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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기억
천년의 기억
Penulis: 데이지

1. 비가 내리기 시작한 오후, 그가 울었다

Penulis: 데이지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6-18 11:06:22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

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

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

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

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

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

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

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

어떤 비는 섬의 해풍처럼 가벼웠고,

어떤 비는 전쟁터의 피비린내를 머금기도 했고,

어떤 비는 이런 오후처럼 조용하고 무표정했다.

평소였다면, 그는 단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무엇인가가 그의 움직임을 붙들고 있었다.

그건 빛도, 소리도 아닌 한 장의 홍보지였다.

백화점 유리벽에 큼직하게 붙어 있는 홍보물.

누군가의 얼굴이 크게 담긴 사진.

그리고 선명한 글씨.

‘천년의 기억’

이수 작가 단독 사인회

도진의 시선이 단단히 그 자리에 박혔다.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다음 순간,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

사진 속 여자의 얼굴. 잔잔한 웃음.

단정한 자세. 그런데, 미묘하게 외롭고, 

어딘가 간절한 느낌이 엮여 있었다.

도진은 이유도 모른 채 숨을 깊게 들이켰다.

폐 안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는데,

마치 오래된 상처를 건드린 것처럼 가슴 한쪽이 날카롭게 조였다.

잠시 후, 그의 눈이 뜨겁게 흔들렸다.

그리고, 아무런 경고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천천히, 한 방울. 그 다음, 연달아.

그는 눈을 깜빡이며 황급히 얼굴을 닦았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왜 이러지.”

중얼거림은 숨처럼 새어나왔다.

울어본 기억이 없었다.

물론 인간이었을 때는 울었겠지만,

그는 이미 오랫동안 인간적인 감정을 잃고 살았다.

기쁨은 오래 머물지 않았고,

슬픔은 닿기도 전에 사라졌고,

사랑은 기억조차 희미했다.

그런데 지금, 한 장의 홍보지를 보고 이토록 감정이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 속 여자를 보는 순간마다 가슴 안쪽이 요동쳤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의 삶 전체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순간이었다.

도진은 숨을 몰아쉬며 홍보물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마치 손끝을 잡아 끌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부르는 것처럼

그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저 안에 있는 것처럼.

백화점 내부는 사람들로 붐볐다.

행사 공간으로 안내하는 사인들이 여러 곳에 걸려 있었다.

도진은 그 모든 것을 보지 않았다.

그저 소리, 조명, 사람들의 움직임 사이로 정확한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걸 향한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도 없이 일직선이었다.

사인회장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 그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테이블 앞 책 더미 위에 손을 올리고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수.

그녀는 고개를 들다가, 도진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죽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종업원의 안내도,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실내조명의 미세한 진동도

모두 희미해졌다.

오직 둘 사이의 시선만이 조용하게, 깊게, 오래 이어졌다.

도진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너무 익숙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너무나 오래 기다렸던 얼굴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 앞까지 다가갔다.

직원을 통과하는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꿈 속을 걷듯이 현실의 무게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 섰을 때, 그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흔들리며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이렇게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 이유가… 혹시… 당신 때문인가요?”

그의 말은 절박하지도, 격하지도 않았다.

그저, 너무 오래된 무언가를 처음으로 입 밖에 내보는 사람의 말이었다.

이수는 그를 바라보았다.

곤란해하지도 않았고, 놀라지도 않았다.

마치 드디어 왔군요. 그런 얼굴.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안았다.

조용한 포옹이었다.

하지만 내려앉는 감정은 너무 컸다.

오래된 상처가 기척을 드러내듯,

잃어버렸던 시간이 한꺼번에 밀려오듯.

“그동안… 잘 지냈어요? 도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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