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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한다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3 16:33:00

밤은 더 깊어졌으나, 궁은 잠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깨어 있어서가 아니라 의심이 잠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진은 군영 안쪽의 훈련장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

불빛이 닿는 곳.

그는 그 자리를 일부러 골랐다.

숨은 시선은 어둠을 좋아하지만, 완전한 밝음에서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는 갑옷의 끈을 천천히 조였다.

낙마로 다친 어깨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약점이었지만, 그 약점을 모르는 자에게는아무 의미도 없었다.

문제는 그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었다.

도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싸우면 이 밤은 끝난다.

그러나 끝난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는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선택이 언제나 가장 어려운 선택이라는 사실을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시각, 이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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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147. 너무 많은 문이 열렸다

    대비전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반듯했으나,그 반듯함이 오늘은 오히려 위태로워 보였다.사람이 오가며 닳아야 할 길이 지나치게 말끔하다는 것은 누군가 미리 정리해 두었다는 뜻이기도 했다.이수는 그 사실을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생각하는 순간, 발걸음이 느려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지금 필요한 것은 머뭇거림이 아니라 지나침이었다.대비전의 문 앞에서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지 않았다.숨을 고른다는 행위조차 여기서는 하나의 신호가 될 수 있었다.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들고 문을 넘었다.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사람이 많지 않았고, 말소리도 없었다.그 고요는 이미 많은 말이 오간 뒤의 고요였다.대비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표정은 평온했으나, 그 평온함은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오히려 모든 일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다.“왔느냐.”대비의 음성은 낮고 고른 결이었다.“예, 대비마마.”이수는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몸은 낮췄으나 눈은 피하지 않았다.“어젯밤이 길었을 터인데.”대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잠은 이루었느냐.”“잠들지 못했사옵니다.”이수는 솔직하게 답했다.이곳에서는 솔직함이 가장 안전한 경우도 있었다.대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반응은 그 대답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궁이 소란스러우면 잠드는 법을 잊게 되는 법이지.”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묻겠다.”대비의 시선이 이수에게 곧게 닿았다.“어젯밤, 세자가 네 처소에 들렀다 들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부정하지 않았다.“예, 대비마마.”“그리고,”대비는 말을 이었다.“그 자리에 도진도 있었다고 하더구나.”이수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그러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도진 경은 처소에 접근한 기척을 확인하러 잠시 들렀을 뿐이옵니다.”그 대답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다르게 말할 이유도 없었다.대비는 한동안 이수를 바라보았다.그 시선에는 책망도, 분

  • 천년의 기억   146. 비어 있는 대답들

    밤이 완전히 물러났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었다.새벽의 빛은 오고 있었으나, 그 빛은 위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칼날에 가까웠다.이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방 안은 고요했으나, 그 고요는 잠을 부르지 않았다.오히려 생각을 불러왔다.어제의 말들, 어제의 눈빛들,그리고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들.그녀는 손을 내려다보았다.손끝이 더 이상 떨리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이건 두려움이 가라앉았다는 뜻이 아니었다.두려움을 넘는 단계로 이미 들어섰다는 신호였다.상궁이 다시 들어와 조심스레 다가섰다.“마마.”그녀는 낮게 말했다.“해가 들기 전, 대비전에서 사람을 보내올 듯합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그 소식이 놀랍지 않았다.이 밤이 이렇게 지나갈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거든…”이수는 잠시 말을 멈췄다.어떤 말이 가장 덜 위험한지 빠르게 가늠했다.“…기다리라 하여라. 내가 직접 나가겠다.”상궁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마마께서 직접”“그래야 한다.”이수의 말은 단정했다.“이제는 누군가의 말로 대신 전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상궁은 더 묻지 않았다.궁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일수록 이런 순간에 말을 아낀다.이수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한 번 정돈되었다.그녀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지금 필요한 것은 얼굴이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의 문 앞에 서 있었다.아침의 공기가 폐 속으로 깊게 스며들었다.몸은 여전히 무거웠으나,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그는 궁 쪽을 바라보았다.높은 담장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지금도 많은 것들이 움직이고 있으리라는 것을 그는 본능처럼 느꼈다.‘오늘은…’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그러나 그 바람에는 이미 자신조차 기대하지 않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군영 안쪽에서 동료 무관 하나가 다가왔다.눈빛이 평소와 달랐다.“도진 나으리.”그가 낮게 불렀

  • 천년의 기억   145. 이제 버틸 시간이 왔다

    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새벽을 앞에 두고도, 어둠은 자신이 물러설 이유가 없다는 듯 궁의 지붕 위에 눌러앉아 있었다.이수는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자리에 눕는다는 행위가 곧 안온함을 의미하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듯했다.그녀는 낮게 타오르는 촛불 옆에 앉아 손끝으로 찻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훑었다.식은 온기가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확인해야 할 것은 끝나지 않았다.현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낮은 파문처럼 반복되고 있었다.의심은 칼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으나,궁에서는 의심이야말로 가장 늦게 닦이는 칼이었다.상궁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이번에는 발소리를 숨기지 않았다.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마마.”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세자 저하께서 오늘 밤 더는 움직이지 않으실 듯합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식이 안도인지, 유예인지 가늠하지 않았다.“그래도…”이수가 낮게 말했다.“오늘 밤의 기척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상궁은 대답하지 못했다.궁에서 오래 산 사람일수록 그 말의 의미를 굳이 묻지 않는다.잠시 후, 상궁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마마께서 너무 오래 깨어 계십니다.”이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아직 빛은 오지 않았지만, 어둠의 결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눈을 감는다고 잠이 오는 밤은 아니다.”그녀는 담담히 말했다.“오늘은 눈을 뜨고 있어야 할 밤이다.”상궁은 더 말하지 않았다.그저 한 걸음 물러나 불을 조금 더 낮췄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 안의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무장은 풀었으나 몸은 여전히 긴장 속에 있었다.검을 잡지 않은 손이 허공에서 자꾸만 멈칫했다.그는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이 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지금은 나서지 말라.’현의 명이 아니라, 이수의 눈빛이 그를 그 자리에 묶어두고 있었다.도진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대신 기

  • 천년의 기억   144. 닫히지 않은 밤의 무게

    현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복도는 곧바로 고요를 되찾지 못했다.마치 방금 전의 공기가 자신이 갈라진 자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어딘가 팽팽하게 남아 있었다.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이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탓도 아니었고,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다.지금 이 밤이 끝났다고 믿는 순간, 다시 시작될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촛불이 낮게 흔들렸다. 불꽃은 흔들렸지만 꺼지지 않았다.이수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숨이 내려앉는 곳마다 가슴 안쪽이 조용히 아렸다.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지만, 이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마마…"상궁의 목소리는 울음을 삼킨 뒤의 소리였다."이제… 처소로 드시겠사옵니까."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발걸음을 떼는 순간, 다시 한 번 복도 끝을 돌아보았다.현이 사라진 방향.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방금까지 서 있던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김 상궁."이수가 낮게 불렀다."예, 마마.""오늘 밤의 일은…"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어떤 말로 규정해야 할지 쉽게 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누구에게도 먼저 전하지 마라."상궁은 잠시 망설이다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분부 받들겠사옵니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알고 있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궁에서 이런 밤은 결코 혼자만의 것으로 남지 않는다는 것을.처소의 문이 닫히자 바깥의 기척이 한 겹 가려졌다.그제야 이수는 등 뒤의 힘을 풀었다. 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상궁이 급히 다가왔으나 이수는 손을 들어 말렸다."괜찮다."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정했다."잠시… 숨만 고르면 된다."상궁은 물러서며 촛불을 정리했다. 방 안의 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이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창가로 다가가 어둠 속 궁을 내려다보았다.밤은 깊었고, 궁은 잠든

  • 천년의 기억   143. 의심을 칼로 바꾸지 않는 법

    문이 열리는 데에는 소리가 필요하지 않았다.누군가 손을 대지 않았어도, 이 밤은 이미 스스로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복도에 고인 공기가 한 번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흔들림은 바람도, 발소리도 아니었지만 세 사람은 동시에 느꼈다.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었다는 감각을.현은 한 발짝 더 다가섰다.그의 얼굴에는 분노도, 조급함도 없었다.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했다.그 차분함이 이 밤을 더 위험하게 만들었다.“빈.”그는 다시 불렀다.이번에는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달랐다.호칭이 아니라, 확인이었다.“내가 묻겠다.”현의 시선은 이수에게 고정된 채,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지금 이 자리에 그대와 도진 경, 둘만의 연이 있었는가.”그 질문은 이미 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질문이었다.답이 무엇이든 그는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이수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눈동자는 맑았고, 도망치려는 흔적은 없었다.“저하께서 묻고 계신 것이 사실이라면,”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저하께서 지금 의심하시는 것은 저와 도진 경의 마음이옵니까?”현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마음이라.”그는 낮게 되뇌었다.“궁에서 마음이란 말은 가장 쉽게 죄가 되는 말이지요.”도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려 했다.그러나 이수는 그보다 더 빠르게 한 발을 내디뎠다.“저하.”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이 일은 도진 경의 몫이 아니옵니다.”현의 시선이 도진을 스쳤다가 다시 이수에게 돌아왔다.“그대가 막겠다는 말로 들립니다.”“제가 감당하겠다는 뜻이옵니다.”그 대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 침묵은 짧았으나 궁의 밤을 충분히 가르고도 남았다.“감당이라…”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대는 무엇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까.”이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리고 분명히 말했다.“저하의 의심을.”“궁의 시선을.”“그리고… 이 밤이 끝

  • 천년의 기억   142. 문을 여는 쪽

    새벽은 아직 문턱에 서 있었다.빛은 오지 않았고, 대신 기척만이 궁을 맴돌았다.어디선가 종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을 재고 있었다.도진은 복도의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서 있다는 표현이 맞지 않았다.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움직이지 않는 것이 선택이 되는 밤,그는 가장 어려운 쪽을 택하고 있었다.발소리가 하나, 둘. 멀지 않았다.경계의 방식이 바뀌었음을 그는 느꼈다.보던 눈이 사라지고, 대신 기다리는 눈이 생긴 밤이었다.그 시각, 이수는 복도의 중앙에서 걸음을 멈췄다.앞으로 나아가면 대비전으로, 옆으로 돌면 자신의 처소로 돌아갈 수 있는 갈림.궁은 늘 이렇게 갈림을 만든다.사람에게 선택을 맡긴 척하면서, 이미 답을 정해 둔 채로.이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슴 속에서 한 문장이 또렷해졌다.‘지금, 누군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문이란 반드시 나무와 쇠로 된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입을 여는 것, 발을 내딛는 것, 혹은 침묵을 깨는 것 역시 문을 여는 일이었다.그녀는 방향을 틀었다.돌아가는 쪽이 아니라, 마주하는 쪽으로.그 움직임은 조용했지만 궁은 그 소리를 들었다.궁은 늘 이런 것에는 빠르다.세자 현은 긴 복도를 지나오며 자신의 걸음 소리를 의식하지 않았다.의식할 필요가 없었다.이 복도는 이미 그의 발걸음에 익숙한 길이었다.그는 마음속으로 여러 번 같은 말을 되뇌었다.‘확인만 하겠다.’‘확인은 칼이 아니라고,’‘확인은 죄가 아니라고.’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그러나 그는 알았다.확인은 언제나 그 다음의 행동을 불러온다는 것을.도진은 멀리서 현의 기척을 먼저 느꼈다.발걸음의 무게가 달랐다.망설임이 없는 걸음이었다.그는 그 방향을 바라보지 않았다.보는 순간, 이 밤은 이미 결론을 향해 달려갈 것이기 때문이다.도진은 손을 주먹 쥐었다가 풀었다.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검을 쥐지 않은 손이 이토록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낯설었다.그때, 이수

  • 천년의 기억   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 천년의 기억   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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