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차가 도심으로 다시 들어섰을 때, 창밖의 불빛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늦은 시간의 거리에는 각자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그 모습은 이수에게 잠시 현실감 없는 장면처럼 느껴졌다.“저 사람들은,”이수가 낮게 말했다.“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을 끝내겠죠.”“대부분은 그렇습니다.”도진의 목소리는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에는 오래된 체념이 섞여 있었다.“모르는 채로 잠드는 게 축복일 때도 있죠.”“도진 씨는 그 축복을 가진 적 없죠.”그의 손이 핸들 위에서 잠시 멈췄다.그러나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아주 오래전부터요.”차는 이수의 집 근처에 멈춰 섰다.엔진 소리가 꺼지자 갑작스럽게 고요가 내려앉았다.그 고요 속에서 이수는 문을 열지 않은 채 잠시 머뭇거렸다.“오늘은… 여기까지죠.”“네.”도진은 곧장 내리려 하지 않았다.이수는 그가 아직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는 걸 느꼈다.“이수 씨.”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앞으로 한동안, 일상이 조금 더 불편해질 겁니다.”“위험해진다는 뜻이죠.”“그렇습니다.”“그래도”이수는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뒤 다시 말했다.“그래도 당신이 곁에 있다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그 말은 의존이 아니었다.동행을 선택하는 사람의 태도였다.도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그 말 하나면 충분합니다.”이수는 차에서 내렸다.문을 닫기 전, 그녀가 다시 몸을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오늘뿐만이 아닙니다.”그의 대답에 그녀는 작게 웃었다.집으로 들어간 뒤, 이수는 신발을 벗고도 한동안 서 있었다.집 안은 너무 조용했다.공원의 밤보다도, 차 안보다도 더 고요했다.불을 켜지 않은 채 거실 창가로 다가갔다.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어딘가 낯설었다.“괜찮아.”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그러나 가슴 안쪽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그 시각, 도진은 차를 몰아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라디오도, 음악도 켜지 않았다.침묵 속에서 그는 몸 안
해가 완전히 저물자 공원의 공기는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사람들의 발걸음은 뜸해졌고,남은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멀리서 간간이 들려오는 차량의 마찰음뿐이었다.이수는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손끝이 조금 시렸지만 말하지 않았다.도진은 그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예전에는,”이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밤이 이렇게 조용하면 안심이 됐어요.”도진이 고개를 돌렸다.“지금은요.”“지금은… 조용한 밤이오히려 무섭게 느껴져요.”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숨김이 없었다.도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벤치에 함께 앉았다.“조용한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그가 말했다.“일어나기 직전의 숨 고르기일 때가 많습니다.”이수는 그 말을 이해했다.그래서 반박하지 않았다.“도진 씨는 언제부터 이런 느낌을 알게 됐어요.”“아주 오래전부터요.”그 대답은 자연스러웠지만그 안에 말해지지 않은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이수는 더 묻지 않았다.지금은 알아야 할 때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잠시 후, 도진의 휴대전화가 다시 진동했다.이번에는 그가 바로 받지 않았다.“안 받아도 돼요.”이수가 말했다.“아닙니다.”도진은 전화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화를 나눴다.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빨라져 있었다.“현 씨가,”이수가 먼저 물었다.“예.”“뭔가… 결정한 것 같죠.”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극단적인 선택을 떠올리기 시작합니다.”“그리고 그 선택이 옳은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고요.”“중요한 건 자신이 잃고 있다는 감각을 멈추는 것이니까요.”이수는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죠.”“흔들리지 않으면 됩니다.”도진은 차분하게 말했다.“그가 원하는 건 당신의 불안이고, 당신
차는 도심을 벗어나 조금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빌딩의 유리면이 사라지고, 나무가 늘어선 도로가 나타났다.속도가 느려지자 이수의 숨도 조금씩 제 박자를 찾았다.창밖을 보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이상하죠.”“무엇이요.”“말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오히려 하지 않은 말들이 더 무겁게 남아 있어요.”도진은 잠시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풀었다.“말하지 않은 것은 아직 선택의 영역에 있다는 뜻입니다.”“선택…”“네. 말해버리면 되돌릴 수 없지만, 말하지 않으면 아직 지킬 수 있죠.”이수는 그 말의 끝을 천천히 되짚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더 버거운 걸지도 모르겠어요.”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잠시의 정적. 엔진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경적만이 공기를 채웠다.그때 도진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그는 화면을 힐끗 보았다.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무슨 일이에요?”“확인해야 할 게 생겼습니다.”“지금요?”“예.”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당신과 관련된 건 아닙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이수는 그 말에서 ‘당장’이라는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현 씨 쪽이죠.”도진은 부정하지 않았다.“그 사람의 움직임이 조금 빨라졌습니다.”신호가 바뀌었고, 차는 다시 출발했다.이수는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조용히 물었다.“제가 부담이 되는 건 아니죠.”도진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엔진을 껐다.“이수 씨.”그는 처음으로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부담이라면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았을 겁니다.”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그럼…”“지켜야 할 선택입니다.”도진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당신이 이야기를 선택했듯이, 저는 당신 곁에 있는 걸 선택했습니다.”그 말은 과장도, 각오의 선언도 아니었다.이미 내려진 결정을 그대로 옮긴 문장이었다.이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저는요.”그녀가 말했다.“지금도 가끔 겁이 나요. 당신까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밝은 복도의 소음이 한 박자 늦게 밀려들었다.구두 소리, 낮은 인사, 서류가 스치는 소리들.모두 일상의 얼굴이었다.그러나 이수에게는 그 일상이 유리처럼 얇아 보였다.“이쪽입니다.”직원이 길을 안내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도진은 반 걸음 뒤에서 자연스럽게 위치를 잡았다.그 배치는 누가 정한 것도, 누가 요구한 것도 아니었지만둘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익숙한 거리였다.회의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안쪽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자였다.아니, 기자들.“오늘은 사진도 같이”“질문은 사전에”“SNS 반응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미 이야기는 이수의 것이 되어 있었다.손잡이에 손을 얹은 순간,이수는 자신의 심장이 생각보다 차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괜찮겠습니까.”도진이 낮게 물었다.“네.”이수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이제는 괜찮아요.”문이 열렸다.시선이 한꺼번에 쏠렸다.플래시가 터졌고, 순간적으로 공기가 뜨거워졌다.이수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그 말 하나로 소음은 조금 가라앉았다.그녀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앉으면 방어처럼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오늘은 질문을 많이 받지 않겠습니다.”기자들 사이에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대신 제가 먼저 말씀드릴 게요.”도진은 회의실 벽 쪽에 서서 그 모든 반응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이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제 소설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기억이기도 합니다.”그 말에 누군가 펜을 멈췄다.“그리고 그 기억은 제가 선택해서 쓴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들이었습니다.”질문이 나오기 전, 그녀는 말을 이었다.“그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저와 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그녀는 잠깐 시선을 옮겼다.도진을 향해.“그 관심이 어디까지 허락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긋고 싶습니다.”회의실의 공기가 눈에 띄게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아침을 건너왔다.신호등은 제 시간을 지켰고, 카페의 문은 늘 하던 대로 열렸으며,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을 아무 설명 없이 안고 걸었다.그러나 이수의 하루는 이미 어제와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거울 앞에 잠시 섰다.화장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머리카락도, 옷차림도. 달라진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뿐이었다.도진은 현관 옆에 서 있었다.신발을 신은 채, 문을 먼저 열지 않고 기다리는 자세로.“같이 나갈 겁니까.”그가 물었다.“네.”이수는 주저 없이 답했다.“오늘은 숨기고 싶지 않아요.”도진은 그 말의 무게를 이미 알고 있었다.그녀의 선택이 사소한 동행이 아니라는 것도. 문을 나서자 바람이 먼저 스쳤다.이수의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그 순간,도진은 아주 짧게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익숙하지 않은 공기의 밀도.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공간에 남아 있는 듯한 기척.“잠깐.”그가 걸음을 멈췄다.“왜요?”“그냥 확인하고 가죠.”도진은 골목 끝을 한 번,건너편 유리창에 비친 반사를 한 번, 그리고 이수의 등 뒤를 한 번 더 살폈다.아무것도 없었다.적어도 보이는 것들 중에는.“괜찮습니다.”그는 말했지만, 목소리는 조금 더 낮아져 있었다.차에 오르자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문화면의 짧은 코너였다.“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행보에 대해 업계의 관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이수는 손을 뻗어 라디오를 껐다.“오늘은 그 이야기 안 듣고 싶어요.”“안 들어도 됩니다.”도진은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요.”차창 밖으로 사람들이 흘러갔다.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통화를 하며, 누군가는 아무 표정 없이 길을 건넜다.이수는 그 풍경을 보다가 문득 말했다.“도진 씨.”“네.”“만약에요.”그녀는 문장을 한 번 접었다가 다시 펼쳤다.“이 모든 게 더 커진다면, 당신까지 잃게 된다면”“그 가정은 하지
새벽은 언제나 먼저 도착한 사람처럼 조용히 집 안을 채웠다.불을 켜지 않아도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이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밤새 그대로였다.잠들지 못했다기보다는 잠들지 않기로 선택한 자세에 가까웠다.부엌 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컵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그리고 아주 짧은 숨.도진이었다.“잠이 안옵니까?.”그는 물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책망도, 염려도 아닌 사실 확인에 가까운 말투였다.“도진 씨도요.”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답했다.도진은 그녀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조금 비켜 선 채 창가에 기대 섰다.그 거리에는 의도적인 계산이 담겨 있었다.“오늘은 연락이 올 겁니다.”“누구에게서요.”“어제 그 사람들.”이수는 잠시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풀었다.“조건을 제시하겠죠.”“네.”“저를 빼고?”도진은 즉답하지 않았다.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가능성이 큽니다.”이수는 작게 웃었다.웃음이라기보다는 한 번 숨을 고른 표정에 가까웠다.“그럼 제가 해야 할 선택은 이미 정해진 거네요.”도진이 고개를 돌렸다.“아직은 아닙니다.”“도진 씨.”이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사람들이 원하는 건 항상 비슷해요. 조용해지라는 것. 말하지 말라는 것. 혼자 있으라는 것.”그녀는 시선을 들었다. 눈동자가 맑았다.“하지만 그건 선택이 아니에요. 지워지는 과정이죠.”도진의 턱선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래서 제가 옆에 있는 겁니다.”“옆에 있으면 당신이 위험해져요.”“이미 그 선은 넘었습니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그 담담함이 오히려 확고했다.잠시 후,이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예상보다 빠른 연락이었다.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그녀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왔어요.”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받으세요.”이수는 스피커를 켰다.“말씀하세요.”상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그러나 정중함 아래에는 명확한 방향이 있었다.“작가님께서 최근 공개적인 발언을 하신 이후, 여러 방향에서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