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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년의 시작, 마주한 운명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8 11:08:08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

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

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

머리가 가벼워졌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

세상이 기울었다.

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

이수의 손이 그를 잡으려 했지만 닿지 못했다.

그의 의식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꺼졌다.

쓰러지는 순간, 그의 시야 속에서 어둠이 천천히 펼쳐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한 빗소리가 들렸다.

궁의 처마, 비가 스며들던 풍경.

하얀 장옷을 입은 여인이 울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도진……

그 목소리가 천년을 돌고 돌아

오늘 이곳에서 다시 그를 데리러 온 듯했다.

그의 의식은 시간의 층을 무너뜨리고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떨어졌다.

새벽은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았다.

산등성이 너머로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지만,

궁을 둘러싼 담장은 여전히 밤의 색을 품고 있었다.

새벽안개는 기와지붕 아래를 얇게 흐르며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들어가는 사람도, 나오는 사람도 거의 없는 시각.

하지만 궁 안쪽 깊은 곳에서는 이미 하루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직 촛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처마 아래에서

경계를 서는 무사들의 갑옷이 은빛 새벽에 부딪혀 자그마한 광택을 만들었다.

피마가 햇살을 먼저 맞는 동쪽 마당에서는 군사들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돌바닥 위에서 나무창 끝이 부딪히는 소리가 짧고 단단하게 메아리쳤다.

그 가운데, 한 남자의 발걸음이 다른 이들과 달리 조용했다.

검은 도포 아래에서 움직이는 그의 걸음은 바람이 스치는 결처럼 가볍고 단정했다.

밝아오는 새벽빛을 등지고 서 있는 그의 실루엣은 그때의 누구보다 똑바르게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도진. 궁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궁의 칼이 되어버린 남자.

단 한 번도 검을 흘려 쓰지 않는 자.

군사들은 그가 지나가는 방향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길을 내줄 뿐이었다.

그는 새벽 훈련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으나,

손끝이 닿는 곳까지 긴장감이 흐르는 걸음이었다.

마치 몸 전체가 검처럼 벼려져 있는 듯한 기세.

그러던 중, 궁 안 깊숙한 곳에서 작은 북소리가 들렸다.

전하가 깨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전이었다.

북소리는 규칙적이지 않았다.

경사를 알리거나 군사들을 모으는 신호는 아니었다.

딱 한 번, 짧고 낮게 울리는 북소리.

도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 북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자저하의 전각에서 부르는 소리였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방향을 바꿨다.

동쪽 편전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직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걷는 내내 기와 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정적 속에 일정한 박자로 들렸다.

전각 앞에 도착하자 하인 몇 명이 불안한 표정으로 잔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북소리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도진을 지나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가 문 앞에 다다르자 내관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진은 허리에서 검을 풀어 내관에게 건넸다.

궁 안에서는 함부로 검을 차고 드나들 수 없기에 이것은 오래 전부터 지켜온 규칙이었다.

손에서 검이 떨어지자 마치 그의 몸 일부가 잠시 공백이 된 듯한 묘한 감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 안은 희미한 촛불 몇 개만이 켜져 있었다.

촛불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창문을 단단히 막아둔 듯 기척 없이 곧게 타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누군가가 홀로 앉아 있었다.

세자 현. 도진의 벗이며, 그가 평생 지켜야 할 존재.

궁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약속받은 사람.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뒷모습에는

왕세자라기보다 잠 못 이루는 한 사람으로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도진은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저하, 부르셨사옵니까.”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은 밤을 닮아 있었다.

기품이 있었으나 어딘가 피로했고,

말하지 못한 생각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듯한 눈매였다.

“새벽이 밝기도 전에 부른 것을 용서하라.”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도진은 머리를 숙였다.

“저하께서 부르심에 사사로운 시각은 없사옵니다.”

이현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그 걱정 어린 미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곤란함과 낡은 우정의 묘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가 가라앉자, 그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간택이… 곧 내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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