의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장미자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멍하니 굳어 버린 유호천의 눈동자가 보였다.“소용없어요. 이제는 아무 소용 없어요.”유호천은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어 나갔다.장미자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서, 유호천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리고 마침내 그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왜... 왜 이렇게 된 거야. 분명히 나는 다 너희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한 건데...”장미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장미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이 모든 일을 다 유호천을 위해, 유씨 가문을 위해서 했는데, 왜 하나같이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소지연... 그래, 소지연!”울음을 한 차례 쏟아낸 뒤, 장미자는 갑자기 소지연의 이름을 되뇌더니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다 걔 탓이야. 전부 그 여자 때문이야. 이 모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