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
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
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
머리가 가벼워졌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
세상이 기울었다.
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
이수의 손이 그를 잡으려 했지만 닿지 못했다.
그의 의식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꺼졌다.
쓰러지는 순간, 그의 시야 속에서 어둠이 천천히 펼쳐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한 빗소리가 들렸다.
궁의 처마, 비가 스며들던 풍경.
하얀 장옷을 입은 여인이 울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도진……
그 목소리가 천년을 돌고 돌아
오늘 이곳에서 다시 그를 데리러 온 듯했다.
그의 의식은 시간의 층을 무너뜨리고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떨어졌다.
새벽은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았다.
산등성이 너머로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지만,
궁을 둘러싼 담장은 여전히 밤의 색을 품고 있었다.
새벽안개는 기와지붕 아래를 얇게 흐르며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들어가는 사람도, 나오는 사람도 거의 없는 시각.
하지만 궁 안쪽 깊은 곳에서는 이미 하루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직 촛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처마 아래에서
경계를 서는 무사들의 갑옷이 은빛 새벽에 부딪혀 자그마한 광택을 만들었다.
피마가 햇살을 먼저 맞는 동쪽 마당에서는 군사들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돌바닥 위에서 나무창 끝이 부딪히는 소리가 짧고 단단하게 메아리쳤다.
그 가운데, 한 남자의 발걸음이 다른 이들과 달리 조용했다.
검은 도포 아래에서 움직이는 그의 걸음은 바람이 스치는 결처럼 가볍고 단정했다.
밝아오는 새벽빛을 등지고 서 있는 그의 실루엣은 그때의 누구보다 똑바르게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도진. 궁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궁의 칼이 되어버린 남자.
단 한 번도 검을 흘려 쓰지 않는 자.
군사들은 그가 지나가는 방향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길을 내줄 뿐이었다.
그는 새벽 훈련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손끝이 닿는 곳까지 긴장감이 흐르는 걸음이었다.
마치 몸 전체가 검처럼 벼려져 있는 듯한 기세.
그러던 중, 궁 안 깊숙한 곳에서 작은 북소리가 들렸다.
전하가 깨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전이었다.
북소리는 규칙적이지 않았다.
경사를 알리거나 군사들을 모으는 신호는 아니었다.
딱 한 번, 짧고 낮게 울리는 북소리.
도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 북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자저하의 전각에서 부르는 소리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방향을 바꿨다.
동쪽 편전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걷는 내내 기와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정적 속에 일정한 박자로 들렸다.
전각 앞에 도착하자 하인 몇 명이 불안한 표정으로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북소리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도진을 지나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가 문 앞에 다다르자 내관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진은 허리에서 검을 풀어 내관에게 건넸다.
궁 안에서는 함부로 검을 차고 드나들 수 없기에 이것은 오래 전부터 지켜온 규칙이었다.
손에서 검이 떨어지자 마치 그의 몸 일부가 잠시 공백이 된 듯한 묘한 감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 안은 희미한 촛불 몇 개만이 켜져 있었다.
촛불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창문을 단단히 막아둔 듯 기척 없이 곧게 타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누군가가 홀로 앉아 있었다.
세자 현. 도진의 벗이며, 그가 평생 지켜야 할 존재.
궁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약속받은 사람.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뒷모습에는
왕세자라기보다 잠 못 이루는 한 사람으로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도진은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저하, 부르셨사옵니까.”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밤을 닮아 있었다.
기품이 있었으나 어딘가 피로했고,
말하지 못한 생각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한 눈매였다.
“새벽이 밝기도 전에 부른 것을 용서하라.”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도진은 머리를 숙였다.
“저하께서 부르심에 사사로운 시각은 없사옵니다.”
이현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 걱정 어린 미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곤란함과 낡은 우정의 묘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가 가라앉자, 그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간택이… 곧 내려질 것이다.”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다.그러나 밤은 더는 밤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어둠은 깊었으나, 그 어둠 안에는 방향이 있었다.도진은 군영의 가장자리에서 다시 한 번 걸음을 멈췄다.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마치 누군가의 손처럼 지나갔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바람의 방향을 확인했다. 습관이었다.적을 마주하기 전, 공기의 흐름부터 읽는 것은 그가 수십 번의 전장을 지나오며 몸으로 익힌 방식이었다.그러나 지금은 전장이 아니었다.궁이었다.그래서 더 위험했다.도진은 눈을 감았다 떴다.오늘 밤,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없었다.그러나 명령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가장 큰 신호였다.명령이 없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 움직인다.그리고 그 움직임은 누구의 책임도 되지 않는다.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숨이 가슴 깊숙이 내려가자 마음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지금은 움직이지 않는다.지금은 버틴다.그러나 그 문장은 아까보다 훨씬 위태로웠다.그 시각, 이수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등불을 껐음에도 그녀의 눈은 쉽게 감기지 않았다.눈을 감으면 보지 않아도 될 장면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세자의 눈빛. 그가 ‘빈’이라 부르며 한 발 더 다가왔던 순간.그리고 그 눈빛 아래에서 조용히 떨리던 공기.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분노는 차라리 단순하다.현의 눈빛에는 분노보다 더 복잡한 것이 있었다.확신 없는 확신.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을 붙잡으려는 손.이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차가운 바닥이 발바닥에 닿자 정신이 또렷해졌다.“지금이다.”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스스로를 다잡기 위한 말이었다.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누군가 대신 선택할 것이다.그리고 그 선택은 결코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을 것이다.이수는 창을 열었다.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그 공기 속에는 궁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다는 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알았다.이 밤이 지나면 더 이상 ‘
상궁은 이미 물러났고 방 안에는 이수 혼자였다.혼자 있는 시간이 오히려 숨을 쉬기 쉬운 밤도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그 손이 오늘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결정을 삼켜왔는지 그녀 자신만 알고 있었다.세자의 눈빛. 도진의 침묵. 그리고 궁 안에 퍼진 기척들.모두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이수는 부정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중심이 언제부터 ‘보호’가 아니라 ‘의심’으로 바뀌었는지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피할 수 없다면…”이수는 낮게 중얼거렸다.그 말은 기도도, 다짐도 아니었다.“선택해야겠지.”그 선택이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선택일지라도.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그리고 마음속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도진 경을 의심의 중심에 세우게 둘 수는 없다.’그를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과, 그를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이수는 천천히 일어나 등불을 완전히 껐다.방 안이 어두워지자 비로소 생각이 또렷해졌다.어둠은 결정을 숨겨주지 않는다.오히려 결정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그 시각, 세자 현은 침전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등불은 그대로였으나 그의 시선은 불빛을 보지 않고 있었다.도진의 대답들.그가 꿇었던 무릎.그리고 끝내 묻지 못한 질문.빈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그 질문은 현의 가슴 안에서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되풀이되고 있었다.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확인할 뿐이다.’그러나 그 문장은 자기 위안에 가까웠다.확인은 늘 의심이 먼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침전을 걸었다.발걸음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이상하리만큼 크게 들렸다.그는 문득 자신이 언제부터 이수의 얼굴을 떠올릴 때 안도보다 불안을 먼저 느끼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사랑은 언제나 보호로 시작한다.그러나 보호는 언제든 통제로 변한다.현은 그 경계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 두려웠다.“확인해야 한다…”그는 다시
짧고 단정한 대답. 군더더기는 없었다.현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그 거리는 이제 공식적인 거리보다 조금 가까웠다.“경의 그 충성,”현이 낮게 말했다.“어디까지 믿어도 되겠는가.”그 질문은 사실상 시험이었다.도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저하께서 허락하시는 데까지이옵니다.”현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웃음이 스쳤다.웃음이라기엔 너무 짧고, 너무 날카로웠다.“허락이라…”그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다시 도진을 보았다.“도진.”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호칭 없이 불렸다.“나는,”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경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그 말은 믿음처럼 들렸으나, 실상은 경고였다.“그러나,”그는 말을 이었다.“내 눈앞에서 빈을 둘러싼 일들이 너무 잦아지고 있다.”도진의 심장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한 번 뛰었다.“궁은,”현이 계속 말했다.“말보다 기척을 먼저 읽는 곳이다.”그는 도진을 똑바로 바라봤다.“경의 기척이 어디에 머무는지, 나는 알고 싶다.”도진은 그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저하.”그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말했다.“제 기척은 항상 저하께서 계신 곳을 향해 있사옵니다. 그것이 제 자리이옵니다.”침전 안이 순간 완전히 조용해졌다.현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손은 옷자락 아래에서 천천히 말려들고 있었다.“일어나거라.”도진은 조용히 일어섰다.현은 한숨처럼 말했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그 말은 용서도, 신뢰의 회복도 아니었다.다만 결정을 미루는 선택이었다.“경은 물러가라.”“예, 저하.”도진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문을 나서기 직전, 현의 목소리가 다시 그를 붙잡았다.“도진.”“예, 저하.”“빈은”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그리고 그 뒤를 끝내 잇지 않았다.“…아니다. 물러가라.”도진은 더 묻지 않았다.묻는 순간, 그 질문 자체가 새로운 의심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
그 대답에는 여지를 두지 않는 단정함이 있었다.내관이 물러나고 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이 손으로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었다.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이 밤이 지나면, 세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의심’이라는 말로 묶어둘 수 없게 될 것이다.도진은 군영 한복판에서 전갈을 받았다.“저하께서 지금 바로 뵙자 하십니다.”그 말은 예상보다 빨랐고, 그래서 더 무거웠다.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소.”그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마음속으로 이수의 얼굴을 떠올렸다.지금 이 부름은 그녀와 직접 닿아 있지 않으면서도, 가장 깊게 이어진 부름이었다.도진은 돌아섰다.발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그가 침전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궁의 공기는 마치 숨을 멈춘 듯 고요했다.이수는 그 고요를 멀리서도 느꼈다.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 심장 아래에서 조용히 움직였다.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결정은 이미 시작되었다.그리고 그 결정은 말보다 먼저 사람을 움직이고 있었다.그날 밤,궁은 다시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조용히 넘고 있었다.침전 앞의 돌바닥은 밤의 습기를 머금고 차가웠다.도진은 그 위에 발을 디디며 자신의 숨이 얼마나 고르게 유지되고 있는지를 의식적으로 점검했다.검은 없었다.그는 일부러 검을 두고 왔다. 오늘 밤, 무기를 지니고 세자 앞에 서는 것은 필요한 선택이 아니었다.문 앞에서 근위가 길을 열었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이 자리가 얼마나 민감한지를 말해주고 있었다.도진은 안으로 들어섰다.침전 안은 생각보다 밝았다.등불이 하나가 아니라 둘,그리고 창 쪽에도 희미한 불이 놓여 있었다.어둠을 완전히 허락하지 않는 공간.현은 창가 쪽에 서 있었다.등을 보인 채, 바깥을 보고 있었다.도진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정중히, 그러나 과하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저하, 부르셨사옵니까.”현은 바로 돌아보지 않았다.한 박자,
밤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그러나 이 밤이 지나면, 궁의 공기는 이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도진은 군영의 끝자락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불빛이 닿지 않는 그늘 속에서 그는 자신의 숨소리를 세고 있었다.숨이 고르면 마음이 가라앉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판단이 또렷해진다.그것이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다.야간 순찰에서 빠진 첫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몸이 기억해온 리듬이 깨졌다.이 시간이면 그는 이미 궁의 가장 깊은 복도를 지나빈의 처소와 가장 가까운 어둠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오늘 밤, 그 자리는 다른 이의 발걸음으로 채워졌을 터였다.도진은 손바닥을 천천히 펼쳤다.검을 쥐지 않은 손이 이토록 무거운 밤도 드물었다.검이 없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손으로 느낀다.그는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지금은 나서지 않겠다.’‘지금은 버티겠다.’그러나 그 문장은 확신이 아니라 다짐에 가까웠다.그때, 군영 바깥에서 낮은 기척이 스쳤다.숨을 죽인 움직임. 말을 섞지 않는 두 사람의 교대.도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 대신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방향과 사라지는 속도를 읽었다.서쪽. 다시 서쪽이었다.빈의 처소로 이어지는 길. 도진은 눈을 감았다 떴다.감정이 먼저 움직이려는 것을 이성으로 눌러야 했다.지금 그가 나서면 그 순간부터 모든 행동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로 기록될 것이다.그는 천천히 돌아섰다.군영 안쪽, 가장 많은 시선이 모이는 곳으로.보이지 않게 움직이는 것보다보이는 곳에 머무르는 편이 지금은 더 안전했다.그 시각, 이수는 홀로 창가에 서 있었다.문은 닫혀 있었으나 창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차가운 밤공기가 비단 옷자락 사이로 스며들었다.상궁은 그 모습을 보고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삼켰다.이수의 등 뒤에는 지금 말을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고요가 서려 있었다.“김 상궁.”이수가 먼저 불렀다.“예, 마마.”“오늘 밤, 도진 경의 이름이 몇
야간 순찰은 궁의 가장 깊은 부분을 오가는 임무였다.그 자리는 도진이 가장 오래 맡아온 자리이기도 했다.“…이유를 여쭈어도 되겠는가.”전령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나으리의 몸이 아직 회복 중이라 저하께서 염려하신다 하옵니다.”염려.그 단어는 궁에서 가장 부드러운 얼굴을 한 가장 날카로운 칼이었다.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그 대답은 짧았고,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았다.전령은 더 말하지 않고 물러났다.도진은 혼자 남았다.야간 순찰에서 빠진다는 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었다.궁의 어둠에서 한 발짝 물러나라는 뜻이었고, 그만큼 시야에서도 멀어지라는 뜻이었다.그는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빈의 처소에서 더 멀어지라는 뜻. 도진은 천천히 손을 풀었다.손바닥에는 아직 식지 않은 긴장이 남아 있었다.그는 마음속으로 이수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이 거리로… 지킬 수 있는가.’그 질문에는 아직 답이 없었다.그 시각, 이수의 처소에서는 상궁이 낮은 목소리로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마마, 야간 순찰 명단이 오늘 바뀌었사옵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어디가 빠졌느냐.”“…도진 나으리의 이름이 빠져 있사옵니다.”그 말은 촛불보다 먼저 이수의 가슴을 건드렸다.그녀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그러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이유는.”“나으리의 부상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당분간 휴식을 취하라는 분부라 하옵니다.”이수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그 말이 얼마나 정중하게 포장된 압박인지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김 상궁.”“예, 마마.”“세자 저하의 염려는 늘 이런 방식으로 시작된다.”상궁은 말을 잇지 못했다.“멀어지게 하고, 보이지 않게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이수는 말을 멈췄다.끝을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 결말은 충분히 무거웠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방 안을 걸었다.발걸음은 느렸으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오늘 밤, 저하께서 나를 다시 찾지는 않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