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새벽을 앞에 두고도, 어둠은 자신이 물러설 이유가 없다는 듯 궁의 지붕 위에 눌러앉아 있었다.이수는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자리에 눕는다는 행위가 곧 안온함을 의미하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듯했다.그녀는 낮게 타오르는 촛불 옆에 앉아 손끝으로 찻잔의 가장자리를 천천히 훑었다.식은 온기가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확인해야 할 것은 끝나지 않았다.현의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낮은 파문처럼 반복되고 있었다.의심은 칼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으나,궁에서는 의심이야말로 가장 늦게 닦이는 칼이었다.상궁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이번에는 발소리를 숨기지 않았다.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마마.”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세자 저하께서 오늘 밤 더는 움직이지 않으실 듯합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식이 안도인지, 유예인지 가늠하지 않았다.“그래도…”이수가 낮게 말했다.“오늘 밤의 기척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상궁은 대답하지 못했다.궁에서 오래 산 사람일수록 그 말의 의미를 굳이 묻지 않는다.잠시 후, 상궁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마마께서 너무 오래 깨어 계십니다.”이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아직 빛은 오지 않았지만, 어둠의 결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눈을 감는다고 잠이 오는 밤은 아니다.”그녀는 담담히 말했다.“오늘은 눈을 뜨고 있어야 할 밤이다.”상궁은 더 말하지 않았다.그저 한 걸음 물러나 불을 조금 더 낮췄다.그 시각, 도진은 군영 안의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무장은 풀었으나 몸은 여전히 긴장 속에 있었다.검을 잡지 않은 손이 허공에서 자꾸만 멈칫했다.그는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이 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사실이 더 괴로웠다.‘지금은 나서지 말라.’현의 명이 아니라, 이수의 눈빛이 그를 그 자리에 묶어두고 있었다.도진은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대신 기
현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복도는 곧바로 고요를 되찾지 못했다.마치 방금 전의 공기가 자신이 갈라진 자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어딘가 팽팽하게 남아 있었다.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이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탓도 아니었고,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다.지금 이 밤이 끝났다고 믿는 순간, 다시 시작될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촛불이 낮게 흔들렸다. 불꽃은 흔들렸지만 꺼지지 않았다.이수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숨이 내려앉는 곳마다 가슴 안쪽이 조용히 아렸다.상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지만, 이수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마마…"상궁의 목소리는 울음을 삼킨 뒤의 소리였다."이제… 처소로 드시겠사옵니까."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발걸음을 떼는 순간, 다시 한 번 복도 끝을 돌아보았다.현이 사라진 방향.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방금까지 서 있던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김 상궁."이수가 낮게 불렀다."예, 마마.""오늘 밤의 일은…"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어떤 말로 규정해야 할지 쉽게 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누구에게도 먼저 전하지 마라."상궁은 잠시 망설이다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분부 받들겠사옵니다."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알고 있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궁에서 이런 밤은 결코 혼자만의 것으로 남지 않는다는 것을.처소의 문이 닫히자 바깥의 기척이 한 겹 가려졌다.그제야 이수는 등 뒤의 힘을 풀었다. 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상궁이 급히 다가왔으나 이수는 손을 들어 말렸다."괜찮다."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단정했다."잠시… 숨만 고르면 된다."상궁은 물러서며 촛불을 정리했다. 방 안의 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이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창가로 다가가 어둠 속 궁을 내려다보았다.밤은 깊었고, 궁은 잠든
문이 열리는 데에는 소리가 필요하지 않았다.누군가 손을 대지 않았어도, 이 밤은 이미 스스로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복도에 고인 공기가 한 번 미세하게 흔들렸다.그 흔들림은 바람도, 발소리도 아니었지만 세 사람은 동시에 느꼈다.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었다는 감각을.현은 한 발짝 더 다가섰다.그의 얼굴에는 분노도, 조급함도 없었다.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했다.그 차분함이 이 밤을 더 위험하게 만들었다.“빈.”그는 다시 불렀다.이번에는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달랐다.호칭이 아니라, 확인이었다.“내가 묻겠다.”현의 시선은 이수에게 고정된 채,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다.“지금 이 자리에 그대와 도진 경, 둘만의 연이 있었는가.”그 질문은 이미 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질문이었다.답이 무엇이든 그는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이수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눈동자는 맑았고, 도망치려는 흔적은 없었다.“저하께서 묻고 계신 것이 사실이라면,”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저하께서 지금 의심하시는 것은 저와 도진 경의 마음이옵니까?”현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마음이라.”그는 낮게 되뇌었다.“궁에서 마음이란 말은 가장 쉽게 죄가 되는 말이지요.”도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려 했다.그러나 이수는 그보다 더 빠르게 한 발을 내디뎠다.“저하.”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이 일은 도진 경의 몫이 아니옵니다.”현의 시선이 도진을 스쳤다가 다시 이수에게 돌아왔다.“그대가 막겠다는 말로 들립니다.”“제가 감당하겠다는 뜻이옵니다.”그 대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 침묵은 짧았으나 궁의 밤을 충분히 가르고도 남았다.“감당이라…”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대는 무엇을 감당하겠다는 것입니까.”이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리고 분명히 말했다.“저하의 의심을.”“궁의 시선을.”“그리고… 이 밤이 끝
새벽은 아직 문턱에 서 있었다.빛은 오지 않았고, 대신 기척만이 궁을 맴돌았다.어디선가 종이 울리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저마다 시간을 재고 있었다.도진은 복도의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서 있다는 표현이 맞지 않았다.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움직이지 않는 것이 선택이 되는 밤,그는 가장 어려운 쪽을 택하고 있었다.발소리가 하나, 둘. 멀지 않았다.경계의 방식이 바뀌었음을 그는 느꼈다.보던 눈이 사라지고, 대신 기다리는 눈이 생긴 밤이었다.그 시각, 이수는 복도의 중앙에서 걸음을 멈췄다.앞으로 나아가면 대비전으로, 옆으로 돌면 자신의 처소로 돌아갈 수 있는 갈림.궁은 늘 이렇게 갈림을 만든다.사람에게 선택을 맡긴 척하면서, 이미 답을 정해 둔 채로.이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슴 속에서 한 문장이 또렷해졌다.‘지금, 누군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문이란 반드시 나무와 쇠로 된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입을 여는 것, 발을 내딛는 것, 혹은 침묵을 깨는 것 역시 문을 여는 일이었다.그녀는 방향을 틀었다.돌아가는 쪽이 아니라, 마주하는 쪽으로.그 움직임은 조용했지만 궁은 그 소리를 들었다.궁은 늘 이런 것에는 빠르다.세자 현은 긴 복도를 지나오며 자신의 걸음 소리를 의식하지 않았다.의식할 필요가 없었다.이 복도는 이미 그의 발걸음에 익숙한 길이었다.그는 마음속으로 여러 번 같은 말을 되뇌었다.‘확인만 하겠다.’‘확인은 칼이 아니라고,’‘확인은 죄가 아니라고.’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그러나 그는 알았다.확인은 언제나 그 다음의 행동을 불러온다는 것을.도진은 멀리서 현의 기척을 먼저 느꼈다.발걸음의 무게가 달랐다.망설임이 없는 걸음이었다.그는 그 방향을 바라보지 않았다.보는 순간, 이 밤은 이미 결론을 향해 달려갈 것이기 때문이다.도진은 손을 주먹 쥐었다가 풀었다.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검을 쥐지 않은 손이 이토록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낯설었다.그때, 이수
궁의 밤은 늘 누군가에게 선택을 강요한다.그리고 그 선택은 대개 가장 소중한 것을 대가로 요구한다.그녀는 눈을 감았다.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다.현은 창가에 서서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을 바라보았다.그의 가슴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의심은 이미 충분히 자랐고, 이제는 확인만이 남아 있었다.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내가 틀리지 않기를.’그러나 그 바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역시 알고 있었다.그 밤, 궁 안에는 아직 아무도 쓰러지지 않았다.그러나 이름 없는 명 하나가 이미 내려와 있었다.그리고 그 명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세 사람의 삶을 다음 장으로 밀어내고 있었다.이제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그러나 밤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있었다.궁 안의 공기는 낮게 가라앉은 채, 마치 누군가의 결심을 재촉하듯 조용히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도진은 군영의 안쪽에서 갑옷의 매무새를 다시 정리했다.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오늘 밤, 그는 전투에 나설 생각이 없었고 누군가를 상대할 계획도 없었다.그러나 몸은 알고 있었다.이 밤이 ‘아무 일도 없는 밤’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낙마 이후 남아 있던 통증은 이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그 대신, 가슴 안쪽에 자리 잡은 긴장이 서서히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궁은 늘 사람보다 빠르다.사람이 깨닫기 전에 이미 결정을 끝내버리는 곳.도진은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그 움직임은 소리가 없었으나, 방향만큼은 분명했다.빈의 처소.그 시각, 이수는 상궁의 도움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잠자리에 들 옷이 아니었다.그러나 외출복도 아니었다.궁에서 가장 위험한 차림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옷’이었다.상궁은 말이 없었다.묻지 않았고, 권하지도 않았다.그저 손끝을 단정히 움직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김 상궁.”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그러나 밤은 더 이상 밤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궁 안의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사람들의 숨결마저 조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도진은 군영의 끝에서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추었다.그는 지금, 어디로도 향하지 않고 있었다.그러나 그 사실이 그를 가장 불안하게 만들었다.움직이지 않아도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감각.그 감각은 칼을 들고 서 있을 때보다 훨씬 잔인했다.그는 손을 내려다보았다.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손.그러나 그 손은 언제든 검을 쥘 준비가 되어 있었다.‘아직은 아니다.’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지금 검을 쥐는 순간, 모든 것은 너무 빨라진다.그리고 빠른 선택은 대개 잘못된 선택이 된다.그 시각, 이수는 등불 앞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바람도, 소리도 없는 방 안에서 그녀는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만을 듣고 있었다.두근.두근.그 리듬은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해온 궁의 밤과는 달랐다.이번에는 어딘가 끝을 향하고 있었다.“이제…”그녀는 속으로 말했다.“…기다리는 밤은 끝났구나.”이수는 눈을 떴다.그리고 처음으로 이 밤이 지나면 무엇을 하게 될지 명확하게 떠올렸다.아직 말하지 않았을 뿐, 그 선택은 이미 그녀 안에서 굳어가고 있었다.현은 근위 하나를 따로 불러 세웠다.그의 얼굴에는 이전보다 훨씬 정제된 기색이 서려 있었다.분노도, 질투도, 불안도 모두 한 겹씩 접어 안쪽으로 밀어 넣은 얼굴.“이 말을 전해라.”현의 목소리는 너무도 차분했다.“내일 새벽, 군영의 인원을 재정비한다.”근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재정비라 하시면…”“공식적인 명은 아니다.”현은 말을 끊었다.“다만, 경계가 느슨해진 곳이 없는지 확인하라는 뜻이다.”그 말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특히”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리고 아주 낮게 덧붙였다.“빈의 처소 인근.”그 한마디가 근위의 등을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렸다.“명심하겠습니다.”근위가 물러나자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