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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
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
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
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
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
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
어떤 비는 섬의 해풍처럼 가벼웠고,
어떤 비는 전쟁터의 피비린내를 머금기도 했고,
어떤 비는 이런 오후처럼 조용하고 무표정했다.
평소였다면, 그는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무엇인가가 그의 움직임을 붙들고 있었다.
그건 빛도, 소리도 아닌 한 장의 홍보지였다.
백화점 유리벽에 큼직하게 붙어 있는 홍보물.
누군가의 얼굴이 크게 담긴 사진.
그리고 선명한 글씨.
‘천년의 기억’
이수 작가 단독 사인회
도진의 시선이 단단히 그 자리에 박혔다.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다음 순간,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
사진 속 여자의 얼굴. 잔잔한 웃음.
단정한 자세. 그런데, 미묘하게 외롭고,
어딘가 간절한 느낌이 엮여 있었다.
도진은 이유도 모른 채 숨을 깊게 들이켰다.
폐 안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는데,
마치 오래된 상처를 건드린 것처럼 가슴 한쪽이 날카롭게 조였다.
잠시 후, 그의 눈이 뜨겁게 흔들렸다.
그리고, 아무런 경고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천천히, 한 방울. 그 다음, 연달아.
그는 눈을 깜빡이며 황급히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왜 이러지.”
중얼거림은 숨처럼 새어나왔다.
울어본 기억이 없었다.
물론 인간이었을 때는 울었겠지만,
그는 이미 오랫동안 인간적인 감정을 잃고 살았다.
기쁨은 오래 머물지 않았고,
슬픔은 닿기도 전에 사라졌고,
사랑은 기억조차 희미했다.
그런데 지금, 한 장의 홍보지를 보고 이토록 감정이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 속 여자를 보는 순간마다 가슴 안쪽이 요동쳤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의 삶 전체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순간이었다.
도진은 숨을 몰아쉬며 홍보물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마치 손끝을 잡아 끌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부르는 것처럼
그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저 안에 있는 것처럼.
백화점 내부는 사람들로 붐볐다.
행사 공간으로 안내하는 사인들이 여러 곳에 걸려 있었다.
도진은 그 모든 것을 보지 않았다.
그저 소리, 조명, 사람들의 움직임 사이로 정확한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걸 향한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도 없이 일직선이었다.
사인회장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 그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테이블 앞 책 더미 위에 손을 올리고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수.
그녀는 고개를 들다가, 도진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죽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종업원의 안내도,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실내조명의 미세한 진동도
모두 희미해졌다.
오직 둘 사이의 시선만이 조용하게, 깊게, 오래 이어졌다.
도진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너무 익숙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너무나 오래 기다렸던 얼굴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 앞까지 다가갔다.
직원을 통과하는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꿈 속을 걷듯이 현실의 무게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섰을 때, 그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흔들리며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이렇게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 이유가… 혹시… 당신 때문인가요?”
그의 말은 절박하지도, 격하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 오래된 무언가를 처음으로 입 밖에 내보는 사람의 말이었다.
이수는 그를 바라보았다.
곤란해하지도 않았고, 놀라지도 않았다.
마치 드디어 왔군요. 그런 얼굴.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안았다.
조용한 포옹이었다.
하지만 내려앉는 감정은 너무 컸다.
오래된 상처가 기척을 드러내듯,
잃어버렸던 시간이 한꺼번에 밀려오듯.
“그동안… 잘 지냈어요? 도진씨…”
밤의 결이 바뀌었다.같은 어둠이었으나, 공기는 더 조여 있었고 침묵은 이전보다 무거웠다.도진은 복도의 끝에 서서 자신의 호흡을 점검했다.숨은 고르게 들고 나갔고, 심장은 불필요하게 뛰지 않았다.몸은 아직 버틸 수 있었다.그러나 마음은 그보다 더 조심스러웠다.그는 지금 자신을 따라붙은 시선보다 그 시선을 허락한 의지를 더 경계하고 있었다.궁에서 누군가를 지켜보게 한다는 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다.그건 이미 ‘의심을 공식화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복도 너머, 등불 아래에서 근위 하나가 서 있었다.평소와 다르지 않은 자세. 그러나 오늘은 너무 정확했다.그 정확함은 우연이 아니었다.도진은 그를 스쳐 지나갔다.눈길을 주지도, 속도를 바꾸지도 않았다.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그러나 그 짧은 순간,서로의 그림자가 바닥 위에서 겹쳤다.그 겹침은 아주 짧았지만, 그에게는 충분했다.‘이제는 숨길 수 없겠구나.’그 시각, 이수는 자리에 앉아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아무것도 쥐지 않았으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다.그 반복이 그녀의 심장을 천천히 두드렸다.이수는 눈을 감았다 떴다.두려움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일 것이다.그러나 두려움에 끌려가지는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오늘 밤은…”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모든 것이 너무 빠르다.”상궁이 조심스레 다가왔다.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마마, 근위의 교대가 조금 잦아진 듯하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았다.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세자저하의 뜻이겠지.”그 말에 상궁의 눈이 흔들렸다.“마마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의심은 늘 혼자 시작되지 않는다.”이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그리고 세자께서 지금 그 의심을 놓치실 분도 아니지.”상궁은 더 묻지 않았다.이 밤에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밤은 더 깊어졌으나, 궁은 잠들지 않았다.사람들이 깨어 있어서가 아니라 의심이 잠들지 않았기 때문이다.도진은 군영 안쪽의 훈련장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불빛이 닿는 곳.그는 그 자리를 일부러 골랐다.숨은 시선은 어둠을 좋아하지만, 완전한 밝음에서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그는 갑옷의 끈을 천천히 조였다.낙마로 다친 어깨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다는 사실은그에게 약점이었지만, 그 약점을 모르는 자에게는아무 의미도 없었다. 문제는 그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었다.도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게 숨을 내쉬었다.지금 싸우면 이 밤은 끝난다.그러나 끝난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지도 모른다.그는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는 선택이 언제나 가장 어려운 선택이라는 사실을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 시각, 이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등불은 꺼져 있었고, 방 안에는 달빛만이 낮게 깔려 있었다.그 빛 아래에서 그녀의 얼굴은 더 또렷해 보였다.결심을 한 사람의 얼굴은 슬픔보다 먼저 고요해진다.“이제는…”그녀는 속으로 말을 잇지 않았다.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궁 안에서 말은 가장 느린 선택이다.움직임이 먼저이고, 침묵이 그 다음이다.이수는 상궁을 불렀다.목소리는 낮았고, 그러나 분명했다.“김 상궁.”상궁이 곧장 다가왔다.눈에는 잠을 이루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마마.”“오늘 밤은 누가 이 처소를 지키고 있느냐.”“근위 둘과 내관 하나가 교대로 서고 있사옵니다.”이수는 잠시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저었다.“한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물려라.”상궁의 눈이 커졌다.“마마, 혹시라도”“지금은 많을수록 위험하다.”이수의 말은 단정했다.“사람이 많아지면 말도 많아지고, 말이 많아지면 의심은 방향을 갖는다.”상궁은 더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것이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그러나 밤은 더는 밤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어둠은 깊었으나, 그 어둠 안에는 방향이 있었다.도진은 군영의 가장자리에서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췄다.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마치 누군가의 손처럼 지나갔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바람의 방향을 확인했다. 습관이었다.적을 마주하기 전, 공기의 흐름부터 읽는 것은 그가 수십 번의 전장을 지나오며 몸으로 익힌 방식이었다.그러나 지금은 전장이 아니었다.궁이었다.그래서 더 위험했다.도진은 눈을 감았다 떴다.오늘 밤,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없었다.그러나 명령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가장 큰 신호였다.명령이 없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 움직인다.그리고 그 움직임은 누구의 책임도 되지 않는다.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숨이 가슴 깊숙이 내려가자 마음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지금은 움직이지 않는다.지금은 버틴다.그러나 그 문장은 아까보다 훨씬 위태로웠다.그 시각, 이수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등불을 껐음에도 그녀의 눈은 쉽게 감기지 않았다.눈을 감으면 보지 않아도 될 장면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세자의 눈빛. 그가 ‘빈’이라 부르며 한 발 더 다가왔던 순간.그리고 그 눈빛 아래에서 조용히 떨리던 공기.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분노는 차라리 단순하다.현의 눈빛에는 분노보다 더 복잡한 것이 있었다.확신 없는 확신.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을 붙잡으려는 손.이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차가운 바닥이 발바닥에 닿자 정신이 또렷해졌다.“지금이다.”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말이었다.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누군가 대신 선택할 것이다.그리고 그 선택은 결코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을 것이다.이수는 창을 열었다.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그 공기 속에는 궁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다는 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알았다.이 밤이 지나면 더 이상 ‘
상궁은 이미 물러났고 방 안에는 이수 혼자였다.혼자 있는 시간이 오히려 숨을 쉬기 쉬운 밤도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그 손이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결정을 삼켜왔는지 그녀 자신만 알고 있었다.세자의 눈빛. 도진의 침묵. 그리고 궁 안에 퍼진 기척들.모두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수는 부정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중심이 언제부터 ‘보호’가 아니라 ‘의심’으로 바뀌었는지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피할 수 없다면…”이수는 낮게 중얼거렸다.그 말은 기도도, 다짐도 아니었다.“선택해야겠지.”그 선택이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선택일지라도.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그리고 마음속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도진 경을 의심의 중심에 세우게 둘 수는 없다.’그를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과, 그를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이수는 천천히 일어나 등불을 완전히 껐다.방 안이 어두워지자 비로소 생각이 또렷해졌다.어둠은 결정을 숨겨주지 않는다.오히려 결정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그 시각, 세자 현은 침전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등불은 그대로였으나 그의 시선은 불빛을 보지 않고 있었다.도진의 대답들.그가 꿇었던 무릎.그리고 끝내 묻지 못한 질문.빈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그 질문은 현의 가슴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되풀이되고 있었다.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확인할 뿐이다.’그러나 그 문장은 자기 위안에 가까웠다.확인은 늘 의심이 먼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침전을 걸었다.발걸음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이상하리만큼 크게 들렸다.그는 문득 자신이 언제부터 이수의 얼굴을 떠올릴 때 안도보다 불안을 먼저 느끼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사랑은 언제나 보호로 시작한다.그러나 보호는 언제든 통제로 변한다.현은 그 경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두려웠다.“확인해야 한다…”그는 다시
짧고 단정한 대답. 군더더기는 없었다.현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그 거리는 이제 공식적인 거리보다 조금 가까웠다.“경의 그 충성,”현이 낮게 말했다.“어디까지 믿어도 되겠는가.”그 질문은 사실상 시험이었다.도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저하께서 허락하시는 데까지이옵니다.”현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웃음이 스쳤다.웃음이라기엔 너무 짧고, 너무 날카로웠다.“허락이라…”그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다시 도진을 보았다.“도진.”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호칭 없이 불렸다.“나는,”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경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그 말은 믿음처럼 들렸으나, 실상은 경고였다.“그러나,”그는 말을 이었다.“내 눈앞에서 빈을 둘러싼 일들이 너무 잦아지고 있다.”도진의 심장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한 번 뛰었다.“궁은,”현이 계속 말했다.“말보다 기척을 먼저 읽는 곳이다.”그는 도진을 똑바로 바라봤다.“경의 기척이 어디에 머무는지, 나는 알고 싶다.”도진은 그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저하.”그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말했다.“제 기척은 항상 저하께서 계신 곳을 향해 있사옵니다. 그것이 제 자리이옵니다.”침전 안이 순간 완전히 조용해졌다.현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손은 옷자락 아래에서 천천히 말려들고 있었다.“일어나거라.”도진은 조용히 일어섰다.현은 한숨처럼 말했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그 말은 용서도, 신뢰의 회복도 아니었다.다만 결정을 미루는 선택이었다.“경은 물러가라.”“예, 저하.”도진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문을 나서기 직전, 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를 붙잡았다.“도진.”“예, 저하.”“빈은”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리고 그 뒤를 끝내 잇지 않았다.“…아니다. 물러가라.”도진은 더 묻지 않았다.묻는 순간, 그 질문 자체가 새로운 의심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
그 대답에는 여지를 두지 않는 단정함이 있었다.내관이 물러나고 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이 손으로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었다.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이 밤이 지나면, 세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의심’이라는 말로 묶어둘 수 없게 될 것이다.도진은 군영 한복판에서 전갈을 받았다.“저하께서 지금 바로 뵙자 하십니다.”그 말은 예상보다 빨랐고, 그래서 더 무거웠다.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소.”그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마음속으로 이수의 얼굴을 떠올렸다.지금 이 부름은 그녀와 직접 닿아 있지 않으면서도, 가장 깊게 이어진 부름이었다.도진은 돌아섰다.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그가 침전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궁의 공기는 마치 숨을 멈춘 듯 고요했다.이수는 그 고요를 멀리서도 느꼈다.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 심장 아래에서 조용히 움직였다.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결정은 이미 시작되었다.그리고 그 결정은 말보다 먼저 사람을 움직이고 있었다.그날 밤,궁은 다시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조용히 넘고 있었다.침전 앞의 돌바닥은 밤의 습기를 머금고 차가웠다.도진은 그 위에 발을 디디며 자신의 숨이 얼마나 고르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점검했다.검은 없었다.그는 일부러 검을 두고 왔다. 오늘 밤, 무기를 지니고 세자 앞에 서는 것은 필요한 선택이 아니었다.문 앞에서 근위가 길을 열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이 자리가 얼마나 민감한지를 말해주고 있었다.도진은 안으로 들어섰다.침전 안은 생각보다 밝았다.등불이 하나가 아니라 둘,그리고 창 쪽에도 희미한 불이 놓여 있었다.어둠을 완전히 허락하지 않는 공간.현은 창가 쪽에 서 있었다.등을 보인 채, 바깥을 보고 있었다.도진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정중히, 그러나 과하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저하, 부르셨사옵니까.”현은 바로 돌아보지 않았다.한 박자,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