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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무너지지 않는 마음

last update Veröffentlichungsdatum: 25.08.2026 07:57:54

궁의 낮은 그날따라 유난히 느리게 흘렀다.

햇빛은 마당의 돌 위에 머물렀지만,

그 빛이 닿는 곳마다 따뜻함보다는 마치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집요함이 먼저 느껴졌다.

이수는 대비전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

가마의 휘장이 살짝 들릴 때마다 궁의 얼굴들이 스쳤다.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고,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녀를 더 고립시켰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도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그 침묵은 이미 판결이 내려진 뒤의 침묵과 닮아 있었다.

대비전의 문이 열렸을 때, 공기는 한층 더 단단해졌다.

향 냄새가 짙었고, 그 향 아래에는 오래된 분노와 눌러두었던 의심이 섞여 있었다.

이수는 천천히 발을 들였다.

고개를 깊이 숙였으나 등은 굽히지 않았다.

“빈이옵니다.”

대비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 속에서 사람들의 숨소리만이 미세하게 겹쳐졌다.

“고개를 들라.”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대비의 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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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159. 무너지지 않는 마음

    궁의 낮은 그날따라 유난히 느리게 흘렀다.햇빛은 마당의 돌 위에 머물렀지만,그 빛이 닿는 곳마다 따뜻함보다는 마치 무언가를 드러내려는 집요함이 먼저 느껴졌다.이수는 대비전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었다.가마의 휘장이 살짝 들릴 때마다 궁의 얼굴들이 스쳤다.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고,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녀를 더 고립시켰다.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아무도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그 침묵은 이미 판결이 내려진 뒤의 침묵과 닮아 있었다.대비전의 문이 열렸을 때, 공기는 한층 더 단단해졌다.향 냄새가 짙었고, 그 향 아래에는 오래된 분노와 눌러두었던 의심이 섞여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발을 들였다.고개를 깊이 숙였으나 등은 굽히지 않았다.“빈이옵니다.”대비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 속에서 사람들의 숨소리만이 미세하게 겹쳐졌다.“고개를 들라.”이수는 고개를 들었다.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그 눈빛을 보는 순간, 대비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요즘 궁이 시끄럽다.”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이미 사실로 굳어진 말을 다시 확인하는 어조였다.“시끄럽다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빈은 알고 있느냐.”이수는 잠시 숨을 골랐다.“짐작은 하고 있사옵니다.”“짐작?” 대비가 웃지도 않은 채 되물었다.“짐작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없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더 이상 숨을 허락하지 않는 밀도로 조여들었다.“빈의 처소에 무사가 드나들었다는 말이 있다.”이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이미 올 말을 충분히 기다려왔기 때문이다.“그 무사는 저하의 호위무사이옵니다.”“그래서 더 문제다.”대비의 음성이 낮아졌다.“빈은 그 경계가 어디까지 허락되는지 정말 모르는 것이냐.”이수는 그 질문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이 질문은 답을 듣기 위해 던진 것이 아니었다.이미 죄목을 만들기 위한 마지막 확인이었다.“저는 경계를 넘은 적이 없사옵니다.”“네

  • 천년의 기억   158. 기록되는 죄

    변방의 아침은 짧았다.해는 떠올랐으나 온기가 오래 머물지 못했고, 차가운 공기는 낮에도 풀리지 않았다.도진은 말 위에 올라 있었다.이곳에 온 지 며칠이 지났는지 정확히 헤아리지 않았다.날짜를 세는 순간, 그가 떠나온 곳의 얼굴들이 너무 선명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말굽이 흙을 밟을 때마다 몸 안 어딘가가 함께 울렸다.그 울림은 통증도, 기쁨도 아니었다.마치 오래전에 약속된 무언가가 천천히 시간을 맞추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그는 이유 없이 한 번 더 궁의 방향을 돌아보았다.보일 리 없는 곳이었다.그러나 시선은 그곳에 머물렀다.그 시각, 궁에서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속도를 숨기지 않는 움직임.이미 결정된 일을 되돌리지 않겠다는 태도였다.이수는 아침이 밝기도 전에 상궁의 손길로 단장을 마쳤다.거울 속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다만 눈동자만이 조금 더 깊어져 있었다.“마마, 오늘은…”상궁이 말을 잇지 못했다.이수는 그 시선을 막듯 고개를 들었다.“괜찮다. 오늘은 어떤 날인지 이미 알고 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그 차분함은 스스로를 다잡는 방식이었다.불안에 흔들리는 사람은 궁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그 사실을 그녀는 너무 일찍 배웠다.밖에서는 내명부의 사람들이 분주히 오갔다.그들의 표정은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질문하지 않는 얼굴.듣고 싶은 답이 정해진 얼굴.이수는 문득 생각했다.도진 경이 여기 있었다면, 이 장면은 조금 달랐을까.그러나 그 생각은 곧 스스로 지웠다.그가 곁에 있었다면 이 모든 일이 더 빨리 일어났을지도 모른다.그의 존재는 늘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했다.현은 그날 아침, 침전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나오지 않았다는 말 역시 정확하지 않았다.그는 이미 궁 전체를 자신의 시선 안에 두고 있었다.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았고,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았다.그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빈은

  • 천년의 기억   157. 아직 아플 것을 미리 아는 감각

    변방의 밤은 궁보다 훨씬 깊었다.불빛은 적었고, 적은 불빛은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도진은 초소 안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검을 벽에 기대어 두지 않았다.여기서는 필요 없었고, 필요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했다.그는 잠들지 않았다.잠들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눈을 감으면 낯선 소리들이 들려왔다.바람이 천막을 스치는 소리, 말의 숨결,그리고, 기억 속에 없는 장면들이 갑자기 끼어들었다.붉은 천. 차가운 바닥.누군가의 손이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감각.도진은 눈을 떴다.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이곳은 변방이었고, 그는 멀쩡히 앉아 있었다.그러나 방금 스친 장면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또렷했다.“아직… 이르다.”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무엇이 이르다는 것인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지금 이곳에서 무언가가 깨어나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확신만은 분명했다.그 시각, 궁에서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바빠졌다.바쁘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대비전에서 내려온 지시는 단정했고, 그 단정함은 더 이상 미룰 여지가 없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그 소식을 상궁에게서 들었다.상궁의 목소리는 낮았고, 말끝마다 조심이 묻어 있었다.“마마, 내일이면 내명부 쪽에서 처소 점검이 있을 듯하옵니다.”점검. 그 말은 이미 몇 번이나 다른 이름으로 불려왔다.확인, 정리, 조사. 이수는 그 단어들을 마음속에서 하나씩 지웠다.“알겠다.”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묻는 순간, 자신이 아직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셈이었기 때문이다.흔들리는 사람은 결정권을 잃는다.이수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상궁이 나가고, 이수는 홀로 남았다.방 안은 고요했고, 그 고요가 오히려 귀를 아프게 했다.그녀는 천천히 침상 옆에 앉았다.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는데, 손끝이 차가웠다.이제는, 그녀는 생각했다.되돌릴 수 있는 선택은 없다.궁은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다만, 선택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릴 뿐이다.이수는 창을 열었다

  • 천년의 기억   156. 닿지 않는 거리

    변방으로 향하는 길은 길지 않았다.그러나 도진에게 그 길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성질의 시간으로 느껴졌다.땅은 같았고, 하늘도 같았으나 그가 딛는 매 순간마다 궁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말의 숨결이 고르지 않았다.말보다 먼저 숨이 가쁜 것은 도진 자신의 가슴이었다.그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이유를 묻는 순간, 되돌아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변방의 초소는 궁보다 훨씬 소박했다.장식도, 기척도, 불필요한 말도 없었다.이곳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의심하기보다 외부를 경계하는 데 익숙했다.도진은 그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나으리 오셨습니까.”초소의 책임자가 고개를 숙였다.도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을 보고하라.”보고는 간결했다.변방은 조용했고, 조용함이 오래 지속될수록 사람들은 긴장을 풀고 있었다.그 평온함 속에서 도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궁의 긴장은 외부의 위협 때문이 아니었다.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보고가 끝난 뒤, 도진은 홀로 초소 바깥에 섰다.밤공기는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머리를 맑게 했다.그러나 맑아진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보지 않으려 했던 얼굴.부르지 않으려 했던 이름.그는 손을 움켜쥐었다.손바닥 안쪽에 아직 검을 쥔 감각이 남아 있는 듯했다.그 감각은 실제가 아니라 기억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였다.‘청명.’이름을 부르지 않았음에도 그 소리가 가슴 안에서 울렸다.도진은 순간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확인해야 했다.변방이었다.궁도, 검도, 모두 멀리 있었다.그 시각, 궁 안은 더욱 조용해지고 있었다.조용함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늦추게 했고, 늦춰진 발걸음은 눈치를 키웠다.이수는 창가에 서 있었다.밖은 어두웠고,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았다.그럼에도 그녀는 그 어둠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마마.”상궁이 조심스럽게 불렀다.“바람이 차옵니다.”“괜찮다.”이수는 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차가운 것이 오히

  • 천년의 기억   155. 뒤돌아보지 않기로 한 약속

    전갈은 종잇장 하나에 불과했으나, 그 무게는 사람 하나를 궁 밖으로 밀어내기에 충분했다.도진은 전각을 나서며 그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바람이 옷자락을 흔들었고, 그 흔들림 속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실감을 했다.발걸음은 담담했으나, 마음은 담담하지 않았다.멀어진다는 선택이 지킨다는 판단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를 조금 덜 비겁하게 만들었지만,조금도 가볍게 해주지는 못했다.지켜야 할 것이 분명할수록 손에서 놓는 것도 분명해지는 법이었다.궁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도진은 멈추지 않았다.뒤돌아보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약속했기 때문이다.뒤돌아보는 순간, 결심은 감정으로 변하고 감정은 다시 죄가 된다.그러나 궁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시선들이 따라왔다.말을 하지 않는 입술들,묻지 않는 눈동자들.그 시선의 끝에는 늘 같은 결론이 놓여 있었다.그가 떠나야 조용해진다.그 시각, 이수의 처소는 조용했으나그 조용함은 평온이 아니었다.상궁은 이수의 손짓에 따라 방 안의 창을 반쯤만 열어두었다.바람이 들어왔고, 그 바람은 이수의 숨결을 조금 흔들었다.“떠난다 하더냐.”이수의 물음은 낮았다.상궁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예, 마마. 변방 순찰이라 하옵니다. 기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사옵니다.”정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돌아올 날이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그 말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잠시 시선을 바깥으로 옮겼다.하늘은 맑았고, 그 맑음이 오히려 잔인했다.“그가 떠난다면,”이수가 천천히 말했다.“궁은 정말 조용해질까.”상궁은 대답하지 못했다.조용해진다는 말의 끝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이곳에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수는 웃지 않았다.대신, 아주 작은 숨을 내쉬었다.그 숨은 체념이 아니었고, 두려움도 아니었다.선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호흡에 가까웠다.“상궁.”그녀가 말했다.“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마라. 말도, 소식도.”“마마”“지금

  • 천년의 기억   154. 밀려오는 결정

    새벽은 오지 않았고, 밤은 여전히 궁을 붙잡고 있었다.그러나 공기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보이지 않는 문들이, 하나씩.도진은 동이 트기 전 군영을 나섰다.잠들지 못한 밤의 잔여가 어깨에 남아 있었고, 그 잔여는 피로가 아니라 경계였다.그는 의도적으로 빈의 처소 쪽을 보지 않았다.보는 순간, 발이 움직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궁 안의 움직임은 더 이상 은밀하지 않았다.전갈은 간결해졌고, 시선은 노골적이었다.어제까지 ‘우연’으로 처리되던 일들이 오늘은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기록은 언제나 결론을 요구한다.도진이 발걸음을 멈춘 곳에서 근위 하나가 다가왔다.말을 꺼내기 전, 그 근위는 주위를 훑었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으리, 대비전에서… 오늘 중으로 인원이 바뀐답니다.”바뀐다는 말은, 정리된다는 뜻이었다.정리된다는 말은, 누군가 빠진다는 뜻이었다.“누가 나간다더냐.”“아직은”근위는 말을 흐렸다.“이름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빈의 처소 쪽 기록이 갑자기 두터워지고 있다는 말이…”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두터워지는 기록은 누군가의 손길이 겹겹이 덧대어졌다는 뜻이었다.그리고 그 손길의 방향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그만 말해라.”도진이 낮게 말했다.“오늘은 더 묻지 않겠다.”근위는 안도한 듯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도진의 마음은 오히려 더 조여들었다.묻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결론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그 시각, 이수는 상궁과 마주 앉아 있었다.아침이 오기 전의 시간, 궁에서 가장 많은 결정이 내려지는 때였다.상궁의 손에는 얇은 장부 하나가 들려 있었다.열지 않아도,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 이수는 알았다.“마마,”상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오늘은… 대비마마께서 마마의 처소를 한 차례 둘러보실 수도 있다 하옵니다.”“둘러본다.”이수는 그 말을 되뇌었다.“이제는 숨길 필요도 없다

  • 천년의 기억   4. 운명의 첫 그림자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 천년의 기억   3. 천 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

  • 천년의 기억   2. 천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 천년의 기억   1. 비가 내리기 시작한 오후, 그가 울었다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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